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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유통뿐 아니라 소비‧소지도 디지털 성착취 행위

텔레그램 n번방 사건…분노를 넘어 법제도 모색으로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처음 세상에 알린 <추적단 불꽃>이 언론들과 함께 거대한 디지털 성착취 현장을 드러낸 후 몇 개월이 흐르고 있다. n번방을 운영한 주요 공모자 중 조주빈을 비롯한 이들이 구속 기소됐지만, 몇십만 원에서 몇백만 원까지 지불하며 범죄에 가담한 ‘관전자’들의 행방에 관한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는다.


거기다 몇몇 언론은 유포된 성착취물을 ‘음란물’이라고 부르며 문제의 본질을 흐렸고, 총선 정국 속에서 ‘n번방 사건은 정치적 공작’이라고 호명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21대 국회 출범을 앞둔 지금, 디지털 성착취에 대해 이제는 분노를 넘어서 제대로 된 제도적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논의를 본격화시킬 때다.


4월 7일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디지털 성착취 근절을 위한 법제도 모색 라운드 테이블” 현장 모습.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지난 7일 한국여성정책연구원과 한국젠더법학회, 한국여성변호사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여성인권위원회,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가 공동으로 “디지털 성착취 근절을 위한 법제도 모색 라운드 테이블”을 펼쳤다. 이 자리에선 디지털 성착취의 구조를 젠더 관점에서 분석하고, 이를 근절하기 위한 입법과제와 제도 개선방안을 모색하는 의견이 오갔다.


디지털 세계는 어떻게 성범죄의 온상이 되었나?


“해외에도 이렇게 대규모의 사람들이 연루된 사건이 있었나 의문이 들었다.”


김애라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디지털 플랫폼에서 성범죄가 발생하고 있는 구조를 분석했다.


“(한국은) 성별화된 성문화와 성인식의 변화는 더딘 반면, 빠른 속도의 네트워크망과 높은 디지털 문해력을 가진 사회라는 점이 이런 결과에 영향에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특히 “인터넷의 발달로 개인화된 미디어 시대에 소비-생산-유통의 경계가 무너지고, 콘텐츠와 인플루언서(sns를 통해 활동하며 영향력 있는 개인)를 중심으로 ‘디지털 자본주의’가 형성되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한 여성의 개인 셀카 사진부터 성착취 영상에 이르기까지, 성폭력은 이제 대면하는 성폭력 범죄에 그치지 않고 ‘돈이 되는 일’이 되어버렸다는 점도 중요하다.”


“텔레그램 내에서 채널을 만들기 용이하고, 대면하지 않고서 조직원을 구하기도 용이하다. 피의자 중 10대들이 있다고 드러났듯이 연령이나 물리적 시공간에서 자유롭다. (성착취 영상의) 소지, 소비, 유포, 제작 환경에 진입장벽이 거의 사라지면서 단기간 내 산업화된 점도 특징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함께 ‘야동’을 보고 성매매 후기를 공유하던 남성들이 이제 “직접 성착취 영상을 기획하고 제작하여 유포하는 남성연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단체들이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의 근본적인 해결을 요구하며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지난 3월 26일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진행된 기자회견 모습. (출처: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페이스북)


“소셜 미디어가 ‘집단 지성’이 모이고 정보가 공유되는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번 n번방 사건에선 ‘조직범죄’가 되었다”고 지적하며, 김애라 부연구위원은 “이것이 새로운 모습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전에 없던 일이 생기는 게 아니라, 기존의 성폭력 문화가 새로운 기술을 통해 다양하게 변주되는 양상으로 봐야 한다.”


“복제, 유포도 생산 행위” 소비, 소지도 가해 행위


조주빈 구속 이후, 어떤 죄를 물을 것이며 그가 어떤 처벌을 받을 것인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지만 의견이 분분하다. 많은 사람이 주요 공모자들뿐만 아니라 가담자와 소비자들에 대한 처벌이 어떻게 이뤄질 것인지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


‘n번방’과 같은 디지털 성착취 범죄에서는 생산과 소비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원 생산자가 누구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김애라 부연구위원은 “복제, 유포 또한 생산의 행위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나아가 디지털 ‘매개성’을 고려하여 젠더폭력의 가해와 피해 범주를 재설정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피해자에겐 (성착취 이미지/영상물을) 생산, 유통하는 사람들만큼이나 소비하는 사람들도 두려움의 대상”이라고 설명하며 “적극적 소비자/이용자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 주요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생산-유통-소비-소지의 단계가 굉장히 유기적인 만큼, 이 상황에서의 피해와 가해에 대해 세세한 연구와 더불어 어떻게 법을 적용할 것인지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


또한 ‘플랫폼은 아무 책임이 없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김애라 부연구위원은 “웹하드 카르텔(불법촬영 영상 유통) 때도 이미 목격했듯이 디지털 성착취 범죄에서 플랫폼은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플랫폼 서비스 자체에 관해 ‘역할 요구’가 적극적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가 제작한 카드뉴스 중. 텔레그램 성착취방 운영자만이 아니라 이용자들에 대해 제대로 처벌해야만 이같은 범죄를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김애라 부연구위원은 “그동안 기술매개 범죄는 주로 기술적 보완이나 대비책에 관한 논의들이 주를 이루어 온 경향이 있다”고 짚었다. 물론 기술적 보완과 대비책이 중요하지만 ‘왜 여성들, 특히 아동/청소년 여성들이 피해자가 되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이 빠져선 안 된다는 얘기다.


