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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네덜란드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해외입양인 여성들의 경험을 듣다> 내 조국들에 보내는 편지


※ 한국은 오랜 기간 입양을 통해 아동을 해외로 내보낸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해외입양 이슈는 여성인권과 아동권, 빈곤과 차별, 인종과 이주의 문제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일다>는 각기 다른 사회에서 성장해 모국을 찾아온 해외입양인 여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들의 경험과 한국 사회에 주는 메시지를 듣습니다. 이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필자 시모나 은미(Simone Eun Mi)에 대해


시모나 은미는 세 살 때 한국에서 네덜란드로 입양 보내졌고, 거의 20세가 되었을 때 네덜란드 국적을 가진 성인으로 처음 한국에 돌아왔다. 시모나는 네덜란드의 시골 지방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젊은 시절부터 지역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불평등, 주민참여, 지역의 역사적인 건물들의 보존, 보편적 인권 및 책임에 대한 의식을 키웠다.


2009년 시모나는 네덜란드 정부의 지원을 받는 젊은 전문가 10인의 일원으로 뽑혀 개발협력기획을 위해 케냐를 방문하여 나이로비 최대의 슬럼가인 키베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한국에 온 시모나는 4,5년 간 ‘뿌리의 집’(KoRoot)의 국제협력팀장으로 활동했다. 뿌리의 집은 한국으로 돌아오는 해외입양인을 위한 게스트하우스이자, 한국 사회의 인식에 도전하는 시민단체(NGO)이다. 시모나는 자신의 위치에서 세계 전역의 (한국인) 입양인 공동체를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아동입양 산업체(Adoption Child Industry Complex)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며, 아동 양육에 대한 대안들을 찾는 작업을 고무하고 있다. 아이를 포기하는 것과 입양 사이에는 꼭 평생 이별하거나 태생적인 유대와 단절하지 않아도 되는 매우 다양한 대안이 있다. 입양은 원래의 가족이나 사회가 일시적으로 위기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돌이킬 수 없는 영구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일이다.


시모나는 2015년 로마에서 열린 IKAA(국제한국입양인협회) 모임에서 발언했다. 2016년에는 미국에서 열린 KAAN(한국계 미국인 입양인·입양가족 네트워크) 컨퍼런스에서 발언을 요청받았다. 2017년에 시모나는 필립 클레이의 죽음에 관한 국회 토론회에서 발언했고, 2018년 1월 CHANGE라고 불리는 해외 한국인 입양인 연합체에서 입양인특례법에 관해 발제할 기회를 얻었으며, 2018년 5월 싱글맘의 날 컨퍼런스에서도 발언을 요청받았다.


‘뿌리의 집’ 활동가일 뿐 아니라, 시모나는 저널리스트이자 아시아계 미국인 저널리스트 연합(AAJA) 서울지부의 프로그래밍 디렉터, 사진작가, 유기농 재배가, 슬로푸드 애호가, 그리고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한 사람이 큰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믿는 뛰어난 교육자이기도 하다.


“만일 한 사람이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면, 사회 전체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상상할 수 있는가? 이 세상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 우리 최선을 다해 보자.”


▶ 4,5년 동안 귀환 입양인을 위한 한국의 시민단체이자 게스트하우스인 ‘뿌리의 집’ (KoRoot)에서 국제협력팀장으로 일했다. 그 일을 하면서 입양인들이 주도하는 많은 행사들을 주최하거나, 공동 주최하거나, 지원할 수 있었고, 해외입양 때문에 인생이 바뀐 많은 귀환 해외 한국 입양인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8개 입양수입국에서 온 한인 해외입양인들(2016년)


친애하는 한국에게


김치의 나라, 고요한 아침의 나라, 언제나 역동적이며 늘 개미와 벌들처럼 웅성거리는 분주한 도시 서울, 여러 왕조들이 부침(浮沈)한 나라, 한(恨)의 나라, 삼국으로 나눠졌던 나라, 금강산의 나라 한국.


