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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수동적인 아시아 여성’ 편견 딛고 높이 날다

<우리가 독일에 도착한 이유> 미경: 레드불 수석 디자이너,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 밀레니엄 시대, 한국 여성의 국외 이주가 늘고 있습니다. 파독 간호사로 시작된 한국 여성의 독일 이주 역사 이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일다>는 독일로 이주해 다양한 직업군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 여성들을 만납니다. 또한 이들과 연관된 유럽의 여러 젠더와 이주 쟁점에 대해서도 함께 다룹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미경 이주 이력서


이주 18년차.

1994년~2001년 한국에서 여러 여성복 브랜드 디자이너로 근무

2002년 아무 계획 없이 독일에 도착

2002년~2007년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학사·석사 유학 및 디자이너 일 병행

2007년~2014년 스위스 럭셔리 패션 브랜드 아크리스(AKRIS) 디자이너

2014년~2019년 독일 럭셔리 패션 브랜드 휴고보스(HUGO BOSS) 시니어 디자이너

2019년~현재 레드불(Red Bull) 및 알파타우리(AlphaTauri) 수석 디자이너


독일 언론 기사를 읽다 보면 패션과 연관된 대중의 관심이 연예인보다 영국 왕실에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연예인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에 대해 다룬 기사는 드문 반면, 케이트 미들턴(영국 왕세손비)과 메건 마클(영국 왕자비)의 옷에 대한 기사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미경의 이름을 처음 발견한 건 2018년 가을, 메건 마클이 입은 가죽 스커트에 대한 기사였다.


기사를 읽다가 디자이너 이름을 발견했다. ‘MiKyong’. 한국 이름이었다. 독일 럭셔리 패션 브랜드 휴고보스(HUGO BOSS)에 한국 여성 디자이너가 있구나, 한국 여성일까 아니면 독일에서 나고 자란 여성인데 한국 이름을 쓰는 걸까. 그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메일주소를 찾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미경을 만날 수 있었다.


<사진 1> 미경이 수석 디자이너로 있는 브랜드 ‘알파타우리’ 이미지. ⓒhttps://alphatauri.com


유럽에서 한국 여성이 ‘수석 디자이너’가 되다!


미경은 2019년, 평생 꿈꿔왔던 일을 이뤘다. 디자이너 중 가장 높은 직급인 ‘수석 디자이너’(Head of Design)가 된 것이다. 미경이 최근 스카우트된 곳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위치한 레드불(Red Bull)이다. 에너지 음료로 유명한 레드불은 여러 축구단과 F1팀 등 프로 스포츠팀을 운영하고 있으며, 알파타우리(AlphaTauri)라는 패션 브랜드를 가지고 있다. 미경은 이곳에서 알파타우리 브랜드 총괄은 물론 레드불 소속 선수들의 옷과 대중에게 판매되는 다양한 레드불 스포츠웨어를 디자인한다.


미경이 맡은 ‘수석 디자이너’는 부서 최고책임자 자리로, 디자인을 총괄하는 일과 동시에 제작부터 마케팅, 판매촉진 등의 업무를 총괄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 일까지 모두 맡는다. 레드불 측은 미경이 원하면 누구든 데려와서 팀을 꾸릴 수 있고, 하고 싶은 디자인을 할 수 있도록 원하는 만큼 예산을 지원한다고 약속했다.


디자이너 일은 자동차 세 대를 동시에 운전하는 일과 같다. 첫 번째 차에서는 1년 뒤 시즌 옷에 대한 디자인 스케치 작업을 한다. 이때 스케치 작업과 동시에 드레이핑(draping) 작업, 즉 마네킹에 직접 천을 대고 재단해서 입체적으로 옷을 만드는 작업을 하기도 한다. 스케치나 드레이핑 작업이 끝나면 패턴사에 작업물이 넘어간다.


두 번째 차에서는 6개월 전 자신이 디자인한 샘플 옷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확인한다. 모델에게 입혀서 디자인대로 옷이 나왔는지, 원단에는 문제가 없는지 등을 꼼꼼하게 살핀다. 이 작업이 끝나면 생산 공장으로 넘어가 옷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간다.


