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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돈나의 ‘버진’은 지금도 유효하다 | |||||||||||||||
페미니스트의 음악 블로그④ ‘Like A Virgin’의 의미 | |||||||||||||||
‘너무’ ‘잘 보이는’ 대중음악
그러나 다른 한편, 저와 같은 사람들에게 마돈나는 ‘너무 유명해서 도리어 알 필요를 별로 못 느끼게 하는’ 뮤지션이기도 합니다. 물론 단순히 잘 알려져 있어서라기보다는 일종의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이와 같은 ‘무지’가 지속되는 것이겠죠. 유행하는 스타일로 온 몸을 휘감고, 과장되게 여자임을 광고(?)하는 듯한 어설픈 ‘마돈나 워너비’들에게서 느껴지는 미묘한 거부감이 원인일 수도 있겠고요. 팝의 양식들을 자본화된 시각문화의 노골성의 정도로 파악하는, 저의 (다분히 계급주의적인) 경직성이 원인일 수도 있을 거예요. 좀 무리가 있는 설정이지만, 대중음악의 카테고리를 ‘듣는 음악’과 ‘보는 음악’ 이렇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누면 사실 마돈나는 명백히 후자에 가까운 유형이죠. (의외로 널리 통용되는) 이런 견지에서는 정신적 우월성은 전자에, 자본 창출의 용이성은 후자에 있다고 흔히 이야기 되곤 합니다. 게다가 그 양자는 종종 본질적으로 아주 다른 것인 양 잘못 인식되고 있기도 하고요. 저 역시 ‘듣는 음악’의 ‘정신성’을 은근히 지지하는 부류에 속해왔었는데요. 이런 편견 어린 ‘취향’을 고수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몇 가지 문제와 마주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는 ‘그렇다면 시각적인 음악은 정신적이지 않다는 말인가?’와 같은 물음들입니다. 왜 그때 그 마돈나인가? ①‘당신이 그 마돈나?’
얼마 전, 우연히 마돈나의 <진실 혹은 대담>(Truth Or Dare)(1991)을 감상하게 될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것은 여성 팝스타 마돈나의 무대와 무대 뒤에서의 삶을 쫓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였습니다. 작품이 발표될 당시 사람들은 이 영화가 다큐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백스테이지에서의 마돈나조차 ‘철저히 계산된 노출’일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죠. 저 역시 파편처럼 모인 장면 장면들이 묘하게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하나의 인위적인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듯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습니다.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열기에 찬 자의식을 보여줄 거라 예상했지만, 그 팝스타는 오히려 굉장한 자제력과 카리스마를 갖춘 ‘여성지도자’를 재현하더군요. 하지만 그 영화가 제게 준 실질적인 충격은 마돈나의 ‘진실’이 아니라, 그녀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욕망’의 성격과 그 효과에 있었죠. 왜 그때 그 마돈나인가? ②패러디 그리고 아이러니 지난 시간 많은 이미지 변신에도 불구하고, 마돈나는 아무래도 ‘Like A Virgin'으로 가장 분명하게 상징화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과 연결되는 이미지 코드들은 어찌 보면 굉장히 상투적이에요. 순백의 드레스, 살짝살짝 튀어나오는 콧소리와 길들이기 쉽지 않은 고양이 같은 몸짓으로 여성성을 드러내는 방식들. 사실 마돈나가 성공시킨 히트 넘버들을 들어보는 것만으로는 미국사회에서 그녀가 왜 그렇게까지 매혹적인 ‘대상’이자 ‘주체’로 지칭되어왔는지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몇몇 미국 대학들에서는 ‘마돈나 학(學)’을 연구할 정도라고 하는데 -주로 포스트모더니즘적 논의와 연관된 대중문화 연구들이에요- 한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 갑자기 모순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마돈나는 가벼운 포르노의 주인공 같은 옷차림을 했지만, 그녀의 가장 열렬한 팬(이자 친구)은 바로 여성들이었다. -루스 피카디 ruth Picardie” (『포스트모던 신화 마돈나』 347쪽 부분인용)
