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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 같은 남한사회에서 ‘홀로서기’를  (최지영)
 
일다는 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주여성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연재해왔습니다. 마지막 기사는 북한식량난민으로 1998년 한국에 와서 10년 넘게 생활하고 있는 새터민 최지영(가명, 40대)씨의 이야기를 싣습니다. -편집자 주
 
직업에 귀천이 ‘있는’ 대한민국에 적응하기
 
나는 지금 대한민국의 모 대학에서 기숙사 위생원으로 일하고 있다.
 
이 일을 시작한 지도 벌써 4년이 흘렀다. 북한에서는 못해본 일이 없어서, 일에서만큼은 남들한테 뒤지지 않는다고 장담했었다. 하지만 북한에서 한 일과, 남한에서 하는 일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어떤 알지 못할, 오래 동안 내려오던 룰이 있다고나 할까? (흔히 사람들은 텃새를 부린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에서 온 새터민들이 취직을 하더라도, 얼마 견디지 못하고 직장을 포기하는 건지도 모른다. 정말 웬만한 배짱과 인내력이 없이는 버텨내지 못한다.
 

일러스트 [느티-박현정]

나에게는 직업에 대한 귀천이 따로 없다. 여자는 힘든 일을 하지 말아야 하고, 무거운 것을 드는 일은 남자만 해야 한다는 편견도 없다. 일손이 딸리면 혼자 못하면 둘이 함께해서라도 꼭 해야만 하는 성격이어서, 본의 아니게 싫은 소리 들을 때도 있다

 
기숙사 위생원 일은 한마디로 말해서 청소부다. 물론 구질구질하고 지저분하고 힘들지만, 일단 맡은 일에 대해선 그 어떤 일이라도 항상 애정을 가지고 즐겁게 하려고 노력한다. 나라고 지저분한 일에 만족할 리 없지만, 직업에 불만을 가지면 아무것도 못한다고 본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나이 지긋하신 분들과 함께 일하면 지루하다가도 재미있는 일들이 많다.
 
일 자체보다는, 나를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한국사람들의 도덕성에 문제가 많다는 점이다. 우리같이 지저분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는 환영 받지 못하는 직업인이다. 그래서인지 이곳 대학교 학생들까지도 우리 같은 사람들을 하찮게 보고 인사를 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50명중 1명이나 되나 마나 할까?
 
그리고 한국사람들은 참 게으르다. 특히 젊은이들은 스스로 뭔가를 하려는 용기가 없고, 요구만 한다. 또, 어른들은 그들이 요구하면 들어준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도 제대로 못하고 누가 해주기만 바라는 아이들이, 과연 경쟁사회에 맞서 헤쳐나갈 수 있을까 싶다.
 
나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은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 사람들과 한참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사투리가 나오는 것 같다. 그럴 때면 나는 당당하게 ‘북한에서 왔고, 고향은 OO’이라고 답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그리고 어쩜 그렇게 말도 잘하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릴 수 있냐고 묻는다. 그게 뭐 그리 놀랄 일인가. 사람들과 자꾸 어울려야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 수 있고, 일 또한 빨리 배울 수 있다고 본다.
 
요즘 직원들이 나를 볼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처음 직장에 들어 왔을 때는 매우 차갑고 쌀쌀맞아서 말을 걸기도 힘들었는데, 지금은 많이 밝아지고 활발해졌다고. 그 말에 대해서는 나도 공감하는 바다.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전쟁터 같은 곳, 남한사회
 
어릴 적부터 북한에서 들어오던 남한의 경제는 형편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중국에서 대충 이야기를 들었지만, 설마 중국보다야 더 잘살겠나 싶었다. 하지만 남한 땅에 첫 발을 내 딛는 순간 많이 어리둥절했다. 내가 상상하던 남한이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그로부터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그 동안 많은 것이 발전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관광, 평양학생예술단과 교회단, 평양대학생응원단과 축구단, 농구단 등 여러 단체들이 오고 가면서 그 동안 굳게 닫혔던 남과 북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남과 북의 주민들이 어느 정도는 서로의 실상에 대해 알고 있다.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이 남아있지만, 그래도 이만큼 발전한 것도 큰 성과라고 본다.
 
