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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이주노동자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머물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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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당신의 음식은 우리의 눈물로 만들어졌다”라고 외치는 이주농업노동자들이 있습니다. 방금, 우리가 먹었던 미나리와 버섯 반찬이 이주노동자들의 눈물로 만들어진 사실을 외면한 채, 건강하고 맛있는 식사를 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새벽 6시에 밭에 나가 주룩주룩 오는 비를 맞아가며, 10장 깻잎을 빨간색의 가느다란 실로 능숙하게 묶어내는 20대 캄보디아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임금체불을 외면한 채, 밥상에 차려진 깻잎을 젓가락으로 집어 먹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밥상에 차려진 음식들이 어떠한 손길들을 거쳐왔는지, 음식들의 뒷편에 담긴 노동의 얼굴을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사진과 인터뷰를 통해서, 이주농업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살아가는 구성원임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또한, 이주농업노동자들이 비닐하우스와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 머물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은 한국에서 거주하며 한국사회와 남북한의 분단 상황, 촛불시위, 대통령 선거, 노동법에 대해 자신들의 방식으로 이해하며 살아갑니다.

 

인터뷰를 하면서 당혹스러운 순간들도 많았습니다. “한국 법은 좋은데, 왜 한국 사장들은 법을 지키지 않습니까?”라는 물음에 말문이 막혔습니다. “왜 사장님은 내가 주말에 친구들과 놀러 가려고 하면 ‘어디 가?’라고 늘 말합니까? 한국사람들 왜 ‘갑질’을 해요? 원래 그래요?”라고 나에게 반문할 때면, 뭐라 해줄 말이 없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한국사회가 답해야 합니다. 이주노동자들에게 왜 그렇게 대하는 겁니까?

 

자신들의 시간과 공간을 내주어, 이야기를 들려준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합니다. “사장님에게 항상 ‘네’, ‘네’ 말하는데,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아요.”라고 했던 한 노동자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이주노동자들의 목소리가 한국사회에 조금 울려 퍼지길 바랍니다. 나는 캄보디아 노동자들에게 당신이 이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라고 말해두었습니다.

 

▲ 포이른 잔타 씨는 충남 논산의 깻잎 농장에서 일한 경험을 들려주었다.   ©우춘희


포이른 잔타: 고용노동부에 ‘숙소’를 관리‧감독하라고 요구했어요

 

저는 잔타입니다. 충청남도 논산에서 채소를 재배합니다. 2018년 5월 31일, 저는 “이주노동자의 빼앗긴 권리를 찾으러 떠나는 투쟁투어버스”를 타고 다른 이주농업노동자들과 함께 세종시 고용노동부 앞에 갔습니다. 거기서 저는 “근로기준법 99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적절한 숙소에 대한 규정을 구체화하고 엄격한 관리감독을 해야 합니다”라고 한국말, 크메르어(캄보디아어), 영어로 쓰인 푯말을 들고 시위하는데 참여하였습니다. 사실 조금 무서웠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시위를 하고 ‘지구인의 정류장’의 선생님이 있어서 조금 덜 무서웠습니다.

 

저는 30대 후반으로 나이가 많은 편이라서, 사장님들이 저를 고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점이 걱정됩니다. 3개월 동안 일이 없으면, 저는 캄보디아로 가야 합니다. 3개월이 되기 바로 전에, 논산에 있는 깻잎 농장에 고용되어 지금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허리를 굽히고 깻잎을 따야 하기 때문에 어깨와 허리가 아픕니다. 일어서서 돌아다니는 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쭈그려 앉기만 하면 허리가 저려옵니다.

 

사장님은 제가 더운 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더운 날씨에 일을 하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캄보디아 사람들이 한국사람들보다 더위에 조금 강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캄보디아 사람들이 이렇게 불볕더위에서 일을 하는 것이 괜찮다는 뜻은 아닙니다. 제 얼굴은 햇빛과 뜨거운 열기로 인해 빨갛게 달아올랐습니다. 약국에 가서 약을 샀습니다. 햇빛을 보지 않아야 얼굴이 낫는데, 저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햇빛을 봅니다. 얼굴은 여전히 쓰리고 아픕니다.