토속리듬을 뜨거운 신비처럼 연출하며 시작되는 음악 속에서 마돈나의 몸짓은 침대를 그 공간적 배경으로 삼습니다. 이 시기 마돈나의 주된 내용적 소재는 단연 침대, 에로티시즘으로 가득 찬 침대였는데요. 그것은 남성중심적 이성애문화에 ‘충실한’, 상상의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백금발로 염색한 마돈나는 요부와 성녀라는 이분법을 기꺼이 받아들이듯, 뜨거운 열정을 느끼게 해준 남자에 대한 변치 않을 사랑을 ‘처녀처럼’ 노래합니다. 하지만 원곡과 달리 부풀어 팽창하는 전개를 가진 라이브 버전의 그 곡이 끝 무렵으로 치달을 때, 마돈나의 광적인 ‘자위행위’와 만나게 되죠. 여기서 그녀가 열연한 ‘처녀’와 ‘자위행위’는 공통적으로 ‘삽입 성교’와 대척지점에 놓여 있다는 아이러니한 사회적 의미로 인해, 보는 이를 아찔하게 만듭니다. (여성의 일반적인 현실에서 전자는 권장되고, 후자는 터부시되곤 하죠.) ‘여성 이미지’로서의 마돈나는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성적인 ‘진실’(고정관념)을 어떤 의미에서는 지나칠 만큼 충실하게 연기해냅니다. 하지만 그 욕망은 성녀와 요부 중 어느 한 쪽에 반드시 속해야 한다는 수행원칙을 집착적으로 따르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욕망은 현실 질서에서 성적인 실천이 가져올 수 있는 갖가지 양상을 전시하는 형태로 드러납니다. “그녀는 남성의 시선에 굴복하는 척하면서 그 시선이 지닌 힘을 패러디하는 한편, 대중매체에 여성의 몸이 전시되는 것에 무조건 적대감을 보이는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의 신경을 건드린다.” (『포스트모던 신화 마돈나』 105쪽) 당신들의 ‘버진’(Virgin)이 무엇을 하는지 보라
그러나 그녀의 음악적 방법론을 보면 구체적 핵심은 ‘전자적인’ 것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1980년대의 미디사운드, 1990년대 락기타 플레이에 시도된 이펙터 효과들, 그리고 2000년대의 일렉트로닉 사운드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들). 어쿠스틱(Acoustic)함을 찾기 힘든 그녀의 음악은 현대 물질문명이 제시하는 일상적인 ‘최첨단’의 범위를 절대 벗어나지 않습니다. 가장 최근의 정식 라이브 콘서트였던 ‘The Confessions Tour’(2007)의 경우를 보아도, 그녀는 예술작업에 전위적인 재료를 쉽게 섞는 뮤지션이 아닙니다. 그녀가 아무리 카발라의 신비적 색채에 반하게 되었고, 테크노와 트랜스를 넘나들며 몽환적인 디제잉 사운드를 꾸려낸다 해도 가장 핵심적인 관심은 언제나 현재의 물질문화에 밀착되어 있죠. 마돈나는 활동 초기, 웨딩드레스 위에 ‘Boy Toy'라고 새겨진 벨트를 차며 자신을 남성문화의 물질적 대상으로 상징화했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원색적인 현실 재현은 오히려 가장 현재적인 남성 논리를 전시하는 기제가 되기도 했죠. 마돈나의 ‘버진’ 역시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그녀는 여성에게 부과되는 시선을 관념이 아닌 사회의 영역에서 물질적으로 파악합니다. 남성에 의해 숭배되면서도 억압받는 여성의 ‘버진’이 물질사회의 제도에 의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듯이, 그 물질은 굳어있는 물건이 아니라 대중문화의 특이성을 드러내는 팝 예술의 필터가 되죠. 