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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으로 다시 듣기] 재즈민 설리반 앨범에 담긴 흑인여성 서사

 

여성이 쉽게 남성의 성적 제안에 응하면 그 사람은 ‘쉬운 사람’이 되어버린다. 여성의 성욕이나 성적 권리가 남성과 다르지 않음에도 말이다. 영미권에서도 마찬가지다.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같은 지적이 반복되었지만 지금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 재즈민 설리반의 “Pick Up Your Feelings” Acoustic Live Video 중에서 캡쳐 


그동안 많은 여성들이 창작물을 통해- 그러니까 미술, 문학, 음악, 영화 등을 통해– 주체로서 여성의 성적 욕망을 당당하게 표현해왔다. 하지만,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그 당당함조차 성녀/창녀 이분법적 구분 아래 ‘쉬운 여자’로 인지되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의 욕구를 섬세하게 살피는 남성이 필요하다거나, 혹은 자신과 성관계를 한다고 해서 그 여성을 우습게 보거나 반대로 성적 요구를 거절한다 하여 ‘나쁜 년’(bitch)이라고 욕하는 등 타인을 자신의 성욕을 채워주는 사람으로 대상화해선 안 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는 솔직히 현실과 괴리감이 느껴진다. 섹스에서 남녀의 권력 구도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여기에는 조금 더 복잡한 구도도 있다. 이를테면 목적을 지닌 섹스다. 오직 쾌락을 목적으로 하는 섹스가 있고, 폭력적인 섹스도 발생한다. 여성 또한 위험을 감수하고 쾌락을 좇는 섹스를 하기도 한다. 섹스에는 돈이나 물질적 이해관계가 걸리는 경우도 있다. 혹자는 자존감을 채우기 위해 섹스를 한다. 다양한 인간상이 있듯 다양한 섹스가 있다.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여지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각각의 맥락을 들여다 보면 쉽게 돌을 던질 수 없다. 누군가는 생존을 위해 섹스를 택한다. 누군가는 후회하고, 또 누군가는 반성하기도 한다.

 

여섯 명의 흑인 여성 화자가 이야기하는 섹스

 

재즈민 설리반(Jazmine Sullivan)의 Heaux Tales 앨범은 바로 그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현실에는 다양한 관계와 섹스가 있고, 타인의 삶을 쉽게 판단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준다. 지난 1월 8일에 공개된 이 음반은 재즈민 설리반이 5년만에 발표하는 신작이다.

 

▲ 재즈민 설리반(Jazmine Sullivan)의 첫 앨범 Fearless(2008)과 신작 Heaux Tales 앨범 커버


재즈민 설리반은 이전에도 결코 아름다운 사랑과 행복한 결말만 얘기하지 않았다. 2008년 처음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앨범 “Fearless”를 발표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말이다. 데뷔곡 “Bust Your Windows”부터 바람난 애인의 차를 부수는 이야기였고, “Forever Don’t Last”에서는 연애 초기에 느꼈던 사랑의 감정이 영원할 수 없음을 노래한다. “In Love With Another Man”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세 장의 정규 앨범을 내는 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평범한 사랑 이야기를 한 곡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런 재즈민이 이번에는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꺼낸다. 앨범은 인트로를 제외하고 흑인 여성 6명의 실제 이야기와, 그들의 이야기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곡들로 채워져 있다. 이들은 각각 섹스에 관하여 각자의 입장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개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2021년 지금, 미국 사회에서 흑인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간 흑인 여성의 삶을 섬세하게 보여준 작품이 많지 않았기에, 또 당사자의 목소리를 통해 그 서사를 전달한 작품은 더더욱 없었기에 이 앨범은 더욱 가치가 있다.

 

첫 번째 곡 “Antoinette’s Tale”의 화자인 안토이넷은 남성이 섹스에 있어 여성을 주체가 아닌 소유물로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자기 결정권을 지닌 여성을 상대하기엔 남성의 자아는 깨지기 쉬운 정도다’라고 이야기한다. 다음 곡 “Pick Up Your Feelings”에서는 첫 곡과 유사한 맥락 속에서 남성을 차버리는, 주체로서의 여성이 등장한다.

