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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의 경계 위에서] 운동장에서 배제됐던 여자들이 돌아온다
※ [젠더의 경계 위에서] 시리즈에선 확고한 듯 보이는 성별 이분법의 ‘여성’과 ‘남성‘, 각각의 한계를 재단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경험과 도전, 생각을 나누는 글을 소개합니다.
농구 하는 소녀들
피부에 닿는 한여름의 운동장 흙과 시멘트의 뜨거움을 기억한다. 체육 시간을 떠올려보면 여자아이들은 프로 스포츠 종목이 아닌 피구나 발야구를 하거나 그늘진 벤치에 앉아 있다. 격렬한 움직임이 요구되는 스포츠를 여자아이들에게 잘 권유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소녀화’된 피구도 한 팀에 12명, 3세트 각 5분씩 진행되는 정식 규격과 정식 규칙이 있음에도 보통 학교에서는 임시로 그어놓은 선 안으로 모두 밀어 넣고 공을 주고받게 했다. 그 안에도 열심히 공을 던지는 자와 열심히 공을 무서워하는 자와 공에 관심 없는 자 등 여러 종류가 있었다. 그래서 누구는 승리 아닌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기세로 전략을 세웠고, 누구는 땡볕을 피해 서늘한 벤치에 앉아 있었다.
▲ 농구 골대에 공이 들어가는 순간. (출처 pixabay) |
초등학교 때 친구들은 운동을 잘했다. 학교를 마치고 향하는 곳은 학교 운동장이나 역 근처의 대형 스포츠센터였다. 방과 후 일과를 운동으로 보내는 것이 소년에게는 당연한 수순일지 몰라도, 소녀에게는 ‘소녀’답지 않은 경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몇몇은 축구를 했지만 나는 축구화보다 농구화가, 축구 유니폼보다 농구 져지와 쇼츠를 입고 싶었으며, 비 더 레즈(Be The Reds)의 붉은 미감과 2002년의 광기에 연루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발로 공을 다루는 것보다 손으로 공을 다루는 것이 더 수월했다. 내가 굳이 많은 스포츠 중에 농구를 하게 된 것은 우연과 필연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친구의 엄마는 농구 국가대표 은메달리스트였다. 친구 엄마는 은퇴 후에 스포츠센터에서 농구 강사를 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에게 농구를 배웠다. 거기에서도 또래의 여자애들은 나와 친구들뿐이었다. 우리는 모두 반에서 뒷자리를 차지하는 키 큰 아이들이었지만, 농구 클래스를 수강생들은 여자건 남자건 성별에 상관없이 모두 우리보다 농구를 잘했다. 스포츠센터에서는 중고등학생들로부터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초보 취급을 받아야 했다.
한번 이겨보자고 이를 깍 깨물고 연습했지만 매일 밤 온몸이 쑤시는 바람에, 신체는 꾸준한 반복의 노력이 새겨지는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을 뿐이었다. 오히려 과도함은 신체 역량의 에너지를 하락시키고 부상과 좌절만 불러온다는 것, 즉 ‘운동은 노력을 배신한다’는 교훈만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보다 농구를 더 오래 한 사람들과의 플레이는 매우 신나는 일이자 새로운 전략과 규칙을 배울 기회였다. 매일 몰려다니며 학교에 갔고, 모든 교시가 끝나면 운동장에 모였고, 또 각자 학원으로 흩어졌고 또 수업이 끝나면 스포츠센터 저녁반에 모였다.
어느 날, 친구 엄마의 현역 시절 국가대표 친구들이 스포츠센터에 놀러 왔다. 농구 수업이 끝나고 키가 큰 중년 여성 무리는 우리의 손바닥을 자기 손에 가져가더니 농구를 진지하게 해볼 것을 권유했다. 엄마가 농구 선수인 친구는 또 그런 소리를 한다며 짜증을 냈지만, 나머지는 신이 났다. 우리가 농구 선수가 될 수 있다니. 우리 손이 그만큼 크다니.
그러나 나의 부모는 운동이란 운동은 다 시켜놓고도 본격적으로 스포츠 세계로 들어서는 것에는 매우 반대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농구를 그만뒀다. 그리고 20대가 되고서야 다시 농구를 시작했다.
여성성의 갱신, 스포츠 하는 여자들
다시 농구를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고 검색창에 여자 농구 동호회를 검색했다. 두 개의 팀이 첫 번째 페이지에 노출되었는데, 집과 더 가깝고 회원이 더 많은 곳을 선택하여 가입했다. 동호회에 처음 참석한 날 첫인상은 “잘못 온 걸까?”였다. 내가 생각했던 수준의 동호회가 아니라 프로 수준의 선수들이 모여 있는 곳 같았기 때문이다. 모두 학창 시절에 최소 체육부장을 해왔던, 뛰어난 운동 신경과 운동 경험을 가지고 있는 여자들이었다. 게다가 거의 10년 만에 농구공을 다시 잡아보는 신입을 바로 경기에 투입했다.
