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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죽을 때까지 배우다 죽었으면 좋겠다"
 

이옥선 할머니는 재치와 유머를 겸비한 이야기꾼이다.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 이옥선 할머니 방에는 언제나 오래된 가요가 흘러나온다. 많은 시간을 혼자서 보내야 하는 할머니는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듣는다고 했다.

 
할머니는 한참을 따라 부르시다가는 “진짜 이름은 홍도가 아니다. 기생 질 하느라 홍도라 불렀지. 두 남매야. 홍도하고 홍도 오빠하고 두 남매인데…” 그렇게 노래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고는, 옛날 극단에서나 볼 수 있던 ‘이야기 꾼’ 같은 목소리로, 노래의 시작은 이렇게 하는 거라며 흉내를 내신다.
 
“한 옛날에 순이라 부르는 여성의 두 남매가 살고 있었다. 그 오빠를 공부시키기 위해서 기생 몸이 되어 홍도라고 불렀다”
 
재치와 유머를 겸비한 이옥선 할머니는 사실 대단한 ‘이야기 꾼’이다. 증언회와 같은 ‘공적인’ 자리에서도 대단하시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도 이야기를 시작만 하면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쉼 없이 이야기하신다. 목이 아파 콜록콜록 기침을 하시면서도 “난 하루 종일 계속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하신다.
 
할머니의 작은 상에는 <열림음악 대백과>, <60년대 청춘 늴리리>, <세상에서 가장 간단한 일본어 회화>, <어린이 그림 영어사전> 등의 책이 가득 놓여있다. 공부에 대한 욕구가 높은 할머니는 연습장에 히라가나를 빽빽이 적으며 글씨연습을 하고 계셨다.
 
“난 죽을 때까지 배우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할머니는, 학교에 한번 가보지 못한 것인 한이라고 하소연하신다.
 
‘우리 아들, 내가 두고 가면 누가 거둬주겠니’
 

할머니와 인연 맺은지 3년이 지났다.

3년 전 우연히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눔의집’(일본군 성노예제 피해 생존자 분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을 방문했다가, 다리가 불편해 성당에 다니기 힘들어 하는 할머니가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시간이 나는 주일마다 ‘나눔의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렇게 이옥선 할머니와 나와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할머니의 침대 머리맡에는 사진앨범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앨범을 한 장씩 넘기다 보면 젊은 시절 모습이 담긴 빛 바랜 흑백사진들이 눈에 띈다. 할머니가 스무 살, 서른 살 즈음에 찍었다는 몇몇 사진들은 구겨지고 찢겨져 있다.
 
오래된 사진들을 보며 신기해하는 나에게, 할머니는 “신기할 것도 많다. 그때 고생한 거를 생각하면... 그걸 어찌 다 말하겠니” 하시며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중국에서 보내야 했던 타향살이 이야기를 조금씩 들려주셨다.
 
할머니는 마흔 살 무렵에 찍었다는 가족사진을 가리키며 “우리 아들, 우리 아들, 잘났지 뭐. 우리 호국이 아부지도 잘났지. 이때가 열 몇 살인가. 스무 살 전이지. 그런데 일 잘한다고 얼마나 소문이 났었다고” 하시더니, 살며시 걱정 어린 미소를 지으신다.
 
“이건 우애가 찍었는가 하면, 야 누나가 북한에 있거든, 근데 자꾸 가족사진을 찍어서 한 장 보내 달라고 너무 그래 갖고... 그래서 이거 찍은 거야. 이게 호국이 아부지... 이렇게 사진 보면 누가 머저리라 하겠노. 학교 댕기면서 얼마나 매를 맞고 댕기는지... 아이들한테 얼리우면서...”
 
할머니의 아들은 ‘농아’이면서도 지적장애를 가졌다. 계모로 들어가 어려서부터 키운 아들이 지금은 오십이 넘은 아저씨가 되었지만, 항상 가장 걱정되는 것은 이 아들이다.
  

