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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중지 다룬 희곡 <그녀들의 단편> 쓴 극작가 이시하라 넨

 

극작가 이시하라 넨(石原燃) 씨가 쓴 성폭력 피해생존자 남성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 <되살아난 물고기들>이 작년 12월에 일본에서 상연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던 형제들의 갈등과 망설임, 고발과 서로에 대한 격려를 그린 작품이다. 공연을 보고 배우들이 주고받는 대사에 푹 빠져들었다.

 

▲ 이시하라 넨(石原燃). 1972년 도쿄 출생. 극작가, 작가. 첫 소설인 <붉은 모래를 발로 차다>로 2020년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오름. 취미는 키르기스스탄의 구금(口琴) 연주라고 한다. (촬영: 이시다 이쿠코)

 

이시하라 넨 작가의 희곡은 시대의 부조리와 젠더 문제를 응시하는 시각이 날카롭다. 전 일본군 ‘위안부’를 회상하는 1인극과,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보도와 관련하여 큰 논란이 되었던 NHK 방송프로그램 개찬 문제를 주제로 쓴 작품 <하얀 꽃을 숨기다>도 있다.

 

(※NHK 방송프로그램 개찬 사태란? 2001년 일본 NHK 교육 채널에서 “전쟁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 시리즈의 2부로 ‘전시 성폭력을 말한다’라는 프로그램이 방송됐다.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을 다룬 내용이다. 그런데 당초 제작 방향과 달리 ‘위안부’와 전 일본 병사의 증언 등 주요 장면이 삭제된 채였다. 해당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한 일부 관계자와 여성평화운동단체 바우락(VAWW RAC, 당시 ‘바우넷 재팬’)은 방송국에 항의했고, 정치권의 개입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으나 7년 공방 끝에 대법원은 원고 패소 판결했다.)

 

<하얀 꽃을 숨기다>는 지난 2월, 국립극단과 한일연극교류협의회,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가 공동 주최한 ‘제10회 현대일본희곡 낭독공연’을 통해 한국에도 소개된 바 있다.(설유진 연출, 명진숙 번역) 그리고 이번 3월 23일~27일, 임신중지와 유산 유도제를 둘러싸고 여성들의 자매애를 그린 <그녀들의 단편(断片)>이 도쿄 시부야 공연을 앞두고 있다.

 

유산 유도제를 먹는 하룻밤 이야기를 무대 위로

 

세계보건기구(WHO)가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했으며 해외에서는 약국 등에서도 비교적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경구 유산 유도제의 신청과 승인을 둘러싸고, 일본에서도 지금 여성들에게 기대와 불안이 커지고 있다. 작년 말, 영국의 한 제약회사가 후생노동성에 승인을 신청했지만, 승인이 된다 해도 지금까지의 임신중지 수술과 마찬가지로 고가에 입원 등의 조건이 붙을 우려가 있다. 이 타이밍에 상연되는 연극이 바로 <그녀들의 단편>이다.

 

“2019년에 안전한 임신중지법을 요구하며 운동을 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었습니다. 같은 해에 시작된 ‘플라워 집회’(일본의 미투 집회)에 참여한 적도 있어서, 페미니즘 관점으로 임신중지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에 흥미가 있었고, 언젠가 이 주제로 희곡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극단 도쿄연극앙상블에서 희곡 집필 의뢰를 받았습니다. 주제와 소재를 제가 정해도 된다고 해서, 유산 유도제를 먹는 하룻밤에 대해 쓰기로 했습니다.”

 

▲ 이시하라 넨 작가의 최근 작은 임신중지와 유산 유도제를 둘러싸고 여성들의 자매애를 그린 희곡 <그녀들의 단편>이다. 도쿄 공연을 앞두고 있다. (포스터 출처: 도쿄연극앙상블 홈페이지 https://tee.co.jp)

 

등장인물은 일곱 명의 여성이다. 스무 살 대학생 다베 마키가 임신을 했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며 임신중지를 선택했다. 재생산권 후진국(그야말로 일본이 여기에 해당된다!) 여성들이 안전한 임신중지를 할 수 있게 돕기 위해, 약을 제공하는 국제적 단체(실재! 네덜란드의 산부인과 의사 레베카 곰퍼츠가 설립한 비영리단체 Women on Waves)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것을 이용하기로 한다.

