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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온 기후 편지] 생산-유통-소비-폐기 전 과정의 지속가능성
계층, 성별, 직업, 세대 등을 막론하고 현대인의 필수품 중 하나인 운동화. 편하게 걷고 뛰자니 성능이 검증된 유명 브랜드의 운동화를 사게 됩니다. 새 러닝화로 바꿀 때, 닳아버린 헌 신발은 어떻게 버리나요? 에코 소비자를 지향하다 보니 내가 만들어낸 쓰레기가 어디로 갈지 신경이 쓰입니다. 운동화에는 여러 소재가 섞여있어 재활용 쓰레기로는 맞지 않고, 그럼 일반 쓰레기인가? 고민하다가 집 근처 의류 수거함을 찾아갑니다.
재활용 운동화 만든다는 ‘나이키 그라인드’ 논란
그러다가 ‘나이키 그라인드’(Nike Grind)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나이키 사가 세계 곳곳에서 진행하는 지속가능성 캠페인인데요. 제품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재료나, 고객들이 신고 버린 운동화 등을 말 그대로 ‘갈아서’ 재활용하는 프로젝트입니다. 고무와 가죽, 직물, 폴리머, 여러 종류의 플라스틱 폼을 재활용해서 새로운 신발이나 옷뿐 아니라 지역 농구코트, 육상 트랙, 놀이터, 바닥재 등을 만든다고 해요. 1992년도에 시범으로 시작했던 캠페인을 기후위기 시대에 크게 확대했다고 하는데, 활기차고 세련된 홍보 자료를 통해 접하는 이 이야기는 무척 솔깃합니다. 내가 버린 운동화에 대한 막연한 죄책감이나 궁금증이 해소되는 것 같고요.
하지만, 긴장을 늦추기엔 너무 일렀나 봅니다. 최근 독일에서 논란을 일으킨 기업 스캔들을 접하게 되었거든요. 독일의 탐사 보도 스타트업 ‘플립(Flip)’은 잠입 취재를 통해 나이키가 수거한 헌 신발뿐 아니라 새 신발들도 재활용 공장에서 분쇄한다는 정황을 파악했습니다. ‘Nike Grind’를 통해 수거한 운동화들의 유럽 집결지 중 하나인 벨기에의 한 재활용 공장에 들어가봤더니, 가격표가 그대로 붙어 박스에 들어있는 신발들도 대량 쌓여 있었던 것이죠. 반품되었지만 새 것과 다름없는 운동화들입니다.
▲ ‘운동화 사냥’(Sneakerjagd)이라는 제목의 탐사 보도 기사에 실린 사진 중 하나. 취재팀은 온라인으로 구입한 신발에 GPS 추적 장치를 심은 뒤 반품 처리해서 운동화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냈다. 작은 스타트업 미디어 플립(Flip)은 기업의 지속가능 경영 활동을 감시하는 탐사 보도를 지향하며, 현재 ‘운동화 사냥' 시리즈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미지 출처: letsflip.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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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 사의 캠페인 홍보 내용에 따르면, 분명 헌 신발들만 그곳에서 재활용 처리되어야 하는데 새 것과 다름없는 물건들까지 고스란히 갈려 나가고 있었던 겁니다. 취재팀의 질문에 나이키는 ‘테스트 용으로 쓰였거나 불량 제품, 사용 흔적이 있는 반품은 판매 불가로 분류되어 폐기 및 재활용된다'는 원칙적인 답변을 내놨지만, 무엇이 ‘판매 불가’인지 기준은 모호합니다.