10년 전 한국에 와서 겪었던 일들이 떠오른다. 탈북자들이 한국에 오면 거주지가 선정되고, 관할 담당경찰서 보안형사들이 신변보호 겸 생활안정도우미로 한국생활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에게는 자격증이 두 개나 있다. 운전면허증까지 합치면 3개다. 처음에 아는 교회의 목사님 권고로, 미용기술시험에 도전했다. 삽질만 하던 손이라 마디마다 굳어져서 롤 연습과 커트 연습을 할 때 손이 말을 안 들어 애를 많이 먹었다.
 
게다가 필기시험은 내가 살아오면서 평생 들어보지 못하던 용어들이 너무 많았다. 한마디로 모든 용어가 ‘외래어’다. 똘똘 암기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열심히 공부했다. 첫 필기시험 때 합격할 리가 없었다. 내용을 모르고 암기만 했으니까. 하지만 내게 포기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첫 시험에 떨어져서 실망하고 부끄러웠지만, 재도전하여 결국에는 두 번째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실기시험은 단 한번에 합격할 수 있었다.
 
모든 성과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포기를 안 했기 때문이다. 새터민이 한국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누군가의 도움이 꼭 필요하지만, 계속 도움만을 받다 보면 홀로서는 방법을 잃어버리게 된다.
 
처음에 은행에 가서 예금통장을 만드는 방법, 은행이자가 더 비싼 데를 찾아 다니면서 예금하는 방법을 알게 됐다. 하지만 나중엔 이자가 비싼 은행은 위험한 곳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나는 지금도 지갑에 돈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지갑에 돈이 있으면 쓰게 되니까. 이따금 만원이라도 생기면 은행에 가서 저금한다. 통장에 돈이 모이는 것이 흐뭇하기도 하다. 내가 내 힘으로 벌어서, 적게 쓰고 적게 먹고 그래서 모은 돈으로 어느덧 첫 적금을 탓을 때의 기분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나의 한달 계약직 월급은 백 만원 정도. 그 월급에서 세금 떼고 적금 나가고 보험금과 휴대폰 값이 나가고 나면 남는 것이 만원도 채 안 된다. 이렇게 절약하고 또 절약하며 살아도, 노후 대책을 마련하려면 아직도 산 너머 산이다.
 
흔히 대한민국에 일자리가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의 견해로는 그렇지 않다. 취직자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사무 일이나 쉬운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가 없는 것이다. 주변에 찾아보면 일자리는 얼마든지 있다.
 
청소부도 천한 일이 아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없으면 대한민국의 방방곡곡 구석구석 쓰레기가 쌓여서 아마 걸어 다닐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 천한 직업은 없다.
 
한국사람들은 전국에 명성이 있는 곳이라면 천리건 만리건 다 찾아간다. 하지만 자기가 먹고 쓰고 난 쓰레기는 가지고 갈 줄을 모른다. 관광객이나 휴가철 피서객들이 왔다간 곳은 금방 쓰레기장으로 변한다. 사람들로 인해 자연환경이 오염되고, 그로 인해 희귀 병들도 엄청나다. 하지만 그 원인이 바로 자신들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비롯된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병원에서는 각종 성인병과 희귀병으로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고, 밖에서는 ‘묻지마 살인’으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도둑질하고, 재산갈등 때문에 형제와 부모를 불태워 죽이고, 돈 때문에 자살을 한다.
 
겉으로는 평화롭게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전쟁터 같다. 이것이 내가 본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새터민에겐 선물과 돈보다, 일자리와 응원이 필요해
 

하나원 남한역사기행을 하는 새터민들(2007) ©주관_좋은벗들

나는 다른 사람이 재산이 많고 잘살아도 부럽지 않다. 부러워한다고 내 것이 되지 않으니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내가 그만큼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한국에 오는 탈북자들은 정부에서 정착금을 많이 준다는 환상에 젖어 온다. 하지만 얼마 안 되는 정착금을 받고 환상이 깨지고 불만이 생기게 된다. 내가 사는 이곳에도 60여명의 새터민들이 있다. 그런데 일을 안하고 있다.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도 힘든 세상인데, 집에만 있다니!
 