 

다베 마키를 둘러싸고 다양한 연령과 각기 다른 입장을 가진 ‘여성들’이 임신중단 경험을 포함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서로에게 나눈다. 이야기 속에는 ‘낙태죄’와 (구)우생보호법, 태아공양(사찰에서 유산이나 임신중지로 태어나지 못한 태아의 명복을 비는 의례)도 등장한다.

 

“여성들이 이 연극에서 공감하는 장면은 저도 쓰면서 가슴이 뜨거웠습니다.”

 

모녀와 지인 등 다양한 등장인물 가운데 다베 마키의 혈연은 등장하지 않는다. “임신중지와 피임 선택에는 본인의 의사가 가장 존중되어야 하고, 젊은 사람이라 해도 부모에게 알릴 의무는 없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일본의 의료기관에서는 그 생각이 좀처럼 통용되지 않죠. 그래서 연극에서 가족이 아니라 친구에게 도움을 받는 설정으로 했습니다.”

 

성폭력, 임신중지,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을 연극 무대에서 다루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성폭력과 임신중지는 묘사를 하기도 어렵고, 남성우월 사회를 비판하는 이야기는 누군가를 적으로 만들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은 그런 것에 대해 각오를 하고 있는 거잖아요. 저도 이 희곡을 쓰기 위해 한발 더 나아갈 각오를 했습니다.”

 

페미니즘이라는 버팀목으로, 당사자에게 힘을!

 

이시하라 씨가 희곡을 쓰게 된 것은 서른이 넘어서이다. 미술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젊은 시절에는 글 쓰는 일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첫 번째 결혼 당시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뭔가 열중할 곳이 필요해 서점에 갔다가 발견한 책이 『희곡을 쓸 수 있다』라는 책이었어요.”

 

유소년기에는 남자 옷을 입어야 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저를 가지고 ‘젠더 규범은 어디에서 싹트는가’라는 주제의 실험을 했거든요. 초등학교에 들어가 반 친구들과 같은 옷을 입고 싶다고 말을 해서 실험이 끝났죠.(웃음)”

 

“어머니가 페미니즘 의식을 가진 분이어서 저는 ‘여성다움’을 강요당하지 않고 자랐지만, 그것이 제 안에서 ‘여성스러운 것은 열등한 것’이라는 가치관으로 자리를 잡아버렸죠. 그런 마음이 전해지는 건지, 여성 커뮤니티에 잘 발을 붙이지 못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제 안에서 가치관의 흔들림이 포화상태가 되었을 때가 희곡을 쓰게 된 때였는지도 모릅니다.”

 

이시하라 씨는 글을 쓰게 되면서 즐거워졌다.

 

희곡의 주제가 사회적인 문제로 향하게 된 것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원전 사고의 충격 때문이었다. “나도 당사자가 되자 사회 문제가 훨씬 가깝게 다가왔습니다. 처음에는 저는 주류에 속하고 가해자 측에 있다는 의식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피해자가 될 리가 없다’는 생각 역시 오만하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죠. 스스로가 당사자가 되는 이야기, 즉 여성이라는 점, 싱글맘 아래서 자란 경험을 쓰기로 했습니다”

 

이 시점만 해도 아직 페미니즘과 만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MeToo 플라워 집회를 만났다. “집회에 참여하면서 나에게 페미니즘이라는 버팀목이 생겼고, 표현방식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버팀목을 가지고 주제 의식을 확장해나가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들의 단편>은 당사자에게 힘을 주기 위해, 당사자를 위해 쓴 첫 작품입니다.”

 

지금, 연습이 한창 진행 중이다.

 

-<일다>와 기사 제휴하고 있는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의 보도입니다. 시미즈 사츠키 기자가 작성하고 고주영 님이 번역하였습니다.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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