내 꿈의 땅, 내 마음의 땅, 내 어머니와 아버지와 형제자매들의 땅, 내가 물려받은 전통이 숨 쉬는 땅, 내가 태어난 땅, 내가 처음으로 세상을 보았던 땅, 내가 첫걸음을 걸었던 땅, 내가 처음으로 흙을 만졌던 땅. 한국, 빛의 나라.


‘남한’과 ‘북한’으로 갈라진 나라, 오랜 산들의 왕국, 내 마음인 땅인 동시에 ‘헬 조선’이라고 불리는-고요함이 깨어진 나라.


나를 버리고 고아원에 맡긴 어둠의 나라, 내게 번호를 붙이고 입양기관이라는 제3의 민간기관에 넘겨버린 나라.


나를 해외로 보내고, 추방하고, 내 한국 국적과 한국인으로서 타고난 권리를 박탈한 나라, 내가 어머니를 잃은 나라.


너무나 이름이 많아서 정작 내 이름은 잃게 만든 나라.


어린 아이인 나는 ‘더 나은 인생’을 위해 이 나라 밖으로 멀리 멀리 보내졌고, 은미라는 내 이름을 잃고 고아원 동화의 등장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다른 많은 아이들과 함께 해외로 보내졌다.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뭔가 큰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깨닫고 있었다. 나는 해외로 보내지고 있었다. 한국에서 네덜란드로 가는 비행기 여행 내내 나는 소리 죽여 울었다. 다른 아이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거나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깊은 슬픔이 나를 채웠다. 비통한 슬픔이 내 어린 심장을 파고들어 가득 채웠다. 여러 해가 지나고서야 그런 감정들을 일부나마 말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상실의 감정이 내 삶에 들어온 것이다. 너무나 압도적인 그 감정은 내 존재의 근원까지 뒤흔들었다. 입양은 비통한 슬픔과 이별과 거부와 상실의 동화이기도 하다.


▶ 고아원에서 찍은 내 사진. ⓒ시몬느 은미


나의 가장 친애하는 한국이여, 당신은 나를 보내고, 버리고, 포기하고 팔아버렸습니다. 

그리고 풍차와 축구와 튤립과 치즈의 나라, 네덜란드는 나를 받아들여 키워주었습니다.


그 동안에도 나는 한국의 가족과 태어난 나라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슬퍼하고 한탄하고 있었다. 비록 나는 내 상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네덜란드의 새로운 가족은 내가 가족의 일원으로 도착한 것을 축하해주었다.


친애하는 네덜란드에게


사람들이 침대에서 자는 나라. 나는 매일 밤 침대에 올라간 뒤, 침대에서 내려와 침실의 차가운 바닥 위에서 잠들었다. 땅에 더 가깝게, 한국에 더 가깝게. 새 부모님들은 내가 왜 침대에서 기어 나와 바닥에서 자는지 궁금해 하셨다.


8개월이 지나자, 나는 서서히 새로운 생활에 적응했다. 나는 시모나라는 새로 얻은 이름에 대답했다. 어느 날 네덜란드의 새로운 부모님과 함께 있을 때, 나는 내 한국이름을 똑똑히 말하면서 그분들을 내 부모라고 불렀다. ‘아버지, 어머니, 은미.’ 새로운 이름을 얻었는데도, 나는 그분들에게 내 한국이름을 똑똑하게 말했다.


초등학교에 간 첫날, 모든 아이들이 나를 만지려고 했다. 나는 몹시 당황했고, 비난당하고 모욕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이곳에서 나는 사람들이 나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부딪쳤다. 내 겉모습은 분명히 달랐다.


일곱 살 때,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도, 가정도, 나라도 사라져버릴 수 있다. 부모 형제들도 사라져버릴 수 있다. 나는 내가 태어난 곳에서 너무나 먼 나라에 홀로 떨어져 있었다. 나는 어떠한 아이도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기를 바란다.


