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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스쿨에서 ‘기후변화와 신재생에너지’를 만나고 5년 후

<우리가 독일에 도착한 이유> 지선: 배터리 엔지니어, 볼프스부르크


※ 밀레니엄 시대, 한국 여성의 국외 이주가 늘고 있습니다. 파독 간호사로 시작된 한국 여성의 독일 이주 역사 이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일다>는 독일로 이주해 다양한 직업군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 여성들을 만납니다. 또한 이들과 연관된 유럽의 여러 젠더와 이주 쟁점에 대해서도 함께 다룹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지선 이주 이력서


이주 7년 차.

2012년 베를린자유대학교 서머스쿨(Summer School) 한 달 참가

2013년 베를린공과대학교 석사 공부 시작

2017년 독일 남부 모터회사에서 6개월 간 인턴

2018년 전자공학 석사 졸업

2018년 9월~현재 폭스바겐 협력사 전기자동차 배터리 테스트 엔지니어


지선이 출퇴근하는 볼프스부르크(Wolfsburg)는 독일 니더작센주의 도시로 인구는 약 12만 명이다. ⓒwolfsburg.de


기후변화와 신재생에너지, 인생을 바꿀 키워드를 만나다


지선은 ‘스펙 세대’다. 대학을 졸업할 때 ‘학점’ ‘학벌’ ‘어학연수 경험’ ‘토익 점수’ 등이 없으면 취업을 시도하기조차 어렵다. ‘ 스펙 세대’ 학생들은 좋은 학점을 만들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면서도 돈을 모아 어학연수도 다녀와야 한다. 지선은 삼수 끝에 어렵게 입학한 대학인만큼 남보다 늦었다는 생각에 계절 학기까지 들으며 지냈다.


하지만 4학년이 됐을 때 지선에게 ‘스펙’은 없었다. 높은 학점도, 유창한 외국어 실력도, 대외활동 경험도 별로 없었다. 기업 인턴으로 일할 기회조차 잡기 어려웠고, 취업 준비에 대한 의욕은 점점 사라져갔다. 보통 2학년이나 3학년 때 신청해서 떠나는 해외 교환학생도 4학년이 돼서야 신청했지만, 취업에 대한 압박으로 취소했다. 취소한 대가로 80시간 봉사활동도 해야 했다.


모두가 취업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달려갈 때, 지선은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베를린자유대학교의 서머스쿨(Summer School)에 참가했다. 교환학생 신청을 취소했지만 짧게라도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었고, 전 세계 학생들과 여러 교양 수업을 듣고 학점도 인정받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해 베를린에서 지선은 자신의 인생을 바꿀 키워드를 만나게 된다. ‘기후변화와 신재생에너지’.


당시 공대에서 반도체 중심의 전자공학을 공부하고 있던 지선은 서머스쿨 기간 동안 기후변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독일은 이미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한 달간 지내는 학교 건물 내에 온수를 데우는데 필요한 에너지도 태양열로 얻고 있는 모습은 지선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때만 해도 출시 전인 전기자동차에 관한 관심도 생겼다.


여러 이슈 중에서도 지선은 태양열 에너지에 가장 큰 관심이 생겼다. 이후 이에 대한 공부를 이어가면서 학사 논문도 블루투스와 태양열 에너지를 연결시킨 주제로 썼다. 시간이 지날수록 베를린을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커져만 갔고, 지선은 졸업과 동시에 막 취업 합격 소식을 받아드는 동기들을 뒤로한 채 조용히 독일로 다시 출국한다.


스펙 싸움에서 져서 취업 준비조차 엄두가 나지 않았던 공대생이었던 자신이 5년 뒤에 독일 자동차회사 폭스바겐(Volkswagen)에서 일하는 배터리 엔지니어가 된다는 걸 꿈에도 모른 채.


자동차 수업 들으며 ‘배터리’ 공학에 매력 느껴


6개월 만에 다시 베를린으로 온 지선은 바로 석사 입학 준비를 시작했다. 베를린공대 석사과정 시작 전에 들어야 하는 석사 입학 준비과정(propädeutikum)이 있어, 한 학기 동안 독일어로 물리와 수학 수업을 듣고 나서 까다로운 입학시험에 통과해야 했다. 무료 과정이라 수업 경쟁률이 치열했다. 독일어만 배우던 어학원 수업과 달리 학문에 쓰이는 독일어를 배울 수 있어서, 지선이 석사 공부를 시작할 때 큰 도움이 된 시간이었다.


