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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애나 잘 키워라”지만 엄마들은 “정치한다”
<페미니스트 ACTion>① 정치하는엄마들
※ 차별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온라인에서 시작되어 거리를 메우기 시작한 2015년부터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의 액션을 기록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여자의 ‘몸’, 여성이라는 ‘젠더’의 가출 선언!
몇 년 사이 ‘엄마’를 이야기하는 출판물이 쏟아졌다. 어쩌다 엄마가 됐고, 엄마는 처음이라서, 서툴지만, 엄마로만 살지 않고, 뻔뻔해지기로 결심했다, 반성도 하지만, 엄마는 페미니스트라는(또는 페미니스트여야 함을 주장하는) 제목들이 눈에 띈다.
반가운 일이다. 엄마는 그동안 ‘여자’만큼이나 줄기차게 호명되면서도 스스로 발화의 주체가 되지 못한 대상이었다. 인내와 희생, 따뜻하고 강인함의 존재로 통칭되다가 최근에야 하나, 둘 개별적 엄마를 이야기하고 주목하니 말이다. 엄마가 무엇이기에 그동안 숨죽여 왔으며 이제는 이렇게 분연히 일어나는 걸까? 애 좀 낳았다고 호들갑스레 유세하는 건가?
우리 사회에서 ‘엄마 되기’는 기존의 세계가 전복되는 일이다. 누구도 임신과 출산의 생리학적 과정 말고는(그조차도 꺼리지만) 설명하지 않았고, 심신이 너덜너덜해지는 경험은 ‘생명의 숭고함’ 뒤로 묻혔다. 서로가 애써 눈 감고 짐짓 외면한 채 여기까지 왔다.
나 역시 엄마가 되고서야 ‘여성’에 대해 강렬히 자각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는 세상에 존재하는 약자, 소수(소외)자, 사회 부조리, 연대의 필요성으로 이어지는 페미니스트 모멘트이기도 하고 세상으로 나가겠다는 또 다른 의미의 가출 선언이기도 했다.
한 달에 한 번, 타고난 ‘성’을 인식할 수밖에 없는 순간과 일상적 불안, 내 몸을 재단하는 눈빛과 시각의 불편하고 불쾌한 일을 당연하게, 또는 체념하며 살았다. 하지만 임신과 출산, 모유 수유라는 보다 동물적인 경험이 보태지면서 여자로서 ‘나의 몸’이 새롭게 다가왔다. 이는 사회적으로 여성의 몸이 어떻게 취급받는지를, 나아가 여성이라는 젠더를 비로소 절감하게 됐다는 것에 가깝다.
▶ <정치하는엄마들>의 ‘엄마’는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여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적 모성을 주장한다. 2017년 창립 총회에서. ⓒ정치하는엄마들
엄마들은 왜 만나서 울었을까?
출산을 하고 육아휴직을 쓸 수 없어 70일 되던 날부터 출근을 했다. 복직 첫날 여전히 붓기가 남아 있는 내 얼굴을 보며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남성 관료는 “최근 출산한 딸이 있어 남일 같지 않다”면서도 내게 “비정한 엄마”라고 말했다. 그렇게 어린 자식을 두고 어떻게 일을 하러 나올 수 있느냐는 말이었다. 배우자는 단 이틀 출산 휴가를 사용했을 뿐이지만 그에게 비정한 아빠라고 말 할 이는 단언컨대 없었을 것이다.
회복되지 않은 뼈마디가 쑤셨다. 임신, 출산과 마찬가지로 출산 이후 몸의 변화에 대해 알려주거나 이해하려는 이는 드물었다. 내 몸 돌보는 건 사치였다. 밤마다 쉽게 잠들지 못하는 아이를 달래가며, 새벽까지 밀린 일을 해야 했다. 그런데도 나는 죄인이었다. 일을 하러 나가서, 아이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아이를 대신 돌봐주는 시가와 친정가족들에게, 아이가 아플 때면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일터에서 늘 그랬다.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지”와 “애 엄마 티 내지 말고 똑같이 일해야지”라는 이중 잣대는 징그러울 만큼 내게 찰싹 붙어있었다.
