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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노숙 농성보다 괴로운 건 ‘노동자 갈라치기’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들의 투쟁이 남긴 것③


작년 6월, 해고된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이 서울톨게이트 캐노피에 오르면서 이들의 실태가 알려졌다. 공공부문이 얼마나 많은 용역 노동자를 쥐어짜며 운영해왔는지 폭로하면서, 한국도로공사에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217일간 농성했다. 도로공사는 ‘전원 직접고용, 2015년 이후 입사자는 (근로자지위확인소송) 패소 시 직접고용 해제’안을 발표했고, 올해 2월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농성을 해산했다. 하지만 싸움이 끝난 건 아니다. ‘공공부문 정규직화’라는 과업을 둘러싸고 사회에 큰 화두를 던진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돌아보며, 그 의의와 사회적 과제를 짚는다. [톨게이트 투쟁 기록팀]

 

톨게이트 요금수납원 김정인 씨는 145일 동안 도로공사 김천 본사 점거 농성 현장을 지켰다. 그는 투쟁 현장을 촬영하기 시작하며 유튜버가 됐다. (김정인 제공)


1심, 2심에 이어 대법원도 “요금수납원은 도로공사 직원”


지난여름,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이 대량 해고에 맞서 폭염을 견디며 견고한 투쟁을 이어간 지 두 달쯤 된 8월 29일, 대법원은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낸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에서 마침내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요금수납원은 도로공사 직원이며, 도로공사는 직접고용의 의무를 갖는다’는 취지의 판결이었다. 소송을 시작한 지 6년 만이었다. 노동자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승리했다”, “이제 끝났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로공사 이강래 사장은 9월 9일 ‘대법원 판결에 따른 후속 조치’를 발표하며, 대법원 판결을 받은 사람들만 직접고용하겠다고 했다. 노동자 갈라치기의 시작이었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2013년부터 2018년에 걸쳐 저마다 다른 시기에 소송을 시작했고 당시 1심이나 2심 계류 중인 경우가 많았다. 대법원 판결을 받은 사람은 해고된 1,500명 중에서는 300여 명뿐이었다. 노동자들은 소송 시기가 다르다고 해도 같은 톨게이트 요금수납원으로 같은 일을 해 왔으니, 대법원 판결 취지에 맞게 즉각 전원 직접고용하라고 요구했다.


(이후 10월 23일 서울고등법원은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들의 근로자 지위 보전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또 ‘관련 대법원 판결은 영업소 및 근무 기간 등을 구분하지 아니한 채 그 모두에 대하여 근로자 파견 관계를 인정한 점’이라고 적시하여, 대법원 판결이 해고노동자 전원을 직접고용하라는 취지임을 밝혔다.)


판결받은 사람만 직접고용? 수납원들, 김천 본사로 모여들다


도로공사의 입장 발표 후 9월 9일,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 300여 명은 ‘전원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도로공사 김천 본사에 진입해 점거 농성에 들어간다.


그러나 당시 한국노총 톨게이트노조 지도부는 조합원들에게 어떠한 지침도 주지 않았다. 박선복 한국노총 톨게이트노조 위원장은 도로공사 이강래 사장을 만나겠다며 9월 2일 서울톨게이트 캐노피에서 내려온 상태였다. 한국노총 조합원들은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김천 본사를 점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발적으로 김천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집에 와 있는데 (김천 본사) 점거 소식을 들은 거지. 다음날 새벽에 김천으로 출발했어요. 도착하니까 그런 전쟁터가 없더라고요. 이미 한국노총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어요. 또 한 번의 감동이었죠. 위원장은 움직일 생각도 안 했는데 조합원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인 거고. 그렇게 되니까 간부들도 안 내려올 수가 없는 거지. 한국노총 사람들이 마당에 한 300명 가까이 됐을걸.”(진명숙, 10년 차, 구리남양주 톨게이트)


김천 본사 안에는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이, 건물 밖에는 한국노총 소속 노동자들이.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제공)


건물 문을 겹겹이 에워싼 경찰을 뚫지 못한 한국노총 노동자들과 일부 민주노총 노동자들은 본사 마당에 텐트를 쳤다. 김천 본사 건물 안에서, 그리고 건물 밖 마당에서 경찰을 사이에 두고 요금수납원들은 또다시 농성에 돌입한다.