세 번째 차에서는 두 번째 차에서 작업한 옷이 공장에서 도착하면, 최종 확인을 한 뒤 캠페인과 옷 정보를 담은 룩북(look book)을 제작하고 세일즈팀에서는 판매를 시작한다. 미경은 이 순간이 제일 긴장된다고 했다. 수석 디자이너는 이 모든 업무에 더해 모든 디자이너의 디자인 방향을 잡아주고, 옷 광고 콘셉트를 잡는 일 등을 총괄한다.


미경은 지금도 꿈을 꾸는 것 같다. 유럽에서 한국 여성이 ‘수석 디자이너’가 되다니. 하지만 미경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 17년간 독일과 스위스에서 보낸 인고의 세월이 있다. 온갖 차별 대우 때문에 찾아온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스스로 병원도 갔었고, 분노 조절이 되지 않아 며칠 밤을 눈물로 지새운 적도 많다. 그 시간을 견디고 비로소 원하는 자리에 섰기에, 미경은 들뜨거나 기쁨에 취하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지난 17년간 저 자신을 감추고 살았어요. 저는 성공하고 싶었는데, 아시아 여성이 성공하고 싶다는 야망을 드러내니까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평이 돌아오고 기회가 없어지는 기분이었어요. 그저 나 자신으로 살고 싶은데, 유럽 사회가 저를 ‘착하고 수동적인 아시아 여성’이라는 편견에 갇히게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나를 드러내지 않고 일하면서, 높은 자리로 올라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긴 시간 끝에 드디어 디자인 수장이 된 터라 스스로 기대하는 바가 많아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미경 모습. ⓒ채혜원


서른두 살, 독일로 도망치듯 도착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미경은 주어진 것이 아닌 ‘나 자신’을 찾고 싶었다. ‘한국인’ ‘여자’ ‘미경’이라는 이름처럼 주어진 것 외에, 진짜 내가 누구인지 찾기 위해 서른 살 즈음에 떠나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언어를 익히며 살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바람이 실현될 거란 기대는 없었다. 디자이너로 잘 자리 잡고 있었고, 남들처럼 결혼하고 사는 게 효도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불치병 진단을 받게 됐다. 남동생과 여동생은 아버지를 위해 모든 상황을 바꾸기 시작했다. 박사과정을 준비하던 남동생은 공부를 그만두고 취직 준비에 들어갔고, 여동생은 결혼을 서둘렀다. 장녀인 미경 역시 뭔가 희생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지만, 희생할 자신이 없었다. 그즈음에 결혼을 앞두고 있던 남성과 갑자기 헤어지게 되면서 미경은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어졌다.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자신의 서른 계획을 실행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우연히 만난 독일인을 통해 독일 대학은 등록금을 받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고, 무작정 독일로 떠났다. 아니, 도망쳤다.


서른두 살이 되던 해 독일에 도착한 미경은 어학 비자를 받아 독일어 공부부터 시작했다. 같이 공부하는 수강생들이 모두 입시 준비생이다 보니 선생님들의 권유가 이어졌다. 한국에서 대학을 나왔지만 여기서 포트폴리오를 준비해 미대에 들어가서 공부해보라고. 한국 대학에서 의류학을 공부한 미경은 자신이 미대에서 어떤 걸 공부할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었다. 베를린 미술대학 교수님을 무작정 찾아가 청강하고 싶다고 말했고, 허락 끝에 수업을 들으며 미경은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교수들이 미경의 재능을 인정해주었고, 미경은 예술대학에 최종 합격하면서 유학 생활을 시작한다.


독일에서 다시 대학에 입학해 공부한 5년의 시간은 미경에게 ‘나 자신을 찾는 과정’이었다.


“저는 한국에서 대학 졸업 전인 1994년부터 일을 시작했어요. 당시 한국은 경제적, 문화적으로 풍요로웠죠. 디자이너로 빠르게 인정받아서, IMF 금융위기 때도 실직하지 않았어요. 그 와중에도 마음 한구석에 불안함이 있었어요. 내 디자인이 진짜 나 자신으로부터 온 것인지 확신이 없었거든요.”