플립 기자들은 이 사례가 명백한 기업의 ‘그린워싱’(위장 친환경 행위)이며, 독일 ‘순환 경제법’(Kreislaufwirtschaftsgesetz)에 위반된다고 주장합니다. 1994년부터 시행해 개정을 거듭해온 이 법은 사용 가능한 물건을 폐기하는 것을 위법으로 규정(위반 시 최대 10만 유로 부과)합니다. 이 보도가 일파만파 퍼지면서, 연방의회는 독일에서 판매하는 제품들을 이같이 처리하고 있는 나이키에 벌칙금 부과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어요.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반품 물건들을 몰래 쓰레기장으로 보낸 것은 나이키만이 아닙니다. 글로벌 쇼핑 플랫폼인 아마존의 시스템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지난 6월 영국 보도 채널인 ITV는 아마존이 2020년 7월 “2030년까지 연료 배출을 50% 감축하고, 2040년까지 탄소 배출을 제로화하겠다”는 지속가능성 목표를 발표했지만, 수백만 개의 사용되지 않은 상품 및 반품 상품이 소각용 쓰레기로 버려지고 있다고 보도했죠. 영국의 아마존 물류 창고에서 4월 한 주 동안 13만 개 이상의 품목이 폐기 처리됐다는 문서가 발견된 겁니다. 여기에는 스마트 TV, 노트북, 드론, 최고급 헤드폰, 밀봉된 안면 마스크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요.
▲ 독일 뿐 아니라 유럽연합도 채택(디렉티브 2018/851/EU)한 5단계 폐기물 위계(Abfallhierarchie) 원칙에 따르면 ‘발생 억제-> 재사용-> 재활용-> 에너지원으로 재활용-> 폐기’순으로 폐기물을 처리해야 한다. 나이키 재활용 캠페인의 경우, 2단계인 재사용 부문에 소홀했기 때문에 위반 사례로 볼 수 있다. 또한, 이와 밀접하게 연관된 순환 경제법(Kreislaufwirtschaftsgesetz)은 폐기물 처리에 있어 생산자 책임을 강화했다. 과거 지방자치단체 중심의 처리 책임을 제품 개발, 제조, 가공 또는 판매업체에게로 확대했다. (도표 출처: abfallmanager-medizi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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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은 왜 벌어지는 것일까요? 팔리지 않는 제품을 창고에 보관하는 것보다 폐기하고 그 빈자리를 새 제품들로 채우는 것이 기업에 이익이라는 논리 때문입니다. 회수된 반품의 상태를 검수해 다시 진열대에 올리거나 중고 시장으로 보내는 것보다 그냥 폐기해버리는 것이 싸고 간편하다는 것도 동일한 셈법이고요. 그런데 여기에는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정적인 환경 영향, 즉 환경 비용(environmental cost)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요즘 같은 기후위기 시대에 더이상 용인되기 어려운, 낡은 이윤 지상주의가 아닐까요? 아마 아마존이나 나이키 만의 문제는 아닐 겁니다. 오프라인 판매가 부진했던 코로나 팬데믹 동안, 수많은 기업들이 늘어난 재고를 어떻게 처리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새로운 시장 패러다임, 지속가능성과 환경지표
글로벌 환경영향평가 기관 CDP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1988년 이래 산업 부문 온실가스 배출의 71%가 세계 100대 기업에게서 나왔어요.(Carbon Majors Report, 2017) 따라서 영향력이 큰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기업 활동을 감시하고 규제하는 것은, 기후위기 타파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각국 정부는 기업들을 점점 더 압박하는 추세로 환경적 영향을 최소화하고 있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기업은 활동이 어려워집니다. ESG(Environmental, Social and Governance; 환경, 사회, 지배구조) 지표는 금융 시장에서 필수 항목이 되고 있어서, 반환경적인 사업 모델이나 운영 방식으로 단기적 이윤 극대화만 추구하는 회사는 앞으로 각종 제재를 받고 고객을 잃을 뿐 아니라 투자도 받기 어렵게 됩니다.
예를 들어, 지난 4월 EU 집행위원회는 앞으로 투자자 및 금융기관이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기술과 사업에 더 많이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지속가능금융 입법안(Sustainable Finance Taxonomy)을 발표했는데요. 이 법안이 시행되면 EU차원의 통일된 기준과 규제가 생기는 셈이고, 기업 투자와 관련해 아래와 같은 6개 환경 목표와 4가지 판단 기준이 적용됩니다. 기업은 재무보고서 등을 통해 지속가능한 경제 활동을 하고 있는지 의무적으로 입증해야 하죠.
