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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그 이후의 삶> 당신의 연애는 안전한가요
-젠더폭력 생존자들이 기록하는 <폭력 그 이후의 삶> 연재는 젠더폭력을 단지 하나의 사건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 이후에도 계속되는 피해와 저항과 생존의 이야기에 주목합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편집자 주]
최근 머리를 짧게 잘랐다. 가족 중 한 명이 ‘실연당한 사람’같다고 말했다. 언제 적 표현이냐며 맞받아쳤지만, 문득 궁금해졌다. 왜 실연당한 사람은 머리카락을 자르는 걸까? 마음을 정리하며 상대를 떠나보내듯 머리도 자르는 걸까? 그러고 보니 나 또한 그와 헤어졌을 때 미용실에 갔다. 좋게 헤어지진 않았기 때문에 결코 슬픈 마음으로 가진 않았고, 악몽 같던 지난 세월은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 출발하겠다는 마음으로 머리를 잘랐다. 바뀐 나의 내면을 보여줄 수 없으니 머리라도 자를 수밖에.
괴롭고, 자존감을 해치고, 무서운 관계
사람 간의 만남과 이별은 일정 정도의 상처와 교훈을 남긴다. 나의 경우, 일반적인 연애에 비해 상처와 교훈의 크기가 매우 컸다. 심지어는 이를 책으로 썼을 정도니 말이다.
▲ 그와 헤어지고, 상담 치료를 받으며 시간 날 때마다 글을 썼다. 데이트폭력과 가스라이팅에 대해 세상에 더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올해 5월, ‘연아’라는 필명으로 책 『당신의 연애는 안전한가요』가 출간되었다. 책 속의 구절들. ©일다 |
우리의 시작은 여느 평범한 연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스터디 모임에서 우연히 처음 만났고, 그의 차를 얻어타게 되었다. 그 뒤로 연락을 주고받고 친해졌으며, 어느새 매일 같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고 연인관계로 발전했다. 그와의 만남 중 제일 좋았던 시기를 꼽으라면 고민할 것도 없이 그와 사귀기 전까지의 기간이다. 정확히 말해서 ‘제일’ 좋았던 시기가 아니라 ‘유일하게’ 좋았던 시기였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면, 설레고 행복했다. 소울메이트라는게 이런 건가 싶었다. 이런 사람,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그와의 연애는 롤러코스터와 같았다. 좋을 땐 이렇게 잘 맞는 연인이 있을까 싶다가도 떨어질 땐 한없이 힘들고 괴로웠다. 그는 내 사소한 말이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며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과 문제가 되지 않던 부분들이 그와의 관계에서는 문제가 되었다. 그는 이런저런 근거를 대며 내게 책임을 물었다. 본인은 정상이고 내가 잘못했다고, 사과하라고 말했다. 누가 잘못한 건지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라며 당당하게 나왔다.
계속되는 그의 비난과 감정폭발로, 나는 스스로에 대한 혼란에 빠졌다. 초기에는 그의 말에 반박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말다툼을 벌였다면, 나중엔 스스로도 ‘내가 문제가 있으니 그가 날 이렇게 비난하겠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내게 “이기적”이라고 한 말을 받아들였다.
‘이기적’이지 않은 연인이 되지 않기 위해 그의 요구에 순응했다. 그는 내가 모임에 나가거나 지인을 만나는 것을 싫어했다. 그와 싸우는 상황을 피하려다 보니 어느새 그와만 만나고 대부분의 시간을 그와 보내고 있었다.
연인과의 싸움은 정신적으로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계속되는 언쟁에 지친 나는 결국 그의 말을 수긍하고 내게 진짜 문제가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와 대화할 때면 그가 화내지 않도록 말을 골라야 했다. 항상 긴장하며 그의 눈치를 봤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스라이팅이었지만, 당시엔 그가 옳고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의 말에 따라도 싸움은 끊이질 않았다. 내가 아무리 그의 눈치를 보며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그는 오히려 더 크게 화를 냈다. 새로운 트집을 잡고 또 다른 걸 요구했다. 고성을 지르며 욕을 하기 시작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모욕들이 연인의 입에서 쏟아졌다. 그는 본인의 분이 풀릴 때까지 몇 시간이고 소리쳤다.