여덟 살 때, 12월의 추운 겨울 아침에 바닥에 앉아 TV를 보다가 겨울에 굶어죽는 폴란드 사람들을 보았다. 그 뉴스를 보고 놀라 바로 울기 시작했고, 한국의 내 어머니와 아버지, 가족들도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내 가족이 너무 가난해서 나를 키울 수 없었다는 얘길 들었기 때문이다. 뭔가를 먹을 때마다, 내 가족이 길거리에서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엄청난 슬픔과 죄책감이 나를 덮쳤다. 한국의 가족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나는 이렇게 잘 살아도 괜찮은 걸까? 내게 과연 살아갈 권리가 있을까? 나는 여덟 살이었다. #생존자의 죄책감.


친애하는 네덜란드여, 왜 내 어머니와 아버지와 형제는 입양하지 않았습니까? 왜 나만을 데려왔습니까? 내 가족은 ‘구원받을’ 가치가 없었다는 말입니까?


친애하는 네덜란드여, 입양이 그토록 훌륭한 제도라면, 왜 당신 나라의 청소년보호위원회는 입양 수입국으로서도 입양을 중단해야 한다고 권고했겠습니까?


친애하는 네덜란드여, 입양이 그토록 훌륭한 제도라면, 왜 노숙인과 노인들은 입양하지 않는 겁니까? 그들도 ‘도움’이 필요할 터인데 말입니다…


친애하는 네덜란드여, 왜 아이들만을 입양하는 것입니까? 원하는 게 아이들뿐이기 때문입니까? 입양이 수요에 따르는 시장이기 때문입니까? 정녕 아이들과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에 대한 당신 국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하지만 아이들의 어머니들은 어떡합니까? 내 어머니가 나를 키우며 살 수 없을 만큼 가난했다면, 내 어머니는 왜 ‘구원’ 받을 수 없었던 겁니까? 그녀에게는 ‘더 나은 인생’, 영원한 가정을 누릴 자격이 없었단 말입니까?


친애하는 네덜란드여, 내게 기대하는 것과 달리 “나를 구원”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점 미안합니다. 하지만 나는 한국에서 날 데려가 달라고, 어린 시절에 내가 가지고 있었고 알고 있던 모든 것을 없애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여기서 끄집어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번호를 붙여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돈과 바꾸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나와 닮은 데가 없는 백인들에게 키워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습니다…


부디 오해는 말아주세요. 나는 네덜란드를 깊이 사랑합니다. 그곳은 언제나 내 마음에 특별한 장소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성찰할 것을, 더 큰 그림을 봐줄 것을 부탁하고 있는 겁니다…


친애하는 네덜란드여, 왜 내 어머니를 구해주지 않았습니까? 한국에 와서 내 어머니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던 것은 왜입니까? 딸을 가진 어머니라면 자신의 삶과 딸의 삶을 위해 지금도 열심히 살고 있지 않았을까요? 입양이 내 어머니에게서 삶의 목적을 앗아가 버린 건 아닐까요? 친애하는 네덜란드여, 부디 나와 함께 깊이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친애하는 네덜란드여, 당신은 나에게 “doe maar gewoon dan doe je al gek genoeg”(평범하게 행동해라. 그래도 이미 충분히 미친 거니까)라고 가르쳤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ik ben niet van suiker gemaakt”(나는 설탕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라고도 가르쳤습니다. 비 오는 날 우산이 없다 해도, 비가 설탕처럼 나를 녹이진 않을 테니 밖에 나가도 된다는 뜻입니다. 친애하는 네덜란드여, 당신은 삶이란 바로 그런 것이라고, 무엇이 너를 괴롭힐 수 있고, 괴롭히고 있고, 괴롭힐 것이건 간에 그것을 견디고 살아야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는 이제 참되고 명예로운 삶을 살려 하고 있습니다.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줘서 감사합니다.


친애하는 네덜란드여, 숲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자연 속에서 책을 읽고 노래하고 존재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친애하는 네덜란드여, 당신은 나에게 많은 의미가 있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긍정적이든 또 부정적이든- 당신 역시 내게 욕설을 하고, 침을 뱉고,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했던 나라이기 때문에- 친애하는 네덜란드여, 나는 결국 그렇게 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태어난 나라로 돌아왔습니다.