나는 몸도 건강하고 어린 나이에 한국에 온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나는 나이가 들어 한국에 왔고 몸이 건강한 것도 아니어서, 지금부터 돈을 벌기 시작해도 시간과 세월이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어 초조하고 불안하다. 하루 하루가 소중하고 아깝다.
 
1년에 두세 번씩 경찰서와 시청에서 새터민들을 모아놓고 간담회라는 것을 한다. 거기에 가면 못 보던 얼굴들이 많이 늘어있다. 그런데 간담회를 할 때마다 안건이 매번 똑같다. ‘새터민들의 사회생활 적응’문제와 ‘취직’문제 등이다. 매번 같은 안건을 가지고 간담회를 하지만, 해마다 늘어나는 새터민 수에 비해 취직을 한 새터민의 수는 늘지 않고 있다. 스스로 일을 하려는 의지가 부족한 탓도 크다.
 
나도 처음에는 노동부와 담당형사들이 도와줬지만, 언제까지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런 도움이 부담스러워, 내 발로 뛰고, 교차로를 들여다 보고, 아는 분들의 소개도 받아가면서 10여 년 동안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그 결과, 지금은 비교적 안정된 일터에서 정식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
 
지금 민간단체나 새터민 관련 행사 주최측들에서는 우리에게 선물이나 상품권을 준다. 어떤 교회에서는 한 달에 4~5번, 즉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오면 돈을 준다. 이런 행태는 물질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키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선물과 돈보다는, 안정된 일자리를 찾아주고, 새터민들이 홀로서기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응원해주는 것이 바람직한 일 아닐까. 물론 본인들의 의지와 노력도 필요하지만 말이다.
 
한국사람들도 취업난을 겪고 있다. 한마디로 전쟁과 같다. 대학을 나온 사람들과 대학원 나온 사람들이 시청에서 뽑는 도로청소부 면접시험에 뛰어들겠는가? (그 직업도 당당히 국가 공무원이니까 그런 경우도 있을 순 있지만.)
 
새터민들 중에 북한에서 대학을 나오고, 의사를 하다가 왔다 해도, 한국에서는 그 기술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재능에 대해 알아주지 않는다고, 앉아서 알아줄 때까지 기다린다고 해서 될 일은 없다. 그런 현실을 빨리 깨닫고 다시 도전해 보거나, 아니면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한국은 어디까지나 경쟁사회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노력해야만 살 수 있는 힘든 세상이다. 북한처럼 정부에서 지정해준 직장에서 지정된 8시간 로동시간을 지키면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어찌 보면 한국사회가 북한보다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북에 있는 가족과 만날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새터민들이 한국에 왔을 때는 북한에서 더는 살기 힘들어서 왔을 것이다.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가슴 아픈 사연들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니까…. 아픈 사연들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일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 언젠가는 가족들을 만나 도와줄 수 있는 그날을 위해 남보다 백배 천 배 더 노력해야 한다.
 
그래도 우리 새터민들은 다른 나라에서 이주한 사람들에 비하면 한국생활에 유리한 면이 있다. 같은 민족이고, 언어가 통하고, 풍습도 같다. 힘들지만, 노력을 한다면 이 세계에 적응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북에 있는 부모형제들을 만날 수 있는 지름길이다. 매 순간순간 북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면서, 몸이 아프고 지치고 힘들어도 누울 수도 쉴 수도 없는 것이 새터민들의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더 그리움이 간절하다. 이 추운 날씨에 옷이나 제대로 입고 있는지, 어디서 배고픔에 떨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하면 목이 메고 가슴이 쓰리고 아프다. 언제나 만날 수 있을지, 언제나 내 소식을 전할 수 있을지, 그런 날이 과연 언제일지, 기약 없는 그날이 빨리 오기만을 한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일다

[이주여성 목소리] 외국인과 ‘중매결혼’ 얼마나 힘든 일인가요  한국어 잘하면 친구될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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