평일에는 장거리 출퇴근을 이어가는 배우자 대신 아이 돌봄을 전담해야 했다.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일터와 근무를 조정해 병원에 데려가고 간호를 해야 하는 것도, 결국 보다 삶의 안전성을 갖기 위해 주거지를 옮기고 아이 돌봄에 집중하고자 일을 그만둔 것도 나였다.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급여가 낮기에 가사와 돌봄 노동으로 내몰리는 수많은 여성들의 전철은 나라고 비켜 가지 않았다. 사회는 나를 ‘경력단절 여성’이라 부르며 단절시켰다. 나로서 살아온 이전까지 삶은 사라졌다. 그래도 결혼, 임신, 출산, 양육까지 너의 자발적 선택이니 수용해야 한다고, “모두가 다 그렇게 산다”고 세상은 말했다.
성과로 측정되기 어려운 가사노동과 돌봄은 그림자였다. 살아가려면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지만 보상은 없었다. 배우자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임금 노동의 가치가 올라갈수록 “이건 우리가 함께 한 일”임을 강조했지만 나는 공허함을 떨치기 어려웠다. 졸지에 ‘집에서 노는’, ‘남편 카드로 속 편하게 사는’, ‘소비만 있고 생산은 없는’ 대상이 되었다.
이름 대신 아이의 ‘엄마’로 불리는 빈도가 늘어날수록 답답함을 설명해 줄 언어에 목말랐다. 틈이 나는 대로, 신문 한 귀퉁이처럼 눈에 보이는 공간마다 글을 써 내려갔지만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아이와 배우자가 내 삶을 망친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에 문제가 있음을 알지만 그래도 답답했다. 나 혼자 아이를 잘 키운다(사실은 키우는 게 아니라 함께 살아갈 뿐이지만)고 될 일이 아니라는 인식은 ‘세월호’ 참사를 경험하며 더욱 강렬해졌다. 돌봄 공백의 사회를 더 이상은 방관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와 같은 이들이 만났다. <정치하는엄마들>이다. 앞선 나의 경험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고 김서령 작가는 책 『여자전』(푸른역사, 2007)에서 “한 여자가 한 세상이다”라고 말했다. <정치하는엄마들>은 저마다 딛고 있는 시대와 환경 속에서 자기의 세상과 서사를 만들어 왔다. 개별성을 가졌지만 공통점을 지녔고,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았다.
우리는 가부장적이고 위계적인 관계를 거부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남녀노소를 ‘언니’라고 불렀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구조 속에서 굳어진 성 역할과 모성 소외를 떨치고 양육 당사자로서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절박함을 공유한 이들이었다.
▶ 2017년 6월 11일 <정치하는엄마들> 창립총회 사진 ⓒ정치하는엄마들
정치하는엄마들은 창립 직후 스토리펀딩 ‘그들은 왜 정치하는 엄마가 되었나’를 통해 그동안 사적으로 치부됐던 돌봄 노동을 공적 의제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첫 만남을 기록한 1화의 제목은 “엄마들은 왜 만나서 울었을까”였다. 우리는 만나서 울었다. 엄마라는 존재로 불리게 되는 순간부터 가장 힘든 일은 ‘약한 생명을 오롯이 책임져야 하고 그 모든 걸 혼자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과 두려움이었다.
처음으로 공적 공간에서 공감을 받고, “당신만 힘든 것이 아니”며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도 되는 세상”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지지 세력이 있음을 발견했을 때 흘린 눈물은 그래서 각별했다. 공감은 변화를 이끄는 시작이 되기도 한다. 우리 더이상 울지만 말고 같이 이를 해결해 보자고 다짐한, 정치하는엄마들로서 ‘모멘트’기도 했다.
모성신화를 거부한 엄마들, 반격을 시작하다
지난해 정치하는엄마들이 출간한 책 『정치하는 엄마가 이긴다』(생각의힘, 2018)의 부제는 ‘모성신화를 거부한 엄마들 반격을 시작하다’였다. ‘여성이 남성보다 양육에 있어 뛰어나다’, ‘여성은 본능적으로 모성애를 지닌다’로 무장한 모성신화는 자본주의와 결합해 여성에게 돌봄을 전가하고, 남성에게는 돌봄의 기회를 박탈했다.
‘맘 키즈’, ‘녹색어머니회’, ‘북텔러 맘’(책 읽어주는 엄마 독서 봉사), ‘스쿨 맘 톡’ 등 육아와 엄마를 동기화한 예는 여전히 숱하다. 정치하는엄마들 회원들은 포털사이트 육아 채널인 ‘맘 키즈’의 이름에 문제가 있음을 제기해 ‘부모아이’로 바꾸는데 일조했다. 녹색어머니회 역시 녹색부모회로 명칭을 변경하라는 권고 사항을 낳기까지 국민신문고 등에 신고하는 활동을 했다.
