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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 옥자 켈러의 <종군위안부> <여우소녀>

2년 전, 한국을 방문한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노라 옥자 켈러(Nora Okja Keller)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찾은 곳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의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 현장이었다. 그 곳에서 그녀가 만난 사람은 황금주 할머니. 12년 전 하와이의 한 인권집회에서 들었던 할머니의 이야기가 그녀의 첫 소설 <종군위안부>(Comfort Woman)의 출발이었다.

위안소에서의 경험을 조용조용 차분하게 풀어놓던 할머니의 이야기에서 받은 충격은 켈러에게, 어떻게 지금껏 이런 이야기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놀라움으로, 그리고 이 ‘말해지지 못한 이야기’를 전하기 위한 글쓰기로 이어졌다.

켈러가 발표한 두 편의 장편 소설 <종군위안부>와 <여우소녀>(Fox Girl)는 모두 ‘말해지지 못한 이야기들’을 전하는 소설이다. 전쟁과 같은 삶 속에 성적 착취를 겪어내야 했던 여성들의 침묵되고 가려진 삶에 대한 한 판 굿과 같은 이야기라 할까.

‘일본군 성노예’로서의 삶을 가슴에 묻고 침묵 속에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 어머니와 그녀를 이해할 수 없는 혼혈인 딸의 이야기인 <종군위안부>. 식민 치하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로, 해방 후에는 기지촌 성노동 여성으로 살아가는 어머니와, 살아남기 위해 미군들에게 몸을 파는 아이들의 이야기인 <여우소녀>. 이 두 소설은 우리 역사 속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모두가 외면하고 감추려고만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정면으로 다룬다.

그러나 켈러는 그녀들의 끔찍한 삶을 아름다운 수사로 치장하려고도, 섣부른 희망으로 위안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때로 책장을 넘기기 두려울 정도로 충격적인 문장들과 잔인하리만치 직설적인 묘사들은 읽는 이의 가슴을 베고 피를 뚝뚝 흘리게 만들지만, 오히려 이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그녀들의 삶에 건네는 우리의 위로의 순간이다. 켈러의 소설들은 우리에게 두 눈 크게 뜨고 그들의 삶을 똑바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어머니, 이게 당신이에요?” <종군위안부>

<종군위안부>는 아버지의 제사상을 준비하는 어머니와 딸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제사상에 올리기 위해 새우를 까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아는 낯익은 제사 풍경이 아니다. 한국인 어머니와 영어밖에 할 줄 모르는 ‘혼혈인’ 딸이 준비하는 제사상. “아버지의 다섯 번째 제사를 지내던 날, 어머니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고백했다”는 딸 베카의 목소리로 그녀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독자들은 두 여성의 입을 통해 들려오는 두 가지 이야기를 따로 또 같이, 소설 전체를 통해 듣게 된다. 마치 대화하듯 혹은 고백하듯 아키코와 베카가 번갈아 가며 털어놓는 이야기들은 각자의 시점에서 과거와 현재, 꿈과 기억 속에 파편화된 채, 소설의 마지막까지 그 실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아키코는 왜 자신이 남편을 죽였다고 말하는 것인지, 그녀는 왜 이상한 행동을 보이며 죽은 자들의 세계에 빠져 살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그녀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인지. 독자들은 그녀의 고백을 통해 서서히 ‘일본군 성노예’로 끔찍한 삶을 살아야 했던 한 한국여성의 역사를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던 베카는 독자들보다도 늦게,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야 어머니에 대해 알게 된다. 죽은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남긴 테이프에 담긴 알 수 없는 말 “Chongshindae”. 자신을 위한 어머니의 마지막 굿판 속에 “어머니, 이게 당신이에요?”라고 울부짖는 그녀의 절규는 이제야 비로소 어머니의 삶, 어머니의 역사를 이해하게 되었음을 한스러움 속에 털어 놓는 것이다.

