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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묘와 함께, 집을 이고 메고 다니는 중

<주거의 재구성> 비혼여성과 반려동물의 동거


“안녕하세요. 저는 집을 이고, 메고 다니는 황주희입니다. 여행을 좋아하긴 하는데 그렇다고 정착이 싫은 건 아니에요. 캄보디아에서 4년 정도 살았고, 그 외에도 유럽, 인도, 베트남에서도 살았어요. 지금은 제주에 있고요.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하하”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소개를 마친다. 참 잘 꾸며진 소개다.


소개가 끝나면 대부분 사람들은 정말 멋진 삶을 산다고, 책을 한 권 써보라고, 부럽다고들 한다. 갖가지 좋은 수식어가 내게 붙는다. 그 말을 들은 아주 인간적인 나는 속으로 매우 우쭐해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사람이 된 듯 신나서 수다를 떤다.


일러스트: studio 장춘


하지만 정작 내가 집을 이고, 메고 다니게 된 시작은 가출이었다.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가출 중인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집은 나에게 불편한 공간이었다. 중고등학생 시절이었을까. 집이라는 공간에서 나는 나로서 온전히 존재하지 않았다. 집에만 가면 가면을 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말수가 줄어들었고,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렇게 10대부터 소심한 가출이 시작되었다. 늦게까지 영화관을 찾거나 일부러 학원에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20대 초부터는 집에 있는 시간이 더욱 줄어들었다. 우리나라를 시작으로 가고 싶었던 곳을 다니는 것에 열중했다. 처음에는 짧은 여행이었다. 하지만 그 여행으로 나의 불안은 충족되지 않았다. 집은 여전히 다시 돌아가야 할 공간이었고, 사춘기가 끝났음에도 나는 여전히 부모님의 그늘 아래에 있어야만 했다.


그 이후 짧은 여행이 아니라 천천히 그 나라의 문화를 즐기고 오랫동안 한 곳을 받아들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더 용감하고 긴 타지생활이 이어졌다. 유럽 곳곳에서 한달살이를 하고, 인도에서 6개월간 어학연수를 하고, 베트남에서 6개월간 자원봉사를 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공동체 생활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끼리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매번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고, 룰을 가지고 생활한다는 것은 꽤 큰 스트레스였다. 가족 간의 공동체 생활도 힘들어했던 나를 돌이켜보며 스스로 공동체 생활에 아주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 규정짓기까지 했다.


외국인으로, 여자로, 반려동물과 함께 산다는 것


완전히 독립하게 된 것은 캄보디아에서부터였다. 혼자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진짜 쉴 수 있는 집이 필요했다. 바깥에서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내가 될 수 있는 편한 공간을 원했다. 인도에서 짧은 봉사활동을 계기로,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일하게 되었다. 1년 정도 한국 본부에서 일한 후, 현장에서 일하고 싶던 꿈을 이루고 싶었다. 스물아홉이었던 나는 결혼 등 사회에서 규정지은 일들은 뒤로 미룬 채 오로지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으로 캄보디아 행을 결심했다.


하지만 당장 언어도 통하지 않고, 살 집도 구해지지 않은 불안한 상황이었다. 그동안의 해외 경험을 떠올리며 애써 담담한 척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체득해왔고, 사람이 사는 곳 어디든 문화가 다를 뿐 별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함께 길을 택했던 동료들이 아니었다면 1년 차의 생활은 꽤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옆집에 살며 서로를 다독이고, 타지에서 힘든 일은 서로 도와가며 캄보디아 생활에 무사히 적응할 수 있었다.


첫 독립은 자유로움, 나를 온전히 찾아가는 것과 별개로 해야 할 집안일과의 싸움이었다. 독립 1년 차에는 그것들이 나를 괴롭혔다. 가족과 생활할 때나 공동체 생활에서나 집안일을 내가 완전히 도맡아 해본 적이 없었다. 특히 엄마는 결혼해서 집안일을 계속해야 할 텐데, 지금부터 하면 안 된다는 이유로 집안일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혼자 살고 보니 나는 집안일을 아주 싫어하는 인간이란 걸 알게 됐다. 공기와 같이 나의 일상을 지탱해주던 일들이 그때 처음으로 대단하게 여겨졌다.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봉이와 봉봉이. (황주희)


캄보디아 생활에 적응할 무렵 주말에 시간이 될 때마다 캄보디아 프놈펜의 유일한 동물보호소에 봉사활동을 하러 다녔다. 한국의 동물보호소 환경과 그리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이 있다면 현지인들에게 동물보호소라는 개념이 생소하다 보니 찾는 사람은 외국인들뿐이었고, 현지인들에게 가축 외에 개나 고양이를 기른다는 개념이 없다 보니 동물을 구조한다는 개념이 없다는 것.


동물보호소에 다니기 시작한 지 한 달쯤 되었을까. 한 녀석이 계속 눈에 밟혔다. 다른 녀석들이 새로운 주인을 만나 떠나는 동안 녀석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안쓰러운 눈으로 보고 지나칠 뿐이었다. 궁금함을 이기지 못해 그 녀석의 사연을 물었다. 누군가 고양이를 학대한 것 같다고. 고양이 울음소리가 매일 들린다며 구조해 달라는 요청이 있는데, 텅 빈 집의 작은 창고에서 녀석은 꼬리가 잘리고, 온몸에 피부병을 뒤집어쓴 채 발견되었다. 긴급히 수술은 했지만 임시 보호처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그 녀석이 계속 눈에 밟혀 한 달쯤을 지켜보다가 내가 결국 임시 보호를 하기로 했다. 한껏 상처를 품은 고양이에게서 나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 예전부터 고양이를 좋아해서 꽤 지식이 있는 편이었지만 그런데도 아픈 아이를 내가 잘 보호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녀석의 이름은 봉이로 정했다. 짧은 기약을 한 동거가 시작되었지만, 봉이는 냉장고 뒤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는 매일 냉장고 뒤에 달라붙어 봉이의 손길을 갈구했다. 치료를 받으러 가는 날이면 봉이와 나는 전쟁 같은 상황들을 겪어야 했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지쳐갈  때쯤, 봉이가 집에 온 지 한달 반쯤이 지난 어느 날 별일 있었냐는 듯 봉이는 냉장고를  벗어났다. 임시 보호를 기약한 지 두 달이 흘렀고, 나는 서슴없이 평생 봉이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나같이 이곳 저곳 떠돌며 다닐 사람이 과연 봉이를 잘 돌볼 수 있을까 수없이 생각했지만, 그것보다 여전히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큰 봉이를 다시 보호소로 돌려보낼 자신이 없었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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