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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는 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사회적으로 묻혀져 있던 여성농민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칼럼을 연재합니다. 농사이야기, 환경이야기, 먹거리이야기, 농부로 살아오면서 겪은 여성들 삶의 이야기를 통해, 녹색미래의 대안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는 농업과 생태감수성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도-농 격차와 여성농민이 겪는 차별과 소외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필자 오미란님은 여성농민정책을 연구하고 발굴해 온 분으로, 현재 전남여성플라자 정책연구실 실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어른한테 물어보고…애기한테 물어보고’

▲자료 사진: 지난 8월 20일 열린 '전국여성농민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먼 길을 온 여성농민들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농산물 가공 일을 시도해보려고 모인 여성농민교육이 끝났다. 교육을 마치면서 후속작업으로, 법인사업에 대해 의견이 오갔다. 법인을 만들려면 투자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각자의 의견을 물었다.
 
‘법인에 참여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런데 한 분이 “우리 집 어른한테 물어보고…”라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한 분이 또 “애기한테 물어보고…” 얘기를 듣다가 참다못해 내가 한마디를 던졌다. “30년 동안 내 쎄빠지게 일했으면서! 그깟 100만원 투자하는데 그 돈도 맘대로 결정 못하요? 그리고 어른은 누구고, 애기한테는 왜 물어봐요. 어머니들이 어른이라구요.”
 
내 말에 여성농민들은 한바탕 웃으셨지만, 돌아서는 맘은 별로 편치 못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현재 여성농민들이 살고 있는 현실이니까.
 
어른한테 물어본다는 말은 남편한테 물어본다는 말이고, 애기한테 물어본다는 말은 자녀들한테 물어보겠다는 뜻이다. 30여 년을 넘게 뼈빠지게 일해서 재산을 지켰든 모았든, 그 당사자가 본인들이면서도 작은 재산권을 행사할 권리조차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하는 여성농민.
 
여성농민은 농업노동자? 농업경영자? 농가주부?
 
그나마 농업법인을 만들려면 300평의 자기소유 땅이 필요하다. 대표이사는 300평의 본인소유 토지를 소유해야 한다. 그러나 300평 정도의 땅이라도 본인 소유로 가지고 있는 여성농민은 많지 않다. 노동자들은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노동을 한 대가가 임금으로 지급되면 자신의 노동가치를 환산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농민들은 30년 일을 했어도 자신의 노동가치를 계산할 수 없다. 50년을 일해도 여전히 그냥 ‘농가주부’일 뿐이다.
 
‘주부’ 여성농민들이 주부인가? 아니면 농업경영자인가? 아니면 농사꾼, 즉 농업노동자인가? 경계가 모호하다. 그래서 교통사고나 재해사고 시 판정도 다양하다. 어떤 보험사는 주부로, 어떤 보험사는 일용직기준으로 판단한다. 여성농민은 신분이 모호하다.
 
얼마 전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보험사에서는 나이가 70이니 무급으로 처리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항의를 하셨다고 한다. “내가 나이는 많이 먹었어도 우리 농사 아직도 다 짓고 시장에 갖다 팔아서 가용(생활비)하고 산디, 나를 그냥 놀고먹는 사람 취급하요.”
 
그렇게 티격태격하는데, 보험사에서 하는 말이 “아주머니 땅도 없잖아요?” 하더란다. “내 이름으로 없지만 내가 날마다 가서 농사지어. 이름만 아들 것이제 내가 농사는 실제로 다 짓는다니까…” 그러나 보험사는 법적 근거가 없으니 무직이라고 우겼다. 어머니는 시장에 가서 조사하고 증인 세우라고까지 해서, 결국 20일분 일당을 타내셨다.
 
이것이 여성농민의 현실이다. 남편 살아선 남편 땅이고, 남편 죽으면 자식 땅이 되는. 물론 최근에는 배우자 명의로 일부를 남기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자기 명의의 땅 소유한 여성농민은 20%미만

 

▲ 자료 사진: 여성농민활동가를 양성하는 여성농민 줄기학교 (3기) 강사와 참가자들 ©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외국의 경우를 봐도 여성농민들은 지위가 낮고, 경영을 하더라도 남성은 대농장인데 비해 여성은 소농장을 경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여성농민들이 자기명의로 땅을 소유한 정도가 20% 미만이다. 그나마 토지규모는 평균 700평 미만으로, 농사지어서 목에 풀칠도 못할 만큼 적은 규모다.

 
얼마 전 여성농민들에게 ‘이름있는 생산자’(생산품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판매하는 것) 되기를 하자고 제안했다가, 기막힌 사실도 알게 됐다. 땅의 소유는 물론이고, 판매에서도 여성농민이 차별 받는다는 것이다. 공판장에 물건을 팔 때 남편 이름으로 출하를 하는 것이 등급을 더 잘 받는다고 했다. 그래서 남편이름으로 출하를 한다나? 그러다 보니 한 작물을 15년째 생산해서 팔아도 남편 이름으로만 내보내서, 농사는 짓되 얼굴은 못 갖겠다고 하신다.
 
자기 앞으로 땅도 없고, 남편 이름으로 출하하니 통장거래 내력도 없고, 결국은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누군가가 본인이 여성농민임을 증명해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기가 막힐 뿐이다.
 
갈수록 농가인구는 노령화되고, 여성농민들의 농사비중이 높아지는 원예, 특작, 하우스 등의 농사일로 농번기, 농한기도 없어져 여성들이 일하는 시간은 증대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일해도 자신소유의 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남편이 죽고 나면 땅은 자식들 이름으로 분배되니, 결국 여성농민들이 하는 말이 ‘어른한테 물어보고… 애기한테 물어보고.’라는 대답일수밖에.
 
덴마크 등 북유럽에선 ‘공동경영주’로 인정 추세
 
노동자들은 그 회사에 근무하기만 하면 누구나 직원이고, 노동조합이 있다면 누구나 조합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자신들 생산자 조직인 작목반에 한 가구당 1명이 가입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일은 함께해도, 회의에서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발언권은 남성이 갖게 된다.
 
외국도 여성농민의 경제적 지위가 불안정하긴 마찬가지지만,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나 독일의 경우엔 여성농민을 공동경영주로 인정하는 추세다. 공동경영주로 인정한다는 것은 모든 농업정책에 포함되는 것과 동시에, 여성농민의 지위 향상을 수반한다.
 
우리 정부는 최근 ‘여성CEO’라는 개념으로 여성농민들 중 일부를 지칭하고 있다. 정말 여성농민들은 경영주인가? 여성농민을 진정으로 경영주로 인정한다면 후계자 선정, 영농회사 설립, 농업정책 지원 등에서 여성농민에게 제약을 주는 요인들을 폐지하고, 여성농민들의 지위를 법과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할 것이다.
 
생산, 유통, 판매 전 과정을 통해서 여성농민에 대한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는 ‘농업’은 결국 점점 존립이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여성농민을 CEO라고 인정한다면, 농업의 핵심인력이라는 현실을 인정한다면, 이제는 말로가 아니라 실제로 경영과 운영에서 지위를 보장하고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오미란/ 전남여성플라자 정책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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