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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vegan) 페미니즘이 뭐야?
2019 페미니스트 ACTion! ③비건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 혐오와 차별을 멈추라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온라인에서 결집되어 거리에서도 울려퍼지는 시대, 지금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의 액션을 기록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2년 전, 정부가 가임기 여성의 지역별 분포도를 나타낸 대한민국 출산지도를 발표했을 때 많은 여성들이 국가에 의해 단지 번식/재생산을 위한 도구로 취급받았음에 분노했다. 우리의 존재는 ‘자궁’이 아니고 ‘유방’이 아니라고 외쳤다.
그런데, ‘암컷 젖소’의 현실은 어떠할까?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젖소의 재생산력과 그 몸을 착취하는 일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 글에서 이러한 의제를 던져보려고 한다.
▲ 젖소의 재생산력과 그 몸을 착취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출처: 비건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희지, 2017)
강제 임신, 출산, 착유, 이별 반복하는 암소와 암탉
사실, 젖소는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임신을 하지 않으면 모유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이 지은 ‘젖소’라는 이름은 그들이 마치 아무 때나 ‘우유’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젖소는 모유를 생산하기 위해서 태어난 지 2년 후부터 강제 임신을 당한다. 인간은 젖소의 질 내에 튜브를 삽입하여 수소에게서 채취한 정액을 집어넣어 임신을 시킨다. 암컷 젖소는 열 달을 아기를 뱃속에 품는 동시에 착유도 당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게 된다. 열 달 후, 아기를 출산한 암컷 젖소는 두 달 후 다시 강제 임신을 당하고, 또다시 열 달을 아기를 품으며 젖을 생산한다.
이것이 암컷 젖소의 짧은 일생의 전부다. 모유 생산량과 출산능력이 저하되기 시작하는 시점인 네 살에서 다섯 살 사이에 도살당하기 때문이다. 젖소의 자연기대수명은 스물다섯 살인데도. 이 암컷 젖소의 수명을, 인간들은 ‘경제 수명’ 또는 ‘생산 수명’이라고 부른다. 생산성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경제 수명’을 다한 암컷 소는 바로 도축되어 ‘고기’로 생산된다. 암컷 젖소가 출산한 새끼들은 고기 혹은 또 다른 암컷 젖소가 된다.
닭알을 생산하는 닭도 마찬가지다. 암탉은 자연 상태에서는 인간과 같이 1년에 12번 생리를 하지만, 인간이 닭알을 얻기 위해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생리할 수밖에 없도록 변형되고 착취당하고 있다.
축산업의 구조 자체는 근본적으로 여성 동물의 재생산력을 착취하는 형태로만 유지될 수 있다. 축산업은 수요를 맞추기 위해 기하급수적인 개체 수를 요구하는데, 여성 동물의 재생산능력을 착취하지 않고 그 수요를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본 기사에서는 재생산 문제와 관련된 여성의 문제만을 집중하여 다루지만, 여기서 여성이란 재생산능력을 가지고 있거나, 가지기로 기대되거나, 가지지 못해 차별받는 사람들을 포괄하여 말한다. 여성을 ‘재생산능력’을 가진 자로서만 표현할 경우 ‘여성문제’로서의 의의를 제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부득이하게 ‘여성’이라고 언급했다.)
