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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커밍아웃에 관한 다섯 개의 여행 가방

<해외입양인 여성들의 경험을 듣다> 물려받은 헌옷 (채일리 달튼)


※ 한국은 오랜 기간 입양을 통해 아동을 해외로 내보낸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해외입양 이슈는 여성인권과 아동권, 빈곤과 차별, 인종과 이주의 문제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일다>는 각기 다른 사회에서 성장해 모국을 찾아온 해외입양인 여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들의 경험과 한국 사회에 주는 메시지를 듣고자 합니다. 이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필자 소개] 채일리 달튼은 1997년 의정부에서 태어나 같은 해 미국에 입양되었다. 2016년 친어머니와 다시 만난 후, 2017년 연구와 친가족을 만나기 위해 한국에 돌아왔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채일리는 한국의 입양인 활동가 조직인 한국입양인참여연대(Solidarity and Political Engagement of Adoptees in Korea. SPEAK)를 공동으로 설립했다.


최근 채일리는 뉴욕에서 열린 한국인 퀴어·트랜스 회의(Korean Queer and Trans Conference, KQTcon)에서 “가족에 관한 급진적 관념: 퀴어 정의와 입양인 정의의 교차점”(Radical Notions of Family: At the Intersections of Queer Justice and Adoptee Justice)을 발표했고, 다양한 맥락에서 성인 입양인 정체성들에 초점을 맞춘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퀴어이자 다른 인종 사회로 입양된 해외입양인으로서, 채일리의 관심과 신념은 돌봄과 친밀성의 정치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채일리는 이 에세이를 통해 연약함과 관계와 연대에 대해 탐구하고자 한다.


▶ ‘퀴어 입양인’인 내가 들어가고 나가는 세상 ⓒ일다(일러스트: 두나)


‘퀴어 입양인’인 내가 들어가고 나가는 세상


한 친구는 언젠가 나에게 벽장(closet)은, 그리고 벽장의 “안”에 있거나 “밖”에 있는 정도는 네가 어디에 있고 누구와 있는지에 따라 항상 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벽장에서 나오는 것(벽장에서 나오다come out of closet라는 표현은 커밍아웃을 뜻함. 벽장은 퀴어 정체성이 감춰져 있는 공간으로 비유된다-편집자 주)은 한 번에 되지 않는다. 벽장은 네가 살고 있는 집과, 네가 벽장 안에 무엇을 걸어 놓았는가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 한국에서 내 할머니와 어머니를 보러 갈 예정이다. 지금 내가 묵고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벽장 역할을 하는 직사각형 상자를 열고,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할머니가 주신 체크무늬 하이넥 블라우스와 장미장식 금팔찌를 꺼냈다. 이것이 여기서 내 벽장이다. 두 번째 한국 방문을 위해 짐을 싸면서 나는 이 벽장이 얼마나 다른지 깨달았다. 내가 고른 옷들은 더 세련되고 여성적이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 자신을 덜 ?더 나은 말이 없기 때문에? 퀴어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벽장을 선택하면서 벽장 더 깊숙이 숨어 들어갔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어디에 있고, 누구와 있는지에 따라 우리의 벽장을 변화시키지 않는가? 우리 가운데 완전히 “커밍아웃”한 ?현대 사회에 그게 가능하다면? 이들조차도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적 맥락에 따라 입을 것들을 선택한다.


솔직히 말해서 친구의 말처럼 퀴어 정체성과 나의 관계와, 내 퀴어 정체성이 그 일부가 되어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들을 벽장의 안과 밖으로 비유하는 게 그렇게 좋은 비유로 생각되진 않는다. 사실 이주민으로서 나와 퀴어성의 관계는 여행 가방의 형태, 즉 감정의 봇짐으로 더 잘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내 커밍아웃에 관한 다섯 개의 여행 가방들과 내가 벗어나고 있는, 그리고 들어가고 있는 세상들을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한다.


