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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키우는, 희망의 공간
아이들과 공부하는 방 한 켠에는 작은 베란다가 있다. ‘꿰맨 창’도 바로 그 베란다의 창문이다. 이사를 올 때부터 그곳 바닥에는 마루가 깔려 있었다. 처음 베란다 문을 열었을 때, 환하고 하얀 쪽방이 마음에 쏙 들어 이 방은 내가 쓰겠노라고 선뜻 나섰다. 그저 마루가 깔려 있는 베란다일 뿐인 이 공간이 마음에 든 것은, 옛날 자주 들어가 놀았던 아버지 책상 밑이나 다락방 같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아이들 몸집에 비해 참으로 컸던, 그래서 집안에 하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책상을 우리 남매들은 ‘큰 책상’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 밑에 들어가 노는 걸 누구보다 좋아했다. 그때, 휑하니 뚫린 책상 다리들 사이에는 꼭 보자기를 쳤다. 빨강, 보라 같은 나일론 보자기에 햇살이 투과되어, 책상 밑은 온통 마알간 붉은 빛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책상 밑에서 놀았던 시절은 잠시였던 것 같다. 곧 책상 밑에 몸이 꽉 끼어, 그 안에 더 이상 앉을 수도 없을 만큼 자란 뒤에는 다락에 올라가 놀았다. 낮에도 불을 켜야만 했던, 창문 하나 없던 그 다락방에서 야트막하게 솟아 있는 작은 나무 턱을 책상 삼아 숙제를 하기도 하고 일기를 쓰기도 했다. 그러다 싫증이 나면, 구석구석 처박혀 있는 물건을 뒤져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통 정리 안된 채, 깡통 같은 데에 아무렇게나 담겨 있던 어머니 물건들 속에는 온갖 신기한 것들이 많아 좋았다. 그 중 특히 내가 좋아했던 것은 색색의 재봉실들이었는데, 항상 새 실이어서 ‘저걸 언제 쓰려나?’ 늘 생각했었다. 물론, 어머니는 끝내 그것을 한번도 사용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세상 속에서 사라진 것들.
아버지의 묵은 수첩들을 뒤적이는 것도 좋아했다. 그 수첩에 쓰인 글들은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후루루 펼치면 종종 하나도 쓰지 않은 흰 면들이 펼쳐지고, 나는 그것들을 겁 없이 쭉쭉 찢어 거기에 인형을 그리곤 했다. 하얗고 맨들맨들한 그 종이는 당시 내가 접할 수 있는 것들 중 최고였다.
그렇게 남아 있던 흰 종이를 거의 다 찢어 쓴 어느 날, 아버지의 불호령을 끝으로 나는 더 이상 그 수첩들은 손대지 않았다. 하지만 ‘묵은 수첩을 가지고 왜 저렇게 화를 내시는 걸까?’ 생각하면서, 역정을 내시는 아버지를 멀뚱거리며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다. 거기에 쓰여 있던 것들이 다 무엇이었을까? 아무튼, 이렇게 다락방에 대한 기억도 유년시절과 함께 끝이 났다. 이후에는 더 이상 그런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쪽방을 얻었다. 난 그곳을 ‘공부방’으로 쓴 적도 있고, 재봉틀을 들여놓고 ‘바느질방’으로 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쪽방도, 예전의 다락도, 더 전의 책상 밑도, 모두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는 <자기만의 방> 역할을 해주었던 것 같다. 씨앗보다도 작은,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꿈들에 물을 주고 싹을 틔울 수 있는 희망의 공간. 그래서 자기만의 방은 크거나 화려하지 않아도, 구석진 작은 공간 어디에도 만들 수 있겠다 싶다.
쪽방에서 꼼지락거리며 뭔가를 할 때면, 꼭 어린 시절 책상 밑이나 다락방에 있는 것 같다. 며칠 전, 그곳에 재봉틀을 앞으로 썩 밀쳐놓고 한 켠에 이젤을 펼쳐 놓았다. 이젠 쪽방을 ‘그림방’으로 쓸 것이다. 요즘은 수채화 그리는 일이 즐겁다. 그림을 잘 그리게 되면, 내가 쓴 글에 직접 그림도 그려 동화책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야무진 꿈을 꾼다.
