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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에서 임산부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SF 드라마 <위노나 어프>의 임신한 배우와 주인공을 보며 묻다
“요즘 임산부 보기 너무 힘들다”고 말하면 내 주위 사람들은 내 발언을 의아해한다. “너 비혼 아니었어?”라며 비혼 여성은 마치 임산부엔 관심조차 주지 않는 다른 종족의 사람이라고 치부하건, “페미니스트라면서 왜 저출생 걱정하는 척해?”라며 비꼬기도 한다.
근데 정말 나만 이런 의문을 품는 걸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임산부라고 하면 지하철의 ‘임산부 배려석’만 생각나는 이상함에 대해서 말이다. 하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임산부 배려석’이 생각난다는 건, 그만큼 임산부 이미지가 제한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작 핑크색과 하트 모양으로 ‘특별히’ 마련된 임산부 배려석에 임산부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본 건, 한 손으로 꼽을 정도인데.
임산부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즈음, 즐겨 보던 SF 드라마 시리즈 <위노나 어프>(Wynonna Earp, 미국 Syfy 채널 2016년부터 방영 중) 시즌2에서 주인공 위노나가 임신했다.
SF 드라마 시리즈 <위노나 어프> 시즌1 포스터 ©2016 WYNONNA EARP
극 중에 위노나가 20대 후반의 비혼 여성으로 나오긴 하지만 그에겐 유동적인 파트너들이 있었고,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SF 세계에서 임신이 딱히 놀랄 일은 아니다. 놀라운 건, 위노나를 연기하는 배우 멜라니 스크로파노(Melanie Scrofano)가 실제로 임신한 것을 극의 스토리에 반영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캐릭터와 배우가 둘 다 임신한 모습을 보게 된 거다.
배우가 임산부를 연기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반대로 배우가 임신했지만 그걸 스토리 전개상 담을 수 없기 때문에 임신 사실을 감추고 연기한 이야기도 있다. 스칼렛 요한슨이 영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때 임신 상태였으나 액션 연기까지 소화하고 촬영을 했다던가, 갤 가돗이 영화 <원더우먼>의 일부를 재촬영할 때 임신 중이었다던가.
시즌제로 제작되기에 때론 몇 년 동안, 매년 어느 기간 동안 촬영에 매진해야 하는 서구권 TV 시리즈(혹은 영화)에서 출연 배우가 임신하는 건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동안 ‘백인 이성애자 남성’들이 독식하고 있던 할리우드 세계에서 임신한 배우들은 ‘전혀 괜찮지 않은’ 대우를 받아왔다.
‘임신’ 자체가 금기어였던 할리우드
임신부 이야기 전에, ‘고전 영화’라 불리는 할리우드 영화에선 오랫동안 ‘임신’ 자체가 금기어였다는 사실을 아는가? 1934년부터 1968년까지 할리우드의 ‘제작 코드’에서 임신/출산은 나체와 같은 금지된 주제였다. 그래서 ‘아기’라는 말을 하거나 ‘의사를 보러 갔다’는 등의 임신을 의미하는 말을 할 순 있어도, ‘임신’이라는 직접적인 단어는 말할 수 없었다. 출산 장면을 보여주는 건 당연히 금지됐다.
이유는 예상대로다. ‘제작 코드’를 만든 사람들이 보수적인 가톨릭의 백인 남성들이었기 때문이다. ‘신성한 여성의 몸’에 대한 존경 때문이라나 뭐라나. 그 시대 영화에선 ‘로맨스-결혼’ 이후 임신/출산의 재현 없이 바로 ‘핵가족’ 단계로 접어드는 일이 허다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빅터 플레밍)에서 멜라니의 출산 장면.
유명한 고전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년, 빅터 플레밍 감독)에선 당시의 분위기에 저항하는 장면인 멜라니의 출산 장면이 나온다. 그에 대해 ‘제작 코드’ 행정부의 심의 담당이었던 조셉 브린은 영화 제작자인 데이비드 오 셀즈닉에게 ‘출산의 고통을 강조하는 행동이나 대사를 삭제하라’는 의견을 냈다고 한다. 출산은 산모에게 ‘기쁨’이어야만 하는데 고통으로 표현되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거다.
어처구니없지만 영화계에서 그런 제한이 몇십 년 이어졌다. 1968년 미국영화협회(MPAA)가 영화등급제를 찬성하면서 ‘제작 코드’가 폐지되고 행정부도 없어지게 됨으로써 창작자들이 표현할 수 있는 임신/출산 장면에 대한 규제도 사라졌다.