최근 한국 사회를 휩쓴 <SKY 캐슬>이라는 드라마에서도 아이들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가해자이자 또 이를 푸는 해결사는 엄마였다. 그러나 이제는 생물학적 여성이기에 모성애를 기본 장착하고 있고, 그래서 아이와 애착을 형성하고 이를 도맡아 책임져야 한다는 관념이 곳곳에서 거부되고 있다. ‘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라고 할 때, 우리가 엄마로 걸어온 삶과 시간 속에서 마주한 결론은 이것이다. “엄마여서가 아니라,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사회가 엄마에게 양육을 짐 지운 것이며 이제는 이를 보호자 모두와 공동체가 해야 한다.”
▶ 정치하는엄마들이 지은 책 <정치하는 엄마가 이긴다>(생각의힘, 2018)
양육에는 모든 사회 문제와 부조리가 겹쳐 있다. 노동, 보육, 교육, 주거 등 사회를 작동시키는 어느 하나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새삼 ‘다층적 소수성’을 경험할 수 있었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혹은 곁에 서서 마주하는 세상은 약자에게 가혹하다. 육아 프로그램에서는 절대 담지 않는 ‘노키즈 존’ 이슈나 아이와 엄마를 향한 혐오(맘충. 개념맘)가 엄연히 존재한다. 사회가 돌봄을 천시하고 인권에 무감하기 때문이다.
정치하는엄마들의 ‘엄마’는 그래서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생물학적 여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세상의 약한 존재들에 대한 관심과 공감을 끌어내고자 노력하며, 양육당사자들에게 귀 기울이지 않는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는 모든 이들이다.
“정치하는엄마들의 ‘엄마’는 단순히 생물학적 여성으로서 개념이 아니라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삼촌 등 성별이나 연령을 넘어서 모든 성인들에게 주어지는 이름이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나아가 국가와 사회 시스템 역시 아이를 돌보는 엄마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로도 확장하기로 했다.” (『정치하는 엄마가 이긴다』 중에서)
우리는 이렇게 ‘사회적 모성’을 바탕으로 모든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돌보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한다. 이들이 처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모순을 해결해 나감으로써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모두가 차별받지 않는 성평등 사회를 바라며 아동인권, 여성인권, 소수자인권 보호 및 연대 활동을 이어가는 이유다.
“무릇 사람을 낳고 기르고 살리는 돌봄과 살림은 우리 사회의 현재뿐 아니라 미래가 달린 일로서 엄마? 여성? 개인에게 그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되며, 가족공동체. 지역공동체. 국가공동체가 서로 함께 책임져야 할 영역이다. 이제 모성은 생식적 어머니와 분리하며 돌봄과 살림을 수행하는 모든 주체의 역할을 가리키는 개념이 되어야 하고, 우리 사회는 집단 모성? 사회적 모성을 추구해야 한다. 나아가 혈연을 넘어서 돌봄과 살림의 관계를 기준으로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포옹해야 하며 가족 구성원 간의 성 평등한 관계를 법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정치하는엄마들 정관 중에서)
‘보노보노’(보육과 노동) 칼퇴근법을 요구하다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많은 양육자(주로 여성)가 직면하는 문제는 과도한 노동시간과 영유아기 자녀를 둔 노동자에게 가혹한 근무환경이다. 여기에 성별 임금 격차가 더해진다. 100만 원 대 63만 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성별 임금 격차를 보면 2016년 기준으로 한국은 여성임금이 남성의 63.3% 수준이다. 남성이 100만 원을 번다면 여성은 63만 원 가량을 번다는 뜻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큰 격차이며 평균(13.9%)의 2.5배이다. 지난 2002년 조사 이래 한국은 단 한 번도 1위를 놓치지 않았다. 저임금, 남성보다 높은 진입장벽, 질 낮은 일자리 등은 점점 노동시장에서 여성을 소외시켰다.
아이가 자라려면 물리적 시간이 필요한데 한국의 노동환경은 개인에게, 양육자에게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회적 안전망이 이를 보완하는 것도 아니다. 정책은 양육자 대신 아이를 돌봐줄 서비스를 늘리거나 경제적 지원금을 확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양육자의 시간을 서비스로 대체하는 것이다. 노동시장에서 버티려면 또 다른 여성(조모, 보육기관 교사, 사설 베이비시터 등)에게 돌봄을 맡겨야 한다.
