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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춘신의 생활문학’ (7) <일다>는 개인의 입체적인 경험을 통해 ‘여성의 삶’을 반추해보는 생활문학 칼럼을 개설했습니다. 필자 윤춘신님은 50여 년간의 생애를 돌아보며 한부모로 살아온 삶 이야기, 어머니와 할머니와 외숙모 이야기, 일터 이야기, 그리고 딸과 함께 거창으로 귀농한 현재이야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편집자 주 
 
아담이 떠난 자리

그곳에 엄마가 있었습니다. 팔자 센 엄마가 아담의 명줄을 단축한다고 그랬답니다. 동서남북 가릴 것 없이 떠돌던 아담의 병환이 깊어지자 엄마의 생년월일인 숫자가 문제되었습니다.
 
자신의 명줄을 보존하기위해 팔자 좋은 여자의 지아비가 된 아담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칠순을 넘긴 엄마가 자식에게서 아담의 흔적을 찾습니다. 그림자 아담이 엄마 입을 통해 불쑥불쑥 나타납니다.
 
엄마의 아담은 목청이 좋아서 노래도 기똥차게 불렀다고 합니다. 딸 셋 중 누구 하나 노래 잘 부르는 자식이 없습니다. 막내아우나 둘째에게도 언니보다는 너희가 났지 않느냐며 물어봅니다.
 
느려 터지게 말하는 폼이 영락없는 윤씨 종자머리라는 말에도 발끈하지 않습니다. 엄마 나이가 위로 향할수록 엄마 몸은 아래 맨 아래로 흘러갑니다.
 
이혼녀가 되어 엄마 집 현관에 아이들을 밀어 넣고 눈물바람을 했습니다. 선녀가 두 아이를 양팔에 감고 두레박을 탓 듯이 엄마는 내게 두레박이 되었습니다.
 
잘했어야. 암만 잘했고말고. 엄마가 그랬습니다. 너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여. 엄마 목소리는 새마을 노래처럼 우렁차기까지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서방 옆에 가서 죽으라고 단봇짐을 싸주더라. 갓난쟁이를 업고 서울로 서방을 찾으러 왔었단다. 너거 애비를 만났거든. 한강 다리 밑으로 나를 데려 가더라. 거기에다 나를 버리고 도망을 가더라. 너를 업고 날마다 한강에 서 있었단다. 움막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는데 네가 설사를 멈추지 않아서 죽을까 봐 발을 동동 굴렀단다. 그때도 너는 안 죽고 살았지.
 
엄마는 내가 부럽다고 말합니다. 당신처럼 ‘개밥’을 ‘가밤’이라 쓰지 않고 ‘개밥’이라고 정확히 쓸 줄 알며 굿모닝을 영어로 읽을 줄 아니 얼마나 좋으냐고 합니다.
 
그때 말이여. 시골서 핵교도 못 나와서 아는 게 없었응게. 너만치라도 배왔으면 움막서 기다리는 짓거리는 안했을 것인디. 난중에 눈이 떠지드라. 그리도 서방이라 포기가 쉽게 되간이. 니가 아픙게 헐수 없이 도로 내려갔지. 할아버지가 친정으로 얼씬도 못허게 히서 너거 집으로(시댁) 갔단다. 복숭아 농사를 지믄서 지달리다가 또 찾아나섰다가 그러고 살았당게.
 
그러다가 너거 애비가 수족을 못쓰드만. 전주 요양원으로 가는디 참말로 폭폭허드라. 그때 점쟁이 말을 듣고 쫒겨 났잖여. 내 팔자가 쎄서 너거 애비가 죽는당게 나가라고 허드만. 그려서 성당에를 내 발로 찾아 가서 세례를 받았잖여. 내가 한이 맺혀서 너거 들은 전부다 성당서 시집 보내는 게 소원이었당게. 근디 어치케 니가 이혼을 허냐. 성당서 시집 보냈는디 먼일인가 모르겄다.
 
뭔 일인지 모르겠다는 엄마는 기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잠이든 엄마 손목에 둘둘 말아 감긴 묵주를 보았습니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잘 때만이라도 편했으면 싶어서 슬그머니 손을 뻗어 보다가 방문을 닫습니다.
 
엄마 사는 동네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뽀대나는 성당이 있습니다. 건축 헌금으로 딸들 이름을 줄줄이 올려놓고 주춧돌을 쓰다듬는 엄마에게 신이 친절했으면 좋겠습니다.
 
빤쓰는 푹푹 삶아 빨아도 암시랑토 않은 백양이 젤로 났다는 엄마가 천오백원짜리 빤쓰를 삽니다. 둘째, 셋째의 것과 섞이기라도 할까 봐 ‘춘시이건’이라고 신문 쪼가리에 이름을 써서 줍니다.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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