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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대선 기획: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라⑤ 근로기준법 개정

 

“한 작품씩만 해요. 일하는 동안 회사에 종속되는 거죠. 예전에 용역제공계약서를 쓴 적이 있는데, ‘다른 업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어요. ‘우리는 프리랜서가 아니구나’ 생각하게 됐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데 프리할 수 있나요?” (영화∙드라마 미술스태프, 30대)

 

지난해 한국여성민우회는 프리랜서, 특수고용노동자, 플랫폼노동자 등 비정형노동을 하고 있는 여성들의 현실에 주목했다. 노동을 하고 있지만 근로기준법 상의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경험을 듣고, 대안을 모색하기로 한 것이다.

 

▲ 민우회에서 제작한 여성 비정형노동자 인터뷰 시리즈 영상 <이렇게 일하는데 노동자가 아니라고요?> 중에서. (유튜브 채널: 한국여성민우회tv)

 

우리는 ‘제도 새로고침: 노동자와 비(非)노동자 사이를 메우다’ 사업의 일환으로, 38명의 여성을 인터뷰했다. 이 글에서는 영화∙드라마 미술스태프로 일하는 ‘프리랜서’ A씨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번 대선에서 다뤄져야 할 제도적 대안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업무지시 받으며 제작사에 매여 사는 ‘프리랜서’?

 

예술 계통에서 ‘프리랜서’로 일한다고 하면, 얼핏 생각하기에 매우 높은 수준의 자유가 보장될 것 같다. 그런데 정작 A씨는 자신이 “한번도 프리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사용자의 요구에 철저히 맞춰야 하는 ‘노동자’라는 것이다.

 

A씨의 일은 철저히 제작사의 관리감독에 따라 진행된다. 디자인 콘셉트를 보고해 승인을 받고 진행상황도 보고한다. 작업 기간 내내 그의 24시간은 촬영에 맞춰서 돌아간다. 아무리 중요한 사정이 있어도 “그 시간에는 일할 수 없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그토록 영화를 사랑해서 이 직업을 선택했지만, 이제는 영화를 볼 시간도 잘 나지 않는다고 A씨는 말했다.

 

그와는 반대로, 제작사 사정에 따라서는 노동시간이 죽죽 늘어난다. 업계에 표준근로계약서가 도입되면서 노동시간이 줄었다지만, 촬영 때마다 노동시간이 조금씩 초과되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게다가 미술팀은 남들보다 일찌감치 현장을 세팅하고 늦게까지 현장을 정리하느라 다른 직군보다도 노동시간이 길어진다.

 

더 큰 어려움은 촬영기간이 연장되는 것이다. A씨는 촬영기간이 늘어나는 상황을 ‘기본값’처럼 여기고 있었다. 예정된 기간에 맞춰 다음 작업을 잡았다가는 일정이 겹칠 수 있다. 그렇다고 늘어난 촬영기간에 대한 대가를 받을 수도 없다. 그는 “쉬는 기간에는 생활비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며, “사람들은 ‘프리랜서니까 놀고 싶을 때 놀 수 있잖아’라고 얘기하지만, 일한 만큼 대가를 받았으면 덜 억울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던 일을 마무리하지 않고 중간에 손 떼고 나간다는 게 쉽지 않아요. 9월에 끝난다고 해서 9월 중순에 다른 계약을 할 수 없어요. 촬영 끝나는 시기가 운 좋게 맞으면 일할 수 있겠지만 위험이 크죠. 타이밍이 안 맞으면… 아주 오래 놀 수 있어요.” 

 

 
민우회에서 제작한 여성 비정형노동자 인터뷰 시리즈 영상 <이렇게 일하는데 노동자가 아니라고요?> 중에서. (유튜브 채널: 한국여성민우회tv)

 

그가 겪는 불이익은 이뿐만이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안전 문제이다. 미술스태프는 위험한 장비를 사용해 작업을 하지만, 노동자가 아니기에 산재보험도 없고 제작사도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 그는 무너지는 세트를 붙잡다가 허리 부상을 입고서, 수술비를 받기 위해 싸웠던 동료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병원을 찾은 현장 책임자는 “누가 그런 걸 잡으랬냐”며 다친 사람을 질책했다고 한다.

 

업계 내 성차별도 노골적이다. 미술스태프의 성비는 여성이 8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많은데, 미술감독의 절반은 남성이다. 남자팀원에게는 돈을 더 주는 경우도 많다. “힘을 더 많이 쓰고 운전을 한다”는 이유에서다. 남자는 승진도 빠르다. 여자는 여섯 작품을 하고 팀장이 되는데, 남자는 세 작품을 하고 팀장이 되는 현실을 보며 A씨는 박탈감을 느낀다고 했다.

 

‘프리랜서’로만 구성된 노동시장에서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A씨는 “여성 스태프는 임신을 하면 영화 생활은 끝”이라고 말하면서 “출산이 예정된 여성은 아예 채용이 되지 않는다. 계획 없이 임신이 되면… 에휴”라고 한숨을 쉬었다.

 

비정형노동은 왜 여성의 일자리가 되는가

 

A씨의 이야기가 모든 여성 비정형노동자의 상황을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민우회가 만난 여성 비정형노동자들은 직종이나 고용형태에 따라서 다양한 일 경험을 이야기했다.