시험 통과 후 지선은 공대 전자공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전체 학생 중 독일인과 외국인 비율이 8:2였고 당시 그는 전자공학과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공대 남녀비율은 8.5:1.5 정도로 여성 비율이 여전히 크게 낮았다. 전공별로 보면 전자공학, 자동차공학, 기계공학과에는 여학생 비율이 낮고 화학공학, 에너지 공학, 건축학과에는 여학생 비율이 꽤 높은 편이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공대 내에는 여학생을 위한 프로그래밍 코스가 따로 있고, 여학생들의 학교 적응을 도와주는 모임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고 한다. 


“전자공학과를 전공하면 배터리 공학, 자동차 모터 등 세부 전공 여부에 상관없이 자동차 관련 수업을 필수로 들어야 해요. 이건 베를린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공대도 마찬가지고요. 자동차공학과가 따로 있지만, 전자공학과에서도 자동차 관련 수업을 들으면서 독일이 자동차 강국이 될 수밖에 없다고 느꼈어요.”


지선이 현재 ‘배터리 엔지니어’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자동차 모터를 공부한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 석사 1학기 때 자동차 모터 관련 수업을 들었을 때 구술시험을 보는데, 교수가 모터를 돌리는 배터리에 대해서 계속 물은 적이 있다. 지선은 시험 이후 교수에게 받은 질문을 중심으로 배터리 관련 공부를 처음 하게 되었고, 어떤 분야보다 흥미를 크게 느꼈다.


전기자동차에 들어가는 배터리 모습 ⓒhttps://volkswagenag.com/de


이후 배터리 관련 공부를 계속했고 석사과정 총 4학기 중 3학기가 시작할 때, 지선은 이미 한국에 있는 배터리 관련 기업에 취업한 상태였다.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되는 상황이었다.


독일 친구들 사이에서 ‘선샤인’(sunshine)이라고 불릴 정도로 밝고 쾌활한 성격의 지선이지만 유학 생활은 하루하루 쉽지 않았다. 독일어로 공부하면 할수록 어렵게만 느껴졌고, 졸업 논문을 쓸 때는 매일 자료를 읽고 코딩(컴퓨터 프로그래밍)하면서 더욱 지쳐만 갔다. 지선은 이때 운동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석사 공부하면서 힘들 때 저의 유일한 돌파구는 수영장이었어요. 한국에서도 수영을 열심히 한 터라 독일 와서도 늘 수영장에 갔죠. 유학 생활하면 혼자 있는 시간이 가뜩이나 많은데 수영할 때도 혼자서만 하니까 너무 외로웠어요. 그래서 파트너와 함께 하는 스포츠인 테니스를 시작했는데, 일상에 활기도 생기고 너무 좋았어요. 한국과 달리 테니스 코트도 쉽게 빌릴 수 있어서 스트레스 받으면 거의 반사적으로 테니스 치러 갔어요.”


무사히 졸업하고 이제 한국으로 가서 이미 합격한 기업으로 출근하면 되는 상황에서, 지선은 평생 직장인으로 산 아버지로부터 조언을 듣는다. 너처럼 자유로운 아이가 한국 직장생활에 잘 적응할지 모르겠으니 귀국 여부에 대해 다시 한번 잘 고민해보라고. 지선은 졸업 후 짧은 여행을 하면서 자신을 시험해보기로 한다. 독일에서 인턴 일에 도전해보기로 한 것이다.


석사 재학 당시 한 학회에 참여한 지선 모습. ⓒ지선 제공


독일 남부 소도시에서 인턴 일 시작


독일에서 줄곧 베를린에서만 지낸 지선에게 ‘독일’은 곧 ‘베를린’이었는데, 처음 베를린을 떠나 남부 소도시에 있는 모터 회사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독일 바덴뷔템부르크 주와 협약을 맺어서 인턴 일자리를 연결해주고 장학금도 주는 프로그램을 통해 인턴을 구할 수 있었다.(현재는 없어짐)


지선이 인턴 일을 시작한 회사는 당시 무인 트랜스포터 등에 탑재될 배터리를 개발하고 있었다. 지선의 업무는 니켈 수소 배터리의 잔량을 계산하는 일이었다. 학교에서는 작은 단위로만 연구하다가 회사에서 큰 단위로 연구하니까 일이 재밌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니켈 수소 배터리는 한국에서 접하기 어렵고, 전 세계적으로 일본 점유율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에 지선은 이 배터리에 대한 전문성을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열심히 일했다.


업무 환경도 훌륭했다. 업무 시간은 오전 6시부터 저녁 7시 사이에 자유롭게 7시간을 채워 일하면 되었다. 그리고 아침 식사 시간 20분, 점심시간 30분이 주어졌다. 지선은 주 35시간만 채우면 돼서, 하루에 8~9시간 일하고 주4일 근무를 하기도 했다. 직원 휴가는 평균 연간 30일이었다.