첫 번째 여행 가방: 비행기에 실려 온 아이


나는 찢어지게 울면서 미국에 도착했다. 내 부모님은 늘 그 이야기를 하신다. 당시 양부모들은 입양할 아이들을 데리러 한국에 갈 필요가 없었다. 대신 아이들이 입양기관에 고용된 조무사들과 함께 비행기에 실려 왔다. 그들은 모두 줄을 서서 비행기에서 내렸고, 조무사들은 입양된 아이들을 하나씩 안고 소중하고 착한 선물처럼 부모들에게 건네주었다. 다문화의 완벽한 가족들이 차례차례 하나씩 만들어졌다. 내 부모님은 다른 귀여운 잠자는 아기들과 달리, 내가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울고 또 울었다고 늘 말씀하신다. 조무사는 부모님에게 나를 떠밀듯 넘겨주면서 “이 아이와 잘 해 보셔요” 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나중에, 나는 작은 여행 가방에 나와 함께 실려 온 예전 삶의 유물들을 파내보곤 할 것이다. 진분홍색 아기 한복, 달처럼 동그란 얼굴을 한 인형 두 개, 돈 몇 천 원, 그리고 내가 열리지 않는 검은 상자라고 생각했던 것. 밤마다 나는 소음이 아닌 뭔가를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그것에 귀를 대보곤 할 것이다.


나중에, 나는 여자들에게 끌리는 이유가 엄마에 관련된 문제들 때문이 아니냐는 물음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단단한 돌멩이 같은 그 말 속에 일말의 진실이 들어있지는 않을지 궁금해 하곤 할 것이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어머니와 떨어지게 된 최초의 상실, 돈을 받고 나를 대양 건너 데리고 온 여성에게조차 거부당한 나의 트라우마가 여성들과 깊고 초월적인 사랑을 찾는 욕망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닐까 궁금해 하곤 할 것이다. 나는 그 답을 모른다. 언젠가 그 답을 알게 될 때가 올지도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런 문제들에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냥 울고 또 울었다. 그때조차 나는 내 울음을 통해 다른 예쁜 아기들과 달라지고 싶었던 것이다. 행복하고 “명랑한”(gay) 것이 아니라, “엿 같고”(fuck you) 퀴어하게 말이다. 부모님은 그날을 내가 “집으로 온” 날(coming home day)이라고 부르신다. 나는 지금 그날을 커밍아웃 데이(coming out day)라고 부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사막으로 가는 길 ⓒ채일리 달튼


두 번째 여행 가방: 사랑, 환희


대학 첫해를 보내고 난 여름, 나는 다시 부모를 떠나 남 캘리포니아의 뜨겁고 건조한 사막으로 날아갔다. 떠나기 전에 부모님들에게 나에 관한 모든 법적 서류들의 사본을 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친가족을 찾는 절차를 시작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입양기관에서 요구한 30달러의 비용과 나 자신에 관해 설명하는 편지 한통에 덧붙여, 친가족한테서 맨 처음 나를 빼앗았던 사람들에게 내 신원을 확인해주어야 했다. 하지만, 편지를 쓰는 것이 내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매일매일 책상에 앉아 빈 문서, 컴퓨터 화면에 깜빡거리는 커서가 나를 비웃는 것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럴 때, 가끔 영어 수업에서 만난 친구가 침실 반대편에 있는 커다란 안락의자에 앉아 내가 고향 도서관에서 가져온 <푸드 네트워크>(Food Network) 잡지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때때로 그녀는 자기에게 화분들을 배달해 보내고, 밤 산책을 함께 하면서 바이올린 연주를 해준 남자아이들에 관한 대단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했다. 때때로 그녀와 나는 ‘ㄱ’자로 붙여놓은 소파에서 잠들었다 깨어나 서로 코를 비비면서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서로의 팔을 쓸어내리곤 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내가 적당한 단어를 찾으려고 또 다시 힘겹게 애쓰고 있을 때, 언제나 웃고 있는 지아다 드 로렌티스(미국의 유명한 셰프, 그녀가 읽고 있던 잡지의 표지를 의미함?역주)의 사진에서 그녀가 고개를 들었던 바로 그날,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는 내가 진실하고 용감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꼭 친구나 애인에게 편지를 쓰는 것 같다고 말했다. 너는 누군가가 너 자신에 대해 뭘 알기를 원하니? 그녀는 내게 물었다. 너는 굉장해, 좋아하지 않을 데가 하나도 없어.