친애하는 네덜란드여, 저지대와 제방과 튤립과 개펄과 언덕과 간척지와 운하의 나라. 부모님들이 나를 위해 얼마나 지불했냐는 물음을, 그런 이야기를 듣고 살아야 했던 나라. 인간에서 상품으로, 한국에서 네덜란드로 판매된, 한국이 자랑하는 수출품이자 네덜란드가 절실히 원하던 귀중한 수입품이 되었던. 미국에서도 아이들을 받고 있는 나라- 그리고 한국에서 아이들을 받아와서 네덜란드로 아이들을 보내는 미국이란 나라- 투자하고 이윤을 거두는… 수요에 추동되는 다른 모든 제품산업과 똑같이.


친애하는 네덜란드여, 내가 사랑하는 나라여, 현재 입양 산업의 참모습인 아동매매 산업복합체의 일부가 되는 것을 그만 둘 수 없겠습니까? 당신의 청소년보호위원회가 제안하고 있는 ‘입양 수입국으로서 입양을 중단하라’는 권고를 따를 수 없겠습니까? 아이들을 상품으로 거래하는 무역에 명확히 반대하는 최초의 나라가 되어주지 않겠습니까?


친애하는 네덜란드여, 부디 생명과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는 기준을 지켜주십시오. 돈이 주요 동기가 되는, 판매국과 ‘입양가격’이 붙은 채 아이들이 온라인 진열대에 세워지는 어떤 형태의 입양도 받아들이지 말아주십시오.


친애하는 네덜란드여, 부디 당신의 국민, 당신의 여성들에게 하는 것과 똑같은 기준을 지켜주십시오. 한국의 여성들도 네덜란드 여성들에게 주어진 것과 똑같은 품위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사회의 시민으로서 보호받고 존중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입양하지 않았다면 내 어머니는 아직 살아계실지도 모릅니다. 의문들, 백만 개의 의문들이 꼬리를 뭅니다. 언젠가는 내 편지를 읽고 답장해주지 않겠습니까?


절실히 알고 싶고 보고 싶은 한 여성, 한국의 어머니


친애하는 우주, 친애하는 내 마음의 나라들,

사랑과 빛이 내 길을 인도하기를.


자라나면서 한국과, 김치와 단절을 겪으면서, 깊은 슬픔을 느끼면서, 내 뿌리와 이어질 필요성을 느끼면서 나는 별과 달과 해와 ‘이야기’했다… 나는 하늘과 이야기했다. 그들은 내가 네덜란드에 있어도 나를 한국에 이어주었다.


나는 빗방울이 나를 치유하고 내 근심과 슬픔을 씻어내게 내버려 두었다. 빗방울은 그 땅을 적실 물과 같은 물이었으니까. 씨앗이 싹틀 수 있게 하고 나무가 열매를 맺게 할 수 있는, 그래서 새가 그것을 먹게 하는- 그 물은 나를, 우리를, 내가 마음속에 간직한 내 고향 한국에 이어준다. 이 모든 요소들이 내가 절실히 알고 싶고 보고 싶은 한 여성, 나를 마음으로, 그보다는 두 팔로 꼭 안아주기를 바란 한 여성에게로 나를 이어준다. 한국의 내 어머니에게로…


