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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 미등록 이주노동자와 같이 살아가는 법

혐오와 배제가 아닌 공존으로…선주민이 변화해야 한다



감염병 확산…비자 만료를 앞두고 국경이 폐쇄되다


쿤티에(가명, 30대 여성) 씨는 2020년 3월, 캄보디아로 출국을 앞두고 비행기표를 샀다. 이제 갓 돌이 넘은 아이에게 줄 선물도 샀다.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와서 경상도 한 깻잎농장에서 약 4년 10개월 가량 일했다.


경상도의 한 깻잎밭. (촬영: 우춘희)


그녀는 한국에서 남편을 만났다. 남편도 고용허가제를 통해 캄보디아에 온 제조업 노동자였다. 겨울의 농한기를 이용해 이 둘은 캄보디아 고향에 가서 결혼식을 올리고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 계속 일을 했다. 2019년, 쿤티에 씨는 아이를 낳았고, 한 달 된 아이를 데리고 남편과 함께 다시 캄보디아 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 달 반 동안 친정에서 시간을 보내고, 아이는 친정부모에게 맡기고 쿤티에 씨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비자 만료를 앞둔 쿤티에 씨는 캄보디아에 돌아가서 한국에 한 번 더 입국할 기회를 잡고 싶었다. 고용허가제의 한국어 특별시험에 합격하면, 다시 한국에 와서 일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던 중, 코로나19가 급속히 퍼지기 시작했다. 쿤티에 씨가 결혼과 양육을 위해 넘나들었던 국경은 잠정 폐쇄되었다. 한국어 시험 일정이 취소되었고, 캄보디아 프놈펜 행 비행기도 취소되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해진 상황에서 쿤티에 씨는 좀 더 확실한 방법을 택했다. 즉, 초과 체류로 3-4년 정도 한국에 더 머물면서 일을 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2020년 3월, 비자 만료를 앞두고 쿤티에 씨는 한국에 더 남기로 결정했다.


쿤티에 씨는 친구들을 통해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보통 미등록노동자들은 합법체류자격을 가진 이주노동자들보다 임금을 70%정도 적게 받고 일을 한다. 그러나 쿤티에 씨는 자신이 깻잎 밭에서 쌓은 전문성을 가지고 사업주와 협상을 하였고, 합법체류자격의 이주노동자들과 같은 월급을 받고 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쿤티에 씨는 단속되어 추방될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늘 가지고 있었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한 달에 한 번만 시장에 가서, 한 달치 먹을 장을 한꺼번에 보았다. 이렇게 고립된 농촌 사회에서 특별히 외출하지 않으면 괜찮을 것이라고들 했다. 퇴근 후에 쿤티에 씨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와 영상통화를 하면서 보낸다. 페이스북 영상통화를 통해,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아이가 텔레비전을 보고, 말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하루를 마감한다.


코로나19시대, 미등록노동자 불심검문과 ‘K-방역’


쏘리야(가명, 40대 여성) 씨는 캄보디아 프놈펜의 한 식당에서 일을 시작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일을 하면서 틈틈이 한국어 공부를 했고, 고용허가제 한국어 시험에 합격했다. 2012년 4월, 한국에 도착해 처음 일한 곳은 충남의 한 채소농장이었다. 계약서에는 하루 8시간 일을 한다고 적혀 있었지만, 쏘리야 씨는 매일 새벽 6시부터 오후 7시까지,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하루에 12시간 일을 했다.


사업주는 계약서에 적힌 105만 원(2012년 최저임금, 4,580원 기준)을 주지 않았다. 하루 10-12시간을 일하고 한 달에 두 번 쉬면서, 그녀가 받은 한 달 월급은 85만원이었다. 쏘리야 씨는 그 중 5만원만 한달 생활비로 쓰고, 나머지 80만원은 가족에게 보냈다. 어머니는 딸이 부쳐준 돈을 받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으로 처음 통장을 만들었다.