*6개 환경목표: 1)기후변화 원칙: 온실가스 감축 2)기후변화 적응 3)수자원 및 해양자원의 지속가능한 이용과 보호 4)순환 경제로의 전환 5)오염 방지 및 관리 6)생물다양성 및 생태계의 보호와 복원
*4가지 판단기준: 1)하나 이상의 환경목표 달성에 상당한 기여 2)다른 환경목표에 중대한 피해를 주지 않을 것 3)최소한의 사회적 안전장치(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 UN 기업과 인권에 관한 지침 등) 준수 4)경제활동 별 기술 선별기준에 부합하는 친환경 활동 식별 및 개발
▲ 2020년 상반기 유럽연합 지속가능금융 전문가 그룹은 관련 규제안을 검토하고 최종 보고서를 발간했다. 지속가능 금융 분류 체계(Sustainable Finance Taxonomy)는 올 가을 출범할 예정이었지만 한차례 미뤄졌고, 그 사이 환경단체 150여 곳은 공동성명을 발표해 ‘천연가스를 친환경 에너지로 분류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저탄소 에너지가 아니고, 고갈되는 화석연료라는 것이 그 이유다. (이미지 출처: Life Cycle Initi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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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사용, 임대, 재활용…기업이 주도하는 순환 경제 모델
소비자 입장에서 피부에 와 닿는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앞으로는 기업이 직접 자사의 중고품을 회수하고 재판매하는 사례가 많아질 겁니다.
이케아는 지난 2020년, 과도한 소비가 일어나는 블랙프라이데이 주간에 중고 가구를 사들이는 바이백(buyback) 프로그램을 진행했어요. 소비자가 쓰던 가구를 가져가면 상태에 따라 현물 쿠폰(원가의 최대 50% 금액)을 발급받아 그걸로 새 제품을 살 수 있었고요.. 이렇게 사들인 중고 가구가 앞으로 늘어날 이케아 직영 중고매장에서 재판매되지 않으면, 재료로 재활용하거나 지역사회에 기부한다고 합니다.
바이백 시행 기간이 너무 짧고 쿠폰 지급을 통해 또다른 소비를 유도한다는 점도 한계가 있지만, 매 시즌 빠짐없이 새로운 제품군을 출시하던 일직선 생산 모델과는 분명 달라요. 제조사 제품을 직접 회수해 재활용 및 재사용을 추진한다는 점에서 자원 순환 모델에 가깝지요.
제조사에 자체적으로 내놓는 임대형 제품도 더 많아질 거라는 전망이 나옵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대형 복사기나 컴퓨터, 정수기 정도가 보편적인 제품이었는데, 앞으로 에어컨이나 TV, 노트북 등으로 확대되면 소비자들이 물건을 덜 소유하고도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자동차, 스마트폰 시장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까
그렇다면 ‘지속가능한 경제 활동’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의미하는 걸까요. 재화와 서비스를 만드는 기업 본연의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면, 제품이 거치게 되는 생산-유통-소비-폐기 각 단계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유럽에서 제일 큰 자동차 제조사인 독일의 폭스바겐그룹은 지난 2019년에 ‘고투제로’(goTOzero)라는 경영 원칙을 발표하고, 제품 생산에서 폐기까지 전 과정에서 탄소 절감 프로그램을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세계 16개 공장 중 11곳을 친환경 전기로 가동하거나, 소비자가 차량을 재생에너지로 충전할 수 있게 하는 것, 전기차 배터리의 재사용 및 재활용 등의 내용이 담겨 있어요.
▲ 스마트폰 제조에 꼭 필요한 광물로는 코발트, 구리, 주석, 금, 인듐, 니켈, 텅스텐 등이 있다. 하지만 그 광물들도 다른 천연 자원과 마찬가지로 점점 고갈되는 추세다. 특히 금은 지금과 같은 채굴 속도로는 100년 안에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네덜란드의 스마트폰 제조사 페어폰은 소비자와 이런 정보를 공유하면서 지속가능성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이미지 출처: fairpho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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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스마트폰 시장도 좀 달라질까요. 삼성전자는 ‘지구를 위한 갤럭시’ 캠페인을 시작했는데, 위와 비슷한 접근 방식입니다. 신제품에 재활용 소재를 적용하거나, 패키지에 일회용 플라스틱 소재를 제거하는 것이 목표라고 합니다. 2025년까지 전세계 스마트폰 사업장에서 폐기물 재활용을 통해 매립률을 제로화하고, 중고폰 유통도 활성화하겠다고 하네요.