동물들은 왜 이런 삶을 살아야 할까? 어째서 자연 수명이 아니라 생산 수명밖에 살지 못하고 도살당해야 할까? 그리고 여성 동물들은 왜 살아가는 동안 강제 임신과 강제 출산과 강제 착유, 생리 등을 반복해야 할까? 그것은 그들의 재생산능력이 ‘착취당해도 괜찮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①유비 이야기: 비건, 페미니스트에서 비건 페미니스트로
페미니스트인 나는 약 2년 전 비건(vegan, 육류와 닭알, 유제품, 생선 등을 먹지 않으며 동물을 희생시켜 얻은 의류나 동물실험을 거친 화장품 등을 사용하지 않음) 선언을 했다. 당시 내 비거니즘은 상당히 개인적이었다. 페미니즘, 비거니즘 관련 글들을 읽고, 가끔 비건 식당에 가며, 보통은 혼자 집에서 비건 요리를 하는 데 그치는 일상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페이스북에서 <비건 페미니스트 네트워크>의 멤버를 모집한다는 글을 발견했다. “이제는 우리가 모여야 할 때”라는 내용이 들어간 워드 문서 4장짜리, 빽빽하고 정성스러운 모집 공고였다. 그걸 어떻게 제대로 읽어볼 생각도 않고 그저 신나서 가입한 건지 지금으로서는 당시의 나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저 비슷한 마음과 생각 그리고 식탁을 공유할 비건, 페미니스트 친구들이 필요해 가입 신청을 했다. 그렇게 얼렁뚱땅 <비건 페미니스트 네트워크>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창립 회의에 가서 알게 된 사실은, 나들이하듯 종이와 펜도 없이 나눠 먹을 비건 빵만 달랑 들고 간 나와 달리 <비건 페미니스트 네트워크>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엄숙했고, 나는 어리둥절했다. 첫 멤버의 약 절반 정도는 페미니즘 분야에서 이미 ‘활동’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이미 ‘활동가’였던 사람들은 페미니즘과 비거니즘의 교차성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하며 ‘비건 페미니즘’이라는 교차성 학문을 연구하고 널리 알려서 그 입지를 확립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반면 나처럼 어리둥절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 지금도 멤버들과 그 날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그때의 긴장과 엄숙함, 그리고 우리의 어리숙함에 한바탕 웃곤 한다.
페미니스트인 나, 동물에 대한 폭력을 어떤 방식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 비건이 된 나는 그때까지만해도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김치녀’라는 호칭의 성차별성에 대해서는 싸웠지만, 동물 사체를 ‘고기’라고 부르는 것은 그러려니 했다. 성차별과 대응되는 ‘종차별’이라는 용어도 몰랐다. (종차별이란 종의 구별과 위계로 이루어지는 차별을 말하며, 따라서 인간 이외의 종에 대한 차별을 말한다.)
그런 내게 <비건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사람들은 참 친절했다. 경험, 경력,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동등한 동물들로서 함께 종차별 언어들에 대해 토론하고, 우리가 앞으로 사용해야 할 비거니즘 언어들을 정비하며 우리의 정체성이 되는 이론, ‘비건 페미니즘’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여기서 비건 페미니즘이란 비(非)인간 여성과 인간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의 구조에서 공통점을 찾는 것으로, 비거니즘의 종차별-성차별 동일구조 이론에서 나아가 비(非)인간 여성의 재생산권에 초점을 맞춘다.
<비건 페미니스트 네트워크>가 발족한 지 한 달 후, 우리는 첫 프로젝트로 비건 페스티벌에 부스를 출점하기로 했다. 함께 모여 페스티벌에 가지고 나갈 머핀을 굽고(사실 멤버들은 이 날을 감옥 같았다고 회상한다. 나는 혼자 집에서 파운드 케이크를 구웠는데 역시나 지옥 같은 밤샘을 했다. 가내수공업은 정말 공장식과는 비교가 안 된다), 비건 페미니즘을 알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다 보니 준비 기간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그러는 새 우리는 전체 회원이 20명도 안 되는 소규모 단체 내에서 금세 꽤 친해졌다.
비건 페스티벌의 부스 출점은 꽤 성공적이었다. 금전적으로는 적자라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비건 페미니스트 네트워크>의 발족을 많은 사람들이 반가워했다. 우리 부스 옆에 작게 마련한 비건 페미니즘 도서관 겸 ‘안전한’ 휴식 공간도 인기 있었다. 멤버들의 노동 시간도 1인당 한두 2시간씩 잘 배분됐고, 최소한 당일 노동에 대한 최저시급이 꼼꼼히 지불됐다. 활동가의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겠다는 처음의 다짐을 실천한 결과다.