나중에, 나는 적당한 단어들을 찾아낼 것이다. 나중에, 나는 국경을 넘고 의식을 초월하는, 내 몸의 기억 속에 깊이 새겨진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편지를 써서 친부모에게 보낼 것이다. 나중에, 나는 그런 단어들을 찾아낼 것이다. 나중에, 나는 세상 사람의 시선 때문에 나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는데 지쳤다고 그 여자에게 말할 것이다.


어쨌든 나에게 그것은, 사랑은 일어났다. 그때, 비록, 단어들은 나를 피해갔지만, 나는 나중에 퀴어 공동체로서 느끼는 것을 배우게 될 사랑의 환희와 부드러움과 따스함이 내게 밀려오는 것을 느끼면서 거기에 앉아 있는 것이 여전히 행복했다. 그 시간들은 밖으로 나가기 (coming out)보다 안으로 들어오는(coming in) 과정이었다. 내가 나가야 할 단단하고 편안한 고치를 지으면서 말이다.


▶ 오아시스에 들어가서 ⓒ채일리 달튼


세 번째 여행 가방: 커밍아웃


이번 커밍아웃 여행 가방은 얇은 먼지로 덮여 있는, 등산화와 땀에 찌든 옷으로 가득 차 있는 배낭과 같은 것이었다. 이 커밍아웃 여행 가방의 지퍼는 불가마 같은 데스 벨리(Death Valley)에 익숙하지 않은 마르고 갈라진 입술이었다. 나는 그 전 해 봄 방학에 부모님에게 커밍아웃했다. 이미 양부모와 나 사이의 틈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던 때였다. 미국의 가족이란, 한국의 가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나는 투쟁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자신들에게 낯선 가족 구조의 정당성을 인정해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 가족은 한 사람에게 두 명의 어머니, 두 명의 아버지, 두 명의 형제 등등등이 있을 것이다. 나는 부모님에게 내가 퀴어가 된 것은 내가 그렇게 믿어서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부모님은 예상대로 두려움으로 무거워진 사랑으로 반응했다. 어머니는 지저분한 야외 테이블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저 상황이 너에게 힘들지 않기를 바란단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상황을 더 힘들게 만들지 마세요.” 내가 대답했다.


아버지는 여행이 끝나고 며칠 뒤 나를 불렀다. “나는 더 이상 네가 누군지도 모르겠구나.” 아버지가 내뱉듯이 말했다. 나중에 나는 아버지의 분노 아래에 숨어있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내려고 애썼고, 아버지가 내가 싸우고 있었던 것과 같은 문제와 싸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족이 서로 친숙함을 잃거나 그것을 유지하지 못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때, 하지만, 나는 울었고, 내 벽장에 내가 가진 것만큼 많은 부끄러운 것(skeleton in closet은 집안의 수치, 부끄러워서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라는 뜻-역주)들이 있지 않기를 바랐다.


▶ 데스 밸리(죽음의 계곡)에서 살기 위해 ⓒ채일리 달튼


네 번째 여행 가방: 두 어머니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공항에서 친어머니와 만났을 때, 우리는 둘 다 울지 않았다. 나는 스무 살이었고, 어머니가 나를 낳았다가 빼앗겼을 때와 같은 나이였다. 그때, 우리에게는 그 사이에 한 평생이 있었다. 우리는 포옹했고, 그 평생은 갑자기 한없이 크면서도 한없이 작아 보였다. 어머니는 내 여행 가방을 들었고, 우리는 긴 침묵 사이로 가끔 의미 없는 말을 한 마디씩 하면서 어머니의 차로 걸어갔다. 나는 나를 낳아준 여자를 바라보았고, 갑자기 그녀가 생판 남이나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그녀의 빛나는 하얀 아파트에 들어가고, 멕시코 식당에서 할 말이 없어서 울음을 터뜨리고, 함께 쓰는 침대에서 일어나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면서, 서로 손을 꼭 쥔 채 다른 손으로는 핸드폰을 들고 날카롭고 밝은 화면을 들여다보던 여러 날이 지나가고 우리는 마침내 대화를 시작했다.