상부조직과 소속 노동조합이 각기 달랐던 노동자들


톨게이트 요금수납원 투쟁에 함께 한 조직은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내 4개 조직(민주연합노조, 공공연대, 인천지역일반노조, 경남일반노조), 이렇게 다섯 곳이었다. 함께 투쟁의 방향을 정하고 힘을 모으기에 쉽지 않은 조건이었다. 특히 양대 노총 사이의 벽은 견고했다.


한국노총은 소속 노조인 톨게이트노조를 지원해주지 않았고, 톨게이트노조 지도부는 조합원들의 자발적인 투쟁을 엄호해주기보다는 통제하는 모습이었다.


7월 초 서울톨게이트 앞에서 농성을 하던 한국노총 소속 수납원들이 우발적으로 고속도로를 점거했을 때의 일이다. “캐노피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 빨리 내려오게 하고 싶은 마음에 누군가 먼저 고속도로로 뛰어들었고” 누구의 지시도 없이, “이렇게라도 이슈를 만들어보자는 마음에” 우르르 몰려나갔다.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6개 차로를 점거하며 버텼다. 하지만 2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고 두 시간 만에 점거를 풀게 된다. 현장에 있었던 노동자들은 “그때 고속도로에서 버텼다면 뭐가 돼도 됐을 것”이라며 지금도 아쉬워한다. 그때 점거를 풀고 나온 이유는 “책임져 줄 수 없다”는 한국노총 톨게이트노조 집행부의 만류 때문이었다고 했다.


당시 “(톨게이트노조) 집행부에서 겁먹고 ‘나와라, 나와라’ 해서” 갓길 쪽부터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연행돼서 조사받거나 몸을 다쳐서 치료를 받아도 내 돈으로 해야 되는” 그런 상황이었고 “위에서 ‘걱정하지 마, 우리가 책임질게’ 하면 우리도 했을 텐데 ‘나대지 마’, ‘이거 봐, 가도 아무 도움도 안 줘’하니까” 점점 주춤하게 되었다고 한국노총 소속 요금수납원들은 말한다.


서울톨게이트 밑에 모여있던 한국노총 소속 노동자들은 캐노피 위로 올라가 농성하는 동료들을 빨리 내려오게 하고 싶다는 생각에, 누구의 지시도 없이 자발적으로 고속도로에 뛰어들었다. 당시 점거 현장을 캐노피 위에서 찍은 사진.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제공)


노동조합 지도부가 아닌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서로 다른 조직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순간들, 즉 소속의 벽을 뛰어넘어 연대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7월 15일에 서울톨게이트에 있던 우리가 광화문으로 올라가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랑 처음으로 합류했어요. 저 멀리서 민주노총 사람들이 행진해서 오는데 우리가 ‘와~’, 민주노총 사람들도 우리를 보고 ‘와~’.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진명숙, 10년 차, 구리남양주 톨게이트)


“우리(민주노총)는 수많은 지원을 받고 연대 오는 동지도 많잖아요. 되게 감사하고 뿌듯했는데 한국노총 쪽에는 그런 게 없었거든요. 그런 거에 비해서 열심히 싸워줬고 정말 힘들겠구나.”(김정인, 11년 차, 북강릉 톨게이트)


“우리보고 ‘고아’ 같다고 했어요. 한국노총에서 아무런 지원도 안 해주니까. 우리는 밥도 다 사비로 먹었어요. 그런데도 우리가 안 흩어졌던 것 자체가 민주노총 사람들에게는 너무 큰 힘이 됐던 거야.”(진명숙)


이처럼 노동자들은 단결하여 투쟁해나갈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한국노총 톨게이트노조 지도부의 행보는 그와 달랐다.


“우린 똑같은 요금수납원이고 똑같은 일을 했습니다”


김천 본사 점거 농성을 시작한 지 한 달째 되는 날인 10월 9일, 도로공사와 한국노총 톨게이트노조는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의 중재로 합의서에 서명한다. 민주노총 산하 노조들을 배제한 채 이뤄진 합의였다.