어머니를 바라보는 베카의 이러한 시선 변화는 이 소설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키코는 서양의 눈에 비친 동양이자, 남성의 눈에 비친 여성, 식민종주국의 눈에 비친 피식민국이며, 그녀가 자신의 이름과 역사를 찾게 되는 과정은 바로 이들이 자신만의 이름과 역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아키코는 이야기해야 할 때 매번 입을 다물고 침묵하기를 택하며, 그녀가 입을 열어 자신의 진짜 이름과 역사를 얘기하기까지의 과정은 아주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베카와 같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또 다른 아키코의 딸들, 현재의 독자들은 <종군위안부>의 고통스러운 기억의 길을 따라가며 새로이 어머니를 이해하게 된다.

아키코 ‘그 이후’의 이야기 <여우소녀>

<종군위안부>가 일본의 제국주의 지배 아래 ‘성노예’가 될 것을 강요 받았던 피식민국 여성의 이야기라면, <여우소녀>는 그 후속편이라고 할 만한 ‘그 이후’의 이야기이다. 나라는 해방되었지만 <여우소녀>에서 그녀들의 몸은 여전히 식민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새로운 제국’인 미군 기지촌에서 살아남기 위해 성노동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갔다 돌아온 것으로 암시되는 덕희는 고향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이웃집의 ‘씨받이’로, 기지촌의 여성으로 살아가다 결국 거리의 성매매촌 유리방에서 질병과 빈곤에 허덕이며 보이지도 않는 존재로 잊혀져 간다.

그러나 더욱 끔찍하고 암울한 것은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아이들의 삶이다. 덕희의 딸인 숙희는 열 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성매매를 시작하고, 임신한 어머니가 강제로 수용소에 수용되자 주린 배를 참지 못하고 클럽 일에 뛰어든다. 숙희와 그녀의 친구인 현진, 기지촌여성인 어머니와 미군 사이에 태어난 로베토의 삶은 이미 어른들의 그것만큼이나 냉혹하고 처절하다.

‘혼혈’이라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로베토는 누구보다 악랄하게 어머니와 두 소녀의 포주 노릇을 한다. 기지촌에서의 삶을 견디다 못한 두 소녀는 이제 새로운 미래를 위해 미국으로 갈 꿈을 꾼다. 하지만 미국에서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국의 기지촌에서와 전혀 다를 것 없는 클럽에서의 삶이다. 애초에 한국의 클럽에서 미국의 클럽으로 팔려간 것이나 다름없는 그녀들에게 새로운 미래란 이룰 수 없는 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우소녀>는 현진을 통해 그 결말에서 한 가닥 희망의 빛을 버리지 않는다. 모두가 버린 숙희와 로베토의 아이 뮤뮤를 소중히 보살피던 현진이 클럽에서 도망쳐 쓰러진 어느 시골 농가 앞. 그 집에서 현진은 미국인 여성 게리, 건강하게 자라는 뮤뮤와 함께 새로운 가정을 꾸민다.

“말해져야만 하는 이야기들을 위해”

그녀가 수요집회를 찾았던 2년 전, 한 강연회에서 만난 노라 옥자 켈러는 놀라울 만큼 밝고 긍정적인, 당당한 태도를 지닌 작가였다. 천사 같이 예쁜 두 딸과 함께 강연을 하고 사람들에게 싸인을 해주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어쩜 저런 사람이 그렇게 가슴 먹먹하게 힘든 소설을 썼을까’ 하는 촌스런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녀에게 직접 묻지는 못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싸인을 받기 위해 건넸던 책을 받아 든 순간, 그 곳엔 그녀의 힘 있는 필치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말해져야만 하는 이야기들을 위해”(for stories that must be told).일다▣ 윤수진


[일본군위안부] 역사교과서 논란과 한 ‘위안부’여성의 죽음 박희정 2008/12/12
[일본군위안부] 내 친구는 평화를 만들고 있었구나 손경년 2008/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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