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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여자는 어디든 간다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들의 투쟁이 남긴 것④


작년 6월, 해고된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이 서울톨게이트 캐노피에 오르면서 이들의 실태가 알려졌다. 공공부문이 얼마나 많은 용역 노동자를 쥐어짜며 운영해왔는지 폭로하면서, 한국도로공사에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217일간 농성했다. 도로공사는 ‘전원 직접고용, 2015년 이후 입사자는 (근로자지위확인소송) 패소 시 직접고용 해제’안을 발표했고, 올해 2월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농성을 해산했다. 하지만 싸움이 끝난 건 아니다. ‘공공부문 정규직화’라는 과업을 둘러싸고 사회에 큰 화두를 던진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투쟁을 돌아보며, 그 의의와 사회적 과제를 짚는다. [톨게이트 투쟁 기록팀]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외환위기도 아닌 시기, 의아한 대량 해고


“솔직히 해고될지는 몰랐어요. 7월에 자회사를 만든다고 했지만 1500명이나 반대하는데 설마. 겁이 나는 게 아니라, 이 많은 해고자를 만드느니 자회사 방침을 한 번 더 검토하겠거니 생각한 거지요.”(최양예, 15년 차, 서안산영업소)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방법으로, 자회사 대신 직접고용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이의 말이다. 한국도로공사(이하 도로공사)는 그와 동료들에게 자회사를 선택하도록 종용해왔다. 그래도 설마 ‘이 많은 사람을 다 해고시킬까’ 싶었다. 그러나 2019년 6월 한 달 동안 1,500여 명의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가 해고된다.


나 또한 그이들의 해고가 의아했다. 대량 해고다. 공기업에서 이런 대규모 해고가 사회적 비난을 감수하고 일어날 수 있나? 물론 천 명 단위 해고가 전례 없는 일은 아니다. 외환위기를 겪은 나라다. 그때 정리해고 허용 요건이 크게 완화됐다. 2009년에는 쌍용차 노동자 2,646명이 정리 해고된 일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국가 혹은 회사가 망했다는 명분이 있었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그런 명분도 없이 잘렸다. 사회적 공분도 달라보였다. 당시에는 ‘가장’이 잘렸다고 했다. 사람 하나가 잘린 것이 아니라, 그 가장들이 책임지는 수천 명 식솔의 밥줄이 잘려나갔다고 했다. 그러나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해고를 두고 이런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 솔직히 이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톨게이트 수납노동자 1,500여 명이 모두 남성이어도 이렇게 한꺼번에 해고할 수 있었을까.


부당해고와 직접고용 요구를 알리는 광화문 거리 행진 (촬영: 희정)


잘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만 잘려도 며칠은 마음이 지옥이다. 그런데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끔찍하다거나 절망스럽다는 말을 잘 하지 않았다. 자주 하는 말은 “약이 올랐지”였다. ‘화가 났다’, ‘분노했다’, ‘울분이 쌓였다’ 같은 말이 나왔다.


“우리 집회를 하는데, 사람이 와서 당신들은 오늘 자로 해고됐다고 통보문을 읽고 갔어요.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도로공사 직원이 온 거야. 자기들은 우리(용역 직원)랑 아무 관계가 아니라고 해놓고선, 해고할 때는 도로공사가 직접 와서 통보하고 갔어. 우리가 그런 행동 하나하나에 약이 오른 거죠.”(이은자, 3년차, 삼척영업소)


야금야금 자신들을 우롱해온 도로공사에 대한 울분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투쟁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울분에 비해 해고 건을 말할 때는 덤덤하다. 해고가 겁나거나 걱정되지 않았냐는 나의 물음에, 한 톨게이트 노동자는 말했다.


“잘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잘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말까지 있다. 하지만 잘리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말은 이들이기에 할 수 있다. 중년 여성이기에.


‘가정이 있는’ 여자의 노동


평균 직원 수가 열댓 명인 영업소에서 일 년에 한두 명은 꼭 잘렸다. 왜? 도로공사는 하이패스(자동화) 때문이라고 했다. 글쎄. 수납노동자들에게 계약 기간을 물으면 6개월도 말하고 1년도 이야기한다. 이런 식의 계약이 가능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해고하기 더 용이한 사람들. 보통은 여성, 그중에서도 중년·노년 여성일 가능성이 크다.


제조업체에 다니던 여성에게 들은 말이 있다. 그이의 회사는 이런 식으로 계약을 한다고 했다.


