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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 캐릭터 좀 그만 죽여라!” 외친 팬들

변화를 이끄는 퀴어여성들의 팬덤 <클렉사콘>에 가다 上


성차별적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지만, 여전히 미디어에서 퀴어여성의 존재는 가시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안고서, 미국에서 퀴어여성 시청자/팬들이 만들어 낸 적극적 변화라 할 수 있는 컨벤션 행사 <클렉사콘>(Clexacon) 소식을 상, 하로 나눠 전달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 올해 4월, 미국 라스베가스 트로피카나 호텔에서 ‘퀴어, 여성, 미디어, 팬덤’이라는 키워드로 진행된 2019 클렉사콘 뱃지와 굿즈. ⓒ일다


한국 미디어에서 여성 동성애자/양성애자 찾기


2015년 JT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시리즈 <선암여고 탐정단>에서 ‘한국 TV 드라마에서 볼 수 없었던 레즈비언 키스’가 등장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하나의 장면이 한국 미디어에서 퀴어여성이 가시화되는 전환점이 되긴 어려웠겠지만, 적어도 분위기를 전환하는 물꼬가 될 순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키스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중징계에 해당하는 ‘경고’ 조치를 받았다. ‘동성 키스가 부적절하고 사회 통념에 반한다’는 시대에 뒤떨어진 조치에 대해, 부당하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제기됐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해당 장면이 중징계를 받았다는 사실은 창작자들을 움츠러들게 했을 거다. 이후로 지금까지 여성과 여성, 동성 간의 관계나 성적 표현을 방송에서 볼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2016년 tvN에서 방영된 드라마 시리즈 <굿와이프>는 미국 CBS에서 2009년부터 2016년까지 방영된 드라마 <The Good Wife>를 원작으로 한 리메이크작품이다. 원작에서 양성애자로 나왔던 ‘칼린다’를 현지화한 인물인 ‘김단’은 양성애자로 설정이 되었지만, 그 역할이 원래 양성애자라는 걸 알고 있는 경우라야 겨우 눈치챌 수 있는 정도였다.


미디어가 ‘소멸’시키거나 ‘왜곡’시킨 소수자들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를 맞아 생기고 있는 변화의 물결 중에서, 미디어의 성차별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다. 여성을 배제하는 대중문화에 대한 지적으로 만들어진 용어 ‘알탕영화’, ‘아재TV’ 등의 표현이 낯설지 않다. 여성을 제한적인 캐릭터(가사노동 전담, 남성의 보조 역할)로 묘사하는 것이라든지,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조차 다루는 분야에 있어 성별로 차이가 있다는 사실도 문제로 꼽히고 있다.


▲ 2017년 국내 여성앵커와 남성앵커가 소개하는 뉴스 아이템. (출처: 미디어에 의한 성차별 모니터링, 국가인권위원회)


‘여성/여성성’과 더불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수동적인 이미지로 획일화시키는 것도 미디어의 성차별 중 하나다. 여성은 남성이 벽에 밀쳐서 막무가내로 하는 키스를 좋아하고, 그걸 기다리고 있다는 식의 재현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여성이 남성과 무관하게, 사랑과 섹스를 할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안고 있는 퀴어여성의 존재는? 미디어에서 보이지 않아야 한다.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에서 발행하는 <미디어, 젠더 & 문화> 28호에는 “성소수자에 대한 미디어의 시선”(2013, 고려대학교 박지훈, 이진)이라는 제목의 분석이 실렸다. 이 논문은 미디어의 소수자 재현과 관련해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 두 가지를 설명한다.


첫 번째는 “미디어에 등장하는 소수자의 비율이 실제 사회에 존재하는 소수자 비율보다 작을 때 발생하는 문제”인 ‘과소재현’(underrepresentation)이다. “거브너와 그로스(Gerbner & Gross, 1976)는 미디어에서 배제되는 집단은 사회적인 중요성과 존재감을 박탈당한다는 ‘상징적 소멸’(symbolic annihilation) 개념을 사용한 바 있다”고 논문은 설명한다.