임신하면 연기를 못한다니…
임신조차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는 문화가 있었던 곳이니, 임신한 배우를 제대로 대우했을 리 없다.
특히 그 문제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TV 드라마 시리즈 <멜로즈 플레이스>(Melrose Place, 미국 Fox 채널 1992년~1999년 방영) 제작진이 임신했다는 이유로 배우 헌터 타이로(Hunter Tylo)를 해고하고 다른 배우로 교체한 일에 대해 배우가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드라마 시리즈 <멜로즈 플레이스> 시즌6의 DVD 표지 ©Spelling Entertainme
헌터 타이로를 해고한 제작자 애런 스펠링(Aaron Spelling)은 헌터를 해고한 이유가 “(남성을) 섹시하게 유혹하는 캐릭터인데 (임신부로서는) 그걸 할 수 없기 때문”이며 “헌터가 임신으로 47파운드 살이 쪘기 때문에 의상을 교체해야 하는 일 등이 계약 위반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변호인도 “TV에 등장하는 배우에겐 외모가 중요한데, 외모가 변했기 때문에 해고는 타당하다”고 했다.
하지만 여성 10명과 남성 2명으로 이뤄졌던 배심원들은 헌터의 손을 들어줬다. 심지어 헌터가 요청했던 배상금의 두 배인 5백만 달러(약 59억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배심원들은 “헌터의 상사인 제작자들이 ‘섹스어필’을 강조한 건 성차별”이라고 지적했다. 이 판결은 배우가 임신하더라도 충분히 아름답고 주어진 역할을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했으며, 미국 캘리포니아주와 연방법에 임산부에 대한 차별 금지 조항이 있음에도 영화 현장에서 배우에게 적용되고 있었던 불합리함을 드러냈다.
임신을 이유로 해고된 배우가 소송을 제기한 최초의 사건이었고, 역사적인 판결을 보며 제작사와 제작자들은 뜨끔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후에도 임신한 배우를 배제하는 행태는 계속되었다. 큰 문제 제기가 일어나지 않았고, 정확하게 임신을 이유로 들어 배우를 하차시키지 않았다 하더라도, 배우들이 임신하면 브라운관에서 사라졌으니까.
임신했으니까, 임산부인 채 일한다
물론 배우가 예정에 없이 임신하게 되면 작품에 영향이 생길 수 있다. 그 캐릭터가 전혀 임신할 상황이 아닐 경우 제작진들에겐 큰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그동안 많은 TV 드라마나 영화가 다양한 방법으로 배우의 임신을 숨기는 방법을 창의적으로 강구했다. 이제는 CG라는 기술까지 등장하지 않았는가.
또 다른 방법은, 임신한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임신한 것으로 작품에 녹여내는 거다. <위노나 어프>가 택한 방법이 그것이었다.
<위노나 어프> 시즌2 중 위노나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 ©2017 WYNONNA EARP
시즌2 촬영이 시작되기 전, <위노나 어프>의 주인공 배우인 멜라니 스크로파노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병원에서 그 사실을 확인했을 때 “정신을 잃을 뻔했다”는 멜라니는 한편으론 임신이 기쁘면서도 (직업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 하지만 <위노나 어프>의 총괄제작자이자 작가인 에밀리 안드라스는 “여성으로서, 여성이 이 업계에서 어떤 일들을 겪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며 그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에밀리는 막상 방송사와 제작사가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긴장했다고 한다. 다행히 멜라니의 임신 사실을 알렸을 EO, 모두들 문제없이 받아들였다. 이후 에밀리는 이미 쓰고 있던 대본을 수정하여, 위노나가 시즌2에서도 여전히 악령들과 싸우며 그들을 지옥으로 돌려보내는 역할을 하면서도 임신한 상황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극을 구성했다.
제작진의 노력과 배려로, 멜라니는 임신 6개월일 때 시즌2 촬영을 시작했고 문제없이 촬영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4일 뒤에 아이를 출산했다.
저출생이 엄청난 위기라면서요?
임신을 한 배우가 단지 드라마에 계속 등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멜라니는 위노나답게 위노나를 연기하기 위해 액션 장면들도 소화했다. 물론 모든 걸 다 한 건 아니지만, 할 수 있는 만큼 한 거다. 큰 배를 두드리며 임산부라고 못할 게 뭐냐는 모습으로.