▲ 2019 S리그 준결승. 팀 스퍼트 대 팀 스타일의 경기. ©팀 스타일 |
여자 농구 동호회라는 공동체는 신입을 매우 환대하지만, 이곳은 야생, 즉 생존을 위해서는 공 붙들고 뛰어야 하는 그런 곳이었으나, 나는 매우 빠르게 적응해버리고 말았다. 여자 농구 동호회에 가입하고 활동을 지속하는 선수들은 보통 강도 높은 운동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평소에 운동이나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는 여자들이 갑자기 슬램덩크를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여 농구 동호회에 가입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여성의 신체가 운동이나 스포츠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져 소녀들에게는 매니저(?) 혹은 응원의 역할이 주로 주어졌기 때문에, 여자들은 스포츠에 대한 흥미를 바로 수행으로 옮겨내기 어렵다. 소녀인 내가 성차화된 장소인 운동장이라는 공간과 가까웠던 경험이 있었기에, 20대에 문득 농구가 하고 싶다는 생각을 곧바로 동호회 가입이라는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농구 동호회에 가입하는 여자들은, 농구가 아니더라도 다른 스포츠 종목에 몸담고 있거나 체육학과거나 어쨌든 최소 체육부장이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운동을 좋아하던 나도 취미를 적어 내는 칸에는 매번 ‘독서’라고 써냈다. 책과 공을 매우 공평하게 사랑했지만, 소년의 취미가 축구나 농구라면 소녀들의 취미는 독서였기 때문에 여자아이로서 가장 무난한 답변이라고 판단했던 것이었을까. 취미활동은 성별에 따른 고유한 스타일을 의미하는 듯 했지만, 이는 ‘차이’가 아닌 신체 능력 ‘부족’을 의미하는 것에 가까웠다. 즉 A와 B의 이분법이 아니라 A와 not A로 구분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분법도 아닌 하나의 기준이 있었을 뿐이었다.
남성들이 교양이 외부(공간)에서의 상호작용이었다면 여성들의 교양은 내부(공간)에서의 사적 행위로 인식되었다. 대표적으로 독서뿐만 아니라 돌봄과 가사 등 여성 노동 그 자체가 교양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교양이지만 동시에 여성이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필수에 가까운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대 페미니즘 흐름 안에서 여자들은 빼앗긴 운동의 기회들과 억압된 신체적 역량에 대해 말하고 개별의 경험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스포츠를 하기엔 부적절한 몸이 아니라, 단지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것, 운동장의 가장자리만 주어져 왔던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 부당한 것이었음을 발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차별의 경험을 공유하는 과정은 공통의 서사를 생산했다. 동시대 여자들의 억압과 차별의 서사는 여성스러운 것이 무엇인지 서로에게 다시 묻고, 여성성이 무엇인지 다시 대답하는 정치적인 경합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여자들의 취미가 바뀐 것일까? 여성성에 대한 사유의 갱신은 취미의 확장을 불러왔고, 이는 취미나 유행의 영역뿐 아니라 여성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문제이다. 수동적이거나 약한 것으로 치부된 ‘규범적인 여성 신체에서 벗어나기’는 강하고 역동적인 신체 이미지 생산을 동반한다. ‘농구 하는 여자’로부터 떠오르는 신체 형상은 그 자체만으로 어떤 일탈감과 해방감을 주기도 하고, 기존의 젠더 규범을 교란하고 흩트려놓는, 전복적 감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는 건강하게 살기 위한 움직임일 뿐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살아내는 것에 대한 움직임이자, 여성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그동안 운동을 척지고 살았다’고 고백하는 여자들이 여자 농구 동호회에 가입한다. 드리블은 물론 기본적인 규칙도 모르지만 동호회 문을 두드린다. 농구가 5:5 플레이이며, 드리블이라는 걸 하는 스포츠인 것쯤은 알고 오는 것이 좋겠지만, 이제는 우선 농구가 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먼저 코트를 찾아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호회를 기초 학원 같은 곳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혹은 내가 처음 동호회에 가입했을 때처럼 자신과 비슷한 실력의 사람들이 모여있을 것으로 착각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동시대 페미니즘이 불러온 새로운 흐름들이 매우 반갑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제는 신입이 오면 바로 경기에 투입하지 못하고 드리블과 슛동작을 먼저 알려준다. 고인물들의 입장에서는 경기의 흐름이 끊기고, 템포가 느려지고, 원하는 플레이를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재미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동호회 사람들은 여전히 신입을 환대한다. 농구공을 옆구리에 끼고 코트 위를 바쁘게 달려도, 드리블을 제자리에서 하다가 공을 잡고 다시 드리블을 제자리에서 해도, 고인물들은 신입들에게 칭찬과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 이러한 환대의 분위기가 수많은 여자 농구 동호회 중에 나의 동호회만의 고유의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학팀의 실력 있는 선수들만을 스카우트하는 팀도 있고, 대회 성적이 곧 정체성인 동호회도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스포츠 정신이 온다
놀랍게도 동호회는 작은 프로이다. 스포츠의 성적 지상주의는 고스란히 동호회 안에도 스며들어있다. 스포츠의 성적 지상주의는 체육 참여를 제한하고, 모두가 즐기는 생활 체육을 보장하기 어렵다. 나는 동호회까지 스며든 이러한 성적 지상주의가 타고난 신체에 대한 지나친 선망, 무한한 신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스포츠가 무엇인지 매우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스포츠는 신체적 능력과 같은 ‘누가 누가 가장 잘 타고났나?’를 증명해내는 필드가 아니다.