미경은 독일에 도착한 이후, 정체성을 찾는 일에 몰입했다. 잘하는 것보다 다른 것에 높은 점수를 주는 독일 문화에서 많은 걸 배웠다. 뻔한 주제를 두고도 서로 다른 작품을 창의적으로 만들어오는 동기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기분이었다. 자신만의 아이디어로 남들과 다르게 생각한 디자인을 펼쳐내는 일을, 미경은 학교에서 배웠다.


5년간 학사와 석사 공부를 모두 마친 미경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유럽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다. 국제결혼을 통해 정착하고 싶지 않아서 독일 남자와 연애도 하지 않았다. 고민 끝에 미경은 디자인 경연대회에 나가기로 결심한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디자인을 선보이면 좋은 기회가 될 거라 생각했다. 졸업 후 40일 동안 경연대회 준비에만 매진했고, ‘참가상은 받을 수 있겠지’란 작은 바람으로 뮌헨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했다.


경연대회 과제로 만든 미경의 옷 중 일부 ⓒ미경


‘아크리스’ 대표에게 직접 스카우트되어, 스위스로 이사


참가상이라도 기대하며 친구들과 놀러 가듯 참석한 시상식에서 미경은 당당히 1등을 수상한다. 너무 기쁘고 놀란 미경이 하도 소리를 질러 시상식은 웃음바다였다고 한다. 경연대회 과제는 ‘예술 여행에 관한 여섯 가지 옷 디자인’이었다. 당시 돈 없는 학생이었던 그는 ‘실제 여행 대신 음악으로 떠나는 여행’이란 주제로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 나그네’(Winterreise)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곡에서 영감받은 여성복들을 만들었다. 미경이 독일 학교에서 배운 ‘다르게 생각하기’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이 수상은 미경의 바람대로 그에게 엄청난 기회를 가져다준다. 당시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스위스 명품 브랜드 아크리스 대표가 미경을 직접 스카우트한 것이다. 정식 채용 전, 스위스 아크리스 본사에서 인턴으로 3개월 일하는 동안 미경은 매사에 당당하게 임하며 최선을 다해 일했다. 그런 미경을 보고, 대표는 “너를 반드시 아크리스로 데려올 테니 비자가 해결될 때까지 독일에서 기다리고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스위스행 비행기 표가 도착했다.


부푼 꿈을 안고 시작된 스위스에서의 시간은 그러나 미경에게 우울과 고통의 시간이었다. 경쟁이 심한 패션 비즈니스 영역에 뛰어들었더니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사장의 신임을 받는 아시아 여성 신입 직원을 동료들이 좋아할 리 없었다. 미경이 만약 미국인이었다면, 혹은 남성이었다면 대표 신임을 받는 누군가를 그렇게까지 경계했을까.


스위스는 독어, 불어, 이탈리아어를 모두 사용하는 국가이다 보니 이제 독일어가 능숙해진 미경은 또다시 새로운 언어까지 익혀야 했다. 그 와중에 잘하고 싶다는 의지가 강해 몸을 갈아 넣는 심정으로 매일 미친 듯이 일하면서 몸은 점점 망가졌다. 회사를 나와 길거리를 걸으면 온갖 나이 많은 남자들이 던지는 캣콜링과 성희롱에 시달렸다. 당시 스위스에는 동양 여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미경이 어딜 가기만 해도 언어 성희롱하는 남자들의 폭언에 시달렸다.


스위스에서 출발하는 비행기 값은 어딜 가도 너무 비싸서 휴가 가는 것도 어려웠다. 무엇보다 한식을 사랑하는 미경에게 한국인은 물론이고 한식당 하나 없는 스위스는 삭막한 사막 같았다. 미경은 “직장생활을 하는 디자이너는커녕, 한 인간으로 봐주지 않는 느낌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스위스 명품 브랜드 ‘아크리스’ 이미지 ⓒhttps://de.akris.com


우울증으로 매일 울기만 하다가, 이렇게 죽을 수 없다는 심정으로 직접 병원을 찾아가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커리어를 위해 5년을 버텼더니, 5년 차 때부터 미경의 디자인이 전 세계 매장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회사 매출이 점점 올라갔고, 사내에서도 크게 인정받게 되었다. 좋은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이어졌지만, 비자 때문에 계속 문제가 발생했다.