두 번째는 “스테레오 타입을 통해 성소수자를 타자화시키고, 이성애 규범주의(heteronormativity)를 재생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미디어의 ‘왜곡된 재현’(misrepresention)이나 ‘정형화’(stereotyping)”이다.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최근 ‘정치하는엄마들’이 진행하고 있는 “핑크노모어”(Pink No More, 다양한 미디어에 드러난 성차별과 장애, 인종, 성적지향, 직업 등의 차별 요소를 찾아내 개선하는 활동) 캠페인도 그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관련 기사: 사회는 “애나 잘 키워라”지만 엄마들은 “정치한다” http://ildaro.com/8440) 여기에 또 하나 참고할 만한 소식이 있다. 2016년 미국에서는 퀴어여성 시청자/팬들이 더이상 못 참겠다며 낸 분노의 목소리를 결집하고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된 ‘사건’이 발생했다.


2016년 <원 헌드레드> 레즈비언 캐릭터 ‘렉사’의 죽음


먼저 미국에서 2016년이 어떤 해였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 대법원 판결을 통해 동성결혼이 법제화된 역사적인 2015년 바로 다음 해였다. 동성결혼 법제화는 미국 퀴어운동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는 1969년 ‘스톤월 항쟁’ 이후, 1970년대부터 동성결혼을 위한 다양한 활동과 노력의 결과로 얻어낸 소중한 성과로 꼽힌다.


퀴어 커뮤니티의 분위기는 한참 달아올라 있었다. 성과에 고취되기도 했지만, 이걸 계기로 더 많은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제기됐다. 여러모로 새로운 장이 열릴 거라는 희망적인 마음이 싹트던 시기였다.


▲ <원 헌드레드>(The 100) 포스터 ⓒTheCW


그러던 3월, 미국 공중파방송 중 하나인 CW에서 방영 중이던 SF드라마 시리즈 <원 헌드레드>(The 100)에서 퀴어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던 레즈비언 캐릭터 ‘렉사’(Lexa)가 죽임을 당했다. 그 회차 방송이 끝난 후, 소셜미디어는 분노를 표출하는 팬들의 목소리로 뒤덮였다. 정신적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팬들도 많았다.


‘TV 드라마에 나오는 캐릭터가 죽었다고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건 정말 오바’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관객이 직접 움직여 찾아가야 하는 스크린과 달리, 브라운관은 일상에서 가까이에 있다. 또 영화는 대부분 한 편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것에 반해, 드라마 시리즈는 매일 혹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 꾸준히 시청자와 만난다. 즉, 보는 이가 자신의 감정을 연결시키고 때로 동일시하며 감정을 쏟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특히 등장인물이 ‘나와 같은’ 캐릭터라고 생각되면 그에 대한 애정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렉사’의 죽음에 대한 팬들의 분노를 이해하려면, 지금까지 오랫동안 방송에서 퀴어 캐릭터, 특히 퀴어여성 캐릭터를 ‘과소재현’하고 ‘왜곡/부정적으로 재현’해 온 배경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 퀴어여성 캐릭터 숫자. 핑크색은 레즈비언, 보라색은 양성애자, 초록색은 퀴어여성으로 암시된 캐릭터를 뜻한다. ⓒ2019 LGBT Fans Deserve Better.


2002년 <버피> 시리즈 ‘타라’의 죽음이 남긴 상처


미국에서 1997년부터 2003년까지 방영되며 큰 인기를 얻었던 SF드라마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Buffy the Vampire Slayer)는 주인공인 고등학생 여성과 그 친구들이 뱀파이어를 비롯한 악당을 물리치는 내용으로, 10대 여성을 강한 영웅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또 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들어가는 성장 과정뿐 아니라, 친구들과 때론 다투면서도 같은 편에 서서 공동체를 이루는 모습, 세상을 구해야 하지만 그래도 연애는 해야 한다는 연애 판타지가 어우러진 내용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