 

“난 교훈을 배웠어, 그러니 돌아가지 않아,

네가 가졌던 게 그리워? 그래 내가 더 좋아 보이지, 그치?”

-재즈민 설리반 Pick Up Your Feelings 중

 

*Jazmine Sullivan - Pick Up Your Feelings (Acoustic Live Video) https://bit.ly/3jKG0zW

 

“Ari’s Tale”에 등장하는 음악가 아리 레녹스(Ari Lennox)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행위로서 섹스를 이야기한다. 이어지는 “Put It Down”에서는 모든 걸 내려놓을 정도로 섹스가 좋은, 상대 남성의 것(Dick)을 너무 좋아하는 여성 화자가 나온다. 이어지는 “On It” 역시 섹스를 찬양하는 이야기다.

 

“어쩔 수 없어, 그가 내게 한 게 부끄러워도/

 내 여자 친구들이 물어, 그게 뭐냐고, 그러면 나는 말해 그건 D(Dick)야

 그가 돌아오면 난 미치기 시작하지/

 그게 내가 그에게 내 시간을 모두 주는 이유야, 그는 날 눕히니까”

-재즈민 설리반 Put It Down 중

 

▲ 재즈민 설리반 “Pick Up Your Feelings” 싱글 커버와 “Girl Like Me” 싱글 커버


그런가 하면 “Donna’s Tale”은 결혼 생활에서 여성의 섹스를 이야기한다. 요약하면, 남편과의 섹스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걸 얻는다는 이야기다. 이어지는 “Pricetags”는 이를 좀 더 실감나게 전달한다. 여전히 미국 사회에서 훅인 여성은 직업을 구하기 어렵고, 기혼 여성은 남편의 경제력에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다수의 흑인 남성도 안정된 수입이 보장된 상황은 아니다. 여기에 흑인 파트너 사이에서 일어나는 살인을 포함한 범죄율이 높다는 현실까지 살펴보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부부 관계에서도 섹스를 제공해야 하는 여성의 이야기가 더 입체감 있게 들린다.

 

“넌 남편이 다음날 네가 원하는 걸 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섹스를 해”

-재즈민 설리반 Donna’s Tale 중

 

“Rashida’s Tale”과 “Lost One”은 잘못된 선택으로 기존의 관계를 잃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내용이다. 이후 이야기는 점점 더 가감 없이 전개된다. “Precious’ Tale”과 “The Other Side”는 어릴 적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돈 없는 남성은 관심 없다는 프레셔스의 이야기를 던진 뒤, 잘 나가는 래퍼와 결혼해 잘 살고 싶다는 내용의 노래를 더한다.

 

*Jazmine Sullivan - Lost One (Live) https://bit.ly/3tVL5tJ

 

마지막 곡 “Amanda’s Tale”에서는 아만다라는 여성이 섹스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찾고 자존감을 채운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이어지는 곡 “Girl Like Me”는 SNS를 통해 타인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스스로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가 하면, SNS를 통해 가벼운 관계를 하면서 떨어진 자존감을 채우는 굴레에 대해 이야기한다.

 

“뭔가 다른 걸 원했겠지, 내가 뭘 놓쳤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네가 부탁한 건 내가 줬을 거야, 저 애들이 이기다니 옳지 않아/

 왜 그들이 이겼을까? 나같은 여자한테는 희망이 없어”

-재즈민 설리반 “Girl Like Me” 중

 

*Jazmine Sullivan - Girl Like Me (NBC 더 투나잇 쇼 스타링 지미 펄론) https://bit.ly/37bs1xV

 