“1심에서 승소한 노동자들은 직접고용하며, 1심 계류 중인 노동자들은 ‘임시직 근로자’로 고용하되 이후 1심 판결에 따라 직접고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덧붙여 “2015년 이후 입사자는 차후 최초 판결 결과에 따른다”고 했다. 한마디로 ‘직접고용 되고 싶으면 한 번이라도 법원 판결을 받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 이면에는 도로공사가 2015년 이후 ‘불법 파견’ 요소를 많이 없앴기 때문에, 이후 입사자들의 소송에서는 공사 측이 유리할 거라는 계산이 있었다.


소송이 계류 중이거나, 2015년 이후에 입사한 사람들 입장에선 애초에 도로공사가 제시한 ‘기간제’ 일자리도 받지 않았는데, 또다시 법원 판결만 기다리며 ‘임시직’으로 일할 거였으면 이렇게 힘들게 싸워 올 이유가 없었다.


한국노총 톨게이트노조 집행부는 도로공사와 합의하기 전, 조합원들에게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조합원들이 내부 SNS에 이를 비판하는 글을 올리면, 일방적으로 삭제해 버리곤 했다. 10월 5일, 한국노총 소속의 한 조합원은 김천 본사 안에서 열린 집회에서 이렇게 항의했다.


“(…) 왜 여태까지 투쟁했습니까? 대법원 판결까지 났는데, 왜 다시 소송 이야기를 합니까? 우린 똑같은 요금수납원이고 똑같은 일을 했습니다. (…) 어찌 수장이란 사람이 (이렇게) 무책임하고. 누가 봐도 이강래 (사장)에게 유리한 안으로 노동자들을 갈라치려 합니까? 그걸 협상이라고 우깁니까? 박선복 위원장이 밀어붙이는 안건은 (한국노총 소속) 톨게이트 노동자 전체의 의견이 아닙니다.”


회사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만 해온 세월에서 이제야 벗어났는데 노조 윗선의 부당한 처사에 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후 이 발언을 한 조합원은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한국노총에서 문자로 제명 통보를 받는다. 소명의 기회도 얻지 못했다.


진명숙 씨는 지도부의 독단적인 결정을 반대하며 한국노총을 탈퇴하고, 민주노총에 가입해 ‘전원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끝까지 싸운 조합원 중 하나다. (진명숙 제공)


약 70명의 조합원이 한국노총을 탈퇴하고 민주노총에 가입해 ‘전원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함께 싸운다. 이들의 행보는 김천 본사에서 있던 노동자들에게 큰 힘이 됐다.


광화문에서 청와대까지 오체투지…겨울 농성장의 모습


11월 초가 되자 김천에서 일부 조합원들이 서울로 올라와 광화문 광장에 천막을 치고 거점을 마련한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책임지고 사태 해결에 나설 것을 요구하며 김현미 국토부장관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지역구 사무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시작한다.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점거는 이후 28개로 확대된다.


한국노총과 도로공사가 합의를 했다고 언론에 보도되자, 세상은 마치 수납원들의 투쟁이 끝난 것처럼 알고 있었다. 절박한 상황을 다시 알려내야 했다. 광화문에서 세종로를 거쳐 청와대까지 오체투지를 했다. 청와대 면담을 요구하며 행진을 시작했다.


“올라오는 첫날부터 청와대 진격 투쟁했어요. 경찰하고 몸싸움하고 잡혀가고. 그때는 ‘다 잡혀가자’하는 심정으로 올라온 거죠. 처음 한 20일은 빨래할 시간도 없었어요. 경찰이랑 싸울 때 우리가 절대 안 밀리더라고요. 진짜 잘하더라고요. 우리도 놀랐어요. 기술이 점점 늘어. 방패는 이렇게 뺏어야 하고 ‘오늘은 나 잡혀갈게, 내일은 너, 너, 너.’ 무서울 게 없는 거죠. 경찰서 가서 하룻밤 자고 나오자 이런 심정으로.”(김경남, 10년 차, 청북 톨게이트)


“저는 김현미 장관 사무실 실내에서 잤는데 그나마 그건 ‘호텔’이었고. 광화문에서 몇 번 자봤는데 며칠 자보니까 잘 수가 없어. 소음에, 매연에, 추위에. 너무 추워서 저는 안 씻었어요. 그쪽 화장실에 따뜻한 물이 안 나와요. 이빨 시려워서 닦기가 싫어. 그런 걸 견디는 걸 보면 정말 신기해. 비참하다고 생각을 안 했어요.”(진명숙)