“애를 낳을 수 있으면 6개월 계약을 하고, 얘를 낳을 수 없는 여자는 1년 계약을 했어요.”


출산과 양육을 ‘해야 하는’ 여자와는 단기 계약밖에 하지 않는다. 이런 사회가 기혼 여성들에게 평생직장을 줄 리 없다. 고정된 일자리도, 정규직도 주지 않는다.


“내가 애들 좀 키워놓고 다시 나오려고 하니까 그 자리는 없는 거예요. 이미 일자리는 계약직이 만연하고, 경력 단절 여성에게 정규 일자리 진입은 너무 어려운 일이에요.”(이정미, 4년 차. 원주영업소)


‘다시 나온’ 여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비정규직 일자리였다. 계약직이면 그나마 다행한 일. 아르바이트, 파트타임. 1년마다 계약서를 다시 쓰는 자리가, 아니 그 계약서마저 쓰지 않는 일자리가 주어졌다.


정부마저 ‘일과 가정의 양립’이라며 시간제 일자리를 권장했다. 덕분에 회사는 합법적으로 단시간 인력을 쓸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과 가정의 양립’이 일하는 사람의 자리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집과 직장이 ‘갈등’ 관계에 놓이면(여자가 없으니 집안 꼴이 엉망이다, 식구 병간호할 사람이 없다 등) 여자는 집을 선택해야 했다.


이들이 톨게이트를 직장으로 선택한 이유에도 ‘집’이 있었다. 수납 일의 장점을 꼽아 보라 하니 수면시간이 매번 바뀌는 고단한 근무형태인 3교대를 든다. “낮에 집안일을 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또? “잔업이 없다는 거.” “집에 가면 회사 일을 그냥 잊어버릴 수 있으니까.” 왜 회사 일을 잊어야 하나. ‘집안일’을 해야 하니까.


‘가정 있는’ 여자는 짧게 일하고 쉽게 잘린다. 자르면서 해고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집에 가서 ‘쉬라고’ 한다. 퇴사를 거부하고 버티면 ‘남편이 어디 모자라서’ 그러는 거냐는 핀잔이 돌아온다. 그러니 이번이 여성 노동자들 인생에서 처음 맞는 해고일 리 없다. 한국도로공사도 이들 처지를 알기에 대량 해고를 감행할 수 있었다. 1천 명 이상의 해고 당사자가 여성이기에 사회적 비난도 덜 받고, 부담이 크지 않았을 것이다.


광화문 천막 농성 당시 하루 일정이 끝난 후 평가 시간을 갖는 톨게이트 노동자들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제공)


‘아줌마’라서 참았고, ‘아줌마’라서 싸웠다


그래서 해고 통고 앞에 아쉬울 것도, 절망스러울 것도 없다. “해고한다면 겁낼 줄 아냐.” 해고 당일이 되기도 전에 상경해 서울톨게이트 앞에 진을 쳤다. 어차피 여길 떠나도 자신들을 기다리는 것은 해고당하기 쉬운 직장이다. 그런 일자리밖에 가질 수 없는 여성들이라서 싸웠다.


“쌓여온 게 폭발했던 것 같아요. 우리가 ‘아줌마’고 비정규직이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그게 있어, 울분이. 그 열기가 폭발력이 있었어요.”(유경화, 10년 차, 매송영업소)


잘 싸운 이유에도 ‘아줌마’를 가져온다.

“우리끼린 말해요. 아줌마들이니까 해냈다고.”


그런데 지금껏 도로공사와 영업소에 마땅한 권리를 빼앗기고 당해온 이유도 ‘아줌마’에 있다고 했다. “아줌마들이 뭘 알아. 할 말 못 하고 살았지.”


‘아줌마’라는 말은 뭐 이리 많은 의미를 지녔단 말인가. ‘아줌마’들은 뭘 모르는 존재라고 해서 물었다. 그러면 언제부터 알게 된 거예요? 대부분 “노동조합 활동하면서”라고 답한다.

“노조 하면서 우리 권리를 알게 되고 할 말 하게 됐지.”


이런 대답에 감동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서사도 한두 번이지. 의문 가질 때도 됐다. 정말 그러한가?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의 상태였다가 노동조합으로 각성한 것인가? 그전에는 정말 몰랐냐고 물으면, 친절하게 이유를 설명해준다. ‘애들’ 키우느라 집안에 갇혀서 세상 돌아가는 걸 몰랐다고 한다.