결정적으로 미경이 7년 동안 일했던 아크리스를 떠난 이유는 견고한 유리천장 때문이었다. 패밀리 비즈니스로 운영되는 아크리스는 모든 상위직급이 회장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일반 직원은 고위직으로 올라갈 수 없음이 분명했다. 계속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싶었던 미경은 이직을 결심한다.


다시 독일로 돌아와 ‘휴고보스’ 디자이너로 하향 지원


미경이 아크리스 다음 행보로 정한 곳은 독일 럭셔리 패션 브랜드 휴고보스(HUGO BOSS)였다. 당시 채용공고도 없었고 아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홈페이지에 공개된 대표 번호로 다짜고짜 전화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지금 인사 담당자와 통화를 하고 싶은데 온라인상에 나와 있지 않네요.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시겠어요.”


그렇게 인사 담당자에게 메일을 보낸 미경은 회사로부터 바로 아래와 같은 연락을 받았다. 마침 프랑스인 디자이너가 관둔 터라 사람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프랑스 남자 디자이너를 채용했는데, 아무도 지각 안 한 상태로 아침 8시면 모두가 출근해있고 아주 꼼꼼하게 일 처리하는 독일 문화 때문인지 한 달 만에 도망가서 사람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아크리스에서 일한 당신의 포트폴리오가 아주 맘에 드네요.”


미경이 5년간 재직한 ‘휴고보스’ 매장 모습. ⓒhugoboss.com


미경은 휴고보스가 워낙 큰 회사이니 패밀리 비즈니스로 운영되는 아크리스와 달리 빨리 승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미경이 일했던 시니어 디자이너 직급에서 제일 높은 자리인 수석 디자이너까지 승진할 수 있는 두 자리가 더 있었기 때문에 2년 정도 지나면 승진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승진의 기회는 절대 찾아오지 않았다. 미경은 따져 물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죠. 제 독일어가 부족한가요?”

“당신의 독일어는 충분합니다. 당신이 디자이너로서 뛰어나니, 매니저 일보다는 디자이너 일에 전념하길 바라는 회사의 뜻입니다.”


미경은 디자인 일 외에도 부서를 총괄하는 매니저로 성장하고 싶다는 뜻을 계속 밝혔지만 승진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경의 디자인이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되기 시작했다. 영국 왕실의 메건 마클 등에 이어 여러 셀러브리티가 미경이 디자인한 옷을 입으면서 높은 매출을 기록했고, 완판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휴고보스는 미경의 상사 자리에 미경을 승진시키지 않고 미경보다 경력이 10년 이상 낮은 데다 독어와 영어도 능숙하지 않은 스페인 디자이너를 앉혔다. 미경이 더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글로벌 비즈니스 인맥 사이트인 링크드인(Linkedin)을 통해 레드불(Red Bull)로부터 직접 제안이 왔다. 그토록 꿈꾸던 ‘수석 디자이너’ 자리였다.


인내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스위스 아크리스에서의 7년, 분노의 시간을 보낸 휴고보스에서의 5년. 힘든 시간이었지만 미경은 많은 걸 배운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스위스인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 말 그대로 장인이 떠올랐어요. 늘 혼나고 지적당했어요. 전 한국에서 꽤 꼼꼼하게 일을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스위스에서는 그냥 창의적이고 동작이 빠른 사람일 뿐이었죠. 7년 동안 꼼꼼하게 일하는 게 무엇인지 배웠어요. 독일에서는 계획하는 법을 배웠어요. 전 무지 즉흥적이고 유동적인 사람인데, 그런 저에게 일 년 이후의 완벽한 계획까지 요구하니 너무 힘들었죠. 하지만 5년간 일하면서 주어진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들게 됐어요. 지금도 많은 부분 부족하지만, 스위스에와 독일에서 정말 많은 걸 배웠습니다.”