광화문에서 세종로를 거쳐 청와대까지 오체투지하는 톨게이트 노동자들.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제공)


더운 여름보다 추운 겨울이 더 힘들었다. 평균연령 50세인 여성들이 몸싸움의 달인, 노숙의 달인이 되어가는 동안 많이 다쳤고, 없던 병이 생기거나 지병이 더 심해지기도 했다. 투쟁이 장기화되면서 가족들은 이제 그만하라고 했다. 집에 쉬러 갔다가 복귀하지 않는 조합원들이 늘어났다. 서울도, 김천도 점점 인원이 줄어갔다. 예전만큼 투쟁이 힘 있게 진행되지 못하면서 공권력은 더 거칠게 진압하고 연행했다. 청와대 앞에서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막 잡혀가면 (한동안) 투쟁이 조용해지”곤 했다.


투쟁 현장으로 오지 않는 조합원들이 원망스러워 불만을 토로할 때면 “언니, 이거 언니 일이잖아”라고 말하는 옆 동지의 말에 끄덕이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질기게 버티는 힘은 오롯이 “동지”에게서 나왔다. “동지가 거기 있으니까”, “동지 때문에 집에 가기도 하지만 동지 때문에 다시 나오고 버틴”(김정인) 시간이었다.


“우리 인생의 목표가 도로공사 정직원은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아픔을 딛고 거기에 있었거든요. 남편이 암투병 중인 사람, 애들이 아직 어린 사람, 어머니도 아프고 남편도 아픈 사람… 자신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까 하고 자리를 지킨 거거든요. 그 힘든 과정 속에서도 남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옆에 동지가 있으니까.”(김정인, 11년 차, 북강릉 톨게이트)


“뭘 잘 하진 않지만, 그냥 내 자리를 지키는 거죠. 나를 보면서 힘이 날 수 있게. ‘아 저 사람은 저기 계속 있구나’ 이런 거? 사람들이 집에 좀 가라고 할 정도로 있었어요. 우리 지회 언니가 ’이번에 내려오면 다시 (서울로) 안 갈려고 했는데 경남이 너 때문에 내가 또 올라간다.’ 그러더라고요.”(김경남)


기대를 매번 저버린 도로공사인데 왜 또 기대했을까


12월 6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도 노동자들이 옳다 했다. 승소자 중에는 도로공사가 “불법파견 요소를 제거했다”면서 차후 판결에 따라 고용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한 2015년 이후 입사자들도 있었다. ‘전원 직접고용해야 한다’는 노동자들의 주장이 정당함을 재차 확인한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의원 사무실 점거는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가 중재한 교섭을 이끌어냈다. 그런데 도로공사 측은 12월 11일 국회에서 교섭하기로 해 놓고 하루 전인 12월 10일, 노동자들을 우롱하듯이 언론에 보도 자료를 뿌렸다.


발표 내용은 ‘1심 계류 중인 노동자들까지 모두 직접고용하겠다’는 것이었지만 또 조건이 붙었다. “2015년 이후 입사자는 임시직으로 우선 채용하고, 향후 (남은 소송에서) 법원의 최초 판결에 따라 직접고용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었다. 2015년 이후 불법 파견 요소를 없앤 내용이 판결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추후 재판에서 변론을 제대로 하면 공사 측이 이길 수도 있다는 속내였다.


이강래 도로공사 사장이 교섭 자리에 나오겠다고 한 또 다른 이유는 바로 2020년 총선 출마를 위해서라는 얘기가 돌았다. 사표를 내기 전, 톨게이트 요금수납원 문제를 털고 가고 싶어한다는 것. 12월 11일 이강래 사장과 노조 측의 정식 교섭이 진행된다. 이강래 사장은 “전체 직접고용하는 것에 대해 정규직 노조의 반발이 심하다”라고 말하며 노조 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이강래 사장은 퇴임 전 나오기로 한 교섭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몇 차례의 실무교섭이 진행되었지만, 도로공사는 ‘투쟁 과정에서 발생한 형사 및 민사 등 일체의 소를 취하하고 징계하지 않는다’는 노조 측의 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섭은 최종 결렬됐고 이강래 사장은 퇴임했다. 1,500명 노동자를 길거리로 내몰아놓고 문제를 매듭짓지 않은 채 빠져나갔다.