“이미지 기반 성착취라는 젠더 폭력의 기술매개적 특수성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기술매개가 젠더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 새로운 유형의 범죄에서 여성의 피해에 관한 심층적 논의가 더 필요하다.”


디지털 매개 ‘비신체적 성범죄’ 특수성 고려해야


윤덕경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디지털 성범죄의 주요 법적 근거가 되는 성폭력처벌법(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14조는 지속적으로 개정되어왔다고 설명했다. 자기촬영물의 비동의 유포행위, 촬영물이 아닌 재촬영물의 유포행위, 합성물에 의한 행위도 처벌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의의가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성적인 부위가 아닌 신체, 혹은 전신 등에 대해서는 성적 대상화를 포괄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일례로 ‘여고생 몰카’로 유통되는 여고생들의 전신 교복 사진이나, 성적인 신체 부위나 노출이 없는 신체 이미지에 대한 동의 없는 촬영과 유포 행위는, 사진이나 영상이 유포되는 과정에서 성적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언어적 성희롱에 노출되는 경우가 있지만, 이에 대해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한 대법원 판례가 있다.


윤덕경 연구위원은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 신체적인 성폭력이 아닌 ‘비신체적 성폭력’을 어떻게 중범죄로 다루어 처벌할 수 있을지, 법 개정 방향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다.


“디지털 성범죄는 강간 등 신체적 침해가 아닌 비신체적 성폭력으로, 물리적 접촉 없이도 피해자에게 성적 수치심을 주어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가하는 인격적 침해 범죄”라는 인식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특히 법정에서 ‘성적 수치심’이나 ‘성적 욕망’의 개념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성범죄가 인정되기도 하고 인정되지 않기도 하는 상황이라는 점에 문제를 제기했다.


나아가 ‘성적 수치심’이라는 성범죄 구성요건이 “이 범죄 구성에서 꼭 필요한 것인지”, “이 범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다른 요건으로 대체될 필요는 없는지”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범죄가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라는 ‘음란’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와 같이 인격권을 침해하는 성폭력 범죄의 경우, “성적 대상으로 하여”, “괴롭히는 행위”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거나 “성적 불쾌감, 모욕감” 등 피해 감정을 보다 중립적인 용어로 나타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윤덕경 연구위원은 “카메라 등 촬영죄 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법을 통해 “합의된 성적 촬영물이 동의 없이 유포된 이후, 제3자가 재유포하는 행위는 음란물 유포죄로 처벌할 수 있지만” 성폭력 범죄로서 가중처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안의 기준을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사생활 침해에 관련된 기본적인 범죄유형으로 마련”하고, “성적인 속성이나 불법성이 강화되는 범죄의 경우 가중처벌하는 방식”을 제시했다.


“형법에 사생활 침해 범죄(제316조의 2)를 신설하고, 성적 속성이 있는 사생활 침해의 경우 가중처벌하는 규정을 성폭력처벌법에 두는 방안도 가능하다.”


가해자 처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피해자 보호


불법 촬영도 문제지만 ‘n번방 사건’처럼 디지털 성범죄는 유포와 소비가 심각한 문제다. 윤덕경 연구위원은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텔레그램 성착취 공대위 활동가들이 4월 10일, ‘박사방’ 운영에 가담한 사회복무요원 강OO 재판을 방청하고 법원 앞에서 피켓을 들었다. 강OO는 텔레그램 성착취 혐의가 발견되기 이전, 한 여성을 협박한 사건과 관련하여 재판 중이다. 검찰은 이 두 사건을 병합하기를 요청한 상태. 공대위는 ‘n번방 사건’의 모든 가해자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재판 모니터링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출처: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페이스북)


그리고 유통/판매를 제재하는 방안으로 “불법영상물 유통·판매자 제재를 위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을 고려”하자는 의견도 냈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피해자가 가해자의 ‘고의 또는 그것에 가까운 악의’에 의해 피해를 입은 경우, 그러한 행위를 두 번 다시 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전보전 손해배상에 추가하여 불법행위자에게 실손해 이상의 배상금을 부과하는 제도”로 “이미 하도급거래공정화법, 신용정보법 등에 그 제도를 두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도입을 고려해볼 만하다.”


윤 연구위원은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안 필요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먼저 “디지털 성범죄의 정의를 성폭력방지법(성폭력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명시하는 방안”이다. 성폭력방지법은 피해자 보호와 성폭력 예방을 규정하는 법이므로, 그 피해자 범위를 보다 광범위하게 명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서 “아동·청소년 이용 음란물의 제작·배포 등”과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서 “사이버 음란물 유포죄 등”도 성폭력방지법에 포함하여 피해자들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디지털 성착취 근절을 위한 법제도 모색 라운드 테이블”에서는 그 외에도 다양한 법안 마련 의견이 제시되었다. 토론에 참여한 프로젝트 ReSET 활동가는 “디지털 성범죄물을 소지하는 행위만으로도 처벌”할 수 있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며, “관전 행위를 방조죄 혹은 교사죄로 처벌하는 방안 등이 논의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디지털 성범죄가 개인정보 유출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성착취 목적의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처벌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박주연)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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