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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놀러 온 김에 꽁치를 구웠다. 우리 집 식단에서 육고기 요리가 떠난 지는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생선을 포함한 해산물은 가끔씩 상에 오르기도 한다. 특히 손님이 오는 날이면 그렇다.
 
물고기도, 문어도 고통을 느낀다
 

고향이 바닷가라서 그런지, 어린 시절 고등어, 꽁치 같은 생선은 우리 집 단골 메뉴였다.  또 가족들이 특별한 날 외식을 할 때면 거의 어김없이 횟집을 찾곤 했다.
 
평소 생선을 좋아했지만, 횟집 가는 일만은 참으로 싫었다. 아직 목숨이 붙어 살아 꿈틀거리는 생선을 마주대한 채 도저히 그 살을 삼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번, 회를 즐기는 가족들 곁에서 불편한 자리를 지키면서 어서 빨리 식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곤 했다.
 
회를 전혀 먹지 못하던 나도 그같은 환경 속에서 자라서인지, 성인이 된 후 사람들과 어울려 횟집을 찾으면, 그래도 회 몇 점은 거들 만큼 제대로 길들여졌다. 게다가 회를 입에 대지 못하는 친구를 볼 때면, 그 맛을 즐기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기까지 했다. 사실 맛으로 따지자면 어릴 때부터 생선을 즐겨 먹어왔는데 회인들 싫어했을 리 없다. 다만, 물고기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목격하면서 그 맛을 즐기는 것에 거부감이 들었던 것이다.
 
꽃게만 해도, 할머니께서 손수 살아 있는 꽃게를 죽여 요리하는 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렸을 때는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꽃게를 직접 죽여 내 입 속에 넣는 일은 곤욕스러웠다. 산 채 토막 내거나 펄펄 끓는 물에 던져 넣는 일도 두렵기만 했다.

어린 시절부터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그 의문–‘다른 생명체에게 고통을 주면서까지 그 맛을 즐겨야 하나?’-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나마 도살과정을 보지 못했을 때는 모른 척 그 맛을 즐길 수도 있었지만, 직접 죽여 식사를 차려내야 되는 입장에서는 도저히 그 질문을 회피할 수 없다.

 
비록 물고기나 오징어, 문어 같은 연체동물이 사람을 포함한 포유동물, 조류가 표현하는 방식으로 고통을 드러내진 않더라도, 복합적인 뇌를 가진 존재로서 기계적 반응이 아니라, 고통에 따른 의미 있는 행태적, 생리적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미루어, 분명 고통을 느낀다고 결론짓는 과학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우리가 물고기를 먹을 때 그 생명체에게 고통을 준다면, 그야말로 생존적 필요가 아닌 이상, 우리의 먹는 행위를 윤리적으로 정당화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런데 게, 새우, 가재와 같은 갑각류 동물의 경우는 뇌가 발달하지 않아 그 고통을 짐작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이상, 고통을 가할 수도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는 피터 싱어의 주장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만약 그들이 고통을 느낀다면, 우리는 물고기 한 마리를 먹을 때보다 여러 마리의 새우를 먹음으로써 더 많은 생명체에게 고통을 주는 윤리적 우를 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될수록 다른 생명체에게 고통을 적게 주거나 주지 않는 먹을 거리 선택에 대한 고민은 윤리적 차원에서 중요하다. 더욱이 가축과 달리 인도적 도살에 대한 지침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물고기는 전혀 먹지 않는 것 이외에 좋은 윤리적 선택이 없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바다고갈, 오염 앞에서
 

추천서-제인구달, 게리 매커보이 & 게일 허드슨 "희망의 밥상" 사이언스북스, 2006

동물학대의 차원이 아니더라도, 오늘날 해산물 섭취는 지구환경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줄여나갈 이유가 충분하다. 무엇보다도 과도한 조업방법이 문제다.