흑인 여성의 서사는 여전히 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꺼내지 않았던, 섹스에 관한 흑인 여성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통해 재즈민 설리반의 이번 앨범은 여러 매체에서 호평을 얻었다. 리뷰 전문 미디어 <피치포크>는 일종의 콘셉트 앨범이기도 한 이 앨범이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님을, 재즈민이 과거 작품에서 꺼냈던 이야기에서 근거를 들었다. 그러면서 Heaux Tales 앨범이 한층 더 깊숙이 타인의 일상으로 들어간 동시에, 깊이 있고 세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 NBC방송 ‘더 투나잇 쇼 스타링 지미 펄론’에 출연해 공연하는 재즈민 설리반(Jazmine Sullivan) 유튜브 영상 캡쳐. 


뉴요커, ABC뉴스 등도 이 앨범을 다뤘다. ABC뉴스는 인터뷰를 통해 Heaux Tales 음반에 실린 곡들에 담긴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재즈민 설리반의 고등학교 친구들임을 공개했다. 이런 작업을 하기가 쉽지 않았고 “고통스러웠다”는 재즈민의 말과 함께, 흑인 여성의 서사는 사회에 여전히 들리지 않음을, 이 앨범에 나오는 이야기는 결국 (흑인 여성) 우리 모두의 이야기임을 강조했다.

 

<뉴욕타임스> 역시 이 앨범의 흐름을 이야기하며 음악적 성과를 함께 전했고, <포브스>는 Heaux Tales가 빌보드 메인 차트 4위에 오르는 동시에 알앤비/힙합 앨범 1위에 오른 상업적 성과도 함께 언급했다. 말 그대로 재즈민 설리반의 새 음반은 미국 흑인 여성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냈고, 많은 이의 공감대를 불러 일으키며 상업적인 성과로 이어졌다. 여기에 가스펠에서 영향을 받은 자신의 음악적 뿌리부터 전자음악 요소까지 고루 담는 동시에, 담백한 소리 구성을 통해 메시지 전달에 초점을 두었다는 부분 또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백인들이 어떻게 부르냐에 따라, 그리고 피부 색이 진한 정도에 따라 불리는 이름부터 정체성까지 규정된다는, 그에 따라 삶까지 다르다는 내용을 노래한 니나 시몬(Nina Simone)의 “4 Women” 이후, 흑인 여성의 삶을 담은 음악은 소수지만 그래도 존재해왔다. 비교적 최근에는 10~20대 흑인 여성의 사랑과 이별, 그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비롯한 문제까지 이야기한 시저(SZA)의 Ctrl(2017)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으며, 이러한 작품은 미국 사회에 큰 울림을 줬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지만 공개적으로 꺼내지 않는 이야기, 많은 여성들의 현실임에도 잘 언급되지 않는 이야기를 수면 위로 끄집어 올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힘이 되고 위안이 된다. 2017년 시저의 Ctrl 앨범과 다른 점은 시저 음악이 20대 초중반의 삶을 이야기한 반면, 재즈민 설리반의 Heaux Tales은 좀 더 포괄적인 생애주기에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했다는 점일 것이다. 두 작품 모두 자칫 누군가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는 여성의 모습도 있는 그대로 풀어냈으며, 그것이 지금 이들의 현실이자 삶 자체임을 역설한다.

 

음악적으로도 훌륭하다. 의미와 서사뿐만 아니라, 재즈민 설리반은 작품의 구조와 흐름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세련되면서도 전통적인 방식을 곳곳에 남겨놓은 이 작품은 각각의 곡이 싱글로 발표되면서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1월에 나왔음에도 벌써 올해의 앨범 감이라는 소리를 듣는 이 작품을 꼭 감상해보자.

 

*Jazmine Sullivan Tiny Desk Concert, NPR Music https://bit.ly/3da4KR2

 

[필자 소개] 블럭. 프리랜서 디렉터, 에디터, 칼럼니스트.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내외 여러 음악에 관하여 국내외 매체에 쓴다. 저서로 『노래하는 페미니즘』(2019)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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