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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초원이 다리는 백만 불짜리 다리”라는 국민 유행어를 탄생시켰던 ‘감동의 스토리’ <말아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더랬다. 전국민을 감동시켰다는 영화를 보면서도 마음 한쪽이 계속 편치 않은 것은 여친 엉덩이를 만지려는 초원이에게 달려들던 그 남자보다 초원 엄마 때문임이 분명하다고. 다른 가족들도, 자기 자신도 뒤로 한 채 아이가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초원이 엄마의 헌신적인 삶은 분명 맘속 깊은 존경의 마음이 들만큼 대단한 것이었지만, 내속에선 자꾸 이런 의문들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는 행복할까? 저대로 괜찮은 걸까?’

다운증후군 딸 은혜를 키우며 장애와 여성에 관한 만화를 그려온 만화가 장차현실의 새 책 <작은 여자 큰 여자 사이에 낀 두 남자>를 읽으며 <말아톤>의 기억이 다시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말아톤>에 한결같고 헌신적인 ‘장애아의 엄마’가 있다면, <작은 여자 큰 여자>에는 제목 그대로 ‘여자’가 있기 때문이다.


편견에 맞서 세상 속으로! 
 
▲  장차현실의 신간만화
십여 년 전,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에 <색녀열전>을 연재하며 조선시대 ‘밝히는’ 여성들의 통쾌 발랄한 섹스 이야기로 활동을 시작한 장차현실은 “만화가 장차현실”이라는 이름만큼이나 “은혜 엄마 장차현실”로도 유명하다. 다운증후군 장애아인 은혜를 키우며 울고 웃으며 서로 의지하고 살아온 두 모녀의 하루하루는 지난 십여 년간 여러 지면을 통해 세상에 중계됐다.
 
하지만 그녀의 만화는 이혼 후 홀로 장애를 가진 딸을 키워온 독신여성의 이야기라면 흔히 생각할 법한 ‘인간극장’류의 계몽적 감동 스토리도, 장애인의 처우를 문제 삼는 시사 다큐멘터리조의 사회 고발도 아니다. 그녀의 만화는 우선 재미있고 힘차고 발랄하다. 아이를 돌보고 살림하고 돈도 벌어야 하는 삶에 숨차 하면서도 그녀는 은혜의 작은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다시 웃음을 터트리며 힘을 얻는다. 아이 혼자 보낸 여름 캠프에서 은혜가 ‘불쌍하다’며 울었다는 선생님 얘기를 전해 듣고는 “불쌍한 건 누구?”라며 은혜와 함께 분통을 터트리기도 한다.
 
장애에 대한 사회의 편견 속에 한숨 쉬며 숨어버리는 대신, 은혜와 엄마는 사랑과 용기로 무장한 채 당당하게 세상 밖으로 나간다.
 
2003년도에 펴낸 <엄마, 외로운 거 그만하고 밥먹자>가 편견으로 가득 찬 세상을 향한 두 모녀의 씩씩한 출정기였다면, <작은 여자 큰 여자 사이에 낀 두 남자>에는 ‘두 남자’가 새로이 등장한다. 홀로 은혜를 키우던 그녀는 그 사이 다큐멘터리 작업을 위해 은혜네를 찾았던 7살 연하의 감독 서동일씨와 ‘눈이 맞았다.’ 연애를 하고, 동거를 시작하고 ‘작은 남자’ 은백이를 낳으면서 은혜네 식구는 둘에서 넷으로 늘었다.
 
“집안일도, 돈벌이도, 아이 키우기도” 언제나 혼자임에 가끔은 지치고 외로웠던 그녀 곁에 항상 함께인 누군가가 생겼으니 마음이 놓이고 힘이 된다. 하지만 장애아를 키우는 ‘독신모’일 때나, 7살 연하의 애인과 함께 사는 지금이나, 그녀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만은 않다.
 
‘헌신적인 엄마’보다 ‘행복한 여자’로 

▲  만화 <작은 여자 큰 여자 사이에 낀 두 남자> 중에서
장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 친지들의 외면, 은혜의 교육과 장래에 대한 걱정,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고민, 가장으로서의 부담. 그녀의 만화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들은 자칫 무겁고 힘겹게 느껴질 법도 하다. 하지만 <작은 여자 큰 여자~>는 답답한 한숨 대신 건강하고 씩씩한 기운을 뿜어낸다. 독자로서 ‘장애아 엄마’의 삶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금은 특별한’ 한 아이의 엄마이자 노동하는 직업인이고 한 가정의 가장인 씩씩한 ‘언니’로부터 위로를 받는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그녀가 어떤 좌절과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원더우먼’ 같은 모습일거란 기대를 한다면 큰 오산이다. 대신 그녀는 힘들 땐 힘들다고, 두
려울 땐 두렵다고, 화가 날 땐 화가 난다고 푸념하고 속상해 하고 짜증도 낸다. 아이에게 매인 삶 속에서 “나 혼자 있고 시퍼! 돌아가고 시퍼!”라고 소리쳐보기도 하고, 은혜의 생일에 미역국을 끓이며 “은혜의 엄마로 살기에 이 세상은 너무 힘들었어”라며 남몰래 눈물도 흘리고, 시부모님 때문에 상한 마음을 소주 한 잔에 달래기도 한다. 매끈한 피부를 자랑하는 TV 속의 여자들의 모습에 질투를 느끼고, 간만에 참석한 만화가 모임에서 “작가 장차현실”이 아닌 “아줌마”, “미스 장”, “누나”라 불리는 현실에 발끈하기도 하는 ‘어머니’가 아닌 한 ‘여자’의 삶.
 
얼마 전 작은 여자, 두 남자와 함께 ‘결혼식’이 아닌 ‘가족식’을 올린 자리에서 그녀는
이렇게 선서했다고 한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지 않겠습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어려우면 어렵다고 투정도 부리겠습니다. 아닌 척 씩씩한 척 하며 가족들을 원망하거나 불편해하지 않겠습니다. 나의 건강을 지켜나가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닌 짐을 나누고 가족의 짐을 나누어 받겠습니다. 사랑하는 서동일, 은혜, 은백 그들을 진심으로 원하며 오래도록 사랑하겠습니다. -2008년 6월 8일 신부 장현실” (출처: 오마이뉴스 보도)

<작은 여자 큰 여자~>을 읽으며 나는 더 이상 <말아톤>을 보며 느꼈던 가슴 답답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녀는 과연 행복할까?’ 의문을 던지는 대신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감탄한다. 나를 지운 채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로 봉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 가족 꾸리기도 가능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고 감동한다. 그리고 가슴 한 켠을 덥히는 용기를 얻는다.

 
장애와 비장애, 나이와 성별의 벽이 없는 은혜네 가족. 그들의 삶은 사회적 편견들과 억압적인 가부장적 가족제도 속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힘과 위안을 전한다. 더불어 “엄마가 행복해야 가정이 행복하다구요!”라는 그녀의 외침처럼, “아이의 장애가 자신의 잘못인 양, 가족들에게 죄스러워 숨가쁜 하루를 지내며 자신조차 돌볼 수 없는 엄마들”에게 “봄바람이 신나게 불었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바램이 실현되길 함께 기도해 본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윤수진 


2008/08/04 [23:44]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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