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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책임지지 않는 “부머”들의 정치는 가라

2050탄소제로법안 통과된 뉴질랜드…한국의 국회는?


우리 집 부머(Boomer, 1946~1965년생 베이비붐 세대를 칭하는 말)는 “일회용 용기”에 담긴 커피를 팔아, 내게 노트북을 사주고 뉴질랜드 녹색당에 “비행기” 태워 보냈습니다. 이건 ‘기후정의’에 반하는 글입니까?


1. 자본주의 앞에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 같은 소리 하네


“아 유기농, 무농약 귤 겁나 좋죠. 근데 우리 밭 농약 안 치잖아요? 옆 밭 벌레들 다 우리 밭 와서 우리 먹을 귤도 없어요.” 이런 말을 들어본 나는 제주에 산다.


그다음 문장으로는 그게 우리 집안 양반들이 한 말이라고 하는 시나리오가 제주에 산다는 소개와 걸맞겠지만 그렇지는 않고, 꽤 오래된 테이크아웃 전문 카페를 운영하신다. 필자야 뭐 기억할래야 기억나지 않는 시간부터 핫초코를 꽁으로 마시고 과자도 조금만 조르면 먹었으니, 그것으로 좋았다. 용돈을 받아 노트북을 사고 술을 마시고 영화 ost를 사는갑다, 정도로만 생각했다. 내 장사도 아니라서 별 간섭 같은 걸 해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팔자가 어떻게 된 건지, 언젠가부터 주변엔 녹색녹색한 친구들이 대다수가 되었다. 기후위기와 관련한 글을 쓰고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그런 말들을 하면서 아주아주 짜증 나는 괴리감 같은 것이 생겼다.


나는 집안 양반들이 테이크아웃 커피를 판, 그러니까 일회용 종이컵과 플라스틱 컵에 플라스틱 빨대, 거기다 플라스틱 뚜껑까지 있는, 지구를 아주 그냥 아작나게 하려는 것들로 범벅이 된 것들로 번 돈의 일부로 용돈을 받아 녹색녹색한, 그리고 기후위기와 관련된 활동을 하며 후원금을 내고, 지금은 무려 그 돈으로 산 노트북으로 기후정의(climate justice, 기후변화는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불평등의 문제이며 ‘정의’를 실현시켜야 한다고 보는 관점)를 실현하자고 하는 글을 쓰고 있다.


뉴질랜드 웰링턴에서 지난 9월 열린 기후위기 파업에 참여했을 때 내가 들고 갔던 피켓.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몰라 번역기를 돌리니 ‘우리 지구는 연약하다’라고 나온다. 음, 뭐 비슷하다고 하자. (출처: 진서윤)


배교(背敎), 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좋아하나? 그냥 마음에 와닿는다. 자신의 종교를 배신한다는 뜻인데, 녹색당 활동을 하며 자주 느낀다. 집안 양반들과 저녁을 먹는다고, 내가 몸이 아파서, 귀찮아서, 일정이 있어서, 논다고, 집회에 나가지 못할 때 등등. 짜증 나며 이상하고 괴리감 같은 것이 느껴질 때면 배교, 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셔플을 춰서 정말 미칠 노릇이다. 그런데 기후위기를 실감하고 있는 지금, 그것은 더 가중된다. 그렇다고 집안 양반들이 갑자기 안 되지도 않는 커피 장사를 그만하고 다 같이 데모해서, 용돈을 적게 받아 영화 ost를 사지 못하게 되면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미칠 노릇인 거다.


일회용 컵을 아주 그냥 없애버리자고 제안하기에는 집안 양반 카페 200m 근방에 대형 프렌차이즈 카페가 두 군데나 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장사 때려치우자고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텀블러 쓰는 사람들은 할인해주는 게 어떻겠냐’고 집안 양반께 제안했다. 한 50초간의 실랑이가 있다가 내가 묘하고도 짜증 나는 괴리감이 있다고 하니, 성사되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텀블러를 많이 쓰고, 배교하는 느낌이 덜 들 거라고 생각했다. 참 순진하고 띨빡했다. 딱 두 손님만 텀블러를 쓴다고 했다.


발톱 끝까지 솔직해지자면 ‘텀블러 할인’이라는 종이를 붙이고 나자마자 나의 그런 묘한 배교하는 느낌은 잠시 사라졌다. 카페에서는 사람들에게 제안을 했고, 사람들이 성가셔서 텀블러를 쓰지 않는 것인데, 일하지도 않는 내가 그 손님 한 명 한 명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제에발 텀블러 좀 써주시게마씀~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치만 나는 알고 있다. 이렇게 제안을 해도 사람들이 쓰지 않는다면, 우린 기후위기에 집어 삼켜져서 다시는 핫초코도 아메리카노도 못 마시고 줄 용돈 있어도 용돈 못 받으며 그냥 다들 사라져버릴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아, 되려 아주 그냥 배교한 느낌이 든다. 내 속 좀 편하자고 그런 ‘텀블러 할인’ 같은 걸 써놓은 것 같아서, 내가 무슨 지구에 대역죄인이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손님들이 텀블러를 쓰지 않는 건 내 탓도, 우리 집안 양반 탓도, 손님의 탓도 아니며, 커피의 탓도, 종이컵의 탓도 아니다. 다들 무고하다. 정부에서 일회용품 사용 중단하자고 하는 법안 하나만 통과시키면 정말 해결될 일이다. 내가 집안 양반들을 쪼아댈 이유도, 묘한 배교하는 마음이 드는 일도, 신념대로 살다가 영화 ost 사지 못해 우울할 일도 없는 것이다.