 

▲ 응 쏙치아 씨는 경기도 하남 꽃 농장에서 일한 경험을 들려주었다.   © 우춘희


응 쏙치아: 왜 한국사람들은 한국법을 지키지 않습니까?

 

제 이름은 쏙치아입니다. 캄보디아 프놈펜 옆에 깜퐁참(Kampong Cham)이라는 도시에서 왔습니다.

 

2014년에 한국에 도착했고, 경기도 하남의 꽃 농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캄보디아 사람은 저 혼자 뿐이고, 한국인 아주머니 두 명과 같이 일했습니다. 늘 혼자 밥을 먹고, 혼자 비닐하우스에서 잠을 잤습니다. 비닐하우스에서 연탄난로를 사용하는데, 난로는 뜨겁고 불편합니다. 그렇게 혼자서 친구도 없이 1년 1개월 동안 일했습니다. 가족이 너무 보고 싶어서 많이 울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참아,” “노력해”라는 말이 유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참았습니다.

 

한국에서 4년 넘게 일했고, 곧 캄보디아로 돌아갑니다. 한국어 특별시험을 봐서, 다시 한국에 와서 공장에서 일하고 싶어요. 여름에 땀도 너무 많이 흘리고 힘들어서 농사일은 다시 하고 싶지 않습니다. 공장에서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쉬지만, 농장에서는 한 달에 두 번만 쉽니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휴일에 한국어 공부를 해서 통역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캄보디아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싶습니다. 그들에게 쌀도 사주고, 돈도 주고, 옷도 사주고 싶어요. 캄보디아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한국의 법은 정직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사장님들은 표준근로계약서에 노동자들과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습니까? 저는 열심히 일을 했는데 왜 일한 만큼 월급을 주지 않습니까? 왜 이랬다저랬다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까? 한국 사람들은 한국법을 지키지 않습니까?

 

▲ 빈 라붓 씨는 강원도 철원의 채소 농장에서 일했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 우춘희


빈 라붓: 한국은 여전히 총소리가 울리는 분단 국가입니다

 

저는 라붓입니다. 깜퐁참이라는 큰 도시에서 2014년 2월에 한국으로 왔습니다. 강원도 철원에 있는 파프리카, 토마토 농장에서 일했습니다. 겨울에 눈도 많이 오고 굉장히 춥습니다. 여름에는 너무 덥고, 일할 때 땀을 많이 흘리기 때문에 너무 힘듭니다. 동네에 군인도 많고, 농장 근처에 군부대가 있어서 총 소리도 많이 납니다. 처음에는 많이 무서웠지만, 점차 적응이 되었습니다.

 

2015년 어느 날, 일하고 있는데 낮 2시쯤, 사장님이 급히 와서 “일하지 말고, 빨리 차에 올라타!”라고 말했습니다. 이유도 모르고 차에 올라탔고, 잠시 후 도착한 곳은 땅 밑에 있는 큰 방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 20명 정도가 그 방에 있었습니다. 오후 7시가 되자, 사람들이 괜찮다면서 집에 가자고 했지만, 저는 밖에 나가는 것이 정말 두려웠습니다. 그 날 저녁, 텔레비전에서는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과 남한의 박근혜 대통령이 싸울 것 같다고 했습니다. 군인들이 서로 총을 들고 쏠 것 같아서 굉장히 무서웠습니다. 문득, 캄보디아와 베트남 국경지대에서 싸우고 있는 것도 떠올랐습니다. 1975년부터 1977년까지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서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했다고 배운 기억이 났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여전히 총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지금은 충청북도 증평에 있는 버섯농장에서 일합니다. 같이 일하는 친구가 기타 연주하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쉬는 날에는 기타를 치고, 개울가로 물고기를 잡으러 갑니다. 저는 캄보디아에 사랑하는 부인이 있습니다. 언젠가 둘이 함께 살 집과 농장을 사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 홍 다니 씨는 충북 청주의 채소 농장에서 일한 경험을 들려주었다.   ©우춘희


홍 다니: 사장님은 “어디 가?” 라고 매일 물어봐요

 

저는 캄보디아에서 온 다니라고 합니다. 처음에 한국에 오는 것이 많이 두려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 갔고, 그 사람들에게 “한국에 가니까 어때? 많이 힘들어? 특히 여자가 한국 갔을 때, 더 안 좋은 상황에 놓일까?”라고 물어봤습니다. 사람들이 제게 이렇게 말했어요. “한국 괜찮은 것 같아. 한국의 법들이 잘 지켜지는 것 같아.” 그래서 한국에 오기로 결심했어요.

