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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페미니스트 예술인의 서사> 미술 작가 문상훈


많은 청년 페미니스트들이 다양한 페미니즘 주제를 예술로 표현하고 있고, 나아가 예술계 성폭력과 차별, 위계에 문제 제기하며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따로 또 함께’ 창작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는 페미니스트 예술가의 새로운 서사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언니에게,


어제는 전시 오프닝이 있었어요. 그날따라 날이 좋기도 했고 많은 선후배, 동기들이 참여한 전시여서 뒤풀이 자리에는 꽤 많은 사람이 모였어요. 서촌의 노가리집 야외에 테이블을 길게 깔고 앉아 맥주를 한 잔 두 잔 비워가며 서로의 근황을 나누었어요.


늘 그렇듯이, 약간의 자기 자랑과 신세 한탄이 섞인 이야기들이 오가던 중, 누가 먼저 꺼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사라진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어요. 미술 작가가 되는 것이 유일한 목표인 학교 분위기 탓에 졸업하고 나면 소식이 끊기는 동기들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처음에는 저도 대수롭지 않게 옛이야기를 주고받았죠. 그러다가, 문득 언니의 이름이 들려왔어요.


2019년 12월 문상훈 개인전 <우리는 끝없이 불화할 것이다> 전시 전경, 킵인터치서울


언니, 언니는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언니를 처음 본 날을 기억해요. 3학년 학기 말 전시 기간이었고 저는 1층 복도 구석에, 지나가다가도 발견하기 힘든 곳에, 한 해 동안 그린 드로잉을 전시하고 있었어요. 누가 와서 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누군가 그곳에 있었고, 그게 언니였어요.


언니는 좁은 공간에 설치된 제 작업을 보기 위해 꽤 오랜 시간 몸을 숙이고 한참을 있었어요. 저는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언니를 기다렸는데 다리가 저릴 정도였으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아요. 제가 기립성 저혈압이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언니가 나왔을 때 언니 주변으로 별이 보였던 것 같기도 해요. 별이 보였던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작업을 누군가 그렇게 공을 들여 봐준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기쁘고 힘이 났어요.


사실 고백하자면 저는 언니를 알기 전까지는 언니가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남들이 바쁘게 다니는 유명 작가들의 전시 오프닝에 한 번도 얼굴을 보이지 않으면서 또 많은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어떤 소문에도 타협도 하지 않는 사람. 그래서 저는 언제나 언니를 이해하기 어려웠죠. 또 선배들은 그런 언니를 뒤에서 ‘개념 없다’고 말했거든요. “남자를 좀 만나 보라”는 교수의 말에 분명한 불쾌함을 표현하는 ‘예의 없는’ 사람, 분위기에 뜬금없이 찬물을 끼얹은 사람, 언니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언니의 흠을 잡던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개념’의 논리에 맞지 않으면 배제했어요.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들로부터 배제되지 않기 위해 눈치를 봐야 했죠. 생각해보면 그 ‘개념’은 어디에서 나온 말이었는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그건 몇몇 사람들이 자신들이 만든 규율에서 누구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틀이었는데. 저 또한 스스로 그 안에 갇혀서 틀 밖에 있던 언니를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정작 틀을 만든 그들은 ‘관리자 놀이’의 대가로 여러 소문을 통제할 수 있었단 걸 깨달은 건 한참 후였지만요. 언니는 그들의 방식에 휘말리지 않으려 싸웠던 거였어요. 그들의 논리에 스스로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거리를 두었고 어떤 식으로도 그들에게 힘을 넘겨주지 않았죠. 그때는 잘 몰랐지만 그래서 언니가 그토록 빛나 보였나 봐요.


문상훈, Sense of Touch, Single-channel video, 6m 58s, 2019


언니, 돌이켜보면 우리가 함께 보낸 시절은 암흑의 시대였던 것 같아요. 학교에 다니고 사회에 진출하기까지의 10년 동안 이명박근혜가 집권했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라는 게 존재하던 때였어요. 어떤 것들은 억압당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많은 것들을 관용했어요. 서로의 작품에 대해 비평하는 수업 시간에 한 선배가 여러 여성의 허벅지를 부감으로 찍은 사진을 가져온 날 기억해요? 우리는 그날 불쾌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강사를 비롯한 사람들은 그 작품의 미학적인 측면에 대해 1시간이 넘게 떠들었고, 결국 언니는 혼자 자리를 박차고 나갔어요.  (계속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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