 
어린 시절 대구는 참 귀하고 비싼 생선이라 자주 먹을 수는 없었지만, 한 번씩 먹는 대구탕은 별미였던 기억이 난다. 그 기억 때문에, 프랑스 어시장에서 대구를 발견할 때면, 가끔씩 사다가 우리 식의 탕을 끓여 보양식으로 삼곤 했었다. 그런데 그 대구가 멸종위기에 내몰려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바다 밑을 샅샅이 훑어 싹쓸이를 하는 상업어로방식은 바다 속 산호초, 해초 숲을 모두 파괴해 지상의 숲처럼 황폐화시켜 왔다. 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원하지 않는 해양생물까지 끌어올리는 저인망방식은 잡히는 물고기의 25%~50%를 ‘쓰레기’ 취급하며, 다시 바다로 내다 버리고 있단다. 이 과정에서 보호해야 할 희귀생물도 함께 희생되고 있다. 과도한 이익추구가 낳은 결과이다. 1990년대 초반, 세계식량 농업기구는 세계 어족의 70%가 고갈되었거나 고갈되고 있는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제 이윤추구는 양식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양식업은 지상의 공장식 사육과 다를 바 없다. 나일론 그물로 우리를 만들고, 비좁은 우리 속에 과도한 밀집사육을 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살아가는 물고기는 질병과 기생충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비타민과 미네랄을 첨가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량의 항생제, 성장호르몬도 필수가 된다. 양식 연어의 경우는 착색제까지 동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크릴새우, 동물성 플랑크톤을 먹고 살아가는 자연산 연어는 분홍색 살을 가지고 있지만, 양식 연어는 연한 회색 살을 띄기 때문이다.

 
또 가축과 마찬가지로, 질소와 인을 다량 함유한 과도한 오물 방출이 야기하는 수질 오염도 심각한 문제이다. 게다가 사육하는 물고기의 먹이를 마련하기 위해 바다의 작은 물고기들까지 고갈시키고 있으며, 양식 물고기나 새우의 먹이를 잡아들이기 위해 사용하는 화석연료의 양도 만만치 않다.
 
그것만이 아니다. 우리를 뚫고 달아나는 양식 연어가 자연산 연어와 경쟁하거나 교미하여 자연산 연어의 유전자에 변화를 일으키거나 질병을 옮기고 있어, 자연산 연어가 현저히 감소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나 남아메리카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왕새우 양식은 맹그로브숲과 같은 홍수방지 숲을 파괴시켜, 쓰나미와 같은 자연재해를 부추기고 있다고 한다.
 
언젠가부터 그토록 먹기 어렵고 귀하던 왕새우나 연어를 우리 식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알고 보니, 모두 위험한 양식업의 생산물이었다. 새우의 절반이상 연어의 대부분이 양식업에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먹을 거리라기보다는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의 입맛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것이다. 가난한 나라 어부들은 양식업으로 인해 경제적 도움을 받기보다 오히려 환경오염과 파괴로 인해 공동체마저 와해되어 생존이 위태로운 상황이다. 새우 양식장의 경우, 염분조절을 위한 지하수의 과도한 개발로 식수가 소금물에 오염되어, 식수난까지 겹쳐 그들의 고통을 더하고 있다.
 
결국 상업적 어업, 다시 말해서 과도한 조업과 양식업으로 대표되는 집약적 어업이 제공하는 해산물은 수중생물의 고통, 생태계 파괴만 아니라, 제 3세계 어민의 생활터전 파괴를 비용으로 지불하고 있으며, 우리 개개인의 건강에도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실 이같은 어업도 소비자의 구매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이제 소비자로서 올바른 정보를 꼼꼼히 찾아 제대로 된 선택을 할 때이다.
 
나는 아직 생선에 대한 입맛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적게 먹기를 실천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물론 연근해 수산물을 중심으로 해서 말이다. 무엇보다도 젓갈로 담근 김치와 멸치를 우려 낸 국물을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을 지가 고민인데, 사찰음식을 참고로 그 해법을 찾을 생각이다. [이경신의 철학하는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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