1999년에 방영된 시즌4부터 주인공인 버피만큼이나 중요한 등장인물이자, 주인공의 친구라는 보조캐릭터에 머무르지 않고 마법을 공부하는 마녀로 성장해 가는 캐릭터인 윌로우(Willow)가 타라(Tara)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윌로우와 타라의 러브스토리가 특히 중요했던 건, 그동안 방송에서 보여준 여/여 관계(혹은 키스)는 농담 소재로 쓰이거나 이성애자 남성을 위한 유희, 혹은 잠시 주목을 끌기 위한 해프닝 장치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1997년 엘렌 드제너러스가 자신의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던 시트콤 <엘렌>(Ellen)에서 레즈비언임을 커밍아웃을 한 후폭풍으로 시트콤이 막을 내린 후였기 때문에 이들의 ‘레즈비언 관계’의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 1997년부터 2003년까지 방영된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Buffy the Vampire Slayer) DVD 사진


윌로우와 타라의 관계는 시즌4부터 시즌6까지, 세 시즌에 걸쳐 꾸준하게 전개되었다. 남자친구가 있었던 윌로우가 자신의 성적지향을 조심스럽게 깨닫는 과정이나, 타라의 보수적이고 강압적인 아버지가 나타나 “지금 날 안 따라오면 너한테 이제 가족은 없다”며 딸을 끌고 가려고 했을 때 “이제 내가 타라의 가족”이라며 하나둘 그 아버지 앞에 맞서던 친구들의 모습도 보여졌다. 윌로우와 타라가 버피의 여동생 돈(Dawn)을 돌보며 친밀함을 쌓아가는 과정은 대안가족의 형태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 모든 이야기가 TV 앞의 퀴어여성 시청자들, 특히 퀴어청소년들에게 희망이고 빛이었다.


그렇기에 시즌6에서 타라가 어이없게도 빗나간 총알에 맞아 죽었을 때 팬들은 절망했다. 그 죽음에 더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타라의 죽음이 ‘미국 TV 역사상 최초의 레즈비언 베드씬’ 바로 이후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함께 흐트러진 침대에 누워있고 서로 안고 키스를 나누는 장면이 나간 이후, 두 캐릭터와 시청자들의 행복감이 극도로 달해있던 그 순간 타라를 죽여버린 거다.


이건 단순히 ‘한 캐릭터가 죽었다’가 아니라,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정확하게 드러낸 캐릭터가 ‘죽임을 당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여성이 섹슈얼리티를 드러내면 처벌받는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건 물론이고, 레즈비언은 행복할 수 없다는 인식을 조장할 수 있는 설정이었다.


“동성애자를 묻어버리는” 방송에 분노한 팬들


타라 전후로도 방송에서 “동성애자를 묻어(죽여) 버리는 일”(Bury Your Gays)은 하나의 용어가 될 정도로 빈번했다. 퀴어의 비가시화와 과소재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자, 방송국에선 ‘다양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혹은 자극적인 요소로 이용해서 시청률 반등을 노리기 위해 퀴어 캐릭터를 등장시키긴 했지만, 그 캐릭터에게 제대로 된 스토리를 주지 않았다. 1990년대와 200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방송국을 점령하고 있는 연출/제작진들 대부분이 ‘시스젠더 이성애자 백인남성’이었으니 아마 무슨 이야기를 써나가야 할지도 몰랐을 거다.


기껏 등장한 퀴어 캐릭터들은 소모품처럼 놓여있다가 사라지는 일이 많았고, 사라지는 방법 중 하나가 ‘죽임을 당하는 일’이었다. 극 중 캐릭터가 죽는다는 건 꽤 자극적인 스토리이기도 하니 연출진 입장에선 감당하기 버거운 캐릭터를 치우는, 1석 2조의 방법이었다.


한편으로는 ‘냉장고 속의 여자’(남성 캐릭터의 각성이나 변화를 위해 부상, 강간, 죽임당하는 여성 캐릭터) 신드롬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여성 캐릭터가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게 퀴어여성에게도 어김없이 적용된 면도 있다. 드라마 시리즈가 전개되다 보면 어떤 캐릭터의 죽음 설정이 필요한 경우도 물론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이 필요한 상황일 때 연출진들이 죽음 후보군 가장 꼭대기에 올려놓는 캐릭터는 (주인공일 리 없는) 여성이자 퀴어라는 것이다.