“유모차를 끌고 나가면 유모차 끄는 엄마들만 만나게 되는 거고. 어린이집 가면 어린이집 엄마들만 보는 거예요. 내 세상이 딱 그만큼인 거예요.”(장효주, 8년 차, 송탄영업소)


그 세상을 넓혀 나오니 해고가 손쉬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혼 여성이 복지나 임금조건을 따지는 것은 사치였다. 그래서 때론 알고도 모른다고 했다.


“여긴 지방이라 여자 일자리가 없어요. 일 시켜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일하는 거지.”(이은자)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그들이 투쟁을 통해 알린 바대로 불합리한 노동조건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버텼다. 세상은 이들의 벌이를 ‘애들 학원비’ 취급하지만, 학원비만 벌려고 하루 8시간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으며 살아왔다.”


때로 몰라야 하는 상황이 힘에 부치면 “아줌마들이니까”라는 말로 체념했다. 세상이 중년 여성에게 얼마나 각박한지 아니까.


중년 여성의 노동, 아무나 하는 일이라고?


“미스 때 일하는 거랑 아줌마가 되어 일을 하는 거랑은 다르다는 걸 느껴요. 미스 때는 지금보다 수월하게 일을 한 거 같아요. 많이 봐주는 느낌도 있었고. 그런데 아줌마가 되어서 노동현장에 들어갔을 때는 봐주는 게 전혀 없는 거예요. 나에게 더 요구되는 것들이 있어요. 더 가혹하게. 그게 현실인 것 같아요.”(유경화)


‘아줌마가 되어 일하는 게 다르다’는 말은 노동 강도나 월급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은 중년 여성에 대한 매도와 무시가 공공연한 사회다. 세상이 관용을 베풀지 않으니 제 살길을 도모해야 하는데, 그러면 ‘드세다. 단순무식하다. 막무가내다’라는 이미지가 따라붙는다.


노화는 누구에게나 오는 것인데 연령에 이런 비하가 따라붙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비하에서 벗어나려면 ‘돈’이 있거나 돈으로 형성한 젊음(안티-에이징)이 있어야 한다. 하루하루 일하며 생활을 꾸리는 사람들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다.


자신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을 알기에 이들은 몸을 낮춰 살았다. 스스로도 ‘아줌마가 드세지’라는 말을 입에 붙인다. 동시에 힘차게 싸운 후에도 다른 사람들 눈에 드세게 보이면 어쩌나 걱정했다.


김천 한국도로공사 본사 점거 농성 당시, 연대자들을 반기는 톨게이트 노동자들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제공)


몸은 낮췄지만 삶은 치열했다. 뭐 대단한 삶의 굴곡이 있어서가 아니다. 국가도 사회도 크게 보태주는 것 없는 세상에서 자식을 키우고 가족을 건사하고 제 벌이를 하려면 치열해야 했다.


세상은 요금수납 일을 ‘아무나 하는 일’이라고 비하하지만(톨게이트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 기사에 이런 내용의 댓글이 자주 달렸다) 이들에게 수납 일은 버텨내어 익힌 기술이었다.


“교육받고도 한 달은 (미납요금을 메꾸는 등) 자기 돈 써가면서 일해야 해요. 돈도 깨지고 사람도 깨지니까 그만두는 사람 많아. 다들 자신과의 싸움을 해가면서 버티며 한 고개를 넘어온 거야.”(장효주)


적응이 끝나면 자기 자리에서 숙련을 쌓고 노하우를 만들어 간다. “(요금을 안 내겠다고 하는) 드센 아저씨들이 있어요. 막 소리 지르는. 어떻게 그 사람들을 상대해.” 그러나 상대한다. 일이니까. 어떻게든 방도를 찾는다.


“뻥도 무지하게 치면서 잡았어. 저희는 해드리고 싶지만요~ 카메라가 다 보고 있거든요~ 앞에 카메라에 있어 다 찍힌다, 나중에 돈 다 물어야 한다고.”


네모난 한 평짜리 수납 부스 안에서


영업소 사장들이 목숨 걸었던 평가/성과 점수 항목에는 고객 민원이 있었다. 그 민원을 앞장서 막아야 하는 이는 톨게이트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일이기에 했다. 일이니까 ‘되게’ 했다. 자신만의 노하우를 쌓았다. 그렇게 자기 자리를 만들어 갔다. 그들의 노동이 무엇이라 폄하되든 네모난 한 평짜리 세상, 톨게이트 수납 부스에선 즐거웠다고 했다.