물론 모든 임산부가 출산 직전까지 일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무리하게 어떤 일에 도전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임산부가 되면 아무 일 못 하는 존재가 되거나 매력이 없는 존재인 것처럼 보여지는 것은 잘못된 재현이라는 점에서, 멜라니가 위노나를 통해 보여준 모습은 분명 통쾌함을 준다.
<위노나 어프> 시즌2 중 위노나가 동생 웨이벌리와 체력 훈련을 하는 장면 ©2017 WYNONNA EARP
우린는 현실에서 혹은 미디어에서 이런 임산부의 모습을 얼마나 자주 보고 있을까? 저출생으로 “나라가 위태롭다”고들 하는 지경이지만, 기혼 여성의 출산율은 2016년 기준 2.23명 그리 낮은 편은 아니다. 특별히 ‘배려해서’ 대중교통에 자리까지 마련해 주는데도 임신한 여성의 모습은 왜 눈에 띄지 않을까?
어디서든 다양한 임산부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건, 임산부들이 어떤 직업을 가졌든 계속 일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임신을 한 여성이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건 모든 사람들이 어떤 생애주기를 거치든 마땅히 누려야 하는 권리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내가 비혼 여성이라 하더라도, 임신한 여성들의 ‘비가시화’는 여성으로서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 ‘걸즈 캔 두 애니씽’의 외침이 임산부가 되면 예외라는 건 이상하니까.
◇ 여성 총잡이 히어로가 등장하는 TV 시리즈 <위노나 어프>
한 손에 피스톨을 들고 적과 마주하는 총잡이가 등장하는 서부극 드라마나 영화엔 늘 ‘이성애자 백인 남성’이 나왔다. 너무 정의로워서 세상의 모든 고통을 끌어안으려는 고독한 ‘진짜 남자’가 펼치는 영웅담에서 여성들의 위치는 주변에 머물렀다. 시체거나, 영웅을 위한 ‘트로피’거나, 그나마 나은 경우는 조력자거나.
하지만 <위노나 어프>는 다르다. 주인공 이름이 제목인 이 SF 드라마의 중심은 위노나 어프라는 27세 여성이다. 캐나다 고스트 리버 트라이앵글 지역의 퍼거토리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서 위노나는 그동안 ‘진짜 남자’들이 해 왔던 총잡이로 등장한다.
양성애자 서큐버스(Succubus, 전설 속에 등장하는 여성 악마 중 하나로 성교를 통해 타인의 에너지를 빨아들임)를 주인공을 내세웠던 SF 드라마 시리즈 <로스트 걸>(Lost Girl, 캐나다 showcase 채널 2010~2015년 방영)에서 제작자로 참여했던 에밀리 안드라스가 총괄제작을 맡았다. <위노나 어프>의 위노나는 레버넌트라 불리는 악령들을 지옥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총을 쏜다.
SF, 서부극, 악령, 계승자, 총잡이… ‘알탕영화’에 등장할 것 같은 주제들로 가득한 이 드라마를 채우고 있는 건 사실 전혀 다른 이야기다. 시즌1에서 ‘위노나-돌스-닥’의 묘한 삼각관계가 비중 있게 다뤄지는 듯 보이지만 시즌2, 시즌3으로 갈수록 ‘위노나-웨이벌리’ 자매의 이야기나 ‘웨이벌리-니콜’의 여여 커플 이야기에 힘이 실린다.
제작자인 에밀리는 <위노나 어프>가 여성 서사이며 페미니스트 쇼라는 걸 숨기지 않는다. ‘알탕 서부극’에 질렸다면, ‘영웅놀이’에 관심 없고 자기 멋대로인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위노나 어프>의 이야기가 색다를 수 있다. 넷플릭스에서 시즌1~2 시청 가능. (박주연 기자)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 참고자료
*Where Were All the Pregnant Women in Classic Movies? (Kristin Hunt, Vulture, 2018-10-03)
https://www.vulture.com/2018/10/where-were-all-the-pregnant-women-in-classic-movies.html
* Actress Fired Over Pregnancy Wins $5 Million (ANN W. O’NEILL, LA times, 1997-12-23)
https://www.latimes.com/archives/la-xpm-1997-dec-23-mn-1420-story.html
* ‘Wynonna Earp’ Exclusive: Showrunner Emily Andras and Star Melanie Scrofano Break Down That Big Reveal (MAUREEN RYAN, Variety, 2017-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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