깻잎밭에서 이주노동자들이 하루에 10시간, 한 달에 두 번 쉬고 일을 한다. 선주민의 빈 자리를 이주노동자들이 채우고 있다. (사진 속 인물은 미등록노동자와 관련이 없습니다.) 촬영: 우춘희


쏘리야 씨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캄보디아 농업노동자들도 제대로 월급을 못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당하다고 생각해서 노동지청에 가서 이야기를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사장의 말을 잘 들으라’는 것이었다. 쏘리야 씨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안산에 있는 ‘지구인의 정류장’이라는 단체에서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을 도와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는 사업주에게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노동자들이 많았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구인의 정류장과 캄보디아 노동자들의 열망을 담아 2013년에 크메르노동권협회가 만들어졌다. 쏘리야 씨는 사람들의 적극적인 지지도 받아 회장도 도맡았다.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캄보디아 사람들이 처한 임금체불의 문제를 돕고, 고용허가제의 문제점을 알려왔다.


고용허가제 취업비자가 만료된 뒤, 2017년 쏘리야 씨는 다시 한국땅을 밟았다. 한국어를 배우면서 노동자들을 돕겠다는 꿈이 있었다. 캄보디아 노동자들로부터 임금체불로 전화가 오면, 쏘리야 씨는 노동지청에 신고할 증거를 어떻게 모으는지, 어떠한 절차들을 밟아야 하는지 알려주었고, 무엇보다도 힘내라고 노동자들을 북돋아주었다. 크메르노동권협회에서 운영하는 여성 쉼터를 관리 운영하면서, 숙소가 없는 여성노동자들이 머물 수 있게 하였다.


2017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을 기념하여 개최된 이주노동자대회에서, 쏘리야 씨는 사업주들의 임금체불과 비닐하우스에 살면서 1인당 월세를 30만원씩 내는 상황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캄보디아 명절이 되면, 그녀는 이주노동자들과 같이 시장에 가서 장을 봐서 요리도 척척 해냈다. 타국에서 외로운 사람들에게 일종의 울타리 역할을 해주었다.


그러던 중, 2019년 비자 만료를 앞두고, 경제적인 문제로 쏘리야 씨는 미등록 체류 신분으로 일을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경상도의 한 도시의 식당에서 강원도 채소농장까지, 쏘리야 씨는 여러 지역을 옮기면서 일자리가 필요하면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받으면서 일을 했다.


2020년 11월, 쏘리야 씨를 다시 만난 곳은 경기도 화성 외국인보호소였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시기에 그녀는 경기도의 한 공장에서 마스크를 만드는 일을 하였다. 평소보다 작업이 일찍 끝나서, 쏘리야 씨는 공장 사람들과 같이 시장에 갔다. 버스정류장에 내렸는데, 단속반원의 불심검문에 걸렸고 화성 외국인보호소에 구금되었다.


면회신청을 하고, 면회실에 들어가 소지품을 맡기고, 배정 받은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두꺼운 유리판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하얀색 인터폰이 있었다. 쏘리야 씨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위아래로 연한 녹색 옷을 입었고, 등 뒤에 “외국인보호소”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파란색 덴탈 마스크 뒤로 얼핏 보이는 쏘리야 씨의 얼굴이 많이 피곤해 보였고, 어깨가 축 쳐져 있었다. 허용된 면회시간은 20분이었다. 쏘리야 씨는 인터폰을 들고 이야기하다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마스크 공장에 불법사람도 많고, 합법사람도 있어요. 한국사람들이 공장에서 일하기 싫어해서, 우리 외국 사람이 가서 일을 해요. 우리 월급 조금 받고 일해요. 내가 하고 싶은 건, 돈을 벌어서 한 달에 500달러(약 55만원)를 캄보디아 가족에게 보내는 거예요. 그게 전부예요.”