엄마는 어느 날 저녁 외출했다가 커다란 캔 맥주 여섯 개를 들고 와서 냉장고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나는 텔레비전의 평평한 화면 위에서 빙빙 돌고 있는 2차원 음식들을 보고 있다 고개를 돌렸다. “하나 마실래?” 여전히 자기의 흠잡을 데 없는 영어를 쑥스러워하며 엄마가 천천히 말했다. 내가 한국에서 배운 몇 안 되는 단어들은 미처 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부서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캔 하나를 들고 그것을 그녀의 캔에 부드럽게 부딪쳤다. 우리는 “건배”라고 말했다. 엄마는 내 옆 소파 위에 몸을 쭉 펴고 누웠다. 우리는 그날 밤 맥주 여섯 캔을 전부 다 마셨다. (엄마는 네 개를, 나는 두 개를 마셨다.) 


우리는 좋아하는 책들, 가족들,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서로가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음악을 가지고 놀렸다. (엄마에게는 위켄드, 나는 프랭크 오션이었다.) 우리는 춤도 약간 추었다.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자 내 눈꺼풀은 무거워졌고, 우리는 술이 취해 서로의 몸에 놀라지 않고 서로에게 기대어 푹 쓰러졌다. 그때 엄마가 내게 말했다. “이번에 함께 … 우리가 막 데이트를 시작한 기분이야.” 나는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게 딱 내 기분이에요.”


그 밤의 끝에, 나는 미국에 있는 어머니가 주신 선물을 엄마에게 주었다. 엄마는 포장을 풀고 파란 색과 노란 색 비즈로 만든 작은 팔찌를 꺼냈다. 내 미국 어머니께서 ‘채일리가 아주 어릴 때 제게 준 거랍니다, 저는 당신이 이걸 가지시길 바래요.’ 라고 써놓으셨다. 엄마는 그 서투른 미술 과제를 팔목에 걸고 손을 들어 빛에 비추어 보았다. 나는 내 과거와 현재를 느끼면서, 두 어머니의 존재를 너무나 깊이 느끼면서,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중에, 내 어머니는 나에게 남자친구가 있는지 물어볼 것이다. 나는 내가 ‘아니에요, 없어요.’ 라고 대답하는 진실이 없는 거짓말을 듣게 될 것이다. 나는 어머니에게 지금까지 만났던 여자들과 내가 깊이 사랑하고 있는 여자, 그녀의 음악을 되풀이해서 듣고, 그녀의 목소리가 내 심장을 찢어놓기도 뛰게도 만드는 여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나는 어머니에게 커밍아웃 한다면 그녀의 반응이 어떨지 예언하는 마음의 노트들을 만들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때, 하지만, 나는 그저 두 어머니들이 우리 사랑의 기묘함(queerness)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에 만족했을 뿐이었다. 내게 깊이, 그리고 다르게 사랑하는 두 어머니가 있다는 것. 그 특별한 순간에 우리 모두 사랑은 서로 경쟁하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해를 가졌다는 것. 그때 거기서, 나는 보았다고 느꼈다. 나는 들었다고 느꼈다.


▶ 제주에서 바라보다 ⓒ채일리 달튼


다섯 번째 여행 가방: 퀴어한 관계들


며칠 전, 나는 틴더(tinder, 소셜 데이팅 앱-역주)에서 알게 된 젊은 여성과 미술 전시회에 갔다. 우리는 서로 마주보는 자루 소파에 몸을 파묻고, 누구와 같이 사느냐에 따라 방의 젠더가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 이러 유형의 공간에 존재하는 유동성에 대해 고찰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 여성은 얼마 전에 할아버지의 집에서 나와 ‘고시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고시원 방이야말로 벽장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가족의 집의 넓은 공간보다 그녀를 더 자유롭게, 더 퀴어하게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벽장 같은 방.