이렇게 대기업들이 움직이면 생산, 유통 및 판매와 연관된 수많은 중소업체들도 같이 변화해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런데, 여전히 가시지 않은 우려가 있죠. 이들 기업이 대량생산 체제를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한편에서는 지속가능성 캠페인을 펼치고, 다른 한편에서는 분기별, 연도별 신제품 출시 경쟁을 계속한다면, 발생되는 폐기물의 총량은 별로 줄어들지 않을 겁니다.
소비자로서의 바람을 말하자면,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2년마다 새로운 모델을 출시하는 과열 경쟁을 그만두고 이미 나온 스마트폰을 오래 쓸 수 있게 수리와 업그레이드를 지원했으면 좋겠어요. 네덜란드의 작은 회사가 만드는 페어폰(Fairphone)처럼 말이죠. 2013년에 처음 출시된 페어폰은 구리, 갈륨, 코발트, 금 등 원재료를 공정무역으로만 조달하고, 공장 노동자 인권에도 신경 씁니다. 소비자들이 자가 수리할 수 있도록 액정부터 카메라, 배터리까지 다양한 부품을 공식 웹사이트에서 판매하죠. 보증기간은 5년으로 다른 스마트폰보다 훨씬 길어요. 올해 페어폰 4까지 나왔는데, 성능 개선을 위한 비정기적 신제품 출시였습니다.
페어폰은 개발 단계부터 ‘지구와 사람에게 공정하게 만들어 오래 쓸 수 있는 스마트폰’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생산량이 많지 않고, 가격도 성능에 비해 비쌉니다. 그런데도 윤리적으로 떳떳한 소비에 목마른 사람들이 줄을 지어 예약 구매했지요. 비영리단체와 협력해 스마트폰 원재료의 고갈 상태나 채굴 시 일으키는 오염도를 정리한 도표까지 공개한다는 점에서. 페어폰의 지속가능성 캠페인에서 보다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관련 기사: 이제 ‘윤리적 휴대폰’의 시대를 열자 https:// ildaro.com/7997)
▲ 네덜란드의 한 사회적 기업이 제조 및 판매하는 페어폰(Fairphone)은 사용자가 필요에 따라 쉽게 분해할 수 있도록 접착제가 아니라 표준 나사를 채택했다. 소비자가 스마트폰을 직접 분해하거나 부품을 교체하면 제조사 A/S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타 회사들과 달리, 페어폰은 자가 수리를 적극 권장한다. 다양한 유지 보수 테크닉을 알려주는 공식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지역별 소비자 포럼도 지원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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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입장에서 어떤 제품의 지속가능성을 따질 때에는 사실 두 가지 질문이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이 물건을 얼마나 오래 잘 쓸 수 있는가’, ‘이 물건을 소비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노동과 자원의 착취에 동참하는 것은 아닌가.’ 어찌 보면 단순하고도 어려운 이 기본을 충족하는 제품과 서비스가 계속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운동화든 스마트폰이든, 힘없는 소비자로서 우리는 시대의 필수품을 쓸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소비자가 마냥 무기력한 것은 아니죠. 우리는 지속가능하고, 책임 있고 윤리적인 소비 생활을 하기 위해 계속 공부하고 실험하고 실천하고 또 사회 운동을 할 테니까요. [일다]
[필자 소개] 손어진. 정치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에서 독일/유럽연합의 R&D 정책분석 일을 하고 있다. 독일 녹색당의 정치적 역동을 경험하고 싶어 베를린에 왔다. 지속 가능한 삶을 연구하는 움벨트(Umwelt) 모임 소속으로, 유럽의 녹색정치와 환경, 여성, 이민자 영역에서 다양한 만남을 통해 존재의 확장을 경험 중이다.
[필자 소개] 하리타: ‘에코워리어’들이 많이 사는 환경 도시 프라이부르크에서 환경 거버넌스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탈서울 녹색전환을 위해 독일에 왔다. 다양한 종(種)과 성(性)이 공존하는 대안 공동체, 자연과 더불어 소박하고 소신 있게 사는 것이 일관된 관심사. 관련 저서 <뜨거운 지구 열차를 멈추기 위해 - 모두를 위한 세계환경교육 현장을 가다>(공저, 2020)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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