이옥선 할머니가 마흔 즈음에 찍었다는 가족사진

“나는 아들이 불쌍한 거야, 남만 못하니까. 이혼하려고 아들을 앉혀 놓고 이래 본다. 보면 내가 안 낳았는데 무슨 상관 있어... 내가 두고 가면 어떤 엄마 들어와서 너를 거둬 주겠니 (생각)하면 눈물이 너무너무 나와서 못 견디는 거야. 그래서 내가 못 갔어. 이혼을 못했어. 그 영감하고.”

 
한번은 목을 매 죽으러 산 속에 가서는 스스로 죽어야 하는가 하고 땅을 긁으며 울고 있는데 “엄마 여기도 없어, 엄마 여기도 없어” 하는 아들의 목소리를 들렸다고 한다. ‘내가 죽어서는 안 되겠다. 아들이 저렇게 엄마 찾고 다니는데...’라는 생각이 들어 빙 둘러 집에 오니, 아들이 막 달려 들어와 “엄마 그러지마!”하는데, 자꾸만 눈물이 났다고 한다.
 
“가들한테는 내가 있어야 되는 건데...” 장애를 가진 아들과 언청이(구순구개열 환자)인 며느리, 그리고 어린 두 손자에겐 할머니가 실질적인 가장이었기에, 중국을 떠나온 지금도 그 책임감을 할머니는 묵묵히 지고 계셨다.
 
“해결도 못할 거... 그때 위안부 간판을 안 내놨으면 더 좋았을걸...” 나지막이 혼잣말을 하신다.
 
내 팔자가 사나우니깐
 
할머니는 중국에서 20년이 넘도록 산파 일을 했다고 한다. 비록 자신은 위안소에서 성병치료와 임신방지의 이유로 몸에 수은증기를 쐬어 임신을 할 수 없었지만, 부락에서 알아주는 산파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할머니는 ‘일’이 아니고서는 갓난아기를 만지지 않는다.
 
“누가 아이들 놓아서 와도 암만 마음이 고아도 첫돌 지나지 않으면 다치지(만지지) 않는다. 다른 할머니들이 안아보고 잡아보아도 난 안 그런다. 애기가 돌 지나기 전에는 내가 안 다쳐본다. 너 조카 놓고도 내가 애에 대해서 물어보디? 돌 지난 다음에야 물어보고 하지만은 돌이 지나기 전에는 절대로 안 한다. 지금도, 지금도 그러지... 어떤 사람들은 내인데 와서 결혼할 때 바느질 해달라고... 사정사정해도 안 한다. 위안부에서 나온 사람이니깐, 팔자가 사나우니깐 난 안 하지, 그런 거. 절대로 안 하지.”
 
그래, 난 위안부가 아니다
 

할머니와 만나면 시공간을 넘나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할머니가 가진 마음의 상처와 그 아픔을 내가 느낄 수는 없지만, 나와 같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할머니를 만나 함께 이야기하다 보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와 함께 그 피해구조가 연속되고 있는 ‘현재’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래, 니 말이 맞다. 난 위안부가 아니다. 역사선생님이다. 역사선생님. 하하하.”
 
농담처럼 건넨 ‘역사 선생님’이라는 말에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신다. 어쩌면 우리가 기대하는 당당한 할머니의 모습은, 우리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족의 어머니’, ‘순결한 이 땅의 여성’이라는 말로 피해여성을 표현하는 이 사회에서, 할머니는 자신을 존재시키기 위해 또 다른 고통을 겪지 않았을까.
 
“우리 호림이가 열심히 공부해서 아버지 엄마를 잘 건사해야 하는데...” 할머니의 둘째 손자 호림 군은 현재 K대학의 도움으로 대학 내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올해가 ‘마감’일 것 같다며 죽는 소리를 하시면서도 “자 대학 마칠 때까지는 살아있어야 하는데...” 하신다.
 
토요일마다 찾아오는 손자를 위해 과일이며 과자며 챙겨 놓으시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돌아가신 나의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생각난다.
 
별다른 준비도 없이 할머니를 인터뷰해보겠다 했지만, 결국에는 어느 때처럼 할머니의 끊이지 않는 이야기를 듣기만 하다 저녁 무렵이 되었다. “저녁 먹고 가라. 먹고 가” 할머니의 정겨운 성화에 밥 한숟갈 얻어서 먹는다. 안병훈/ 일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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