2. 2050탄소제로법안 통과시킨 뉴질랜드의 청년 정치


아시아태평양 녹색당(APGF)에서 진행하는 여성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국제연대, 같은 거창한 걸 배우고 싶었던 건 전혀 아니다. 영어도 좀 늘었으면 좋겠고, 캠페인 전략 같은 것도 배워오고 싶어서 내 멘토가 있는 뉴질랜드로 가겠다고 했고, 진짜 가버렸다. 정말 영어와 캠페인 전략 같은 것을 배우고 싶어서 가는 거였기에, 뉴질랜드에 어떤 이슈가 있는지, 뉴질랜드 녹색당에는 얼마나 힙한 국회의원이 있는지 등 아무것도 몰랐다.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뉴질랜드 녹색당에 있던 멘토와 함께 탄소제로 법안이 통과되는 걸 보고 있다. 두구두구하는 것도 없이 통과해서 다들 환호하고 그러지는 못하고, 모두 “오, 쩌네..”라고 반응했다. (촬영: 전서윤)


‘아 이제 곧 한국에 돌아가니까, 맛있는 거 원 없이 먹어야겠네’ 할 때쯤, 뉴질랜드 의회에서 2050탄소제로법안(2050년까지 탄소배출을 없애자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뉴질랜드 정부(노동당·뉴질랜드제1당·녹색당 연합정부)가 제출한 2050탄소제로법안이 통과되기 전날인 11월 5일, 클로이 스와브릭(Chlöe Swarbrick, 25세, 녹색당 하원의원)은 의회에서 탄소제로법안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하필 클로이가 자신은 2050년에 56세가 될 것이고, 현재 의회의 평균 나이는 49세라며 맞는 말을 할 때, 다른 정당에 있던 국회의원들이 야유를 해버렸다. 그래서 클로이는 부머들에게 “OK, Boomer”(베이비붐 세대를 조롱조로 일컬은 것으로, 이후 세계적인 유행어가 됐다. 나는 ‘응, 그래’ 혹은 ‘응, 아니야’ ‘그래, 닥쳐’ 등으로 의역한다)라고 받아쳤다. 적재적소에 맞는 말을 던진 것뿐이다.


뉴질랜드에 갔을 땐 지방선거 기간이었다. 거의 매일 후보자들의 토론회가 정말 작은 웰링턴 시내 곳곳에서 열렸는데, 도의원과 시의원 후보로는 대학생이 한 명씩 나왔다. 놀라웠다. 내 주변에 대학 다니는 사람들을 대입해 생각해보면 정말 신기한 풍경이었다. -내 친구들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저 그들이 출마한다는 것이 신기할 거 같아서다- 그들은 청년 정책들과 함께 ‘기후위기’ 얘기를 하면서, 나의 이야기이고 나의 문제라고 말했다.


빅토리아 대학의 대학생이자, 시의원으로 나온 테모사 폴(Tamatha Paul, 22세)은 당선되었다. 녹색당 시의원 당선됐으며, 투잡을 뛰고 있는 세 아이의 워킹맘 아이오나 페넷(Iona Pannett, 녹색당)과 함께 그린뉴딜(Green New Deal, 기후위기와 불평등에 대응하는 일자리 창출 정책)을 꼭 통과시킬 것이라고 한다. 더불어 웰링턴 근처 카피티에 사는 소피 핸포드(Shophie Handford)는 13세부터 환경활동가로 활동하였으며 19세인 지금은 카피티 지역의 기후위기 파업 코디네이터이자 지역구 의원이다. 세상에 이렇게 힙할 수가 없다.