 

누군가는 직장인과 똑같이 사무실로 출퇴근을 하면서 일했고, 누군가는 불특정한 시간에 가정이나 기관 등을 방문해 제품 점검, 교육 등의 일을 했다. 집이나 카페 등에서 일하지만 업무 진행과정 내내 사용자의 컨펌을 받아가며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조금씩 형태가 다를 뿐, 사용자의 관리감독을 받고 일하면서 회사의 이윤을 창출하는 ‘노동자’라는 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 근로기준법 상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비정형 노동자들도 노동권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가 2021년 10월 21일 개최한 <일하는 모두를 위한 근로기준법 새로고침> 토론회 현장. (출처: 민우회)

 

이들이 다른 노동자보다 자유로워 보인다면, 그러한 방식이 회사나 고객에게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즉, 굳이 정해진 장소에서 노동을 시키지 않아도 업무매뉴얼 적용, 실적 및 퀄리티 압박, 업무 보고∙평가 등을 통해서도 충분히 관리감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보이는 직종의 A씨 사례는 비정형노동자가 전혀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관리감독에 따르는 비용을 줄이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한 법적 의무를 질 필요도 없으니 사용자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다. 최근에는 아르바이트 채용공지에 ‘3.3% (사업소득세) 신고 되시는 분’을 자격요건으로 명시하는 사례도 늘었다. 4대보험 가입 의무 등을 회피하기 위해, 사용자가 적극적으로 ‘가짜 프리랜서’를 요구하는 것이다. 결국 비정형노동은 노동자가 자유롭게 일하는 노동이 아니라, 사용자가 자유롭게 노동자를 사용하는 방식의 노동인 셈이다.

 

비정형노동자가 모두 여성은 아니지만, 비정형노동의 문제는 성차별과 많은 부분 중첩된다. 일단 여성이 비정형노동 일자리를 갖는 배경에서부터 채용 성차별, 성별 직종분리 등 노동시장의 구조적 성차별이 연루된다. 어떤 인터뷰 참여자는 “더 안정적인 일자리는 남성에게 돌아간다”고 말했고, 다른 참여자는 “남성들은 이런 열악한 일자리에 오지 않는다. 와도 몇 달 못 버틴다”고 전했다.

 

여성 비정형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니기에, 업무 도중에 성희롱을 겪어도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화려한 고소득 프리랜서’의 기회는 남성에게 돌아갔다. 명백한 성별 임금격차를 경험해도 항의할 수 없었다. 육아휴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일이 중단된다고 하더라도, 이는 법적으로 ‘계약해지’일 뿐 ‘부당해고’가 아니다.

 

미룰 수 없는 ‘근로기준법 개정’, 대선 후보들은 답하라

 

작년 한 해 동안의 사업을 통해서 민우회가 내린 결론은 “비정형노동자는 노동권을 누려야 할 똑같은 노동자”라는 것이다. 이들이 노동권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일단 비정형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해야 한다. 즉, 근로기준법을 개정해야 하는 것이다.

 

▲ 2021년 11월, 민우회를 비롯한 각계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국회 앞에서 '일하는 모두를 위한 근로기준법 개정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출처: 민우회)

 

이미 다른 나라들은 다양한 고용형태의 노동을 담기 위해 법제도 개선에 나섰다. 특히 주목 받는 것은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사례이다. 보통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은 노동자가 “나도 전통적인 노동자와 비슷하다”고 입증해야 노동자성을 인정하는데, 이곳에서는 이런 절차를 반대로 뒤집었다. 일단 일하는 사람을 모두 ‘노동자’로 간주하고, 사용자로 하여금 ‘저 사람은 노동자가 아니라 독립사용자에 해당한다’고 입증하도록 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2021년 이러한 흐름을 반영해 고용형태 및 사업장 규모에 상관없이 모든 노동자로 대상을 확대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68년만에 발의되었다. 그러나 국회에서도, 대선 국면에서도 근로기준법 개정 논의는 외면당하고 있다. 노동권 확대 논의가 밀려난 대선 공간에서는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는 무책임한 공약만 난무한다.

 

특히 노동의 형태가 점점 다양해지는 상황, 코로나19의 재난이 취약한 노동자들을 먼저 집어삼키는 현실에서, 근로기준법 개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각 후보들은 이번 대선의 주요 의제로 근로기준법 개정을 논의해야 한다.

 

더 열악한 조건에 놓인 노동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현재 근로기준법이 말하는 ‘기준’이라면, 차별 없이 누구나 노동권을 누릴 수 있도록 그 기준부터 바꿔야 한다. 대선 후보들은 당장 포퓰리즘과 차별∙혐오의 경쟁을 멈추고, ‘일하는 사람 누구나 노동권을 누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구체적인 정책을 내놓길 바란다.

 

[필자 소개] 열쭝: 민우회 여성노동팀 활동가. 무기력과 냉소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오늘도 꾸역꾸역 페미니스트 시민으로 살고자 한다. 끙차!  일다

 

※ 비정형노동자의 노동권 확대에 공감하셨다면, 민우회에서 제작한 여성 비정형노동자 인터뷰 시리즈 영상 <이렇게 일하는데 노동자가 아니라고요?>도 함께 봐주세요. (유튜브 채널: 한국여성민우회tv)

 

① “산꼭대기에도 정수기 점검하러 갑니다 (feat. 내돈내산 케이블카)” 

② “촬영 갔다가 한 달을 집에 못갔어요. 엄마는 가출했는 줄...” 

③ “온종일 그렸지만, 내 이름은 지워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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