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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도 눈물도 없이>의 홍보상 장르는 그 이름도 낯선 “펄프 누아르”다. 1940년대 미국의 범죄물과는 거리가 먼, 그렇다고 그럴듯한 체계를 가진 조폭이 등장하는 것도 아닌 싸구려 밑바닥 양아치 인생들이 얽히는 영화다.

무엇보다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으로 보이는 것은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여성버디영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버디영화가 남성들에게 주로 국한된 영역이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구조가 내러티브상에서, 또 관객, 여성관객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이 영화에서 여성성은 어떻게 재현되고 있으며 그것이 사회적 맥락과 연관되는 부분은 무엇인가? 구체적인 관객의 반응을 조사하는 것은 무리지만, 여성들은 단지 성별화되어 있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이 영화에 나온 것처럼 여성의 다중적인 정체성을 고려해야 한다.

물론 2002년 개봉작인 <피도 눈물도 없이>가 액션장르에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이전 해인 2001년 ‘한국형 조폭영화’의 새로운 효시가 된 <친구>여성액션을 내세운 <조폭 마누라>의 성공이 나란히 자극제로서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2000)로 액션 장르에 분기점을 제공한 류승완 감독은 너무 일찍 여성버디무비라는 새로운 시도를 한 탓인지, 외국 액션 영화들의 낯익은 키치로 관객들을 사로잡지 못한 탓인지, 아무튼 <피도 눈물도 없이>는 흥행에서 별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이전에도, 이후에도 발견되지 않는 ‘여성’과 ‘버디’와 ‘액션’의 희귀한 결합이 다시 <피도 눈물도 없이>를 돌아보게 만든다. <킬빌>이나 <언더월드>와 같은 여성 원톱 액션영화들이 있고 <조폭마누라>도 시리즈물로 제작되고 있지만, ‘남성간의 의리와 연대감’을 강조하며 정의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버디 액션 영화는 다시는 여성들에게 주연을 내주지 않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주인공이 두 여성이 될 수 있는 이유, 즉 여성버디영화의 형식을 취할 수 있는 것은 그 둘이 상대적으로 억압 받는 위치, 그것도 명확한 ‘가부장적 남성성’이라는 공동의 적에 의해 고통 받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맞는 아내’의 적나라한 상징인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수진과, 남편의 노름빚으로 딸과 헤어진 채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는 택시운전사 경선은 처지는 다르지만 지옥 같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공통의 목적-돈의 탈취를 공유하게 되고 연대한다.


비록 경선의 행동의 동기는 <에일리언2><터미네이터2>에 나오는 강한 여성상이 모성적 정체성으로 인해 정당화되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딸을 찾고 보호하기 위한’ 변종된 형태의 ‘이상적인 어머니(ideal mother)’로 귀결되지만 말이다. 물론 여기에 나타난 여성들은 일반적인 사회적 정체성-중산층 여성, 가족을 부양하는 남편-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이상적인 어머니’ 이론은 다르게 적용될 수밖에 없다.

수진은 전직 라운드걸 출신이자 가수 지망생이다. 그녀는 항상 수다스럽게 호들갑을 떨며 웃고 울고 소리 지르지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선글라스로 자신을 숨긴 채 끊임없이 세상을 주시한다. 수진이 남편인 독불(정재영)을 속이고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남성을 성적으로 유혹하는 팜므 파탈의 역할을 담당하고, ‘남성적’인 직업을 가지고 터프한 모습을 보여주는 전과자 경선이 소위 ‘다이크(dike, 레즈비언)’를 연상시키며, 이 둘이 남성들을 배신하고 돈가방을 챙겨 둘만의 삶을 시작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많은 부분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 <바운드>를 떠오르게 한다.

이 두 여성 사이에는 모호하지만 동성사회적(homo-social) 코드가 읽혀진다. 여성이 여성을 응시하는 새로운 시선의 체계는 기존의 수동적이고 대상으로서의 여성상(L.Mulvey)에 종말을 고하면서 “다르게 욕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에 반기를 드는 전복적인 모델들은 기존의 정형화된 여성성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재현과 기호를 창출하고 거기에서 새로운 성 정체성이 형성될 수 있다.