쏘리야 씨는 한 방에 15-20명이 함께 지내고, 매일매일 보호소에 미등록이주민들이 오기 때문에 코로나가 퍼지진 않을지 걱정을 하였다. 이곳에서는 휴대폰도 사용할 수 없었다. 쏘리야 씨에게 남은 선택지는 본국에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감금시설에 있던 쏘리야 씨는 결국 한 달 뒤 캄보디아로 떠났다.


“불법체류자”에서 이제는 “미등록 이주민”이 되다


한국 정부는 체류자격이 없는 이주민들을 단속과 추방의 대상으로 보고 이들을 “불법 체류자”라고 불렀다. 그들에게 이들은 한국에 있어서는 안 되는 “불법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코로나19가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다. 전염병은 성별, 국적, 인종을 가리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없던 존재로 취급 받던 사람들이 전염병 관리대상으로 떠올랐다.


코로나19 확진자의 숫자가 치솟던 작년 2-3월, 미등록이주민들은 마스크를 구입할 수도 없었다. 정부의 마스크 5부제를 시행했고, 선주민과 마찬가지로 이주민들도 외국인등록증과 건강보험증을 들고 약국에 가면 주당 2개씩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등록이주민들은 신분증이 없거나 신분증이 만료되었기 때문에 마스크를 구입할 수 없었다.


이들의 감염 가능성이 높아지고 점점 방역의 사각지대로 내몰렸다. 4월 20일이 되어서야 미등록이주민들은 마스크를 구입할 수 있었다. 현실적으로 이들은 고립된 지역에서 살고, 장시간 노동을 하며, 불심검문이라는 위험 때문에 약국에 가서 마스크를 구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2020 년 4 월 29 일, 정세균 국무총리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이들을 “미등록 이주민”이라고 처음으로 언급했다.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2019년 기준, 38만 여명의 미등록체류자들이 있다. 정부가 이들을 “불법 체류자”로 단속을 할 경우, 이들은 계속해서 사회로부터 숨게 되며, 감염으로부터 사회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불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이들의 체류를 범죄로 바라보기보다는, 미등록이주민이 사회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 이 언급의 취지이다.


사실 쿤티에 씨는 “미등록”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초과체류”에 해당한다. “미등록이주민”은 입국의 기록이 없는 사람을 뜻한다. 취업비자나 여행비자 등을 통해 입국한 뒤, 만료된 이후에도 계속 체류하는 사람들을 “초과체류자”라고 한다. 법무부는 사실상 “미등록”에 대한 통계나 자료가 없으며, “초과체류자”에 한해 “불법체류자” 혹은 “미등록체류자”라고 지칭한다. 그런데 사람의 존재가 “불법”일 수 없다. 따라서 “불법”이라는 말 대신에 서류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일컬어 “미등록”이라는 단어를 붙인다.


이를 통해 방역적 차원의 접근과 의료 접근성이 높아질 것이 기대되었다. 미등록체류자들도 코로나19 증상이 의심이 되면 공공보건의료기관에 가서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법무부에서는 담당 공무원이 이들의 체류자격과 신상정보를 안다고 하더라도 출입국외국인관서에 통보할 의무가 면제된다고 발표하였다. 미등록이주민들도 코로나19 감염 시, 무상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쏘리야 씨의 사례에서도 보듯이, 미등록이주민들이 장소를 이동하는 것은 큰 위험이 따른다. 쿤티에 씨처럼 이들은 외출을 하려 하지 않는다. 행여, 코로나19 감염이 의심되어 가까운 보건소나 지정병원을 방문하다가 자칫 불심검문을 당해 본국으로 추방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미등록노동자들의 값싼 노동력에 기대는 사회


이주민, 특히 미등록이주민과 관련한 기사에 가장 많이 달리는 댓글은 바로 “너네 나라로 가”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지겹게 말한다. “힘들면 너네 나라로 가.”