이 상황에서 결국 육아를 위해 양육자 중 한 명이 직장을 그만두어야 할 경우 대게 여성이 맡는다. 직장모는 ‘독하고 비정한’ 엄마가 되고, 전업모는 ‘노는’ 사람이 되는 고리의 배경이다. 그리고 정치하는엄마들이 가장 먼저 보육과 노동에 집중한 이유다.
일명 ‘보노보노’, 보육과 노동은 연결된다. 2017년 6월 단체를 창립한 후 첫 행보로 국회 앞에서 ‘칼퇴근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을 가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과도한 근무시간을 줄이고, 양육자가 스스로 아이를 돌볼 수 있을 때 수많은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고 봤다. 또 이언주 국회의원의 ‘밥하는 아줌마’ 발언이 보여주는 급식 노동자에 대한 비하와 천시 풍조를 비판하며, 가사와 돌봄 노동의 가치를 조명하는 활동을 벌이는 이유도 닿아있다.
사회적 모성의 역할, ‘핑크노모어’와 ‘스쿨미투 법률 지원’
“위험한 시간에 다니지 말고, 위험한 곳에 가지 말고, 위험하게 입지 마라.” 여성들에게 익숙한 말들이다. 위험을 일으키는 요소는 그대로 둔 채, 위험을 피하지 않은 이들이 문제라고 말하는 무책임한 태도는 오랫동안 힘을 가졌다,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대중교통이 위험하고, 교복이 위험하고, 심지어 학교가 위험하다. 더이상 어떻게 조심해야 한다는 건지 모를 그 시각은 점점 어린 나이로 닿는다.
지역 온라인 육아 커뮤니티에서 “네 살 여자아이가 속바지를 입지 않고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데 주 양육자가 할머니여서 그런 걸 신경 쓰지 못하는 것 같다”며, “함께 있는 우리 남편도 자꾸 쳐다봐서 민망했다”는 글에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우리 사회는, 기성세대는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 미디어에 드러난 성역할의 문제를 고발하기 위해 만든 웹자보. ⓒ제작: 강미정(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
아동복을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몰에서 어린이가 화장을 하고 성인처럼 포즈를 취한 채 어색한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한다. 유아 장난감 코너에는 화장품이 즐비하고 유치원 아이조차 살이 찌면 안 된다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초등학교에서는 사춘기 여학생의 체중과 외모 관리를 해준다는 학원 전단지가 뿌려진다. 유튜브에서는 어린이가 화장하는 콘텐츠가 인기를 끈다. 꾸밈과 통제의 방식은 아이들이 여과 없이 접하는 미디어 속 콘텐츠에도 담긴다. 수많은 차별, 혐오, 고정관념이 아이들의 생각,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3월 14일 시작을 알린 ‘핑크노모어’(Pink No More) 캠페인은 이 같은 문제 인식에서 비롯됐다. 정치하는엄마들은 교육방송이라 불리는 공영방송사 EBS의 어린이 프로그램을 들여다보면서 심각성을 느꼈다. 실제로 현재 방송 중인 TV 아동 애니메이션 112개를 분석한 결과(대중매체 양성평등 모니터링 보고서,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2018) 주인공이 남성인 경우는 68%, 여성인 경우는 32%로 성별 차이가 두 배에 이른다. 또한 여성 캐릭터는 분홍색을 입은 얌전하고 예쁜 모습으로, 남성 캐릭터는 파란색을 입은 씩씩하고 힘이 센 모습으로 그려 성별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요소가 여전히 강했다.
영화, 책, 웹툰, 인터넷 방송, 광고, 음악 등 다양한 미디어에 드러난 여성, 성적 지향, 장애, 인종, 학력, 경제력, 직업 등의 차별적 요소를 찾아내고 이를 개선하려는 활동을 시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정치하는엄마들이 3월 14일 미디어 속 혐오 콘텐츠를 집단지성의 힘으로 모니터링하고 개선하기 위한 핑크노모어(Pink No More)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를 알리는 기자회견 퍼포먼스. ⓒ정치하는엄마들
그리고, 스쿨미투(School MeToo) 법률 지원을 위한 펀딩도 시작했다. 성 불평등한 관습 및 교육으로 인해 피해 입은 학생들은 용기 내어 학교 성폭력을 고발해오고 있지만, 어른들은 이를 방조했다. 학교와 교육 당국은 해결 의지가 미약하고 피해 당사자 학생들은 힘겹게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전국의 스쿨미투 중 대다수 사례는 지역 사회의 연대와 전문적인 법률 조력 없이 은폐 축소되거나, 피해자 및 고발자들이 2차 피해를 당하는 상황이다.