▶ 한국의 내 할머니가 살고 계신 섬으로 가는 배 위에서. ⓒ시몬느 은미


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초등학교 수학 시험에서 조부모님들이 몇 명이냐는 문제가 있었다. 외조부모님 둘에 친조부님들 둘을 더해서 해답은 4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네덜란드와 한국의 조부모님을 더해서 8이라고 썼다. … 초등학교 선생님은 내 답이 틀렸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국제 인권변호사가 되어 국가들이 자기 나라 아이들을 책임지게 만들고 싶었다. 나는 아이들, 노인들, 소외된 사람들, 동물들 및 보호가 필요한 모든 구성원들이 가족의, 사회의, 무엇보다 정부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굳게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으며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한국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한국의 조부모님들의 DNA를 물려받았다. 이별이라는 엄청난 슬픔을 겪은 이후, 나는 생각을 바꾸어 우리 모두 같은 별과 같은 달과 같은 해를 보고 있기 때문에 나는 한국에, 가족들에, 어머니에게 항상 이어져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나는 우주의 일부분인 지구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네덜란드에 있는 동안 나는 한국에 연결된 기분을 느끼기 위해 지평선을 확장해야 했다.


외국에 살면서 한국적인 것만으로는 내 존재와 정체성을 구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보편적인 가치를 찾아야 했다. 겉모습은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네덜란드적인 정체성만을 구축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이래, 나는 평생 나를 인도할 보편적 가치를 찾아 그런 가치를 가지고 살기 위해 노력했다. 세계의 이쪽 편에 있는 우리에게 선한 것이 세계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선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삶과 행복 뿐 아니라 타인의 삶에도 똑같이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면서, 더 나은 세상과 더 나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우리는 삶에서 권리들과 선택의 자유를 갖고 있기 때문에 책임 역시 가지고 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가치들을 지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에게 그만한 자격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은 더 나은 세상과 더 나은 미래를 누릴 자격이 있다.


모국에 돌아와서


여기 한국 땅에서 한국인들이 많은 경우 나를 ‘한국인’으로 생각하지도, 내가 누군지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네덜란드로 입양되었고, 네덜란드어를 말하고,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 같은 네덜란드의 관습에 길들여져 때문이다. 나에게는 한국인 같은 면과 함께 네덜란드 사람 같은 면도 똑같이 강하게 존재한다. 나는 내 존재와 삶의 역사가 가진 이런 부분도 완전히 받아들이고 있다


입양 때문에 나는 오늘날의 내가 되었다. 나는 아이 때 이 나라를 떠났기 때문에 한국어를 하지 못한다. 내 식단은 김치와 밥에서 호밀 빵과 치즈를 먹는 것으로 변했다. 나는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는 우유를 매일 마셨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래야 건강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친애하는 한국이여, 나는 한국어가 아니라 네덜란드어로 말하고 있다. 나 때문이 아니라 당신 때문에….


나는 유년과 젊은 시절 매우 활동적이었다. 중학교 때 행사를 조직하고 신문을 창간했으며, 학생자치위원회의 적극적인 위원이었다. 대학 시절 이미 나는 시당 위원으로 선거인 명부에 올랐고, 20대 초반에 내가 속한 당을 위해 시의회 의원이 되었다. 또 20대에 10인의 젊은 전문가들 중 하나로 뽑혀 네덜란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케냐로 가서,나이로비의 키베라의 개발 기획을 위해 일할 기회를 얻었다. 나는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과 공동체 활동이 가진 의의를 굳게 믿고 있다.


나는 사회 정의를 위한 활동과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의 가능성을 믿는다. 한국에 와서 나는 같은 일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네덜란드에서는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던 반면, 한국에서는 입양 및 입양 후의 문제와 같은 내가 직접 체험한 문제들에서조차 무시당하고 있다. 나는 모국에서 2등 시민이 되고 있다.


나는 우리, 귀환 입양인들이 이 사회에 받아들여지고 포용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그대, 한국이 보낸 24만 명이 넘는 생명의 보화이자 선물이다. 우리가 아이였을 때 이 생명의 선물에 은덕을 베풀고 존중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돌아오고 있는 지금 그렇게 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받아들여 달라.


▶ ‘뿌리의 집’에서 열린 <Flip the Scrip: Adult Adoptee Anthology> 읽기 행사


나를 보낸 나라와 다시 이어지려는 노력


나의 민족, 한국 사람들에게. 어린 시절 이래 나와 함께하며 세상의 불빛이 되어주었던 사람들. 지금 나는 수 년째 한국에 머무르고 있다. 내가 태어난 나라와 내 뿌리에 다시 이어지려고 노력하며, 내 타고난 권리를 되찾으려고 노력하며, 그대와 다시 이어지려고 노력하며.