경상도의 한 비닐하우스 농장. 한국의 농업은 많은 이주노동자들의 노동력으로 채워지고 있다. 촬영: 우춘희


여기 선주민(한국인)이 하고 싶지 않은 자리에 이주민들이 그 빈 곳을 메우고 있다. 그 빈 곳에 이주민이 없어진다고 상상해보자. 선주민들은 그 누구도 고립된 농촌에서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고 하루에 10시간씩 일을 하며, 곰팡이가 가득하고 바퀴벌레가 우글거리는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지내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농업현장에서는 사람을 구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당신이 슈퍼마켓에서 사는 식품들, 당신이 음식점에서 먹는 반찬들은 식품가공업체에서 일을 하는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의 손을 거쳐서 당신의 식탁에 오른다. 한국인의 얼이 담긴 “김치”는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다. 선주민들은 더이상 최저임금을 받고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당연히 인건비가 올라가고, 그 올라간 인건비는 당신의 식탁에 매일 오르는 채소값에 고스란히 반영이 될 것이다. 현재 밥상 물가는 2~3배가 올라갈 것이다. 이것을 당신은 감당할 수 있는가?


마스크가 K-방역의 상징으로 떠올랐고, 수출길에 올랐다고 언론들이 자화자찬을 했다. 그 마스크 뒤에는 이주노동자 혹은 미등록노동자들의 땀이 배어있다. 그 마스크공장에서 일을 하는 이주노동자 혹은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이 없다면, 공장은 그 빈자리를 채울 사람을 찾기 위해서 발을 동동 굴러야 할 것이다. 하나에 1500원이던 마스크는 3000-4500원이 될 수도 있다.


미등록이주민들은 분명 한국 사회에 살고 있다. 지금 당신의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이들의 손길이 곳곳이 미치는 곳에 당신은 살고 있다. 당신이 한국에서 코로나가 걱정되어 약국에서 마스크를 구입하고, 매일매일 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 한, 이주노동자들과 미등록노동자들의 보이지 않는 노동을 벗어날 방법은 없다. 대한민국 선주민들은 이주노동자와 미등록노동자들의 값싼 노동력에 기대에 살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미등록이주민과 같이 살아가는 법’ 모색


코로나 “이후” 논의 이전에, 코로나와 “함께” 오는 것들에 대한 당신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코로나19 시대에는 함께 살아가는 방법의 모색과 공존이 요구되는 시대이다. 미등록이주민도 여기에 들어와야 한다. 어떤 논리를 만들어 누군가를 사회에서 “배제”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 어떤 잣대로 어느 순간 당신도 그 “배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주노동자의 결혼식. 이 두 사람은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왔다. 캄보디아 식당에서 사람들의 축하 속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사진 속 주인공은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촬영: 우춘희


다른 국가들은 미등록이주민들을 포용하는 정책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 바탕에는 ‘이주민과 미등록이주민도 사회 구성원’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혀있다.


2020년 4월, 일본정부는 외국인을 포함해 일본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에게 1인당 현금 10만엔 (약 113만원)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일정 분야의 이주노동자가 코로나19로 해고당한 경우, 취업가능한 특정 활동 비자로 변경하여 1년 더 일본에 머물 수 있었다.


2020년 1월 현재까지 한국의 경우를 살펴보면, 부천시는 ‘결혼이민자’와 ‘영주권자’에게만 5만원의 재난지원금을 지원하였고, 안산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외국인 주민에게는 7만원, 내국인 주민에게는 10만원의 생활안정지원금을 지원하였다. 서울시는 세대주가 취업·영리활동이 가능한 비자(체류자격)를 소지한 경우에 한해서 외국인 긴급재난생활비 30-50만원을 지원하였다. 이 경우를 제외하고 한국에서 외국인이 받을 수 있는 재난지원금은 없으며, 미등록이주민이 받을 지원금은 더더욱 없다.