정치하는엄마들은 시민모임 ‘교육계 재립 프로젝트’팀이 공개한 교내 성폭력 고발 학교 리스트(https://m.blog.naver.com/pro_scmt/221415757097)를 참고로, 스쿨미투가 있었던 전국 79개교 중 연락 가능한 49개교 트위터 계정(쪽지 기능 없는 계정 10개교, 계정 사라진 곳 20개교)을 통해 무료 법률 지원을 안내, 스쿨미투 당사자들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 또한 전국 17개 시도교육청에 스쿨미투 현황 파악을 위한 정보공개 청구를 진행 중이며, 이를 바탕으로 스쿨미투 전국 지도를 제작, 온라인 상에 공개할 예정이다
“보통의 엄마들은 아니네요”라는 평가에 대하여
성 불평등한 현실을 바꾸려는 노력은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이뤄질 수 있다. 글을 쓰는 이들은 글로 말하고, 세상을 만나고 싶은 이들은 현장에서 부조리한 상황에 맞서는 연대를 이어간다. 가정 내 투쟁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게 엄마들은 ‘자기만의 방’을 만들어가며 자매애의 이름으로 끈끈하게 연대하고 있다. 수십 명에서 시작한 이들이 이제는 회원 수 1천7백여 명(후원 회원은 8백여 명)에 이르렀다.
▶ 2월 16일 열린 “스쿨미투 청와대는 응답하라” 집회에서 이베로니카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가 발언을 하고 있다. ⓒ정치하는엄마들
“보통의 엄마들이 아니네요”라는 시선은 표현의 정도만 다를 뿐 줄곧 정치하는엄마들을 향했다. ‘보통의 엄마’를 향한 규정도 폭력적이지만, 이 범주에서 벗어났다는 시각은 엄마가 정치를 이야기하는 상황을 그저 특별한 소수에 한정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우리는 ‘모두가 엄마다’, ‘집단 모성이 세상을 바꾼다’고 말한다.
사회적 모성은 비단 내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 여성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여성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이며, 나아가 가난한 나라의 여성이 잘 사는 나라의 아이를 기르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남겨야 하는 상황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자성이며, 그래서 공적 돌봄을 확대하고 안전망을 함께 키워가자는 발화이다.
가족 관계 내 도련님, 아가씨 같은 성차별적인 호칭 문제를 공식의제로 제기하지만, 이는 정상가족 규범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가 아니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속에서만 이뤄지고 있는 모성보호 정책에도 비판 의식을 지닌다. 버젓이 출산, 육아휴직이 있음에도 사용하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한 것도 문제지만, 다양한 가족 형태가 존재함에도 엄마, 아빠, 아이 등 3인 이상으로 구성된 ‘정상가족’만을 정책의 대상으로 삼는 준거 방식에도 점검을 요구한다.
정치하는엄마들은 여성과 남성 모두를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최전선에 서 있지만, 변화의 노력을 계속해 갈 뿐이다. 누군가는 ‘엄마답지 않은 존재’라고 우리를 규정하고, 또 한편에서는 ‘가부장제 존속에 기여하는 대상’으로 우리를 인식하는 기이한 상황에 둘러싸인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그래서 ‘엄마와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로 여러 차례 함께 고민을 나누기도 했다. 여성으로, 엄마로 살아온 경험은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임을 깨닫는 과정이었다. 찬성과 반대만이 존재하는 토론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논의를 만들어가는 이들이 여기 있다.
우리는 성 평등한 사회, 모든 아이가 사람답게 사는 사회, 모든 생명이 폭력 없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사회, 미래세대의 환경권을 위한 생태사회 등을 위해 ‘정치 참여’한다. 정책을 결정하고 민의를 대변해야 할 정치가 남성, 기득권 중심으로 흐르는 것을 방치하지 않는 방법은 당사자가 나서는 일뿐이다. 그래서 엄마, 양육당사자는 정치에 최적화된 이들일지도 모른다.
정치라는 행위에 대해서만도 부정적인데, 거기에 엄마를 내세운 단체에게 세간에서 보인 반응은 이랬다. “엄마들이 무슨 정치냐, 애나 잘 키워라.”
우리는 말한다. “엄마니까 정치한다.”
언어를 갖지 못했던 이들이 일상의 정치를 하면서 세상에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당장 나부터 바뀌겠다는 절박함으로 <정치하는엄마들>은 걸어 나오고 있다.
엄마들의 페미니스트 액션은 정치다.
※ 정치하는엄마들 페이스북 facebook.com/political.mamas 이메일 politicalmamas201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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