늦가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풍경. ⓒ채혜원


스위스와 독일을 거쳐 오스트리아에서 새로운 시작


미경은 처음에 레드불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때 의아했다. 한국에서도 여성 브랜드에서만 일했고, 스위스와 독일에서도 여성복 디자인만 한 미경에게 럭셔리 스포츠웨어를 총괄하는 디자이너 자리를 제안했으니 말이다. 레드불 측의 답변은 명확했다.


“우리 기업 옷은 퀄리티가 높지만 디자인 완성도가 높지 않은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디다스나 나이키 등 스포츠웨어 쪽의 경력이 아닌 여성복, 특히 아크리스에서 꼼꼼하게 명품을 만들던 당신의 감성이 필요합니다.”


2019년 11월, 미경은 스위스와 독일에서 쌓은 경력으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위치한 레드불 본사에서 새로운 시작을 맞았다.


“요즘 하루하루 행복하게 일하고 있는데요, 수석 디자이너가 되어서라기보다 저보다 뛰어난 동료들 덕분입니다. 존경할 수 있는 동료와 일한다는 게 큰 힘이 돼요. 회사가 저에게 기대했던 섬세하고 꼼꼼한 디자인이 뒷받침된 아름다운 옷을 만들기 위해 초심으로 돌아가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미경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분명히 그의 행보가 ‘수석 디자이너’가 끝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더 큰 꿈이 있을 것이 확실했다. 그 꿈에 대해 묻자, 미경이 갑자기 왈칵 눈물을 쏟았다.


“미안해요, 제가 한국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서요. 전 한국을 정말 사랑해요. 우리가 너무 작은 땅에 많은 인구가 모여 살다 보니 의도치 않게 경쟁해야 하고 여러모로 고생을 많이 하잖아요. 한국인은 감수성이 강하고 섬세해서 감성적인 상품을 만들 수 있는 강점이 있어요. 저는 언젠가 한국만의 패션 브랜드를 만드는 게 꿈이에요. 그런 브랜드를 만들려면 디자이너도 양성하고 시스템도 구축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엔 아직 제가 부족해요. 수석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그 준비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자신이 총괄하는 레드불의 브랜드 ‘알파타우리’ 잘츠부르크 매장 앞에 서 있는 미경. ⓒ채혜원


미경을 인터뷰하면서 독일 와서 처음으로 내면을 치유 받는 느낌이었다. 내가 독일로 온 이유에는 젠더 영역에 대한 전문성을 더 쌓고 싶은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10여 년의 경력을 토대로 한국에서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거의 매일 젠더 이슈나 페미니즘 관련 글을 읽고 번역해 보고서로 만들고, 한국 매체에 실릴 기사를 쓰고, 독일 여성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며 이주·난민 이슈에 관해 공부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했다. 그럴 때마다 많은 이들이 말했다. 독일 가서도 왜 그렇게 열심히 사느냐고, 유럽은 느려도 괜찮은 곳이니 좀 즐기면서 지내라고.


하지만 난 배우고 싶었고, 성장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전문성을 쌓고 싶었다. 주위에 좋은 동료와 친구들이 있지만, 어느 때보다 외롭고 고단했다. 나와 같은 이유로 힘들어하고 행복해하는 동지를 만나는 게 독일에서는 참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전혀 다른 영역이긴 하지만 전문가로서 성공하고 싶어 했고 그 목표를 향해 끝없이 달려가는 미경의 이야기가 크게 와 닿았다.


“모두들 제가 수석 디자이너가 되는 건 어렵다고 했어요. 그만 노력하고 인생 즐기라고 했죠. 왜 그렇게 힘들게 사냐고. 스스로 수석 디자이너가 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더 멀리, 더 높게 날고 싶었어요. 그래서 포기하지 않았고, 덕분에 그토록 원하는 일이 시작된 것 같아요. 다시 모든 게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고 있어요.”


