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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피해자의 고통을 ‘비교’하는가?

『전쟁과 성폭력의 비교사』의 ‘위안부’ 문제에 관한 논쟁적 지점②


※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발굴한 여성의 역사. 이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이 기사의 필자 이지은 님은 일본군 ‘위안부’, 기지촌 여성, 탈북여성 등 국가 경계의 여성 서사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연구자입니다. 최근 동료들과 함께 『난민, 난민화되는 삶』(갈무리 2020)을 출간했고, 「민족국가의 베트남전쟁 해석사와 국적불명 여성들의 전장」(『동방학지』 2020), 「여성 재현의 ‘몫’을 묻다」(『크릿터』 2020) 등의 글을 발표했습니다.


일본인 ‘위안부’를 드러내기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전쟁과 성폭력의 비교사』에 수록된 또 한 편의 논쟁적인 글은 기노시타 나오코의 「‘강제연행’ 담론과 일본인 ‘위안부’의 불가시화」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초기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공론화가 ‘강제연행’이라는 고발 프레임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일본인 ‘위안부’의 문제가 비가시화되었다고 지적한다.


기노시타는 공론화되기 시작하는 ‘위안부’ 문제가 일본 정부의 책임 회피성 발언에 항의하는 가운데 ‘조선인 강제연행’에 대한 기존 연구의 담론과 합류하는 장면을 포착한다. 그는 조선인에 대한 폭력적인 동원을 가리키는 역사용어 ‘강제연행’이 ‘위안부’ 피해를 지칭하는 말로 전유됨으로써, “강제로 ‘위안부’가 된 경험이 조선인에게 고유한 피해로서 간주되는 담론 효과”(110쪽)가 발생했다고 본다.


우에노 지즈코 외 지음 『전쟁과 성폭력의 비교사』(서재길 역, 어문학사, 2020)


그런데 기노시타도 밝히고 있듯, 초기 자이니치(재일조선인) 여성운동은 “적극적으로 일본인 ‘위안부’의 피해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창부 차별의 담론을 거들지 않고 여성의 존엄이 짓밟히는 것에 문제 제기를 해왔다”(111쪽)


또,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전후 책임을 확실히 하는 모임’에서도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문제는 이와 같은 사례가 초기 운동 가운데서 충분히 공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반면, 일본사회당은 ‘위안부’ 문제와 강제연행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면서도 일본인 ‘위안부’의 존재는 누락했다. “대외적인 자세의 그늘에 가려, 일본인 내부의 권력 관계나 착취라는 문제는 쟁점이 되지 못한 채, 가해국 일본이라는 관념 속에 균질적인 국민상이 그려”(116쪽)졌던 것이다.


글의 결론에서 저자 기노시타는 일본군 ‘위안부’의 비가시화가 “‘위안부’라는 성폭력 제도가 성립하게 된, 공창제로부터의 전개라는 근원적인 부분이 추궁되지 않고 지금에 이르렀”(120쪽)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요컨대, 저자가 보기에 ‘위안부’ 문제는 공창제로부터 연원이 있는데, 조선인에 대한 폭력적인 동원을 의미하는 ‘강제동원’이라는 고발 프레임을 띠게 됨으로써 일본인 ‘위안부’가 누락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인 ‘위안부’ 문제를 가시화하는 일은 “성폭력의 제도가 식민지 지배하의 여성에게 어떻게 파급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작업”(120쪽)이 된다고 주장한다. 덧붙여 기노시타는 이러한 작업이 “식민지 지배 문제의 경시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120쪽)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한다.


물론 민족 차별, 인종 차별에 의해 가혹한 폭력을 당한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되겠지만, 조선인 여성의 피해가 클로즈업되고 피해의 상징처럼 된 상황을 통해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역사상(像)이 민족이라는 경계로 나뉘는 담론 배치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119~120쪽)


다른 문제는 다르게 말하기: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위안부’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먼저, 기노시타의 주장처럼 위안소를 공창제의 연장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위안소의 관리·운영 주체인 일본군이 삭제될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공창제나 위안소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도구화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나, 그 책임의 주체가 ‘다르다’는 점 또한 누락되어선 안 된다.