▲ 1976년부터 2916년까지 미국 방송에 등장한 레즈비언 캐릭터 중 21%가, 여성 양성애자 캐릭터 중 32%가 죽임을 당했다. ⓒ2019 LGBT Fans Deserve Better.


퀴어여성 캐릭터의 죽음 중에서 일부는 자살로 표현되었다. 여기에 대해 연출진들은 ‘현실을 반영한다’는 안일하고도 게으른 핑계를 댔다. 1970년대~1990년대 많은 퀴어들이 심리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겪었던 게 사실이지만,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행복하고 당당하게, 하고 싶은 연애도 실컷 즐기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미디어에는 ‘퀴어들, 레즈비언은 불행하다’는 이야기만 반영된 것이다.


그러니까 <원 헌드레드>의 렉사의 죽음은 시청자/팬들에게 단순한 죽음일 수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묻어야만 했던 캐릭터가 이미 너무 많았다.


#LGBTFansDeserveBetter 운동이 시작되다


2016년, 또 한 명의 죽임 당한 레즈비언 캐릭터인 ‘렉사’는 굉장한 인기를 얻고 있었다. <원 헌드레드>의 주인공인 클락(Clarke)과 ‘서로 적이어서 사랑에 빠지면 안 되는데 계속 끌리는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관계를 만들며 퀴어여성 캐릭터로는 보기 드물게 ‘러브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렉사와 클락이 각각 자신의 부족/무리의 리더였으며 레즈비언, 양성애자라는 사실이 그들에게 전혀 시련이 되지 않는다는 점도 많은 시청자들을 매혹시킨 요소였다.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렉사와 같은 퀴어여성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 캐릭터를 동경하는 이들도 많았기에, 렉사의 죽음은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렉사의 죽음은 이상하리만큼 절묘하게도 2003년 타라의 죽음과 닮아있었다. 렉사가 클락과 키스를 하고 흐트러진 침대 위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 이후 어이없게도 총에 맞아 죽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가장 행복한 순간에 말이다.


팬들을 정말 분노했다. 이번에는 단지 분노만 하지 않았다. 이미 <버피>의 타라 사태를 겪은 팬들, 수많은 퀴어 캐릭터를 “묻어온” 팬들은 이 죽음이 퀴어 커뮤니티에 미칠 영향을 걱정했다. 그래서 퀴어청소년들을 위한 모금을 진행했다. 나아가 방송/미디어가 이런 스토리를 반복하는 걸 그만둬야 한다며 “우리(LGBT 팬들)은 더 나은 대접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LGBTFansDeserveBetter 운동을 시작했다.


퀴어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문화 온라인 언론매체인 ‘Autostraddle’에선 “TV에서 죽은 204명의 레즈비언과 바이섹슈얼 캐릭터들 그리고 그들이 죽은 방식”(All 204 Dead Lesbian and Bisexual Characters On TV, And How They Died)이라는 기사를 내며 실질적인 ‘증거’를 들이밀었다. 해시태그 운동이 탄력을 받자 대중 언론들도 그제서야 무엇이 문제였는지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방송에서 퀴어여성 캐릭터를 사용해 온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비판했다. 팬들은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 클렉사콘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선 벌써 내년 일정을 알리고 있다 ⓒ2017-2019 ClexaCon, LLC.


팬들은 이 운동이 일회성으로 끝나서 안 되며 지속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바로 <클렉사콘>이다. 클렉사라는 이름은 클락과 렉사의 커플명으로, 그 캐릭터가 퀴어 커뮤니티에 미친 영향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클렉사콘>은 <코믹콘> 등과 같이 팬들을 위한 컨벤션 행사다. 다른 점이 있다면 ‘퀴어여성’과 앨라이(지지자)를 위한 행사이고 사회적 변화를 위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곳이라는 점이다. 올해 라스베거스에서 열린 <클렉사콘> 현장 분위기가 어땠고,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갔는지는 다음 편에서 전하도록 하겠다. (박주연)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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