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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으로 다시 듣기] 페미니스트 시인이자 음악가 알로 팍스

 

머큐리 상(Mercury Prize)은 1년에 단 한 장의 앨범에게만 상을 주는 영국의 음악상이다. 후보도 1년에 12장의 정규 앨범만 꼽으며, 대중적 흥행과는 무관하게 작품성만을 고려하여 선정한다. 1992년에 처음 열린 이 시상식은 그래서 후보로 오른 것만으로도 인정을 받는다.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음악가도, 백만 장의 판매고를 올린 싱어송라이터도 머큐리 상 후보로 오르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영국 록 밴드 라디오헤드만 해도 음악적으로 크게 인정받는 세계적인 밴드이지만, 5차례 후보로 올랐을 뿐 상은 한 번도 받지 못했다. 특정 장르에 편중되는 것도 없다. 재즈, 록, 랩, 전자음악까지 수상작의 장르도 다양하다. 이 시상식이 올해에도 어김없이 열렸다. 서른 번째 시상식에도 쟁쟁한 작품이 많았는데, 승자는 2000년생 싱어송라이터 알로 팍스(Arlo Parks)의 첫 정규 앨범, Collapsed In Sunbeams이다.

 

▲ 2000년생 싱어송라이터 알로 팍스(Arlo Parks)의 첫 정규 앨범 Collapsed in Sunbeams은 올해 영국의 가장 권위 있는 음악상인 머큐리 상을 수상했다.


알로 팍스의 음악에 쏟아진 찬사

 

알로 팍스는 BBC가 매해 신인을 꼽는 ‘Sound of’의 2020년 리스트에도 오른 바 있다. 이 리스트 역시 해마다 가능성 높은 신인을 소수만 꼽는데, 알로 팍스는 첫 정규 앨범을 내기도 전에 이미 그 가능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후 대형 브랜드인 구찌가 눈 여겨 보고 협업하기도 했으며, 세계적인 영화감독 구스 반 산트(Gus Van Sant)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추천을 받기도 했다.

 

그의 음악은 네오 소울과 재즈를 기반으로 1990년대 영국 트립합(Trip-Hop)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담겨 있다. 얼핏 들으면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 같지만, 그 안에는 알로 팍스의 우울한 정서와 그것을 치유해가는 복잡한 과정,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고민하는 내용도 담겨 있어 그렇게 편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음악은 아니다. 머큐리 시상식의 심사평 역시 그러한 부분을 짚으며 ‘음악가 자신의 세계와 깊이 연결되고, 지금 영국의 삶이 담긴 다양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평범한 경험을 하며 자랐던 것은 아니다. 나이지리아인과 차드계 프랑스인 보호자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TV 대신 프랑스 영화를 보며 자랐고, 12살 즈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17살에 스스로가 바이섹슈얼이라고 정체성을 깨달았다. 자신의 인종적/성적 정체성 고민과 맞물려, 그는 어릴 적부터 깊이 있게 자신의 세대와 환경에 관해서도 고민했다.

 

19살 전후로 음악을 발표하기 시작하는데, 그래서 알로 팍스를 이야기할 때는 싱어송라이터라고 하는 동시에 시인이라고도 한다. 그의 곡에 담긴 가사는 실제로 한 편의 시와 같다. 곡 중간 중간에 그는 스포큰 워드(spoken word), 그러니까 시를 운율감 있게 낭송하는 방식으로 풀어내기도 한다.

 



▲ 알로 팍스(Arlo Parks)의 싱글 “Black Dog” 커버. 친구의 우울증을 바라보는 혼란과 무력감을 담은 곡이다.


“모퉁이 가게에 가서 과일을 사러 가자

나는 너를 너의 방에서 꺼내기 위해 뭐든 할게

그냥 약 먹고 밥 좀 먹자,

나는 너를 너의 방에서 꺼내기 위해 뭐든 할게

네 마음이 이유 없이 할 수 있는 것은 너무 잔인해”

- Black Dog 중에서

 

“Black Dog”은 자신의 친구가 겪고 있는 우울증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면서 혼란스러움과 무력함을 느꼈을 때를 담아낸 곡이다.

 

*Arlo Parks "Black Dog" 라이브영상: https://youtube.com/watch?v=2n-Ive3VmOQ

 

“물론 난 알아 우리가 왜 두 달을 버텼는지

공공장소에서 너는 내 손을 잡을 수 없었어

그들의 시선이 우리의 사랑을 판단하고 피를 보려는 걸 느꼈어

난 널 비난할 수 없어”

- Green Eyes 중에서

 

“Green Eyes”는 자신의 성 정체성 때문에 사람들이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거나, 급기야는 영국 사회에서도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범죄가 일어나고 있음을 자신의 관계와 사랑 이야기를 통해 언급한다.

 

*Arlo Parks "Green Eyes" 뮤직비디오 https://youtube.com/watch?v=ddjr5KDqYGA

 

“나는 종종 내가 나쁜 징조 아래서 태어난 것처럼 느꼈다

비단옷이나 푸른 잉크의 반점처럼 괴로움을 입고

빛을 찾고,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구멍을 찾는다

난 아직 감정의 깊이를 전달할 수 없다

아직 이에 관해 마음을 여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나도 알고, 넌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안다

그래, 나도 알고 넌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안다”

- Hope 중에서

 

“Hope”는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자신과 친구들이 겪었던 공통된 감정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물리적으로 혼자 있지만, 결코 혼자가 아님을 역설하기도 한다.