“부스 안에서 모든 책임은 내가 갖는 거야. 그 작은 세상에서 내가 주인이 되는 거고.”(장효주)


가정도 일터도 그이들만의 자리를 주지 않았다. 가정은 그들과 돌봄 노동을 떼어놓지 않았고, 사회는 네가 본디 있을 장소는 집이라며 그것을 저임금을 주는 근거로 들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일터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었다. 그 자리를 두고 동료와 경쟁도 하고, 때론 동료의 자리를 함께 지켰다.


영업소 사장은 너희들 중에 나갈 사람을 스스로 뽑으라는 잔인한 짓도 시켰지만(해고시킬 직원 이름을 써내야 했다), 한 달 벌이가 소중한지 아는 여자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한 사람분 월급을 만들어 동료의 고용을 지켰다.(인천영업소 등에서 행해진 일이며, 이를 직원들끼리 ‘잡세링’이라 부르곤 했다.) 그렇게 너와 나의 자리를 마련했다.


“우리의 지나온 삶 자체가, 용역회사에 있으면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다는 것을 본인(도로공사)들이 더 잘 알아요.”(도명화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 지부장, 서산톨게이트)


한국도로공사 본사 농성장에서 맞은 새해를 자축하는 톨게이트 노동자들 (공공연대노조 도로공사영업소지회 제공)


자리 한 켠, 설 곳 하나 마련하려고 치열하게 살아냈다. 그 저력으로 이들은 자신을 단순무식으로 보는 시선, 자신들의 싸움을 막무가내로 보는 시선, 자신들의 노동을 아무나 하는 단순반복 일로 보는 시선을 거부했다. 자신들의 본래 자리를 찾아가겠다고 싸웠다. 도로공사 직접 고용이라는 본래의 자리.


그 자리를 찾기 위해 이들은 방도를 마련한다. 봐 주는 일도 없고, 어떤 자원도 쉽게 내주지 않는 사회에서 이들은 자신들에게 유용한 자원을 스스로 획득했다. 집단화. 노동조합으로 모인 것이다. 옆 사람과 함께 가는 일, 뭉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들이 치열하게 살아온 과정에서 획득한 교훈이다. 함께했고, 조직했고, 그러므로 할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여자들이 왜 이렇게 잘 싸우냐면


217일간 ‘집을 떠나’ 한 싸움은 할 말을 하는 과정이었다.


“도로공사 사장이 아주 아줌마들을 허투로 봤다고. (해고되면) 얼마 안 남을 줄 알았는데, 많이 남아 놀랐을 거야.”


대량 해고를 감행하며 도로공사는 사회적 비난만 계산하진 않았을 것이다. 주체들의 저항 여부도 주요 고려대상이다. 해고를 거부하고 끝까지 싸울 사람이 얼마나 되나? 아마 도로공사는 낙관했을 것이다. ‘가정 있는’ 여자가 어떻게 밖에서 오래 싸울 수 있나.


“우리는 늘 도로공사 시나리오랑 반대로 움직인 거지.”


대량 해고를 단행한 도로공사 시나리오의 전제에는 ‘아줌마’(중년 기혼 여성)이 있었다. 그 시나리오를 번번이 깬 것 또한 여자들이다.


“우리는 집안일이랑 직장 일을 병행한 사람들이고, 3교대 하면서 잠도 제대로 못 잔 사람들이에요. 굉장히 피곤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인데, 여기(투쟁 공간) 와서는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잠을 자요. 한뎃잠이건 노숙이건 간에.”(이정미, 4년 차, 원주영업소)


그이는 이 말을 하며 되물었다. “우리가 왜 못 싸울 거라고 생각하나요?” 도로공사를 향한 말만은 아니었다. 이들이 지금껏 살아온 치열함이 투쟁의 동력이 됐다. 못 싸울 이유가 없어 잘 싸웠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아줌마’라는 표현으로 숨겨놓긴 해도, 이 말에는 자부심이 있다.


“여자니까 이렇게까지 싸운 거예요.”