내가 네덜란드 사회에 적응하려고 최선을 다해 발버둥치는 동안, 늘 나는 한국과 한국인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자라면서 나는 한국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아홉 살 때, 나는 한국에 대한 3시간짜리 발표를 했다. 당시에는 컴퓨터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한국에 대해 찾을 수 있는 모든 책을 메모했다. 나는 88 올림픽 비디오를 상영했다. 한국에 가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 충동이 너무나 강해서 인생에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믿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은 내게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나는 한국에 가야만 했다. 한국에서 떠난 것은 내 잘못도 내 선택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린 아이에 불과한데도 그 결과를 견뎌야 했다.


나는 1988년에 올림픽을 유치할 정도로 위대한 내 조국이 왜 나를 데리고 있을 수는 없어서 올림픽 2년 전에 나를 떠나보냈고 말았는지 궁금했다. 한국이 나를 원치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거리에 버리는 쓰레기보다 못한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이 나라에서 사람들이 쓰레기는 신경을 쓰니까 말이다. 나의 한국은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으면서도, 나를 돌봐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친애하는 한국이여, 왜 당신은 나를 원하지 않았습니까? 나를 위한 자리는 왜 없었던 겁니까?


친애하는 한국이여, 나는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던 겁니까? 그리고 지금도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겁니까?


친애하는 한국이여, 당신은 지금도 나와 내 사람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없다는 겁니까? 당신이 보내버린 것은 당신의 아이들, 바로 당신 자신의 아이들이 아닙니까?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회의 일부로 받아들여줄 자리를 정녕 마련해주지 않을 겁니까?


88올림픽을 보면서 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을 빙빙 돌았습니다. 자긍심과 슬픔은 함께 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개막식에 사용된 큰 북이 기억납니다. 아나운서에 따르면 그 북소리는 인간의 심장 박동을, 당시 세계인구 50억 명의 심장에 연결된 심장 박동 소리를 본 땄다고 하더군요. 친애하는 한국이여, 당신은 세계의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세계 속의 한 나라로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면서, 그러나 당신의 아이들을 돌봐주는 것은 잊어버렸고 지금도 잊고 있습니다.


2003년, 나는 인생에서 큰 결단을 내렸다. 나는 네덜란드 대학에서 학업을 중단하고, 한국에 가서 김해의 인제대학교와 김창룡 교수가 조직한 ‘해외 입양인 모국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할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1년 동안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2004년, 나는 어렸을 때 한국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모국에 돌아왔다. 그것은 인생을 구원하는 경험이었다.


나에게 한국 땅에 있는 것은 여전히 언제나 특별하다. 이 땅은 나를 내보낸 땅이자, 내가 다시 이어지려고 노력하는, 성인의 눈을 통해 내가 가진 한국 문화의 유산을 되찾고 재발견하려는, 그러나 해외로 보내진 아이가 겪은 깊은 분리의 슬픔을 가지고 그럴 수밖에 없는 땅이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극복하며, 한국의 현재를 살면서 그 미래를 위해 활동하고 서로 간의 사랑과 존중을 발견하는 평화로운 삶의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너무나 많은 여성의 권리가 여기 한국 땅에서 침해되었고 침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많은 어머니들의 권리가 침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입양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그렇게 살고 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인류 아닌가? 우리는 모두 우리 아이들을 위해 같은 것을 바라지 않는가?


▶ 올해 5월, 국회에서 열린 국제 싱글맘의 날 컨퍼런스에 발표자로 참여했다. 


친애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대통령님은 저를 모르고, 들은 적도 없겠지요. 아마 앞으로도 저에 대해 알게 되거나 듣지 못하실 테지요. 저는 한국이 해외로 보내버리고 나서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24만 명의 아이들 가운데 한 명일 뿐입니다.