우리는 한국인 가족들에게 커밍아웃하는 문제에 관해 서로에게 물어보았다. 나중에,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아마도 나중에 이곳의 엄마에게 커밍아웃 할 것이라고.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아마도 나중에는 그렇게 할 거라고.


하지만 커밍아웃을 하던 하지 않던 나는 지금 여기 한국에서 행복하다. 퀴어한 관계들, 어떤 인습의 상자에도 전혀 들어맞지 않는 관계들, 우리 사랑을 가두기에 상자는 너무 작다고 말하는 관계들을 찾아내고 만들어내면서 말이다.


0. 들어가고 나가는 이야기


내 최초의 커밍아웃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당연히 경험한 적 있는 이야기이다. 자궁이라는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으로부터 밖으로 나오는 것 말이다. 이 경험, 크고 무시무시한 세상으로 최초의 숨결을 내뱉은 일이 모든 유아들에게 너무나 큰 트라우마이기 때문에, 아기들은 그 기억을 차단한다고 들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 이야기도 같은 트라우마?불공정한 세상으로 홀로 태어나는?를 가지고 있다. 내 이야기는 독립적이지 않다. 내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의 일부분이다. 내 탄생은 다른 사람들의 트라우마의 일부분이다.


퀴어들이 자기 아이들을 빼앗긴 역사를 알고 있는 퀴어로서, 나는 나를 낳아준 여성이 인큐베이터에 나를 넣어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기회와 자기 손으로 나를 키우는 기회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아야 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다. 퀴어로서 나는, 나를 낳아준 여성이 국가가 그녀들의 비(非)핵가족적이고 비(非)규범적인 가족 구조들을 배척했기 때문에 자녀들을 바다 건너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수천 명의 비혼모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잊을 수 없다. 퀴어로서 나는, 가장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정의의 문제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딸로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나의 커밍아웃 이야기들은 노출(emergence)과 위기(emergency)에 관한, 그리고 나에게 그 두 가지가 얼마나 하나로 엮여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커밍아웃은 두려움과 위험함이 깊이 뒤얽힌 감정들을 동반하는 사이렌의 위험하고도 매력적인 부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을 쓰는 것이 -커밍아웃에 관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관해, 출발이 되기도 하는 도착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너무 많이 힘들었다. 그에 관해 쓰기에는 내가 충분히 벽장에서 나오지 못한 것 같아서, 이 글을 쓰는 것이 너무 많이 힘들었다. 나는 내가 이미 나온 것보다 나를 더 많이 벽장 밖으로 나가게 할까봐, 이 글을 쓰는 것이 너무 많이 힘들었다.


이 많은 이야기들 덕분에 나는 매일 커밍아웃하거나 하지 않는 것에 관해, 그리고 그것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내 입양 문제와 얽혀 있는지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 내 이야기들이 내 이야기들만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들은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과 내 연인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내 벽장과 내 여행 가방들 모두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만나지 못했거나 만났는지 아닌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가져온 헌옷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나와 함께 이 벽장에 있는 사람들이 사실 전부 부끄러운 존재들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기 때문에 나는 이 글을 쓰는 것이 힘들었다.