▲ 데이트 상대가 열두 문항 중 한 문항이라도 한다면 위험하다는데, 그는 무려 열 가지에 해당했다. 게다가 이 열 가지 중 여섯 가지 항목은 만난 지 두 달이 채 안 된 초반부터 시작되었다. (자료 출처: 서울시 & 한국여성의전화) |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어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폭력은 더욱 심해졌다. 그는 “내가 뭘 잘못했는데 너한테 헤어지냐는 말을 들어야 하냐”,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말하며 물건을 던졌다. 도망치려는 내 팔을 잡아당기고는 차에 억지로 잡아 태웠다. 헤어지면 직장에 찾아가겠다며 협박을 했다.
무서웠다. 헤어지자는 말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그는 잠잠해졌다. 태도를 바꿔 자신이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본인은 나를 너무 사랑한다며, 헤어진다는 생각만 해도 참을 수 없다고.
데이트폭력과 가스라이팅에 대해 공부하고, 책을 쓰다
그와 헤어지기 전날에서야 그가 내게 했던 모든 것들이 데이트폭력임을 알게 되었다. 휴대폰 기록을 토대로 경찰에 데이트폭력으로 신고하겠다고 말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그와 헤어질 수 있었다.
처음엔 그와 헤어졌단 사실이 너무 기뻤다. 하지만 기쁨은 잠깐이었으며 곧 깊은 절망에 빠졌다. 하필이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눈물이 나왔다. 우울감에 빠져 있다가 자책하다가 그를 향해 분노하기를 반복했다.
지역에 있는 여성폭력피해자 지원단체에 찾아갔고, 그곳에서 연계해준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상담 치료를 받았다. 내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데이트폭력에 대해 책을 찾아보며 공부했다. 다행히, 서서히 괜찮아지기 시작했다. 상담을 받으며, 데이트폭력 피해자로서 기록을 하고 이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시간이 날 때면 글을 쓰기 시작했고, 1년 후 ‘연아’란 필명으로 책이 세상에 나왔다.
데이트폭력 책의 저자로 가끔 강의를 나가곤 하는데, 강의 후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지금은 괜찮으세요? 혹시 그때 생각이 나면 어떻게 하세요?” 잠시 생각한 후,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고 싶은데, 아직도 그때 쓴 일기를 보면 괴롭긴 해요. 그래도 정말 많이 괜찮아졌어요. 가끔 생각날 때가 있긴 한데, 그냥 ‘XX, 개XX’ 욕 한마디하고 말아요.” 질문자와 나는 함께 웃었다.
▲ 데이트폭력에 관한 책을 쓴 저자로서 가끔 강의를 나간다. 강의 중간, 쉬는 시간에 책에 사인을 해달라는 기분좋은 요청을 받곤 한다. 막 성인이 된 딸에게 책을 선물해줘야겠다는 어머니, 자신의 연애를 되돌아보게 된다며 고맙다고 인사하는 대학생 등 다양한 이들과 만난다. 오히려 내가 더 감사하다. |
그래도 인생사 새옹지마요, 전화위복이라고 그와의 시간이 헛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니 그도 불쌍한 사람이었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그와의 연애로 인생의 값진 교훈을 얻었고, 나는 그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변화① 상사의 고압적 태도에 굴하지 않고 ‘할 말은 한다’
제일 큰 변화는 인간관계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고, 사람 보는 눈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전까지 나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웬만하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상냥하게 대하려 하는 편이었다. 거절을 잘 못 하고 상대에게 싫은 말을 하는 걸 어려워했다. 지금이라고 그 성품이 사라지고 확 변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은 할 말은 하려고 노력한다. 나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말이나 행동에는 단호하게 대처하고, 나한테만 과하게 주어지는 것 같은 일들은 거절하려 한다.
한번은 관리자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업무를 혼자 윗사람의 눈치를 보며 나와 동료들에게 시키려 한 적이 있다. 모두 불만을 표했지만, 선뜻 나서지 못할 때 나와 동료 한 명 둘이 대표로 관리자를 찾아가기로 했다. 우리는 그 업무를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이미 업무가 벅차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자기도 똑같은 업무를 해본 경험이 있다며, 그것도 못 하냐고, 능력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우리를 깎아내렸다. 그 전과 같으면, 그 말에 상처 입고 고개를 숙였겠지만, 당당하게 말했다.