<피도 눈물도 없이>는 철저하게 여성의 욕망을 계기로 하여 서사가 구성되고, 관객 동일시 과정에서 여성의 시점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액션 장르에서는 예외적으로 여성 관객에게도 말을 걸고 여성을 앞에 내세우고 있다. 비록 액션이라는 장르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 류승완 감독의 영화들은 전통적으로 ‘남성적 장르’를 선호하는 이들에게 더 호소력 있겠지만, 가부장적 마초 남편과 폭력, 암울한 현실에서 멋지게 탈출한 강력한 ‘일탈적’ 여성들에게 여성관객들이 애정과 찬사를 보낼 것임은 분명하다.


물론 전통적인 액션영화 관객(즉, 남성) 외에도 새로운 관객층을 포섭하려는 노력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이러한 시도 자체가 새로운 의미를 낳는다. 2000년대 초반 조폭코미디 장르와 더불어 한국영화의 한 경향이었던 ‘여성의 능동성과 주체성의 강조’가 그것이다. 수진과 경선 정도로 주체적인 여성들은 이전에도 분명 존재했지만, 남성의 영역에 직접 들어가 그들과 대등하게 격투를 벌이는 방식을 취하는 캐릭터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 점에서는 여성 재현의 영역을 확장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에는 멜로 영화에 등장하는 상투적 남자주인공, 즉 여성적이고 여성들을 배려하는 특성을 지닌 남성이 부재한다. 대신 모호한 양성성을 지닌 동시에 마찬가지로 곤경에 처한 여주인공 경선이 그 역할을 수행하며(거세된 남성이 아닌 동지로서), 이것이 여성 버디영화의 결속력을 다지는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고 본다.

투견장이라는 사건의 중심이 되는 공간의 특성에 대해서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부터 제시되는 이 공간은 투견이라는 도박을 통해 소위 ‘검은 돈’들이 오가는 곳으로 배금주의(拜金主義)에 사로잡힌 인간 군상들의 욕망, 자본주의 그늘에서의 일확천금을 노리는 이들의 환상이 집중된 곳이다. 또한 공권력과 폭력조직이 뒤엉키고, 돈에 대한 이권개입의 압력이 극심하며, 마침내는 등장인물들 간의 생명을 건 싸움이 벌어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특히 육탄전을 벌이는 공간으로서 등장한 투견장은 “목숨을 걸고 물어뜯는 비정한 세계가 비단 투견들만의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여성적인 공간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경선과 수진은 처음에 남성성과 공조하며 결코 속할 수 없는 영역/경계에서 투쟁을 계속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그 이방의 영역, 억압의 공간에서 탈출을 시도할 때, 투견장은 돈 냄새를 젖혀두고 폭력적인 실체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완벽하게 대치되는 적대세력으로서 남성들은 어떠한가? 그들이 가부장적 체계에 괴로울 정도로 잘 적응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형사가 양아치를, 양아치가 삼류깡패를, 삼류깡패가 보스를, 보스가 애인을, 애인이 정부를 착취하거나 기만하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먹이사슬을 이룬다”는 지적대로, 성차 뿐만 아니라 좀 더 복잡한 계급적 권력관계가 얽히고 설키는 것이다.

따라서 한 인물이 가부장적 권력을 행사한다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힘을 행사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가부장적 서사의 짜임새가 관객들을 성차적으로 고정된 위치에 묶어둘 수 있을 것인가? 여성관객들은 일상생활의 구속을 연상하는 장면들을 접하며 저항하기도 하고, 나름의 사회적 관계틀 내에서 스스로의 의미를 생산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관객성을 고정되지 않은 복합적인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들의 관계를 창조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가부장적 헤게모니에 대한 저항이 단선적인 형태를 강요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노조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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