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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인과 ‘위안부’는 “동반자”…누구의 언어인가?

『전쟁과 성폭력의 비교사』의 ‘위안부’ 문제에 관한 논쟁적 지점①


※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발굴한 여성의 역사. 이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이 기사의 필자 이지은 님은 일본군 ‘위안부’, 기지촌 여성, 탈북여성 등 국가 경계의 여성 서사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연구자입니다. 최근 동료들과 함께 『난민, 난민화되는 삶』(갈무리 2020)을 출간했고, 「민족국가의 베트남전쟁 해석사와 국적불명 여성들의 전장」(『동방학지』 2020), 「여성 재현의 ‘몫’을 묻다」(『크릿터』 2020) 등의 글을 발표했습니다.


전시 성폭력을 ‘문제화’하기


19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인 김학순의 증언은 전 세계적으로 전쟁과 성폭력에 관한 연구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연구가 축적됨에 따라 전시 성폭력은 단지 병사의 우발적인 일탈 행위만이 아니라, ‘병사 만들기’의 일환으로 군대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폭력적으로 통제·관리한 제도적 성범죄임이 밝혀졌다. 또, 전후 거의 반세기가 지나 공론화된 ‘위안소’ 문제는 역사라는 것이 ‘선택적 기억’이었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여성 억압적 젠더 규범이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성폭력 피해 여성을 침묵하도록 강제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올해 8월 한국에 번역 출간된 『전쟁과 성폭력의 비교사』(우에노 지즈코 외, 서재길 역, 어문학사, 2020)는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비롯하여 일본인 ‘위안부’ 문제, 일본군 병사의 위안소에 대한 인식, 만주에 남겨진 일본인 여성의 삶이나 그들이 돌아오는 과정에서 겪은 성폭력 피해, 그리고 나치의 강제수용소 내 ‘매춘’ 시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측면을 한자리에 모으며, 기존의 전시 성폭력의 연구에 ‘비교사적 관점’을 제안한다.


우에노 지즈코 외 지음 『전쟁과 성폭력의 비교사』(서재길 역, 어문학사, 2020)


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기획 목적과 방법론은 우에노 지즈코의 서장에서 잘 드러나는데, 그의 전 저서인 『내셔널리즘과 젠더』(1999)의 주요 문제의식이었던 ‘피해자 모델’ 비판의 연장선상에 있다. 우에노는 성폭력 피해의 증언이 사회가 수용 가능한, 혹은 사회가 규정하는 피해자상에 들어맞는 방식으로 정형화되기 쉽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전쟁과 성폭력의 비교사』의 서장에선 ‘강간에서 매매춘, 연애, 결혼까지를 연속선상에 배치하는’ ‘성폭력 연속체’라는 개념을 차용하여, “그 연속성 가운데에서 무엇이 문제화되고 무엇이 문제화되지 않는가”(29쪽)를 살펴봄으로써 ‘피해자 모델’ 이외의 다양한 성폭력 범죄를 ‘문제화’하길 요청한다. 특히, 전쟁 상황에서 성폭력 연속체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아군/적군, 적지/점령지/회색지대 등의 문맥 아래 놓임으로써 좀 더 복합적인 ‘문제화될 수 있는/없는’ 조건을 형성한다.


우에노 지즈코의 여성 ‘에이전시’


또, 우에노는 성폭력 범죄가 문제화되는 방식에 개입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피해 여성의 ‘에이전시’를 도입한다. 우에노가 정의하는 에이전시란, “완벽히 자유로운, ‘부하(負荷) 없는 주체’도 아니고 완벽히 수동적인 객체도 아닌, 제약된 조건 하에서도 행사되는 능동성”(40쪽)이다. 이는 여성을 구조에 종속된 수동적 존재로만 다루는 데에서 벗어나, 구조적 억압 아래에서도 생존전략을 취할 수 있는 능동적 존재로 인식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으로 보인다. 우에노 지즈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구조와 주체의 애로”(39쪽)를 타개하기 위한 것인 셈이다.


아주 범박하게 말해, ‘위안부’ 문제에 접근하는 질문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가 ‘위안소란 무엇인가’라면, 다른 하나는 ‘위안부란 누구인가’이다. 전자로 질문할 경우, 위안소라는 성착취 시스템과 이를 관리·운영했던 일본군이 전면에 드러난다. 그러나 위안소에 존재했던 주체들의 다양한 모습이 뒤로 물러날 수 있다. 반면, 후자로 질문할 경우, 가난으로 인해 가족 울타리 바깥으로 내몰린 ‘딸’, 이들을 속인 업자, 위안소에서의 생활 등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위안소’라는 성범죄 시스템과 이에 대한 책임 주체가 흐릿해질 수 있다. 바로 이 곤경이 우에노가 말하는 “구조와 주체의 애로”이다.


그런데 우에노는 에이전시를 도입한 결과 “여성은 역사의 희생자였을 뿐만 아니라, 가해자 혹은 공범자이기도 했다”(40쪽)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고 지적한다. 여성은 억압적 구조 아래에서 ‘생존전략’을 구사하지만, 이 행위가 구조를 재생산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에노는 이러한 딜레마로 인하여 여성의 생존전략은 이후 성폭력 범죄를 문제화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으며, ‘피해자 모델’을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왜 성착취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반자’라 말하는가?