만약 스포츠가 본질성을 증명하는 필드라면, 게다가 그것을 과학이라고 부른다면, 여성 신체를 운동장에서 배제하는 것이 매우 정당하며 타당한 것이라고 여길 수 있겠지만, 그것은 스포츠 정신을 크게 배반한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고 생활 체육인이므로 스포츠의 정의를 내리기엔 어려울지 모르겠으나, 무엇이 스포츠가 아닌지는 말할 수 있다. 정정당당하지 않은 것은 스포츠가 아니다.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본질(또는 한계)을 고정적인 것으로 여기며, 더 나아가 호르몬 수치를 증명하길 요구하는 것은 스포츠가 아니다. 스포츠에서 당연한 승리는 없으며, 스포츠의 윤리는 불확실성에서 온다고 믿는다. 나에게 가슴 뜨거워지는 스포츠는 한계를 뛰어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힘이다.
▲ 플로터 슛을 쏘는 중. ©허주영 |
운동장에서 배제되었던 여자들이 다시 운동장으로 돌아온다. 섣부른 말일 수도 있겠지만, 여자들의 새로운 교양이 스포츠라면, 이제 ‘여자라면 독서‘가 아닌 ’여자라면 운동‘이라면, 이것은 프로와는 다른 생활 체육 동호회의 새로운 규범을 불러오는 시작일 지도 모르겠다. 이는 ‘여성적’인 것이 ‘남성적’인 것으로 위치 변경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여자들의 교양으로 여겨졌던 ‘독서’도 A에서 탈락한 취미로 머무르지 않았다. 독서는 여자들의 교양이기도 했지만 일종의 놀이 문화이기도 했다. 여자들은 책을, 활자로 만들어진 문화들을 열심히 향유했으며, 이는 결코 내적이고, 개인적이며, 사적인 것으로 규정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독서는 여느 유명 대학과 신문사들이 매년 내놓는 청소년 문학, 수필 필독서뿐만 아니라 하이틴 로맨스. 로맨스 판타지, 순정 만화 등 간접 경험을 공유하는 여자아이들의 소셜활동이었다. 교양있는 ‘여자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혹은 ‘여자라면’ 마땅히 갖춰야 하는 교양으로서 독서와는 조금 거리를 두면서 말이다.
복잡한 ‘경계’를 둘러싼 논쟁과 다양성에 대한 사유의 역사를 거쳐온 자들이 도착한 땅은 척박하지 않다. 여자들은 열심히 산다. 특히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는 더욱 많은 삶의 의지와 열정을 필요로 한다. 여자들은 여자답게 굴기 위해 혹은 여자답게 굴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일상을 실천의 영역으로 옮겨 놓았다. 페미니스트라면 응당 해야 하는 것들만 적어 내려가도 두루마리 서너 필은 족히 채울 텐데, 이를 모두 지켜내고 실천하는 것을 넘어 여성성을 새롭게 갱신하기 위해 노력하는 여자들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흥분되는 일이다.
운동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왔던 것이 모두 지배적 규범에 의한 차별이었음을 알게 된 여자들이 스포츠의 장으로,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포츠를 ‘하기’ 위해서 온다. 스포츠의 성적 지상주의적인 문제가 본질성을 이해하는 오류들과 연결되어 있다면, 스포츠의 발전과 미래는 동시대 페미니즘이 불러온 여성적인 것을 갱신해 온 흐름들과 맞닿아 있다. 이들이 진정한 스포츠의 정의를 되찾거나 혹은 진정한 스포츠의 새로운 발명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배려의 이름으로 폭력과 배제를 하지 않는 정정당당함. 나는 이것을 스포츠가 지향하는 ‘진정한’ 정신이라고 믿는다.
[필자 소개] 허주영. 시인, 문학연구자. 여자 농구 동호회 ASAP에서 7년째 뛰고 있다. 쓴 책으로는 『계집애 던지기』(202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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