마찬가지로, 위의 인용문에서 저자는 민족 차별이나 식민지적 차이가 “놓쳐서는 안 될” 문제라고 강조하는데,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가 역사에 ‘달리’ 기록되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가 놓인 중층적인 억압의 힘은 공통적인 부분도 있으나, 식민지와 본국의 국민이라는 점에서 다른 폭력에 놓여 있기도 했다. 반대로, 전후 내셔널리즘은 조선인 ‘위안부’에게는 피해 고발의 지지대로 작동했으나, 일본인 ‘위안부’의 증언은 억압하였다. 또, ‘창부 구별’ 이데올로기 또한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위안부’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억압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는 공통적이지만 또 ‘다른’ 억압적 구조에 놓여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내부 전시실


교차성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


교차성(intersectionality)이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흑인 여성이 처해 있는 차별적 현실이 인종 차별에 젠더 차별이 하나 ‘더’ 얹혀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흑인 범주로도 여성 범주로도, 혹은 둘을 단순히 ‘더한다’고 해도 흑인 여성이 처한 현실은 포착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조선인 ‘위안부’의 현실은 일본인 ‘위안부’에 ‘비해’ 민족 차별이라는 억압을 하나 ‘더’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억압의 중층 구조가 달라지면 다른 폭력의 양상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민족 차별이 놓쳐서는 안 될 억압이라면,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위안부’는 ‘달리’ 말해져야 한다. 중요한 점은 지금까지 ‘위안부’ 연구의 역사에서 얻은 교훈을 잊지 않고, ‘어떻게’ 다르게 말할 수 있는가이다.


(a) 예를 들어 1권에서는 윤정옥이 한국에서 한 강연의 내용이 번역·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센다 가코나 김일면의 논의를 참고하면서도, 일본인 ‘위안부’는 원래 “매춘이 직업”이고 “조선인 여성처럼 속아서 강제연행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선금을 받았고, 그 돈을 갚기만 하면 언제든지 종군위안부를 그만둘 수 있었다”, “원칙적으로 장교를 대상으로 했다”라며 그 특징을 기술하고 있다. 이는 조선인 ‘위안부’가 얼마나 가혹한 상황에 놓여 있었고 학대를 당했는지를 드러내기 위한 비교대상으로 제시한 것이다.(112쪽)


(b) 이는 조선인 ‘위안부’의 피해가 너무도 심각했음에 비해 일본인 ‘위안부’의 피해는 가벼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100쪽)


저자가 지적하듯 (a)처럼 식민지적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일본인 ‘위안부’를 비교대상으로 삼는 것은 반성적 성찰이 필요한 대목이다. (a)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b)에서 일본인 ‘위안부’ 문제가 조선인 ‘위안부’의 피해 ‘만큼’ 커서, 혹은 ‘더/덜’ 커서 문제화되어서는 안 된다. 일본인 ‘위안부’는 인신 구속의 상황에서 성착취를 당한 피해자이다. 이는 일본인 ‘위안부’가 처한 중층적 억압의 구조를 밝히는 작업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인 ‘위안부’의 피해가 공창제에서 위안소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 있다고 해서, 공창제를 경험하지 않았던 조선인 ‘위안부’를 같은 문제틀에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피해자의 고통을 비교하지 않는 언어를 개발하기


『전쟁과 성폭력의 비교사』의 ‘들어가는 말’에는 비교사적 관점의 유용성을 이렇게 말한다. “비교에 의해 비로소 특정 사례가 지닌 독특함과 다른 것과의 공통점이 명확해”진다.(11쪽) 그렇다면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위안부’의 공통점과 동시에 각각의 독특함 또한 드러낼 필요가 있다.


또, ‘들어가는 말’에는 이런 질문도 있다. “무엇을 비교하고 무엇을 비교해서는 안 되는가?”(11쪽)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위안부’의 피해자성을 비교해서는 안 된다. 각각이 처한 억압적 조건은 하나의 요소가 ‘더’ 있거나 ‘덜’ 있는 상태로서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노시타의 지적처럼 일본인 ‘위안부’의 비가시화가 “어디까지나 담론 생산 활동의 소산”(100쪽)이라면, 기노시타의 문제 제기 방식은 일본인 ‘위안부’를 문제화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담론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그의 주장대로 ‘강제연행’ 고발 프레임이 일본인 ‘위안부’를 누락했다면, 그는 식민지적 차이를 누락하게 만드는 담론을 생산함으로써 그가 비판했던 그 프레임의 과오를 정확히 반대편에서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문제틀은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위안부’가 놓인 조건을 교차성에 입각해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암묵적으로 피해자성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세력에 대항하여 ‘강제연행’이 강조되고, 이로 인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축소된 것이라면, ‘강제연행’ 프레임으로 인해 일본인 ‘위안부’가 비가시화되었다는 논리구조 또한 그에 대한 방어논리로 구축된 편협해진 문제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비교사적 관점이 적절한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피해자 사이의 비교와 경합으로 회수되지 않는 언어를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그 언어를 개발하는 것은 비단 “일본의 페미니스트의 과제”(120쪽)만은 아니다. 이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도구화하는 모든 폭력에 저항하는 우리, 피해자의 고통의 무게를 비교하는 언어에 저항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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