여성을 구조에 종속된 존재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우에노의 지적에는 공감할 만하다. 문제는 ‘에이전시’가 구체적인 분석의 상황에서도 그 개념이 고안된 목적과 정의에 맞게 작동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우에노 지즈코의 서술을 살펴보자.


유사한 경우는 ‘위안부’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제국 일본의 지배 하에서 강제로 일본 국적을 가져야 했던 조선인 ‘위안부’들은 박유하(2014)가 지적한 것처럼 일본식으로 단장하고 일본 이름을 사용했으며 일본어를 사용했다. 일본군의 ‘동반자’였던 이들은 적지였던 피점령지에서 피점령민의 원망과 증오의 대상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일본패전은 조선에게는 ‘광복’이었다. 적과 아군이 역전한 뒤인 전후 한국에서는 비록 강제적인 동원이나 관리 하에 놓여 있었다고는 해도, 일본군의 ‘협력자’로 간주되었던 조선인 ‘위안부’나 강제동원 노무자와 군속들이 처한 위치는 다루기 까다로운 것이 되었을 것이다.(53쪽)


우에노는 박유하를 인용하여 “일본식으로 단장하고 일본 이름을 사용했으며 일본어를 사용했”을 조선인 ‘위안부’를 일본군의 “동반자”라고 말한다. 설령 조선인 ‘위안부’의 생존전략이 우에노가 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과연 “동반자”라는 규정이 “제약된 조건”을 드러내는 분석이라 할 수 있을까? 위안소는 성착취 제도이므로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중국인이든 ‘위안부’는 일본군의 “동반자”라 칭해져서는 안 된다. 이렇게 규정하는 순간 성착취 시스템이 삭제된다. 이는 탈식민 민족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페미니즘의 의제다. 위안소에서 군인과 ‘위안부’는 성착취의 가해자와 피해자이다.


‘박유하-우에노 지즈코’의 언어와 ‘일본 군인-민족주의 남성’의 언어


덧붙여 다음의 장면을 주목하자.


「한국 삐는 병이 걸리지 않아서 좋더군. 상급들은 일본 창녀, 우리들은 한국 삐, 그런데 상관녀석들이 몰래 우리들 영역을 침범하잖아.」

이같이 말할 정도로 한국인 위안부가 좋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하나는 좀 잘난 척하는 일본 삐는 사병에게 매우 냉담하다는 것. 

그 둘째는 한국 삐는 무엇을 하건 일본 여자보다는 훌륭하다는 점을 인정받기 위해서 애써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나이가 젊은 만큼 체격도 좋고 솔직하고 순정이 넘쳐 있었다. (중략)

전선의 사병과 한국 삐와는 어느 의미에서 차원을 같이하고 있었고 사이좋은 동반자 같았다.>


김일면 『천황의 군대와 조선인 위안부』(三一書房, 1976)와 임종국 『정신대실록』(일월서각, 1981)


위 인용문은 대표적인 민족주의 저널리스트인 임종국의 『정신대실록』(일월서각, 1981)에서 발췌한 것이다. 임종국은 『정신대실록』의 ‘편저자’로 되어 있지만, 사실 이 책은 김일면의 『천황의 군대와 조선인 위안부』(天皇の軍隊と朝鮮人慰安婦)(三一書房, 1976)를 번역한 것이다. 김일면의 저작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당시 병사들의 회고나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위안부’ 재현을 발췌‧수집하여 ‘위안부’ 문제를 실증하려고 했던 시도였다.(민족 남성의 ‘위안부’ 담론의 번역과 텍스트의 흐름은 이지은, 「조선인 ‘위안부’, 유동하는 표상 —91년 이전 김일면, 임종국의 ‘위안부’ 텍스트를 중심으로」, 『만주연구』, 만주학회, 2018 참조)


『전쟁과 성폭력의 비교사』에 수록된 히라이 가즈코의 논문에서도 지적되고 있듯, 민족의 체면을 위해 ‘위안 경쟁’을 했다는 서술은 지극히 병사의 시선을 드러내는 것이다. 위의 장면에서 ‘일본군 병사-민족 남성’의 언어는 분명히 구분되지도 않는 가운데, 조선인 여성을 ‘위안하는 존재’로 성애화하면서 일본군의 “동반자”라 부른다.


문제적인 지점은 민족의 남성인 김일면과 임종국이 일본군 병사의 시선을 문제의식 없이 그대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일본군 병사의 회고는 민족 남성으로 이어지면서 언어적·민족적 ‘번역’(trans 반대편으로 –latus이동 –ete 하게하다)은 이루어졌으나, 젠더적 번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박유하-우에노 지즈코’의 언어가 ‘일본군 병사-민족주의 남성’의 언어와 동일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박유하-우에노 지즈코’의 언어가 여성을 식민지로 삼는 제국-남성의 시선을 가졌다는 뜻이거나, “제약된 조건 하에서도 행사되는 능동성”을 설명하는 언어를 개발하는데 실패했다는 뜻이다. ‘내셔널리즘을 넘어 젠더’를 사유하고자 한다면, 내셔널리즘과는 다른 언어를 개발해야 할 것이다. (다음 회에서 이어집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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