 

*Arlo Parks "Hope" 뮤직비디오 https://youtube.com/watch?v=8d-blfWHSng

 

외에도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임을 시인하는, 앨범과 동명의 곡 “Collapsed In Sunbeams”와 시인 오드리 로드(Audre Lorde)의 구절 중 “고통은 바뀌거나 끝날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영향을 받은 “Hurt”까지, 자연스럽게 자신의 관계와 사랑과 삶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안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감정과 상황을 담아내고 있다.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시인들의 이름을 부르다

 

알로 팍스가 처음 주목을 받기 시작한 2019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매체에서 그의 작품이 어떤 것들을 기반으로 삼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2021년 영국 타블로이드지 <더 선>(The Sun)의 사이먼 코신스(Simon Cosyns)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알로 팍스는 처음 시에 눈을 뜨기 시작한 시점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영향을 받은 시인을 이야기했다. 또, 영국 음악 매거진 갈-뎀(gal-dem)의 재슬린 딘자(Jasleen Dhindsa)와의 인터뷰에서는 17살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눈을 떴을 때를 이야기하며,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시인들에 관하여 말했다.

 

이러한 언급은 2019년 1월에 영국 온라인 음악잡지 ‘더 라인 오브 베스트 피트’(The Line of Best Fit) 인터뷰에서도 보이는데, 알로 팍스가 데뷔 이후 꾸준히 자신이 영향을 받은 문화적 유산에 대해 적극적으로 언급해왔음을 알 수 있다.


알로 팍스가 자신의 작품에 영향을 준 사람으로 꼽은 이들은 일찍이 블랙 페미니즘 운동을 했던 니나 시몬(Nina Simone)이 음악가로는 유일하고, 대부분 ‘시인’들이다. 퓰리처 상을 받은 첫 번째 흑인 여성 시인 그웬돌린 브룩스(Gwendolyn Brooks)부터 오드리 로드(Audre Lorde), 그리고 팻 파커(Pat Parker)까지 과거 시민권 운동 시대 흑인 여성의 정체성을 드러낸 이들, 성소수자로서 시를 쓰고 저항해온 시인들의 이름을 소환했다.

 

▲ 알로 팍스(Arlo Parks)의 싱글 “Eugene” 커버

 

나이이라 와히드(Nayyirah Waheed)처럼 요즘 인스타그램을 통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시인도 이야기한 바 있다. 나이이라 와히드는 자신의 실제 삶은 공개하지 않으며 인종, 페미니즘, 정체성에 관하여 시를 쓰는 인물이다. 또 세계 패션계를 장악한 영국 출신 흑인 모델이면서 팟캐스트 운영자, 페미니스트 활동가인 애드와 아보아(Adwoa Aboah), 금기를 깨며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이들을 담아내는 사진작가 낸 골딘(Nan Goldin)까지. 알로 팍스가 영향을 받은 여성 예술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가 어릴 적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관하여 치열하게 공부하고 롤 모델을 찾아보았음을 알 수 있다.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 관습에 저항하는 비트 운동(Beat Generation)에 참여하며 에로티시즘 내러티브를 시에 담은 다이앤 디 프리마(Diane di Prima),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자신의 불행을 고스란히 시로 풀어낸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는데, 알로 팍스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만이 아니라 불행에 관해서도, 또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에 관해서도 많은 고민을 했다는 걸 짐작해볼 수 있다. 다행히 알로 팍스는 실비아 플라스와 달리, 그 끝을 절망으로 풀어내지는 않았다.

 

알로 팍스는 뛰어난 음악가이지만 그에 앞서 뛰어난 시인이다. 집에서 혼자서 자신의 곡을 만드는 이들의 음악을 베드룸 팝(bedroom pop)이라는 카테고리로 묶기도 하는데, 알로 팍스 역시 여기에 속한다. 그의 음악을 로파이(lo-fi)라는 이름으로, 날카롭거나 뾰족한 질감이 아닌 아날로그 감수성으로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음악의 범주에 넣어 즐기는 이들도 있다. 물론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매력적인 음악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는 치열한 삶이 담겨 있다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고자료]

-머큐리 프라이즈 공식 자료, 2021년 9월 9일 https://mercuryprize.com

-영국 온라인 음악 잡지 ‘더 라인 오브 베스트 피트’ <온 더 라이즈: 알로 팍스>, 2019년 1월 28일

-영국 음악 매거진 ‘갈-뎀’, <‘사람들이 그 안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봤으면 좋겠어요’ 알로 팍스는 자신의 앨범이 사람들을 감동시키길 원한다>, 2021년 1월 23일

-크리에이터 서포트 플랫폼 다이시(Daisie) 블로그, <창조의 산업 속 여성: 알로 팍스>, 2020년 3월 4일

-영국 음악 매거진 DIY, <클래스 오브 2020: 알로 팍스>, 2019년 12월 16일

-영국 타블로이드지 ‘더 선’, <락다운에 발표한, 영국과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알로 팍스의 앨범>, 2021년 2월 19일

-영국 퀴어 매거진 ‘디바’, <알로 팍스의 셀프 케어와 퀴어 아이콘 그리고 데뷔 앨범>, 2021년 2월 5일

-탤런트 부티크 에이전시의 알로 팍스 소개 페이지 http://thetalentboutique.fr/arloparks

 

[필자 소개: 블럭. 프리랜서 디렉터, 에디터, 칼럼니스트.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내외 여러 음악에 관하여 국내외 매체에 쓴다. 저서로 『노래하는 페미니즘』(2019)이 있다.] https://ildaro.com

 

* 『당신의 연애는 안전한가요』

 

당신의 연애는 안전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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