지선은 적극적으로 일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서슴없이 질문했고 주어진 과제를 빠르게 수행한 다음, 자신이 해보고 싶은 일과 과제를 먼저 제시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배터리 분야에 대한 전문성도 쌓을 수 있어서 소중한 시간이었다.


문제는 회사 밖의 일상이었다. 전 세계에서 온 친구들과 먹거리, 즐길 거리가 가득했던 베를린 문화를 좋아하는 지선이다 보니 한식당 하나 없는 조용한 소도시가 지선은 답답하게 느껴졌다. 어딜 가나 100% 만족할 수는 없지만, 지선은 다양한 문화 콘텐츠가 풍부해 활기가 넘치는 대도시가 그리웠다.


언어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다. 지선이 속해 있었던 혁신 프로젝트팀은 총 7명 중 박사 출신 연구자가 4명이었고, 모두 전자공학을 전공한 베테랑 경력자들이었다. 지선은 팀원들과 일할 때마다 이제야 중‧고급 단계로 올라왔다고 생각한 독일어 실력이 다시 초급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독일인만 있는 회사에서 업무 보고를 할 때마다 목소리가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독일에 남아 인턴 일에 도전해본 것은 다시 생각해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지선은 인턴 일 덕분에 독일에 계속 남아 취업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용기가 생겼고, 나름 어떤 조건으로 일자리를 구할지 정리가 됐다고 한다. 그는 “나보다 나이 많은 독일 대선배들과 일하면서 독일 회사 문화를 접했으니, 보다 큰 도시에서 전 세계에서 온 동료들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전기자동차 배터리 테스트 엔지니어로 취직하다


베를린으로 다시 돌아온 지선은 인턴 생활 이후 바로 취업 준비를 시작하면서 ‘독일 회사 정직원 취업이면 무조건 오케이!’란 기존의 생각을 버리고 5가지 기준을 만들었다. 젊은 직원이 많은 회사, 전기자동차 업계, 지역은 베를린, 원하는 연봉 제시(협상 없음), 인터내셔널한 큰 회사.


이 5가지 기준을 중심으로 베를린에서 가까운 곳부터 채용 정보를 검색했지만, 배터리 관련 일자리가 많지 않았다. 출퇴근 거리를 약 200km 반경까지 넓혔을 때 구직 정보가 하나 떴다. 폭스바겐(Volkswagen). 폭스바겐은 직접 고용 외에도 채용을 담당하는 협력사를 통해 직원을 채용하는데, 협력사 중 한 곳에서 배터리 엔지니어를 구하고 있었다.


지선은 바로 지원했고, 2018년 9월부터 폭스바겐에서 ‘배터리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대부분 지선처럼 협력사를 통해 폭스바겐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들은 평균 2~3년 뒤 폭스바겐에 경력직으로 입사하는 경우가 많다. 지선도 곧 폭스바겐 경력직으로 지원할 계획이다.


취업을 준비할 때 가장 좋았던 점은 공채 시즌이 따로 없는 독일 채용 문화였다. 채용공고가 떠있는 기업 정보를 찾아 언제든 지원할 수 있었다. 서류전형에서 떨어진 적도 있고, 면접을 보러 갔을 때 잘 모르는 기술에 대해 질문하는 기업도 있었지만, 지선은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최종합격하지 못하더라도 면접 경험을 토대로 다시 열심히 준비해서 도전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불안하긴 했지만 취업을 못 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면접 자리에서는 지선만의 강점을 부각해 말했다. 배터리 관련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전자공학을 공부하면서 어떤 기술을 배웠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소개했다. 지선은 “면접 때, 배터리를 직접 전공해서 이 회사에 들어오는 지원자는 많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또 “업무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인턴 때 연차 높은 독일 직원들과 어떻게 잘 지냈는지, 꾸준한 운동으로 어떻게 건강 유지를 하고 있는지 다양한 주제별로 나 자신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답변을 다양하게 준비했다”고 말했다.


 볼프스부르크에 위치한 폭스바겐 기업 전경 ⓒwww.volkswagenag.com


‘배터리 엔지니어’는 전기자동자 성능의 핵심인 배터리를 테스트한다. 전기자동차 바닥에는 보통 250개 정도의 배터리가 깔려있는데, 춥거나 비가 오는 등 날씨에 민감해 여러 원인에 따라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지선은 배터리에 오류가 발생하는 여러 경우의 수에 대해 컴퓨터로 프로그래밍하고 다양한 온도에 따라 배터리를 테스트한다. 모든 오류에 대한 정보는 기록해서 보고하고, 오류에 대해서는 소프트웨어 팀과 공유해 오류를 수정한다.