▲ 2017년 10월 비건 페스티벌에 참여했을 때, 비건 페미니스트 네트워크에서 마련한 ‘비건 페미니즘 도서관’ (출처: 비건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외로운 싸움이구나, 즐겁게 하자
그런데 비건 페스티벌 직후, 일베 등 ‘남초 커뮤니티’에서 우리 단체가 화두에 올랐다. 일요일에 비건 페스티벌을 마치고 월요일 아침부터 페이스북 페이지 관리자인 내 핸드폰이 쉬지 않고 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위력이 꽤 대단해서 한 시간에도 알람이 30개씩 쌓였다. “쟤네 끝나고 치킨 먹었다”는 얘기부터 ‘육식 전시’, ‘페미니스트들의 끔찍한 혼종 등장’이라는 비방글들… 게다가 3~4일쯤 지나서는 페미니스트들까지 가세하기 시작했다. “나 페미인데, 여성인권이 더 시급하다”, “여성인권에 동물권 얹어 발목 잡는다” 등등. 총 팔로워 수가 300명 남짓인 단체 페이지의 게시글 조회 수가 10만에 달했다.
이제 막 첫 활동을 마친 우리에겐 정말 감당 안 되는 상황이었고, 특히 동료인 페미니스트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우리는 정말로 좁은 길을 걷고 있단 걸 깨달았다. 그래서 외로웠지만, 한편으로는 단체 내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부둥켜안으며 나아가야 한다는 걸 확인한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멤버들에게 적극적인 활동을 기대하거나 강요하지 않는 것 또한 <비건 페미니스트 네트워크>의 사랑스러운 점이다. 예를 들면 멤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잠수’를 타더라도 아무도 그 이유를 묻거나 압박하지 않는다. 힘든 일 있구나, 쉬고 싶구나, 힘든 길을 걷고 있는 만큼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해한다. 서로의 실패를 공유하고 이를 거름 삼아 나아간다.
이렇게 <비건 페미니스트 네트워크>는 개개인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려고 하지는 않았어도 꽤 잘 굴러갔다. 단체 내 비건 페미니즘 번역 모임, 세미나, 의제 연구 개발, 회의 등으로 상시 모였고, 개인이 프로젝트를 자유롭게 제안해 참여할 사람을 모집하면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모여 일하는 식으로 활동했다.
대구 치맥 페스티벌 반대 시위, 개식용 반대 시위, 동물권 행진, ‘낙태죄’ 폐지 시위, 발암물질 생리대 진상규명 촉구 시위, 이화여대 Right Light Festival, 월경 페스티벌, 3·8 한국여성대회, 여성환경연대의 ‘2030 에코 페미니즘 포럼’ 등. 비거니즘과 페미니즘 그리고 환경 분야의 많은 시위와 행사에 참여했다. 그러면서 기존의 비거니즘과 페미니즘에서 나아간 ‘비건 페미니즘’을 제창하는 단체로 입지를 굳혀나갔다.
특히 페미니즘 세미나와 포럼, 행사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페미니즘 진영 안에서 ‘동물에 대한 폭력 소비와 용인’에 대해 비판하였고, 행사에 준비된 다과를 비건식과 비건 간식으로 할 것을 요구하며 비거니즘에 대한 인지를 촉구했다. <비건 페미니스트 네트워크>가 공동주최 단위로 참여한 월경 페스티벌에서는 참여단체 모두에게서 비거니즘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행사와 준비 과정에서 동물성 성분을 배제하는 성과를 남기기도 했다.
▲ 올해 세계여성의날 기념으로 열린 3·8 한국여성대회에 참가해 피켓을 든 비건 페미니스트들의 모습. (출처: 비건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비거니즘에 대한 인식은 빠르게 확산 중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가 열린 지 3년 만에, 66년간 여성의 재생산권을 합법적으로 박탈하고 관리하던 ‘낙태죄’가 헌법재판소에서 헌법 불합치 판결을 받았다. 여성들이 거리로 나와 ‘낙태죄를 폐지하라’고 외친 지난 3년도, 낙태죄가 완전히 폐지되는 앞으로의 2년도 우리의 삶에서 너무 길게 느껴지지만 한국 사회는 상대적으로 변화가 빠른 것 같다. 문제를 인식하기까지 오래 걸리지만, 인식한 이후에는 빠르게 변한달까?