조합원들은 당시 교섭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에 교섭 기간 동안 투쟁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점을 뼈아프게 평가한다. 도명화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 지부장은 “교섭은 교섭이고 투쟁은 투쟁대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교섭이 시작되니까 나쁜 영향이 가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에 할 수 있는 게 되게 제한적”이었다고 말한다.


“교섭하기로 한 날, 국회 안에 들어가서 화장실이나 계단 밑에 숨어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들어간 걸 눈치채고 국회 직원들이 쫓아내는 거예요. 한 동지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질질 끌려나갔어요. 그 수모를 겪었는데도 (상급단체에서) 교섭이 연기됐다며 그냥 나오라고 했어. 거기서 (사장) 욕이라도 해주고 소란이라도 일으킬 걸, 그게 제일 아쉬웠어요.”(진명숙)


“광화문에 사람이 현저히 줄어들 때가 있었어요. 어떨 때 보면 20명밖에 없는 거예요. 힘 빠지죠. 그런데 교섭한다고 하면 사람이 확 몰려, 기대심리가 커서. 한 2주 제대로 투쟁을 안 했던 것 같아요. 그 기대 때문에. 거의 다 끝날 것처럼 마음이 홀가분하고 그랬거든요. 교섭할 때 너무 기대를 했어요, 우리가. 도로공사는 항상 우리가 기대한 대로 해주질 않는데 왜 기대를 했는지 몰라.”(김경남)


‘일단’ 전원 직접고용…과제 남긴 채 농성을 접다


“끌려다니는 느낌이 있었는데” 교섭이 결렬되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다시 대오를 추스렸다. 올해 1월 17일에는 도명화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 지부장과 유창근 공공연대노조 한국도로공사 지회장이 단식 농성에 돌입한다.


교섭이 결렬되자 도명화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장과 유창근 공공연대노조 도로공사지회장은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8일 차 모습.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제공)


같은 날, 도로공사는 또다시 언론을 통해 일방적으로 입장을 발표한다. 해고된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 전원을 일단 직접고용하되 2015년 이후 입사자에 대해서는 ‘소송 패소 시 직접고용을 해제하며 이 경우 별도의 고용안정 방안을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일단 전원 직접고용을 한다는 것은 분명한 변화이자 성과였다. 하지만 2015년 이후 입사자들은 또 법의 판단을 기다려야 하는 형국이었다.


도로공사는 일방적으로 “2월까지 직무교육과 현장배치를 마무리하겠다”고 했다. 작년 대법원 판결을 받은 조합원들은 이미 현장에 복귀해서 일하고 있었다. 남아서 투쟁하고 있던 조합원들은 “그 상황에서 우리도 출근명령이 떨어지면 어떡하나 (투쟁을 접고 들어가야 하는 건지) 조바심이 있었다”고 말한다.


당시 김천 본사와 서울, 두 개의 거점에 80여 명이 남아 투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조합원들의 피로도가 높아진 상태에서 도로공사의 이러한 태도는 큰 압박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도로공사는 김천 본사 점거를 두고 퇴거단행 가처분 신청을 해 놓은 상태였다. 가처분 결정이 떨어지면, 농성을 풀지 않을 경우 각 조직에 큰 액수의 벌금이 떨어질 수 있는 상황도 부담이 됐다.


2015년 이후 입사자 문제 말고도, 원래 하던 수납 업무를 되찾는 문제나 원거리 발령, 임금 문제, 그리고 고소, 고발, 징계 등에 대해서는 도로공사 측과 합의를 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고심 끝에 노조 지도부는 농성을 해제하기 결정한다. 민주노총 내 4개 조직 지도부가 함께 내린 결정이었다.