저는 20대의 성인으로 한국에서 살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죽 여기 살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나 네덜란드에서나 평범한 배경을 가진 평범한 여자입니다. 한국의 제 친할머니는 서해의 작은 섬에 살고 있습니다. 고모들은 매일 바다의 열매를 거두는 것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습니다. 저는 변호사도, 교수도, CEO도, 의사도 아닙니다. 저는 책을 낸 적도 없습니다. 저는 그냥 평범한 사람입니다. 저를 외국으로 내보낸 나라의 대통령이 주의할 만한 중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이 나라를 대표하고 계신 대통령께 이 편지를 보내고 싶습니다. 한국의 대통령으로서 한국에 살고 있는 귀환 입양인을 인정하고, 우리를 온전히 환영하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한국 사회로 포용하는, 우리에게도 진정으로 우리의 대통령이 되는 최초의 한국의 대통령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한국전쟁의 숨겨진 결과입니다. 우리가 전쟁 이후에 생겨났다고 해도, 우리라는 존재(해외입양인) 자체가 전쟁과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디 과거의 숨겨진 이 존재가 양지로 나와 극복되도록 해 주십시오. 우리처럼 아이 때 외국에 입양된 사람들은 그 과거를 극복해야 하고 극복했어야 합니다. 부디 한국이 그 고통스러운 역사를 완전히 인정하고 그러한 역사를 끝장내도록, 그리고 더 나은 더 밝은 미래를 위한 화해에 도달하게 해주십시오.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미래를 바꿀 수는 있습니다.


한국은 나와 내 어머니를 결코 다시 만나게 해 줄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태어난 아이들이 한국에서 더 나은 미래를 만날 수 있게 할 수는 있습니다. 단지 이 나라에서 사는 것뿐 아니라 번영하면서, 삶이라는 선물을 소중히 여기면서 말입니다.


이 편지는 대통령께 보내는 두 번째 편지이자 대통령님께 세 번째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혹시 우리의 첫 번째 편지(koreanadoptiondeclaration.wordpress.com)는 읽어보셨습니까?


작년 한국에 돌아온 입양인 한 사람이 자살한 후, 국회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저는 민주당 유승희 의원에게 발언자로 초청을 받아 대통령과 한국 정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작년 우리는 한국 땅에서 최소한 세 명의 한국 입양인을 잃었습니다. 그 가운데 두 명은 자살했습니다.


▶ 중앙입양원(KAS)이 돌보던 내 입양인 친구 얀이 2017년 11월 24일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고 보도되었다. 한국에서 어렸을 때 길을 잃어 결국 홀트의 입양공장에 들어갔다. 한국에 돌아온 입양인으로서 얀은 힘겹게 살았다. 노르웨이 대사관과 홀트 측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어떤 도움도 거절했다. 김해에서 열린 추도식에 중앙입양원도 초청했지만 중앙입양원이나 보건복지부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단지 입양인들과 시민단체들만이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주었다. 여러 한국 언론매체들은 얀의 이야기를 아무 존중 없이 취재하거나, 그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다. 입양인의 사연을 어떻게 취재해야 하는지 적절한 보도 지침은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언론매체들이 부정확한 정보들을 기사화한다. 나는 얀이 그립다. 얀은 더 나은 삶을 살 자격이 있었다. 그러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시모나 은미


저는 입양으로 인생에 큰 변화를 겪은, 한국에서 내보내졌다가 돌아와서 체계적인 변화들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하고 있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한국 아이들을 위해 더 훌륭한 제도와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고자 함께 일하고 있는 많은 귀환 입양인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부디 더 이상 이 땅에 돌아온 잃어버린 딸들과 아들들을 화장시키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부디 우리를 포용하고,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저는 대통령님이 우리와 함께 일하겠다고 약속해주시기를 희망합니다.