오늘, 늘 그랬듯이, 나는 벽장 안에 있는 동시에 벽장 밖에 있다. 오늘, 나는 나와 함께 벽장에 있거나 내 가까이 있는 존재들을 위해, 자신들의 가족과 역사 주변의 어둠 속에 있는 존재들, 사회나 국가가 그들의 육체도 가족도 인정하지 않는 존재들, 단지 존중과 보살핌을 원하는 존재들을 위해 싸우고 있다. 오늘, 나는 존재하고 사랑하기 위해, 내 커밍아웃이 도착과 출발을 모두 포함하는 여행이 되기 위해, 이것이 지금으로서는 충분한 커밍아웃이 되기 위해 싸우고 있다.  (번역: 권호영)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The Five Suitcases of My Coming Out

Listening to the experiences of overseas adoptee women (5): Hand me down


By Chaelee Dalton


Introduction: Chaelee Dalton was born in Uijeongbu in 1997 and was adopted to the United States later that year. After reuniting with her birth mother online in 2016, she returned to South Korea to meet her birth family and study in 2017. During that time, she co-founded SPEAK, Solidarity and Political Engagement of Adoptees in Korea, an adoptee activist organization in Korea. More recently, she presented Radical Notions of Familyhood: At the Intersections of Queer Justice and Adoptee Justice at Korean Queer and Trans Conference in New York City, and conducted a research project focused on adult adoptee identities in different contexts. As a queer transracial and transnational adoptee, Chaelee’s interests and beliefs often concern themselves with the politics of care and intimacy. This essay is intended to be an exploration of vulnerability, of connection, and of solidarity.


The worlds that I was emerging from and going into as a queer adoptee. (c) Doona


The worlds that I was emerging from and going into


A friend once told me that the closet- and how “in” or “out” of it you are- is something that is always changing depending on where you are and who you’re with. Coming out of the closet is not a one-time deal. The closet changes with the home you live in, and with what you hang in the closet.


Today, in Korea, I am seeing my grandmother and my mother. I open the rectangular box that is my closet in the guesthouse I’m staying in, and pick out a high-necked gingham blouse and the rose gold bracelet my grandmother gave me when I first returned to Korea. This is my closet here. I realized how different it was when I was packing to go to Korea for the second time, how the clothes I chose were more polished and feminine and the way I presented myself less- for the lack of a better word, queer.


Through the choice of my closet, I pushed myself more and more deeply into it. And yet- don’t we all change our closets depending on where we are and who we’re with? Even those of us who are fully “out,” if there is such a thing in modern society, choose to wear items based on our cultural contexts.


In all honesty, though, I find, as my friend was alluding to, that inside and outside of a closet is not a good analogy for my relationship with my queer identity and the relationships my queer identity is a part of. Indeed, as a migrant, I’ve found that my relationship with my queerness more often comes in the form a suitcase- emotional baggage, so to speak. Here, I hope to share with you five suitcases of my own coming out, and the worlds that I was emerging from, and going into.


The first suitcase: a child shipped by plane


I arrived to the United States screaming. My parents always tell this story. During that time, adoptive parents did not have to go to Korea to pick up the children they were adopting. Instead, the children were brought on planes with aides hired by the adoption agency. They would all file off the plane in a row, each woman holding a different adoptee and presenting the child to their parents like precious, well-behaved gifts. A series of perfect, multicultural families made one after another. My parents always tell me that, unlike the other, cute sleeping babies, I screamed and screamed the entire flight. The aide pushed me into my parents’ hands and snarled, “good luck with this one.”


Later, I would dig through the artifacts of my past life that came with me in a small suitcase. A hot pink child’s hanbok, two moon-faced dolls, a few thousand won, and what I thought was an unopenable black box that I would listen to, night after night, in the hope of hearing something more than white noise.


Later, I would be asked whether the reason I was attracted to women was because of my mommy issues, and I would wonder whether there was any truth in that hard stone of a statement. I would wonder whether my own trauma, that initial transpacific loss of my mother, that pushing away from even the woman who was paid to carry me across oceans, had led to my own desire to look for deep and transgressive love with women. I don’t know the answer to that, and I’m not sure I ever will.


Then, though, I did not concern myself with these questions. I just screamed and screamed, and even then I’d like to think that through my scream I distinguished myself from the other, beautiful babies. Not “gay” as in happy, but queer as in “fuck you.” My parents call that day my “coming home “ day. I wonder now, if I can consider it also a coming out day.