“네, 저는 못 하겠어요. 지금 하는 것도 퇴근 시간 넘길 정도로 벅차요. 그리고 무엇보다 굳이 안 해도 되는 일인데 그걸 하느라 본 업무에 집중을 못 할 것 같아요. 전 그 일을 다 해낼 능력이 없네요.”
그도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순간 멍해졌다. 결국 그 업무는 협의 후 없던 일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안 하는 게 회사를 위해서도 옳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나는 나를 본인의 뜻에 따르게 하고자 부당하게 깎아내리는 것에 단호하게 맞설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있다.
변화②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간파하게 되다
무엇보다 사람 보는 눈이 생겼다. 한번은, 직장 동료가 본인의 지인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남편이 지인인 아내가 돈 쓰는 것을 관리해 가계부를 쓰게 하고 이를 검사한다고 했다. 그런 통제 행동은 책에서 읽은 아내폭력 사례 예시 중 하나였다.
“가계부 쓰게 하고 감시하는 건 아내폭력이에요. 그 남편 혹시 다른 폭력적인 행동도 하지 않나요?”
그는 놀라며 실제로 아내에게 욕을 하고 신체적인 폭력도 가했던 사람이라고 했다. 동료의 지인은 이혼하고 싶어도 자식도 있고, 본인에게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서 남편과 헤어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와 헤어지고 데이트폭력,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에 대한 책을 많이 찾아보고 공부해서 그런지 폭력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지고 어떤 행동이 폭력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 친밀한 관계에서의 ‘통제’는 여러 이름으로 정당화되지만, 그 관계 안에는 평등이나 존중, 신뢰가 빠져 있다. 올해 5월 ‘연아’라는 필명으로 펴낸 책 『당신의 연애는 안전한가요』 속의 구절들. ©일다 |
그전까지는 아무렇지 않게 봤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데이트폭력을 찾아내기도 한다. ‘지금 상대방 의사도 안 묻고 저러는 거야? 저건 데이트폭력인데, 잘생긴 주인공이 저렇게 행동하니까 멋있게 포장되지만, 실제로 저러면 어서 도망쳐야지’하고 훈수를 두면서.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고, 소중한 이들과 함께하고 싶다
그 외, 데이트폭력 후 2년이 지난 지금 나의 삶은 평범하다. 여느 20대처럼 운동과 재테크, 커리어 계발이 최대 관심사다. 꾸준히 헬스를 하며 근력을 기르고 있고, 커리어를 쌓기 위해 꾸준히 공부한다. 어떻게 돈을 모으고 굴려야 조금이라도 일찍 은퇴하고 여유롭게 사는 날이 올까 고민한다. 그렇다고 돈의 노예로 살지 않고자 책을 많이 읽으며 마음의 양식을 쌓고 소득의 일정 금액은 기부한다. 주말이면 가족과 시간을 보내거나 친구들을 만나 놀고 수다를 떤다. 나에게 집중하고, 주변의 소중한 이들과 함께하려 노력한다.
남들과 다른 점은, 가끔 가족에게 친구들 만난다고 거짓말을 하고 데이트폭력 피해 당사자로 강의를 나가거나 ‘연아’란 필명으로 글을 쓴다는 점 정도? 뜻하지 않은 이중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은근 재미있다. 강의를 나갔을 때, “정말 저에게 꼭 필요한 내용이었어요”하고 말해 주는 이를 만나면 그 모진 경험이 쓸 데가 있구나 싶으며 그 시간을 보상받는 것 같다. 자신의 이름으로 책 한 권 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다른 사람들에게 차마 글 쓴 이가 나라고 밝히진 못 하지만 책도 내고 말이다.
가끔 내 20대 좋은 시절이 그 때문에 날아갔고, 그 후유증까지 합치면 나를 몇 년을 고생시키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그가 뭐라고 내 인생을 휘두르게 놔둔단 말인가. 살아갈 날이 훨씬 많은데!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고 내 주변 소중한 이들과 함께하기에도 시간은 짧다. (연아) https://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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