 

2013년에 한국에 왔을 때, 충청북도 청주의 비닐하우스에서 토마토, 상추를 땄습니다. 한국에서 제일 힘든 것은 바로 궂은 날씨에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낮 땡볕이 내리쬐는 여름에도 비닐하우스에서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일합니다. 비닐하우스 옆쪽 통로가 약간 열려있다고는 해도, 바람이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너무 덥습니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토마토 순을 따면, 어깨가 많이 아픕니다. 그러면 캄보디아 파스를 붙이기도 합니다. 또한, 겨울은 너무 춥습니다. 캄보디아는 겨울이 없기 때문에 견디기 매우 힘듭니다.

 

사장님과 같이 일을 하는 것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장이 ‘갑질’을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제게 ‘갑질’이 무슨 뜻인지 알려주었습니다. 제가 휴일에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오는 것도 사장님이 싫어하고, 마음에 안 들어 합니다. “어디 가?”라고 매일 물어봐요. 한국사람들은 원래 그런가요? 왜 그래요?

 

한국에 왔을 때는 20대 후반이었는데, 지금은 30대 초반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결혼 생각이 있느냐고 묻는데, 저는 “로이 섬칸” 돈 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돈이 없으면 결혼도, 아기 낳는 것도 어렵잖아요. 돈 많은 남자랑 결혼하기보다는, 제가 맘에 드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맘이 착해야 앞으로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 톨 투이 씨는 전북 전주의 미나리 농장에서 일했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우춘희


톨 투이: 사장의 거짓말에 속아 100만원을 뜯겼습니다

 

저는 투이입니다. 캄보디아에서 한국에 온지 1년 4개월이 되었습니다.

 

처음 도착해서 전라북도 전주에 있는 미나리 농장에서 함께 일을 했습니다. 캄보디아에는 미나리가 없기 때문에 여기 와서 처음 보았습니다. 가슴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진흙탕에 들어가서 미나리를 뜯어야 합니다. 벌레도 많고, 모기도 많습니다. 30-50cm정도 되는 뱀도 많이 봤습니다. 처음 뱀을 봤을 때 너무 놀라서 소리도 지르지 못했습니다. 허리도 아프고, 벌레에 물리는 것도 괴롭습니다. 벌레가 많은 비닐하우스 안에서 생활하는 것도 힘듭니다. 다시는 미나리농장에 가지 않을 것이고, 미나리를 절대 앞으로도 먹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에 올 때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에 법이 있기 때문에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이 저에게 다른 미나리 농장에 가서 일을 하라고 해서,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알고 보니, 저는 사장님 농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일을 하면 안됩니다.

 

나중에는 미나리 밭이 너무 힘들어서 다른 곳에서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사장님은 사업장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100만원을 내야한다고 해서, 저는 돈을 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사장이 저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사업장을 변경하기 위해서 돈을 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다음 기사는 이주노동자들의 얼굴, 목소리, 이야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2018년에 진행한 인터뷰를 토대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당시 이주노동자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2018년 8월, 사회건강연구소가 주최하고 서울시 하자센터와 지구인의 정류장의 도움으로 개최한 전시회 <이주하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에 담겼습니다.

 

[필자 소개: 우춘희. 현재 미국 매사추세츠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과정 중에 있다. 캄보디아와 한국에서 현장 연구를 했다. 지금은 한국으로 이주한 캄보디아 이주농업노동자들에 관해서 논문을 쓰고 있다. 먹거리, 이주, 젠더에 관심이 있다. 2018년 사진전 <이주하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을 열었고, 2020년 <HYPHEN-NATION> 전시에 참여했다.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대중들에게 이주노동자들의 생생한 이야기들을 들려내고 싶고, 그 이야기의 힘이 사회를 바꿀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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