2020년 4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는 주(州) 최초로 미등록이주민 15만명에게 긴급재난지원금 500달러(약 61만원)의 지원금 지급할 것이라고 밝혔다.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캘리포니아는 가장 다양한 인종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양성이 이곳 주민들을 더 강하고, 회복력을 사회로 만든다. 미등록이주민들 또한 이 코로나19 위기 시기를 함께 극복해 나아가야 할 구성원”임을 강조하였다.(포브스 2020 년 4 월 15 일자, Shahar Ziv, “California To Offer $500 ‘Stimulus Checks’ To Undocumented Immigrants” 기사 참조)


미등록이주민들은 캘리포니아에서 노동인력의 10%을 차지하며, 미국 농장 일자리의 36.1%을 차지하고, 매년 20억 달러 이상을 세금으로 납부하며, 이곳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긴급재난지원금을 통해 경제부양 및 미등록이주민들이 코로나19 방역의 안전망으로 유입될 것으로 기대된다.


뉴욕시 의 경우, 이민 상의 지위에 상관없이 미등록이주민을 포함하여 모든 뉴욕 거주자에게 재난 지원금을 지급한다고 밝혔다. 미등록이주민들은 연방정부의 재정적 지원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사회보장 및 의료서비스 접근이 어려워 다른 집단보다 코로나19로부터 더 취약한 상황이었다. 재난 지원금을 통해 1인당 400달러, 이들이 있는 한부모 가정에게는 800달러, 아이를 포함한 가족은 1,000달러를 지원받을 수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직업을 잃거나 경제적 위기 상황에 놓인 약 2만명의 미등록이주민들과 그의 가족에게 지원이 되었다. (뉴욕 시 공식 웹사이트 2020년 4월 16일, “Mayor de Blasio Announces New York City COVID-19 Immigrant Emergency Relief Program with Open Society Foundations” 공지 참조)


유럽에서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일시적으로 체류기간을 연장해주고 있다. 2020년 3월, 포르투갈 정부는 모든 이주노동자와 망명자들에게 한시적 거주허가를 내주고, 이들이 의료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였다. 2020년 5월, 스페인 북부의 과일생산자연합은 4만명의 계절노동자를 당장 구하지 못한다면 이 지역의 농업분야가 붕괴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따라서 스페인 정부는 미등록이주민이 농업분야에서 일하는 것을 일시적으로 허용했다. 미등록이주민 중 5명 중 4명이 40세 이하이며, 이 사회의 노동인구의 감소를 이들이 채워 넣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노동환경 및 주거의 취약한 상황을 개선하고, 더 나아가 이들이 공공보건서비스, 교육, 사회보장제도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코로나 이전, 미등록이주자들의 합법화 모델은 인도주의 및 노동인구 감소 대응 방안으로 논의가 되어왔고, 코로나 19로 인해서 그 움직임이 빨라졌다. 다른 국가들도 이러한 대응 모델을 따르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이처럼, 코로나19시대에 세계 곳곳에서 미등록이주민을 포함하여 이주민과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어떤 곳은 재난지원금을 통해서, 어떤 곳은 일시적 노동허가를 통해서, 또 어떤 곳은 시민권을 주는 방식을 모색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더이상 이주민과 미등록체류자에 대한 혐오의 시선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할 시점이다. 이것이 우리가 코로나19시대에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 중 하나일 것이다. (다음 기사는 하루 10시간 노동, 한 달에 2번 휴일, 그럼에도 지켜지지 않는 이주농업노동자들의 최저임금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 이 기사는 필자가 서울시 청년허브 공모연구 “코로나19로 인한 국경 이동의 제한이 이주민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 연구한 사례를 기반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우춘희. 현재 미국 매사추세츠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과정 중에 있다. 캄보디아와 한국에서 현장 연구를 했다. 지금은 한국으로 이주한 캄보디아 이주농업노동자들에 관해서 논문을 쓰고 있다. 먹거리, 이주, 젠더에 관심이 있다. 2018년 사진전 <이주하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을 열었고, 2020년 <HYPHEN-NATION> 전시에 참여했다.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대중들에게 이주노동자들의 생생한 이야기들을 들려내고 싶고, 그 이야기의 힘이 사회를 바꿀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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