지선은 입사 한 달 만에 블루카드(EU Blue Card)를 받았다. ‘블루카드’는 유럽연합(EU)이 고급인력을 유치하기 위해 만든 정책 중 하나로, 대학 학사 학위와 5년 이상의 업무 경험 등의 조건이 충족되면 신청할 수 있다. 연봉 기준은 세전 55,200유로(한화 약 7,223만 원, 2020년 1월 1일 기준) 이상이어야 하며 수학자, 엔지니어, 자연과학자, 기술자, 의사는 43,056유로 이상이면 된다.


지선의 경우, 관련 석사학위가 있어 근로계약서만으로 한 달 만에 블루카드를 취득할 수 있었다. 지선은 블루카드를 신청할 때 신청서, 여권, 근로계약서, 학교 졸업증과 성적표, 건강보험 확인증을 준비했다. 올해에는 영주권을 신청할 계획이다. 보통 블루카드 소지자가 일정 수준의 독일어를 구사할 줄 만 알면 21개월 후부터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다.


‘스트레스 제로’ 일상을 즐기는 중


지선은 독일에서 취업한 후 1년 반이 지난 지금,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스트레스 제로’ 상태로 살고 있다. 비록 베를린에 살며 볼프스부르크까지 매일 기차로 출퇴근하는 데만 왕복 4시간이 소요되지만, 일을 마치고 퇴근 후 베를린에서 보내는 일상이 행복하다.


“독일에 오고 나서는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서만 살았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계속 고민했고요. 석사 공부를 할 때는 공부도 어렵고 논문도 써야 하는 압박이 심했는데, 오히려 일 시작하고 나서는 휴식기를 보내는 기분이에요. 주말에 마음 편히 한국 TV 프로그램도 보고요.”


지선이 요즘 느끼는 행복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기분에서 온다고 했다. 배터리를 테스트할 때 오류가 발생하면 그 오류가 왜 발생했는지 깊게 연구하고, 그러다 보면 오류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렇게 또 다른 배터리를 테스트하는 일을 하며 하루하루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무엇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행복이 크다.


폭스바겐의 전기자동차 이미지 ⓒwww.volkswagen.de


다만 지선은 정체되어 있고 싶지 않다. 사실 독일어 때문에 정체되기도 쉽지 않다. 아무리 공부해도 이주자에게 ‘독일어’는 외국어이기 때문에, 지선 역시 언어에 대한 스트레스는 계속 있다. 그래서 지선은 매일 고민했다고 한다. ‘아무리 공부해도 독일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 없다면 그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지선은 해답으로 ‘자격증 취득’을 선택했다.


최근 지선은 ISTQB 자격증(ISTQB Certified Tester)을 땄다. 이 자격증은 비영리 국제 소프트웨어(SW) 테스팅 전문가 네트워크인 ‘국제 소프트웨어 테스팅 자격 위원회’(ISTQB: International Software Testing Qualification Board)에서 발급한다. 시험은 실무 관련 6개 영역으로 나눠진 필기시험으로 진행됐으며, 지선의 경우 출퇴근 시간에 공부에만 매달려 두 달 만에 시험에 합격했다.


“독일은 자격증이나 증명서(Zertifikat)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거든요. 예를 들어 제가 에너지 공학 전공한 독일인보다 입사할 때 좋은 대우로 입사했는데, 전자공학을 공부했다는 이유 때문이었어요. 제가 일하는 영역에서는 ‘기계공학’ ‘전자공학’ 전공자를 우대해주거든요. 여러 협상 테이블에서 몸값을 높이려면 늘 자격증, 증명서가 필요해요. 그래서 자격증을 따기로 결심했어요.”


자격증 시험은 영어/독어 중 선택할 수 있었지만, 지선은 일부러 독일어로 시험을 봤다. 시험을 보기 전, 자격증에 대한 고민을 팀장에게 털어놓았더니 그는 “테스트 엔지니어, 더욱이 너처럼 프로그래밍하는 엔지니어에게는 정말 많은 도움이 될 자격증이다. 그런데 벌써 이직할 생각은 아니지?(웃음)”란 답을 들었다. 지선의 열정에 팀장 역시 자극을 받아 함께 자격증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정작 지선만 합격하고 팀장은 몸이 좋지 않아 중도 포기했지만 말이다.