지도부는 조합원들에게 ‘긴 시간 이어온 투쟁의 피로감을 달래고 현장에 들어가서 싸우자’고 했다. 당황하는 조합원, 지도부의 결정을 수용하는 조합원, 반발하는 조합원도 있었다. “갑자기 접는다니까 너무 허탈했다”,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화가 났다”, “이렇게 끝내면 안 된다고, 우리는 더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조합원도 있었다. “지도부는 (2015년 이후 입사자들이) 어차피 재판에서 이길 거라고 했지만”, 추후 재판에서 이길 거라고는 해도 “우리 기조가 같이 가는 거였는데” 이런 결정을 한다는 게 이해하기 힘들다는 조합원도 있었다.


응원해 준 가족들에게 승리의 소식을 안기고 싶은 마음, ‘이길 것 같으냐’고 비아냥거리던 사람들 보란 듯이 당당하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 지도부의 결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온전히 승리하지 못하고 농성을 접는다는 게 허탈했고 억울했다.


“투쟁을 마무리한다는 말에 패배감이 들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는 지고 싶지 않았어요. 정말 이기고 싶었는데, 그리고 이긴 싸움인데. 저들이 비상식적으로 안 해 준거잖아요. 마지막 결의대회 때 연대하는 동지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 ‘여러분은 의리와 원칙을 지켜서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도로공사가…’ 눈물이 왈칵 나는 거예요. 공기업이 이렇게 악랄하게 우리를 힘들게 할 줄 상상도 못 했으니까요. 그 말 듣고 위로가 많이 됐어요.”(진명숙)


‘이긴 싸움’이라고 생각한 건, 법원이 직접고용이 맞다고 판결을 내려줘서가 아니다. “자회사를 선택하지 않은 것부터 이긴 것”(이정미)이었다. 자회사라는 거짓 ‘정규직 전환’ 술책에 속지 않은 것, 법원 판결에 기대지 않고 싸운 것, “배수의 진을 치고, 빈손으로 가도 좋다는 각오로 싸운”(이정미) 것. 그 자부심이 있었다. 온전히 승리하지 못하고 현장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도로공사가 그 자부심마저 꺾을 순 없을 것이다.


딸들이 사회에 나와 비정규직으로 일하지 않도록…


2020년 1월 31일, 145일을 점거했던 김천 본사에서 해단식을 가졌다. 2월 1일에는 서울로 올라와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결의대회를 열어 217일간 쉼 없이 달려온 투쟁을 마무리했다.


145일의 도로공사 김천 본사 점거를 마무리하고 해단식 하던 날. 그동안 깔고 앉았던 깔개를 하늘 위로 던지는 조합원들.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제공)


현재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시즌2’를 준비하고 있다. 온몸을 바쳐 싸웠기에 “좀 멍하고 의욕이 없는 상태”라고 말하기도 한다. 현장에 들어가면 예전처럼 잘 싸울 수 있을까 걱정스러운 마음도 있고, 한편으로는 ‘두고 보자’ 벼르는 심정도 있다.


217일간 투쟁하면서 남들이 말하듯 “비정규직 철폐의 선봉”에서 서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그 말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저항은 한국 사회에 거대한 물음을 던졌다. 왜 우리는 안정된 일자리에서 일하면 안 되냐고. 왜 노동에 서열을 매겨 어떤 노동은 늘 불안하게 2년, 1년, 심지어는 6개월, 3개월에 한 번씩 계약서를 쓰며 ‘갑질’을 견디는 삶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하냐고.


자기 자신의 문제에서 출발했지만,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싸움은 다음 세대를 위한 싸움이 되었다. 이제 현장으로 들어가 ‘시즌2’를 시작할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싸움을 그들만의 싸움으로 남겨둬서는 안 되는 이유다.


“지금 우리 아이들도 들어가면 비정규직이지. 정규직 자리 없잖아요. 우리 지회 조합원이 7명이었는데 싸울 때 조합원 세 명의 아이들이 고3이었어요. 애들 생각하면 비정규직은 안 되잖아요. 조합원 중에 외벌이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딸 둘 키우면서. 그 조합원한테 ‘내가 너를 위해서 싸울게’라고 했거든요. 그 딸들이 사회에 나와 일할 자리가 없으면 안 되잖아요. 비정규직은 절대 안 된다, 우리 애들이 대학 졸업하고 갈 데가 없으면 안 돼.”(이정미, 10년 차, 원주 톨게이트)


*인터뷰 진행 및 기록 : 톨게이트 기록팀(나랑, 시야, 희정)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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