Going forward into the desert. (c) Chaelee Dalton


The second suitcase: love and joy


The summer after my first year of college, I flew away from my parents again, back to the hot, dry desert of Southern California. Before I left, I asked them for a copy of all of my legal documents. I had started thinking about the process of finding my birth family, and in addition to a $30 payment and a letter about myself that my adoption agency requested, I needed to prove my own identity to the people who had stripped me of it initially. For me, though, the letter was what I found the most challenging. Day after day, I sat at my desk staring at an empty document, the cursor blinking on my computer screen, taunting me.


Sometimes, the friend I had met in my English class would sit in the large armchair at the other side of my bedroom as I sat, paging through Food Network magazines I had brought from my local library in my hometown. Sometimes, she would tell me fantastical stories about boys who sent her plants in the mail and played violin to her during their night walks. Sometimes, she and I would fall asleep on perpendicular couches and wake up and press our noses against each other, tracing gentle fingers across each other’s arms.


I loved her, and I loved her for the day that she looked up from a picture of Giada De Laurentiis’ permasmile as I struggled yet again to find the words. She told me to be honest and to be brave. She told me to write as if I were writing to a friend or to a date. What would you want someone to know about yourself? she asked me. You’re incredible, there’s nothing not to like.


Later, I would find the words. Later, I would write and send a letter to my birth parents expressing an unconditional love that crossed borders, that transcended consciousness and was instead embedded in my muscle memory. Later, I would find the words. Later, I would tell that woman that I was tired of denying myself love because of how everyone else saw it.


That for me, love happened anyway. Then, though, words eluded me, but I was still happy to sit there, feeling the joy, gentleness, and warmth of love that I would later learn to feel as queer community, washing over me. Those times were not quite coming out, but rather coming in, spinning a tight and cozy cocoon for me to emerge from.


Coming into an oasis. (c) Chaelee Dalton


The third suitcase: coming out


This coming out suitcase was covered in a thin layer of dust, a backpack full of hiking boots and sweaty clothes. This coming out suitcase’s zippered mouth was dry and lips cracked, unfamiliar with the red oven of Death Valley. I came out to my parents over spring break last year, a time where I could already feel a divide growing between my adoptive parents and myself. I was struggling as I began to recognize that my family in the U.S. could only be built by the loss of my family in Korea.


My parents were struggling to recognize the validity of a family structure that they were not familiar with, one in which there are two mothers, and two fathers, and two brothers, and maybe more to come. I told them I was queer more out of necessity than out of trust. They reacted as I expected, with love heavy with fear. My mother looked down at her hands on the top of a dirty picnic table. “I just don’t want things to be hard for you,” she told them. “Don’t make them harder,” I replied.


My father called me a few days after the trip had ended. “I don’t even know who you are anymore,” he spat. Later, I worked to uncover what was buried under his rage and realized that he was struggling with the same question I was- what happens when family loses, or has never held, familiarity with one another? Then, though, I cried, and wished that I did not have as many skeletons in my closet as I did.


To be alive in Death Valley. (c) Chaelee Dalton


The fourth suitcase: two mothers


When my mother and I met, in the airport, for the second time in my life, neither of us cried. I was twenty years old, the same age she was when I was born and then taken from her. For both of us, then, there was a lifetime between us. We hugged, that lifetime suddenly seeming both immense and miniscule. She grabbed my suitcase and we walked to her car, saying intermittent nothings between long periods of silence. I looked at the woman who gave birth to me and suddenly realized she was a stranger.


Several days later, after I moved into her shiny white apartment, after I cried in a Mexican restaurant because I had no language to give, after I woke up in our shared bed, mirroring each other, two of our hands intertwined, the others’ holding the sharp, bright screens of our cell phones, we finally began to speak.


My mom came home after a night out with six tall cans of beer that she placed carefully in the fridge. I looked up from the two-dimensional food spinning on the flat pane of the television. “Do you want one?” she said slowly, still embarrassed of her flawless English. The few words I learned in Korean broke before they even came out of my mouth. I said nothing, but I grabbed one and clinked my can softly against hers. We said “kambe.” My mom stretched out on the couch next to me. We drank all six of the beers (she drank four, I drank two) that night.