한국 사람들과 한국 아이들은 더 나은 미래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또 통일 이후에 북조선이 해외입양을 보낼 아이들을 키워내는 새로운 사육장이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한국의 역사를 되풀이해서 말입니다…


저는 많은 입양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과 함께 걷고, 그들과 함께 울고, 그들과 함께 웃어왔습니다. 24만 명이 넘는 입양인들 가운데 저에게 분노를 일으킨 것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저는 제가 만나온 입양인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그들이 어떻게 개인적인 생활의 어려움들과 싸워왔는지, 어떻게 그것을 해결해왔는지, 어떻게 생존과 존재를 위한 투쟁을 해왔는지, 어떻게 우울증과 싸워왔는지, 하지만 또한 어떻게 개인적인 평화와 치유와 행복을 얻는 길을 찾아냈는지, 그래서 어떻게 이 세상에서 그들 자신의 자리를 찾아냈는지 지켜보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친애하는 문 대통령님, 아마도 이 편지를 읽지 못하시겠지만, 부디 한국이 과거에 해외로 보낸 이 사람들을 포용해주십시오. 나는 대통령님이 과거에 한국 정부가 행한 정책의 결과로 고통을 견뎌야 했던 이 사람들을 나처럼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부디 이 과거와 진정으로 화해해주십시오. 이것은 결코 한쪽의 힘만으로 끝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한국이여, 당신이 과거에 해외로 보냈던 우리 귀환 입양인들을 포용해주십시오. ⓒ일다(일러스트: 두나)


친애하는 한국인들에게


한국 대통령, 한국 정부, 보건복지부 및 입양 문제를 다루는 권한을 부여받은 준정부기관인 중앙입양원보다 나는 여러분들을 믿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한국에서 사는 동안 나와 함께 있었습니다. 당신들은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고, 여러 행사들에 참여해서 이야기하도록 나를 초대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당신들, 내 동포 한국인들과 함께 오페라 공연장에 가는 것이든, 당신들이 회사의 송년회에 우리를 불러주고 나를 포용해줄 때이든 상관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앉아 식사를 나누던 사람들, 동료 입양인을 위해 시간을 내서 번역을 해준 사람들, 자원봉사를 해준 사람들, 자신의 고향이라고 불렀던 한국에서 죽은 채 발견된 한 입양인을 위해 우리가 김해에서 기자회견과 추도식을 열었을 때 와서 연대해준 사람들. 우리의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해주기 위해 우리를 안아준 사람들, 법을 개정하기 위해 함께 노력한 사람들, 입양인의 권리를 증진시키기 위해 입양인 공동체와 함께 나서준 사람들, 해외입양으로 인생에 큰 영향을 받고 여러분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우리를 환영해 준 사람들, 나는 여러분들을 믿습니다. 당신들이 우리와 함께 내딛은 모든 발걸음에 대해 감사합니다.


부디 귀환 입양인 공동체를 지지해주세요. 당신들의 직장에 그들이 함께 일할 자리를, 당신들의 대학에 그들이 한국어를 공부할 자리를 만들어주세요. 그들이 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힘을 주세요. 그들을 당신들의 집으로 초대해주세요… 단지 하나의 힘을 보탤 수 있다고 해도, 당신들은 변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당신들의 행동은 중요합니다. 당신들의 연대는 중요합니다. 당신들의 말은 중요합니다. 당신들의 사랑과 따뜻한 태도와 포옹은 중요합니다. 나는 당신들이 마음 깊숙한 곳에 우리를 환영할 공간을 찾기를 희망합니다. 당신들, 내 친애하는 동포 한국인들이여, 당신들은 항상 내 마음 속에 있습니다…


내 삶의 여정에서 내가 만난 모든 놀라운 사람들에게 감사합니다. 여러 분은 내게 힘과 공감과 새로운 시각과 우정과 따뜻함과 사랑과 웃음과 행복을 보여주었습니다. 매일 매일 나는 여러분 모두로부터 배우고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너무나 많은 면에서 영감을 줍니다. 고마워요!


늘 안녕하시기를.

잃어버린 한국의 딸들 가운데 하나인

당신의 은미가. (번역: 권호영)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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