추석 명절에도 고공 농성을 유지한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차린 서울톨게이트 캐노피 위 차례상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제공)


이들의 투쟁이 가진 힘을 알아본 것은 어쩌면 도로공사(정규직)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톨게이트 수납노동자들의 도로공사 본사 점거에 대해 “역사에 없는 침탈”이라 불렀다. “듣도 보도 못한 일”이라 했다. 정규직 노동조합(한국노총)이 발표한 성명서에 담긴 표현이다.


맞는 말이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217일 농성은 보기 드문 싸움이다. 여성들의 대규모 상경 투쟁을 처음 본 사람들은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어떻게 여자들이 이토록 싸울 수 있느냐고. 의아하다는 듯, 대단하다는 듯, 대견하다는 듯. 어떤 반응이든 여성이 잘 싸우는 일이 ‘예외’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여자는 드셀 순 있어도, 강인하거나 당당할 수 없는 세상에서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스스로 당당함을 획득했다. 그런데 세상은 이들의 당당함에 자꾸 초를 쳤다. ‘겁 없는 여자들’(kbs 시사직격. 톨게이트 투쟁을 다룬 시사프로 제목)처럼 싸우고 돌아와서 주류 언론사 인터넷 사이트를 열면 눈물 흘리거나 악을 쓰는 자신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싸움의 어느 날에는 어설프게 모자이크 처리된 자신들의 상체 사진이 인터넷 공간에 퍼졌다.


상의 탈의 시위를 향한 세간의 시선들


“나중에 좀 친해진 사람이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때 웃통은 왜 깠어?”(유경화)


이 말을 하고 그이는 잠시 이야기를 멈췄다. 김천 도로공사 본사를 점거한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상의 탈의 시위를 했다. 전투경찰이 이들을 진압하기 직전 벌어진 일이었다.


“오죽하면 그랬겠냐고. 그곳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없었어요, 힘으로만 따지면. 그게 너무 슬프기도 하고, 또 한편 장엄한 것도 있어요. 부끄럽고 그런 건 하나도 없어요. 스스로 대견하기도 하고. 동료들이 그 과정을 같이 겪어줘서 너무 고맙고.”


내 귀를 잡아끈 것은 마지막 말이었다. “같이 겪어줘서 고맙고.”


“당시에 저는 밖에 있는 상황이었어요. 다시 끌려 나올지언정 같이 있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다시 들어갔어요. 그때는 이심전심. 여기를 우리가 지키고 버터야 한다는 생각에서.”


위험을 알면서도 굳이 다시 들어간다. 같이 겪으려고. 함께해야 이기니까.


한국도로공사 김천 본사 농성장에서 보낸 시간은 고됨과 눈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료들과 찍은 기념사진 속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모습.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제공)


일부 언론에서 ‘나체 시위’라고 이름 붙여 내보낸 그날의 시위는 지지 않기 위한 싸움의 일환이었다. 지지 않기 위해 선택한 전술이고, 모든 전술이 그렇듯 후에 여러 측면에서 평가되고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그날의 시위 사건을 보도하고, 보고, 해석한 우리의 시선도 다시금 생각되어야 한다.


그날의 시위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거나, 중년 여성의 몸을 조롱하거나, 처참한 장면이라며 쉽게 선전하거나, 혹은 자기희생을 불사하는 ‘노동 투사’의 이미지를 부여하거나. 그런 시선과 해석이 익숙한 사회는 톨게이트 노동자들에게 묻는다.

“왜 그렇게까지 했어?”


이 질문은 그간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들어온 ‘여자들이 왜 이렇게 잘 싸우냐’는 물음과 다를 바 없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늘 대답해왔다.

“이기고 싶으니까”


그래서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지금까진 지지 않았다.” 하나씩 쌓아가고 버텨간 자신이 “대견하다고 할까.”


“마음속에 그게 있어요. 대견한 거. 우리 잘 해낼 거야. 큰 힘 발휘하지 못해도 같이 있어 줄 거야. 하루하루 당당하게 살아내고 이날들이 쌓이다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달라지도록 노력하는 거야.”


일하는 여자들은 치열하게 자기 자리를 만들고, 싸우는 여자들은 버티고 버텨 자기 자신을 보는 시선을 바꿨다. 그렇다면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켜본 우리는 시선을 어디에 두고 있나. (기록노동자 희정) 


본문에 나오는 구술은 매송/삼척/서안산/송탄/안성/원주/청주 영업소 요금수납 노동자들과의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하였다. 인터뷰 진행 및 기록: 톨게이트 기록팀(나랑, 시야, 희정)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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