-그냥 청년 정치인 말고 이런- 청년 정치인이 많이 나오는 것이 흔한 일인지 물었다. 이런 광경이 흔한 광경이라면 내가 사는 곳과 너무 비교돼 좀 우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았다. 웰링턴은 뉴질랜드 내에서도 꽤 대안적인 동네라고 했고, 그런 동네이기 때문에 청년 정치인이 나온다고 했다. 흔한 광경은 아니지만, 기후위기가 심각한 이슈로 자리 잡으며 다른 동네에서도 청년들이 기후정의를 위해 출마하는 경우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웰링턴 시의원으로 당선된 두 사람. 녹색당 아이오나 페넷(왼쪽)과 22세의 테모사 폴(오른쪽). 테모사는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족이고, 마오리족 포스터를 설명하고 있다. (촬영: 전서윤)


3. ‘기후정의’가 절실한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한다


제주도도 아니고 뉴질랜드도 아닌 한국으로 돌아와 보자. 국회의원의 평균연령은 58세이며, 장관의 평균연령은 60세이다. 국회의원 뱃지, 아니면 무슨 명칭 하나씩 달고 환갑잔치하는 게 한국 국회의원, 장관들의 흔한 풍경인가 싶다. 2050년이면 대부분 무덤이나 병원에서 링거 꼽고 계실 분들이라 그런 건지 –악의는 없습니다, 부머-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정책들은 도무지 나오질 않는 것이다. 다른 나라들은 난리인데 우리나라만 조용한 거 보면 정말 신기하기도 하다. -내가 신이라면 대한민국 정치계를 정말 싹 갈아 엎어버릴 텐데-


더불어 청년 정치하겠다는 사람들은 기성정치인들처럼 왜 그렇게 죄다 양복을 빼입고선 정말 말 그대로의 ‘청년’ 얘기만 하는 걸까? 아이 물론 청년주거 중요하고, 청년 일자리 중요하다.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2050년에 다 죽을 건데 기후위기와 관련한 얘기는 언제 하나 궁금해서 그러는 것이다. 자신들이 지금 국회에 있는 의원들마냥 2050년이 되면 링거 꼽고 병원에 있을 사람들인 줄 아는 것 같다.


가끔 망상을 해본다. 이유야 다르겠지만, 영화 <패신저스>(모튼 틸덤, 2016)에서처럼 사람들이 우주선을 타고 다른 곳에 지구를 만들기 위해 간다고 가정을 했을 때, 과연 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고 그게 몇 명이나 될지. 빌 게이츠는 자기 사돈의 팔촌까지 데려갈 수 있을 것 같고, 이재용은 사돈의 팔촌까지는 데려가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또 다른 갑부는 누가 있지,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그런 우주선에 탈 수 있을까. 나는 그 우주선을 보지도 못한 채 제주도 어딘가에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폼페이처럼 뼈가 남을 수는 있을까, 한다.


뉴질랜드에서 참여한 기후위기 파업에서, 태평양의 작은 섬에 살고 있는 이가 소리 지르고 울며 말했다. 우리는 이미 늦어버렸다고, 해수면이 자꾸 높아져 집이 물에 잠기고 있는 중이라고. 멘토에게 물어보니, 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정부가 도와줄 수 있을 만큼 돈도 없고, 그 개인들도 다른 나라로 이주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제주도에 살고 있는 나는, 나도 언젠가 저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될까 겁이 난다.


아 지금은 진짜 기후정의가 필요하구나, 이러다 싹 다 죽어버리겠구나, 하며 기후위기를 실감하는 사람들이 정치 좀 했으면 좋겠다. “부머들은 이제 경제 어쩌구 하는 그 입 좀 닥치고 기후정의 만들어 냅시다”하는 사람 좀 나왔으면 좋겠다. 남성이 여성을 아주 온전히 대변할 수 없고,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아주 온전히 대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성애자가 동성결혼 반대하는 그 의견, 의미 없다. 이미 부머들의 정치는 많이 보았고,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내놓는 기후위기 정책이 어떨지 보지 않아도 보이는 마술이 작용한다. 돈독 올라서 미쳐버린 게 아닌,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아는 이들, 그 당사자들이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


2019년 9월 27일, 뉴질랜드 웰링턴에서 있었던 기후위기 파업에 참여했다. 거리가 좁아서 사람들이 정말 많아 보였고, 그래서 좋았다. (촬영: 전서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모두가 비건(vegan, 육류와 알, 유제품, 생선 등을 먹지 않으며 동물을 희생시켜 얻은 의류나 동물실험을 거친 화장품 등을 사용하지 않음)을 해야 하며, 일회용품을 쓰지 않고, 탄소배출을 하지 않는 삶과 더불어 플라스틱을 소비하지 않는다고 가정 –물론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무조건 기후위기를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나 생각할 법한 논리이다. 우리가 그 불가능한 것을 해낸다고 해도 코카콜라는 플라스틱을 생산해낼 것이고, 현대는 내연기관 차를 생산해낼 것이며 이를 소비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 굴레에는 소비자의 책임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가 느껴 마땅할 책임감을 넘어, 책임감을 느껴야 할 이들 몫의 책임감까지 느끼고 있다. 그러니까, 경제를 빌미로 계속 개발을 하자고 한다면 일회용품에 대한 규제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정책을 만들어 내고 법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책임이 더 크지 않은가. 그것이 일회용품 규제이든, 탄소배출을 줄인다는 것이든, 개발을 그만하자는 것이든. 하지만 안다. 그들은 우리의 말을 무시한다고 의식하지도 않으며 무시한다는 걸. 우리에겐 새로운 사람들이 필요하며 이들이 새로운 정치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전서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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