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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화카페 문이 열렸습니다!

[도시에서 자급자족 실험기] 현실과 이상 사이, 비전화카페 개업식


※ 필자 이민영님이 목공을 배우고 적정기술을 익히며, 동료들과 함께 전기와 화학물질 없는 도시를 꿈꾸면서 일상을 제작해나가는 과정을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가장자리부터 색이 바래며 몸을 움츠린 은행잎들이 적삼목 지붕 위에 차곡차곡 쌓인 풍광이 제법 멋스러운 어느 날로 기억한다. 언제 찾아올까 손꼽아 고대했지만 정말 찾아오는 걸까 믿기지 않았던 그 날, 비전화카페를 정식으로 선보이는 그 날이 다가왔다. 부족한 것투성이 같은데 무엇이 부족한지도 모르니 솔직하게 날것의 우리를 선보이고 평가받기로 했다.


쓰레기 없는 카페, ‘지정’ 개업선물 받습니다


명색이 첫인사이다 보니 어떻게 말을 걸까 고민이 되어 의견을 모았다. 가능한 쓰레기 발생을 최소화하는 카페로 운영해보고 싶다는 우리의 목소리를 부드럽게 전하고 싶어, 면목 없게도 개업 이벤트로 손수건과 텀블러를 기증받기로 했다.


주 예상 손님들이 체류하는 서울혁신파크 건물 출입구 곳곳에 문 여는 날 소개 글을 붙이고 그 옆에 바구니를 가져다 두었다. 기증받은 텀블러는 테이크아웃용 컵으로, 손수건은 카페 내 휴지 대체품으로 쓰겠다는 계획 겸 다짐을 적었다. 무언가를 새로 사는 산뜻함보다 쓸모 있지만 쓰이지 않는 것들의 또 다른 쓰임을 찾고 싶은 마음을 전하는 일은, 잊혀 가는 것들을 재발견하려는 비전화카페를 시작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 염치없이 개업선물을 지정해 요청했는데도 많은 분들이 응답해주셨다. 답례로 바구니 안에 작은 사탕봉지를 담아두었다. ⓒ비전화공방서울


호응이 있을까 반신반의는 기우였다. 아침마다 바구니 안이 얼마나 채워져 있을까 보물찾기하러 가듯 설레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기증받은 손수건은 대다수가 이미 깨끗했지만 다시 한번 세탁하고, 텀블러도 세척한 뒤 반납받을 것을 예상해 스티커를 붙여두었다. 오히려 비슷하면서도 각기 다른 규격과 크기의 텀블러 본체와 뚜껑을 맞추는 일이 난제일 만큼 과분하게 많은 선물을 받으며 카페 개점을 준비할 수 있었다.


작은 전시회로 문을 연 비전화카페


카페 앞마당 한켠에 작은 전시회도 마련했다. 비전화카페가 지어지는 과정들을 순차적으로 볼 수 있도록 그리고 건축하는 동안 제작자들의 즐거웠던 순간을 포착한 사진들을 진열했다.


비전화카페가 위치한 서울혁신파크에 층층의 거대한 건물들이 숨 가쁘게 지어지는 동안 고작 이 작은 건물을 그리 오래 지었느냐고 누군가는 말했다. 우리가 전할 수 있는 건 이 조그마한 건물을 짓는 이들의 표정과 의지 그리고 그 과정에 담긴 이야기였다. 몇 장의 사진이 조금이나마 그들의 질문에 답이 되어주길 바랐다.


▶ 건축하며 찍은 수많은 사진을 추리는 작업도 지난 시간을 반추해볼 수 있어 새삼 감동으로 다가왔다. ⓒ비전화공방서울


과연 이 범상치 않은 카페에 누가 찾아와줄까. 우려가 무색하게 개업시간보다 앞서 사람들이 문 안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우와 탄성과 함께 높은 천장 먼저 한 바퀴 둘러보고 카페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박혔다. 손수 만든 차림표를 들여다보고 곡선으로 가득 찬 벽면을 손대어 쓸어보며 감탄하는 사람들을 보며 안심이 됐다.


비전화카페의 경관, 이상과 현실 사이


방심은 금물이라는 듯, 빠르게 카페 안을 메우는 사람들을 맞이하기 급급해졌다. 첫날인 만큼 찾아올 손님이 제법 있을 것으로 예상해 며칠 전부터 미리 원두를 준비해두고 스프도 들통 가득 만들어두었지만 주문받고 내보내기 바빴다.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여유로움 따윈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개업 날 커피를 담당했던 나는 세 개의 사이폰 앞에서 쉴 새 없이 성냥을 긋고 내린 커피를 잔에 따랐다. 세볼 겨를도 없이 보유한 사이폰을 풀가동하고, 줄어들지 않는 주문표에 맞춰 잔 개수와 테이블 번호를 맞추느라 정신이 없었다.


▶ 비전화카페 문 여는 날 전경 ⓒ비전화공방서울 


잠깐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왼편에는 웬 설거지 요정이 끝도 없이 쌓여가는 그릇과 잔을 닦아내느라 분주했고 오른편에는 주문받으랴 좌석 안내하랴 잠시 앉을 새도 없는 앞치마 요정이 카페 안을 발 동동 오가고 있었다. 뒤편에는 스프와 샐러드를 그릇에 담고 착유까지 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표정의 펌프질 요정이 넋이 나가 있었다. 그때쯤 사이폰의 알코올램프에 성냥을 그어대느라 황 냄새에 지친 내 콧속이 퉁퉁 부었다는 걸 깨달았다.


카페 문을 연 첫날 영업은 다섯 시간. 이날 판 커피는 45잔. 4종의 메뉴와 총 70번의 주문. 이날 손님을 맞이한 카페지기(비전화카페를 주로 가꾸는 일을 맡은 제작자들은 서로를 ‘지기’라고 부른다)는 번갈아 가며 총 6명. 카페 안 동일시간대 최소 근무자는 4명. 그리고 번 돈은 70만 원 남짓. 비전화카페에서의 영업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다.


더딘 속도에 문 앞을 서성이다 돌아간 손님도 부지기수였는데, 미숙함을 염두에 두더라도 지기 모두가 하루 만에 탈진해서 다시는 이렇게 카페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다며 혀를 내둘렀다. 정산을 하고 나니 재료비는 차치하고라도 며칠 전부터 오늘 하루를 준비해온 걸 생각하면 여기서 일한 이들에게 최저임금이나 돌아갈 수 있을까 정신이 퍼뜩 들었다.


▶ 폭풍전야 영업 준비 중인 비전화카페 내부. 벽 미장이 채 마르지 않아 얼룩이 남아있다. ⓒ비전화공방서울


맞이하는 이와 찾아오는 이의 구분이 불분명한, 구석구석 이야깃거리가 나를 발견해달라는 듯 또랑또랑 눈을 굴리는, 도란도란 대화 속에 자르르 터지는 웃음으로 가득 찬 카페는 분명 환상일 걸 알았지만 첫날의 타격은 제법 컸다. 인스타용 사진만 찍고 떠나는 손님과 커피를 내릴 때마다 같은 질문에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대답은, 막연했던 불안감이 현실감으로 바뀌기에 충분했다.


오늘은 개업 날이니까, 이런 특별한 날은 다시 찾아오지 않으니까 서로를 다독였지만 길지 않은 영업시간 동안 화장실 한 번 가지 못한 강렬한 경험은 오래 묵은 땟자국처럼 잘 지워지지 않았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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