<비건 페미니스트 네트워크>가 발족한 이후 2년간의 변화를 돌아보면 놀라움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처음에 받았던 수많은 악플들은 순식간에 늘어난 비건 지향 인구로 희석되고 있다. 비거니즘을 지향하는 중소기업들이 속속 생겨나고, 이제는 대기업마저 ‘비거니즘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2년 전에는 비건이 아닌 식당에서 ‘이거 빼주세요, 저거 빼주세요’ 했다간 쫓겨나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비건 옵션을 제공하고 표기하는 식당들이 늘어나고 비건 카페가 거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특히 페미니즘 진영에서의 변화가 가장 크게 느껴진다. 페미니즘 단체들을 거의 괴롭히다시피 쫓아다니고 끼어들며 비건식을 요구하고, 비거니즘에 대한 ‘무료 자문’을 제공하는 활동을 하면서 지쳤던 첫 두 해가 오랜 과거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제는 최소한 ‘비건 옵션’이 페미니스트들의 기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차별과 착취의 구조를 비(非)인간에게 남기는 게 아니라, 착취와 폭력의 구조를 무너뜨려 모든 생명이 평등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자는 생각이 널리 퍼지고 있다는 증거다. <비건 페미니스트 네트워크>는 그런 동료 페미니스트들의 변화와 함께 성장하고 있다.
성장하는 <비건 페미니스트 네트워크>와 함께해온 나는 스스로에 맞는 이름을 찾았다.
“나는 비건 페미니스트입니다. 내 몸이 나의 것이듯, 내 재생산력의 전권이 나에게 있듯, 남의 몸도 존중하는 건 당연한 거죠.”
②호연의 제안: 비건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
좁은 길이라고 생각했던 비건-페미니즘의 지향점은 점점 넓은 길이 되고 있다. 나는 비건 페미니즘을 함께 지향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해시태그를 활용해 제시해보려 한다.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순한 명제만 따르면 된다. 소비 자본주의 사회에서 ‘폭력을 구매하지 않기’ 그리고 ‘동물 살해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들을 통해 비거니즘을 실천할 수 있을까?
▲ ‘소젖 끊기’를 제안하는 내용의 피켓. (출처: 비건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육식을_전시하지_마세요
우선 밝히자면 육식은 ‘고기’(동물 사체)만 뜻하지 않는다. 닭알도, 소젖도 모두 육식이다. 당장 식(食)으로 보이지 않는 오리털, 양털과 같은 것들도 포함된다. 동물의 사체와 무관해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의 끝은 결국 도살이다. 닭알와 소젖을 생산하는 동물들은 태어난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무가치하게 여겨지고 도축장으로 끌려간다. 털을 빼앗기는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고통에 둔감하다고 여겨지는 해양 동물들은 항상 떼죽음을 당한다. 심지어 얼마나 많은 해양 동물들이 죽는지 파악하기도 어렵다.
‘육식을 전시’하는 행위는 비(非)인간 동물을 죽이는 것에 힘을 실어주고 폭력에 가담하는 행위다. 동물의 죽은 살점과 착취를 통해 얻은 그 부산물들은 ‘더 맛있는 음식’으로 보이게끔 탈바꿈되며 폭력적인 실태는 숨겨진다.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지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물을 죽이는 장면을 눈 뜨고 똑바로 볼 수 없을 것임에도, 그 고통으로부터 온 동물의 사체와 부산물들-노골적으로 동물의 신체를 해체한 고기, 곱창, 순대, 오돌뼈, 곰탕, 내장부터 예쁘고 무해한 이름으로 포장된 치즈, 우유, 요거트, 달걀 요리까지-은 음식, 예쁜 사진, 자랑거리로 치환되고 폭력성은 증발하는 것이다.