위에서 인용한 책의 저자인 조르주-클로드 길베르는 마돈나의 ‘Bad Girl’(1992년의 [Erotica] 수록곡)이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을 두고, “회개를 할 수 있는 좋은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감상적인 노래의 또 다른 예”라고 말했는데요. 그 지적처럼 마돈나는 ‘나쁜 것 같지만 착한’-"사실은 착하다"라는 말은 본질이 정해져 있다는 말이 되겠죠.- 여자가 아니라, ‘착하면서 나쁜’-이러한 애매모호함은 더더욱 일반질서를 흩트리죠. - 여자일 때 아티스트로서의 개성을 갖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마돈나는 교조적인 사회이론이나 정치적 입장들이 놓치고 있는 여성적 경험의 ‘현재성’을 극적으로 시각화했던 최초의 팝 디바가 아닌가 싶습니다. ‘보여지기의 권력’과 대중예술의 매력
그러나 앤 크벳코비치도 인지했듯, 마돈나가 남성문화의 시각적/성적 대상이 되면서도 권력을 누릴 수 있는 건 그녀의 우월한 사회적 위치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소외된 인종, 계급, 성적취향이 자본에 의해 (예컨대 월드뮤직이나 퀴어영화처럼) 새로운 트랜드로 거듭나는 최근의 쟁점과 닿아 있는 문제이기도 하지요. 누구나 그녀처럼 ‘보여지기의 권력’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힘없는 사람들이 권력의 눈앞에 마구잡이로 발가벗겨졌을 때 더 큰 폭력이 발생할 수 있는 현실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고요. (지난 기사 중 “최신 여성 팝음악의 어떤 환상에 대하여”가 이 이야기와 관련됩니다.) 하지만 마돈나의 ‘버진’이 가진 특별한 영역 역시 무시할 수 없습니다. 만들어진 개념이지만 분명한 현실효과를 지닌 그것은, 세계를 지각하는 독특한 방식이면서 팝 문화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키워드이기도 합니다. 마돈나는 한 방향에서만 정의되던 ‘버진’을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이 혼재하는 예술로 탈바꿈하여, 시각적인 음악에 현실적인 힘을 마련하였으니까요.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음악 마니아들이 종종 그러하듯) ‘볼거리로서의’ 대중음악을 “‘더 진지한’ 오디오용 음악”에 일률적으로 대비시키는 해석방법은 여러 가지로 모자란 측면이 많죠. 심지어 그런 평가들은 대중문화의 소통구조에 대한 순진 혹은 오만한 분석일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신의 창조적 미덕을 고민하는 대신 시장을 독점하여 세력을 확장하려는 팝음악은 문제가 많죠. 하지만 그들은 ‘덜 진지한 (것으로 간주되는)’ 시각문화이기 때문에 나쁜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예술과 문화를 약탈하는 구조 때문에 ‘나쁜’ 것입니다. 끝없이 모습을 바꾸는 팝의 어떤 양식들은, 일방적이고 정지된 문화를 교란시키며 현실을 재발견하게 하고 감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는 때때로 새로운 예술적 체험으로서 굉장한 가치를 갖습니다. 이번 글은 마돈나의 너무나 익숙한 음악들을 다시 보고 들으며 채워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시청각적인 음악을 통해 대중예술의 매력과 에너지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됐어요. 그녀의 음악은 ‘시대를 초월하는’ 연주(작곡)의 천재성이나 자기완결적인 고매함보다는 대중의 사회문화적 의미들 사이에 거미줄처럼 걸쳐 있어야만 하나의 형태로 파악되는, 가장 현실적인 물질입니다. ※마돈나를 ‘다시’ 보고 싶으신 분들은 꼭 공연 동영상이나 뮤직비디오를 감상하시길 바래요. 음반으로는 [The Immaculate Collection](1990)과 [The Confessions Tour (Live)](2007)를 추천합니다. 2008/09/09 [20:46] ⓒ www.ildaro.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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