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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어쩌라고요’…그녀의 이 말은 이해될 수 있을까
[페미니스트의 책장] 황정은 『양의 미래』
이 소설의 화자를 ‘양’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양은 어렸을 때부터 일을 해온 사람이다.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를 생각하면 늘 어디선가 일을 하는 모습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지금도 물론 일을 하고 있다. 장소는 지하에 있는 서점이다. 계단 위의 벚나무에서 떨어진 꽃잎이 때때로 바람에 소용돌이치는 광경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가장 좋은 시간의 햇빛을 받아보지도 못하고 창백한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쏟아지는 일거리를 처리해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양은 서점으로 담배를 사러 온 한 소녀를 만나게 된다. 소녀는 어떤 남자들과 같이 있었고, 양은 그들이 별로 친밀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가서 뭔가 물어볼까, 아니면 경찰에 신고할까. 잠깐 고민하던 양은 금방 그만둔다. 경찰에게 가서 뭐라고 말해야 하나. 어떤 소녀가 남자들과 이야기하고 있다고? 그런 사유로 신고를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만약 신고가 받아들여진다 해도 괜찮을까? 나는 매일 여기서 일해야 하는데, 저들이 보복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양은 결국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일은 양을 실종된 소녀의 마지막 목격자로 만든다. 모두가 반복해서 양을 찾아와 수없이 많은 질문을 한다. 양의 일생을 통틀어 한 번도 그렇게 많은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다.
실종된 소녀의 어머니는 양이 일하는 서점 앞에서 계속 전단지를 나눠주다가, 결국엔 딸의 사진을 세워놓고 하루종일 서점 앞에 엎드려있다. 출퇴근하면서, 혹은 길고양이의 밥그릇을 채워주면서 늘 그 웅크린 등을 바라봐야 하는 양은, 지하 안에서 일하는 내내 그 몸뚱이에서 도망칠 수 없는 양은 어느 날 문득 그렇게 생각한다. 어쩌라고요.
‘어쩌라고요, 아줌마. 나더러 뭘 어쩌라고요.’
대체 어쩌라고. 그 위악적인 말에는 순간 읽기를 멈추게 하고 시선을 머물게 하는 힘이 있다. 이 소설을 생각하면 늘 그 한 문장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아주 새롭고 놀라운 말이기 때문은 아니다. 많은 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그 말을 들을 수 있다. 그 말에 담긴 무책임과 외면도 낯설지 않다.
그 말은 공감과 연민의 정확히 반대 지점에 있는 무관심의 언어다. 그 말은 누군가의 고통을 한없이 납작하게 만들고, 나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만들고, 사람과 사람의 연결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어쩌라고’는 당신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말과 같다.
황정은 저 『양의 미래』(Kong’s Garden) 전승희 역, 아시아, 2015
같은 고통을 통해 연대감을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사람이라면, 양의 ‘어쩌라고’는 조금 더 불편한 선언과도 같을 것이다. 흔히 여성에게 가해지는 위협과 폭력의 희생자일 것이 분명한 그 소녀를 향해 양은 어떤 공감도 연민도 드러내지 않는다. 양은 ‘아줌마 딸, 그 애는 나한테 아무도 아니라고요’라고 생각하며 소녀와 자신 사이에 분명하고도 날카로운 선을 긋는다. 그 사이에는 어떤 책임도, 공감도, 연결도 들어설 여지가 없다. 고통의 연대는 ‘어쩌라고’ 앞에서는 완전히 불가능하다.
‘어쩌라고’는 이토록 비윤리적인 언어로 보인다. 이 말이 단지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장면이었다면, 양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비판의 대상으로 삼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겐 하나의 장면이 아니라 한 권의 책이, 하나의 대사만이 아니라 양의 인생 전체가 주어져 있다. 나는 아주 낯선 사람의 이야기에서 아주 익숙한 대사를 발견할 때마다, 이 하나의 대사가 지닌 전사(前事)를 누군가에게 해명하기 위해 이 모든 이야기가 쓰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곤 한다. 어떤 말들은 이해받기 위해 책 한 권이 필요하고, 어떤 선택은 이해받기 위해 누군가의 삶 전체가 필요하다. 아주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는 진실들이 있다.
‘어쩌라고요’에도 어떤 진실이 담겨 있다. 양은 선택을 했다. 의심스러운 장면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선택했다. 그러나 양이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사람들이 지금껏 계속 양을 무시했고 만만히 봤고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은 자신의 의심이 의미 있게 받아들여질 거라고 확신하지 못했고, 신고자로서 적절한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라고’, 그 안의 담긴 원망은 자신의 선택이 온전히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의 감정이다.
소수자의 선택은 많은 부분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주어진 최소한의 조건들, 이득과 손실이 삶의 맥락 위에서 형성되고 그 역동 속에서 선택을 수행한다. 그래서 그 선택들은 간명한 한두 개의 문장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간직한 자들은 늘 간명한 한두 개의 문장으로 대답하기를 요구받는다. 실종된 소녀의 어머니는 매일 서점에 찾아와서 양에게 계속 질문한다. 마지막 질문은 늘 같다.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양이 가진 대답은 하나뿐이고, 그 질문이 허용하는 대답도 하나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외의 이야기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고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다.
한 문장의 간명한 진실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길고 복잡한 이야기란 건 변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이 단지 변명에 불과한 것이라면 새로운 언어, 삶의 진실은 결코 발견될 수 없다. 어떤 말이 이해하기 쉬운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그 말이 기존의 언어에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언어는 늘 변명 같은 누군가의 삶의 서사에서, 거추장스러운 단서처럼 보이는 어떤 망설임에서 발견된다.
‘어쩌라고요’는 그렇게 나를 붙잡은 문장이지만, 결국 입 밖으로 내뱉어지지 못한 말이기도 하다. 그 말이 이해받기 위해선 책 한 권이, 자신의 인생 전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양도 알았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양은 지하의 합판 벽 뒤에 길고 거대한 통로가 있다는 소문을 듣는다. 아파트의 경비는 그 합판 벽 뒤에 통로 따윈 없고, 그저 곰팡이 핀 벽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양은 그 안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낀다. 합판의 벽을 뜯어낸다면 그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길고 긴 삶인지, 초라한 변명인지 알 수 없는 것이 합판 벽 뒤에 아직 숨어있다. 실종된 소녀의 마지막 목격자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아직 사람들은 모른다.
[페미니스트의 책장]은 대학 페미니스트 공동체 유니브페미(UnivFemi) 회원들의 글로 채워집니다. 이 기사의 필자 은진(호네시)님은 “글 쓰는 대학 페미니스트”입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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