‘모든 폭력이 종결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육식을 전시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_모임의_식단은_비건식으로
최근 ‘비건 옵션’에 대한 논의가 많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어떤 모임을 주최할 때 비건식이 ‘옵션’이 아니라 전체식으로 준비될 필요가 있다. 비건식은 그 누구도 죽이지 않고 만들 수 있으며, 또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육식’과 ‘채식’으로 분류되는 기준은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질 수 없다. 육식에는 생명에 대한 폭력이 존재하며, 폭력을 용인하는 것은 다양성을 확장시킨다는 개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폭력과 차별에 대해 저항하는 모임이라면, 그 모임이 비거니즘을 기반으로 활동하지 않더라도 공식적인 모임에서는 식단을 비건식으로 준비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비거니즘은 실천을 통해서만 연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동물을 죽이지 않고, 먹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
또한 비건의 권리 보장 측면에서 살펴보았을 때도, 비건식은 모두가 먹을 수 있지만 논(non)비건식은 비건이 먹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비건 옵션’의 경우에 종종 샐러드, 김밥 등 한 가지만 준비되는 반면, 논(non)비건식은 다과, 밥류 등 다양하게 준비되어 구성원들 사이에 차별성을 낳는다. 모두가 비건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비건 옵션’을 먼저 먹어버려서 정작 비건은 모임에서 굶게 되는 경우도 왕왕 있다.
▲ 유비가 만든 떡볶이와 김밥 그리고 (사 온) 야채튀김. 떡볶이는 멸치육수 대신 다시마와 채수 베이스로 만들었고 김밥은 손두부 부친 것과 달래를 메인으로 했다. (출처: 비건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인간중심_언어_타파하기
‘물고기’는 애초에 인간의 음식으로 점지해놓은 것처럼 인간에 의해 ‘고기’라고 불린다. 하지만 당연히 그들도 고통을 느끼며, 우리와 같은 생명체이다. 인간보다 ‘지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인간과는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인간에 비해 ‘가치가 없다’며 이들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존중하지 않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이러한 차별 기제는 다른 소수자 인간들을 차별하는 기제와 동일 선상에 있다.) 우리는 이들을 ‘물살이’ 또는 ‘해양 동물’이라고 불러야 한다.
‘고기’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동물 사체’라고 불러야 한다. 동물 사체는 극단적인 언어가 아니며 사실 그대로를 보여준다. 오히려 ‘고기’라는 말은 비(非)인간 동물을 향한 폭력성을 가리며 생명체를 음식, 사물로 치환해버리게끔 한다.
#모두가_비건을_지향한다면
동물권을 바탕으로 하는 비거니즘은 그 어떤 이론보다도 실천이 중요하다. 당장 우리 눈앞에 놓인 ‘일상적’이고 ‘무해한 것으로 보이는’ 무수한 식탁들 위에서, 옷장 속에서 동물의 죽음을 추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오면서 부지불식간에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고, 인간이 겪는 고통은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인간과 다르게 생긴 동물을 죽이는 행위에 대해선 어째서 당연하게 여겼는지 스스로 묻기 시작해야 한다. 가장 기본적이고 당연하게도, ‘다른 존재를 죽이지 않는 것’. 여기서 비거니즘은 출발한다.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서 사회의 가부장제 질서를 무너뜨리고 성차별에 대항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듯이, <비건 페미니스트 네트워크>는 인간 모두가 비(非)인간 동물에 대한 가해를 성찰하고 비건을 지향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제껏 다양한 활동들을 해왔으나 지금까지 한 일보다 앞으로 할 일들이 더 많다. 비(非)인간 동물에 대한 착취를 멈추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인간 동물들의 연대가 필요하다. 인간 사회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종차별주의를 부숴나갈 동료를 찾고 있다. 함께 벽에 균열을 내자. 우리가 모두 지구생명체임을 자각하며 그 누구도 고통받지 않는, 인간의 기본(Base line)이 비건, 페미니스트가 되는 날을 함께 꿈꾸고 싶다. (유비, 호연 기록)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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