지선이 획득한 ISTQB 자격증 이미지 일부 ⓒ지선 제공


지선을 만나고 나니 독일 친구들에게 그가 왜 ‘선샤인’이란 별명을 얻었는지 알 수 있었다. 독일에서 지내는 동안 만난 사람 중 가장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여성이었다. 지선이 원하는 일을 하며 누구보다 독일에 행복하게 정착하고 있는 것은 그만의 건강한 에너지 덕분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지선의 강점인 지구력과 성실함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유럽연합이 블루카드 발급을 통해 특별 전문영역으로 인정하는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는 점도 크게 작용할 것이다.


지선은 앞으로 독일에서 이루고 싶은 거창한 꿈은 없다고 했다. 지금 같이 일하고 있는 동료들은 승진해서 엔지니어보다는 관리‧감독하는 매니저가 되고 싶어 하지만, 오히려 지선은 계속 ‘엔지니어’로 살고 싶다. 독일은 승진 여부를 본인이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지선은 관리자로 승진하지 않고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엔지니어’로 살 수 있을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 지선이 공학과 친환경 이슈를 접목한 엔지니어로 더욱 성장해 독일 자동차 업계에 부각을 나타내는 실무자가 되는 모습을 그려본다. 이미 폭스바겐에서 일하는 한국 여성 엔지니어로, 많은 이들에게 긍정 에너지를 전파하고 있지만 말이다.


독일, 공과대학별 여학생 지원 프로그램 운영


독일에서는 공과대학별로 다양한 여학생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지선이 다닌 베를린공대의 경우, 지난 가을학기에 ‘정보기술 여성 네트워크’를 개설했다. 여학생들은 매주 수요일 열리는 네트워크 회의에 참석해 다양한 공학 분야에 대한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토론하는 기회를 얻는다. 이와 함께 관련 이슈에 대한 최신 뉴스와 연구 과제에 대한 정보도 공유한다. 회의에는 교수와 학생이 함께 참여한다.


강의실에서 정기적으로 여학생을 위해 열리는 프로그래밍 수업도 있다. 학과 수업 시간 외에 열리는 프로그래밍 수업에서 여학생들은 자바(Java), C언어 등 여러 프로그래밍 언어에 대해 배울 수 있다. 따로 등록과정 없이 누구나 강의 날짜에 맞춰 강의실을 찾아오면 되며, 사전 지식이 없는 학생들도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는 내용으로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다.


2019년 열린 ‘여성 커리어 주간’ 포스터. www.proscience.tu-berlin.de ⓒNFA Fak. VII / proScience


11월에는 ‘여성 커리어 주간’(Women’s Career Week)이 열리고 있다. 여학생들은 나흘 동안 열리는 커리어 주간에 취업 준비부터 기업 견학, 기업 관계자들과의 미팅 등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다. 2019년 프로그램을 보면, 주제별로 열리는 워크숍을 통해 면접 인터뷰 준비, 연봉 협상 방법, 새로운 입사 지원서 형식과 항목별 기술하는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다. 전문가를 통해 여러 협상 상황에서 자신의 강점을 분석해 확실하게 표현하는 방법 등도 배운다.


무엇보다 참가자는 관심 있는 회사를 직접 방문해 업무 분위기를 파악하고 직원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지난해에는 독일 최대 전기·전자 기업 Siemens(지멘스)와 세계적인 컨설팅 그룹 ‘KPMG  International’을 방문했다. 이와 함께 행사 기간 동안 여학생들은 컴퓨터 제조업체인 IBM, IT 서비스 제공업체 ITDZ(IT‑Dienstleistungszentrum) Berlin 등 여러 기업의 인사담당자에게 직접 상담을 받을 수 있다.


이처럼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 분야 여학생 지원 프로그램이 중요한 것은, 전공 이후 여성이 경력을 이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STEM 분야 성별 불평등은 여성의 진로 이탈 현상을 일컫는 ‘새는 파이프라인’(leaky pipeline)에 의해 뒷받침된다. STEM 영역의 여성은 졸업하기 전 다른 전공으로 바꾸거나, 졸업 후 다른 분야 커리어를 선택하는 등 특정 단계에서 이탈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독일 언론 <도이치벨레> 보도(“Women are less visible in STEM: Why?” 2019년 6월 17일)에 따르면 여성은 ‘고용 과정에서 겪는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 관념’, ‘여성 스스로 갖는 자기 고정 관념’ 등 여러 차별 요인으로 인해 파이프라인에서 누출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 필자 소개: 채혜원. 독일 베를린 거주. 한국에서 ‘우먼타임스’, ‘여성신문’ 기자와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에서 전문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현재 국제 이주·난민 페미니스트 그룹 <International Women Space> 멤버로 활동 중이며,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유럽 페미니즘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chaelee.p@gmail.com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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