[정인진 칼럼] 우리 고유의 언어가 있다는 것 | ‘미래의 집’에 사는 아이들 | 반딧불이를 보셨나요?
아이들과 공부하는 방 한 켠에는 작은 베란다가 있다. ‘꿰맨 창’도 바로 그 베란다의 창문이다. 이사를 올 때부터 그곳 바닥에는 마루가 깔려 있었다. 처음 베란다 문을 열었을 때, 환하고 하얀 쪽방이 마음에 쏙 들어 이 방은 내가 쓰겠노라고 선뜻 나섰다. 그저 마루가 깔려 있는 베란다일 뿐인 이 공간이 마음에 든 것은, 옛날 자주 들어가 놀았던 아버지 책상 밑이나 다락방 같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아이들 몸집에 비해 참으로 컸던, 그래서 집안에 하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책상을 우리 남매들은 ‘큰 책상’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 밑에 들어가 노는 걸 누구보다 좋아했다. 그때, 휑하니 뚫린 책상 다리들 사이에는 꼭 보자기를 쳤다. 빨강, 보라 같은 나일론 보자기에 햇살이 투과되어, 책상 밑은 온통 마알간 붉은 빛으로 가득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외서 표지 이미지 (Penguin Books)
통 정리 안된 채, 깡통 같은 데에 아무렇게나 담겨 있던 어머니 물건들 속에는 온갖 신기한 것들이 많아 좋았다. 그 중 특히 내가 좋아했던 것은 색색의 재봉실들이었는데, 항상 새 실이어서 ‘저걸 언제 쓰려나?’ 늘 생각했었다. 물론, 어머니는 끝내 그것을 한번도 사용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세상 속에서 사라진 것들.
아버지의 묵은 수첩들을 뒤적이는 것도 좋아했다. 그 수첩에 쓰인 글들은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후루루 펼치면 종종 하나도 쓰지 않은 흰 면들이 펼쳐지고, 나는 그것들을 겁 없이 쭉쭉 찢어 거기에 인형을 그리곤 했다. 하얗고 맨들맨들한 그 종이는 당시 내가 접할 수 있는 것들 중 최고였다.
그렇게 남아 있던 흰 종이를 거의 다 찢어 쓴 어느 날, 아버지의 불호령을 끝으로 나는 더 이상 그 수첩들은 손대지 않았다. 하지만 ‘묵은 수첩을 가지고 왜 저렇게 화를 내시는 걸까?’ 생각하면서, 역정을 내시는 아버지를 멀뚱거리며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다. 거기에 쓰여 있던 것들이 다 무엇이었을까? 아무튼, 이렇게 다락방에 대한 기억도 유년시절과 함께 끝이 났다. 이후에는 더 이상 그런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쪽방을 얻었다. 난 그곳을 ‘공부방’으로 쓴 적도 있고, 재봉틀을 들여놓고 ‘바느질방’으로 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쪽방도, 예전의 다락도, 더 전의 책상 밑도, 모두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는 <자기만의 방> 역할을 해주었던 것 같다. 씨앗보다도 작은,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꿈들에 물을 주고 싹을 틔울 수 있는 희망의 공간. 그래서 자기만의 방은 크거나 화려하지 않아도, 구석진 작은 공간 어디에도 만들 수 있겠다 싶다.
쪽방에서 꼼지락거리며 뭔가를 할 때면, 꼭 어린 시절 책상 밑이나 다락방에 있는 것 같다. 며칠 전, 그곳에 재봉틀을 앞으로 썩 밀쳐놓고 한 켠에 이젤을 펼쳐 놓았다. 이젠 쪽방을 ‘그림방’으로 쓸 것이다. 요즘은 수채화 그리는 일이 즐겁다. 그림을 잘 그리게 되면, 내가 쓴 글에 직접 그림도 그려 동화책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야무진 꿈을 꾼다.
[정인진 칼럼] 우리 고유의 언어가 있다는 것 | ‘미래의 집’에 사는 아이들 | 반딧불이를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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