그가 말한 대로, 언젠가 한국의 브랜드를 이끄는 수장으로서의 그의 모습을 그려본다. 많은 여성이 미경을 보며 꿈을 키워나갈 것이다. 나 역시 미경을 보면서 나의 쉰을 꿈꾼다.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앞서 길을 걸어가는 선배가 이곳, 유럽에 있어 오늘만큼은 이 지독한 북유럽 추위를 떨쳐내 본다.

[마른 모델 금지, 많은 것을 바꾸다]


최근 유럽 패션계의 큰 변화 중 하나는 ‘마른 모델 고용 금지’다. 이 결정은 2017년 9월 프랑스에서 이뤄졌다. 당시 루이비통(Louis Vuitton), 디올(Dior), 구찌(Gucci) 등이 속해있는 대표적인 브랜드 그룹은 마른 모델 고용을 금지하는 헌장을 만들어 서명했다.


마른 모델 기준은 유럽 여성 사이즈 34(미국 size 0-2, 영국 size 6)와 남성 유럽 사이즈 44 미만이다. 이와 함께 모델 고용 시, 모델의 건강 상태를 알 수 있는 최근 6개월 이내 작성된 의료증명서 제출을 의무화했다.


마른 모델 고용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거식증 문제를 전 세계적으로 알리다 2010년에 끝내 숨진 모델 이사벨 카로의 죽음으로 시작됐다. 지나치게 마른 모델을 선호하는 산업 흐름 때문에 많은 모델이 신체적, 심리적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이사벨 카로는 이 문제에 대한 캠페인을 진행하고 책을 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프랑스 그룹들이 서명한 헌장에는 모든 모델이 전문 정신과 상담을 받을 수 있고, 알코올 문제와 관련한 업무를 처리하는 위원회를 설립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프랑스에 이어 스페인과 이스라엘에서도 마른 모델 고용을 금지하는 조항이 생겨났으며, 2018년 2월에는 독일 정부가 마른 여성이 등장하는 광고를 중단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을 없애고, 젊은 여성에게 체중 감량을 강요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의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독일의 한 모델 에이전시 ‘the models’는 다양한 연령대와 사이즈 모델을 고용하고 있다. ⓒhttps://the-models.de


도로시 기독사회연합(CSU) 의원은 독일 언론 <도이치벨레>와의 인터뷰에서 “프랑스 및 스페인과 유사한 규제를 독일에도 적용하고자 한다”며, “거식증과 같은 질병은 사망률이 높고 회복 가능성이 작아 심각한 건강 문제이며 체중 감량 압박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법적 규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경은 유럽 패션계의 ‘마른 모델 채용 금지’ 결정이 패션 산업 내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며 이 결정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전했다. 미경은 “2017년 프랑스에서 헌정이 발표되기 전엔 무조건 마른 모델을 선호했지만, 결정 이후 마른 모델이 오디션을 보러 오는 경우가 눈에 띄게 줄었다”며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 자체가 변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 등장도 변화의 일환이지만, 미경의 말에 따르면 모델과 모델이 아닌 사람들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도 큰 변화다. 예를 들어 한 스파 브랜드(SPA brand)의 온라인 쇼핑 사이트에서는 모델 사진 없이 이미 구매한 소비자가 입고 찍은 사진을 게재하고 있다. 이런 변화에는 소셜네트워크의 영향도 있다. 소비자가 모델 광고를 보고 옷을 사는 게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일반 체격의 유튜버나 인스타그램 운영자가 입고 찍은 사진이나 영상을 보고 옷을 사는 경우가 늘어난 것이다.


미경은 “과거엔 정말 마른 모델만 오디션을 보러 왔다면 요즘에는 다양한 체격의 모델을 만날 수 있다”며 “최근에는 성별이나 나이 짐작이 어려운 젠더리스(genderless) 모델들도 늘어나고 있어 패션계에서 강조하던 ‘여성스러움’과 ‘남성스러움’에 대한 기준도 없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 필자 소개: 채혜원. 독일 베를린 거주. 한국에서 ‘우먼타임스’, ‘여성신문’ 기자와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에서 전문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현재 국제 이주·난민 페미니스트 그룹 <International Women Space> 멤버로 활동 중이며,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유럽 페미니즘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chaelee.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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