We talked about our favorite books, our families, the music we love. We made fun of the music the other person thought was sexy (for her, the Weeknd, for me, Frank Ocean). We danced a little. As the night began to wane, and my eyelids grew heavy, and we slumped against each other, in our drunkenness unafraid of each other’s bodies, she said to me, “ This time together... It feels like we’ve just started to date,” and I laughed, holding her hand. “That’s exactly what it feels like.”


At the end of the night, I gave my mom the presents I had brought with me from my mother in the United States. She unwrapped a small, blue and yellow beaded bracelet. Chaelee gave this to me when she was very young. I want you to have it, my American mother had written. She slipped the clumsy art project onto her wrist, holding it up to the light and I felt myself crying, feeling my past and present, feeling both of mothers’ presences so deeply.


Later, my mother would ask me if I have a boyfriend, and I would hear the lie in the absence of my truth when I told her no, I do not. I would not tell my mother about the women I have dated and the one I was deeply in love with, whose music I listened to on repeat, her voice simultaneously breaking and building my heart. Later, I would find myself making internal notes predicting what my mother’s reaction would be like if I came out to her.


Then, though, I just surrounded myself with the knowledge that my mothers’ dual recognition of the queerness of our love was enough. That I had two mothers who I loved deeply and differently. That we all held an understanding, at that particular moment, that love is not something that exists in competition with itself. Then and there, I felt seen; I felt heard.


Looking out on Jeju. (c) Chaelee Dalton


 The fifth suitcase: queer relationships


A few days ago, I went to an art exhibit with a girl I met on Tinder. We sank into bean bags opposite each other, and listened to a voice speculating on how the gender of a room can change depending on who cohabitates it, the fluidity that exists in this type of space.


This girl has just moved out of her grandparents’ home and into a goshiwon, a room that is maybe best described as a closet. A closet-room that allows her to exist with more freedom, more queerness, than the wider space of her family home.


We asked each other about coming out to our Korean families. Later, I told her. Maybe later I will come out to my mom here. I do not know the future, but maybe later.


For now, though, I am happy to exist here, in Korea, out and not out, finding and forming queer relationships- ones that don’t quite fit into any conventional box. Ones that say, a box is too small to confine our love.


Stories of arrivals and departures


My first coming out story is the story, of course, that we all hold- that of coming out of the warm, safe confines of a womb. I’ve heard that this experience is so traumatizing for all infants- these first breaths into a wide and terrifying world- that they block it completely from their memories. Like many others, my story holds this trauma- of being born into an unjust world. My story is not independent; it is part of other people’s stories, and my birth is part of other people’s trauma.


As a queer person who knows the history of queer people’s children being removed from them, I cannot forget that the woman who gave birth to me was forced to choose between placing me in an incubator and potentially saving my life, and in having a chance to raise me as her own child. As a queer person, I cannot forget that the woman who gave birth to me is one of thousands of other unwed mothers’ whose non-nuclear, non-normative family structures were so dismissed by the state that they were forced to send their children across oceans. As a queer person, I choose to concern myself with issues of justice for those most marginalized. As a daughter, I choose to concern myself with fighting for the people I love.


My coming out stories are about emergence and emergency, and how much, for me, they’re tied together, coming out carrying deeply intertwined feelings of fear and urgency, a siren’s dangerous and magnetic call. I have struggled so much in writing this essay, in thinking about coming out, of emerging, of arrivals being also departures. I have struggled so much in writing this because I am afraid that I am not out of the closet enough to be writing about this.I have struggled so much in writing this because I am afraid to put myself more out of the closet than I already am.


Because of the many stories I can tell about coming out, or staying in, every day, and how much of that is entangled with my adoption. Because my stories are not my stories alone; they are the stories of my mothers, and my brothers, and my lovers. Because both my closet and my suitcase are filled with a collection of hand-me-downs, from the people I am the closest to and from people who I will never meet, or never even know if I met. I have struggled writing this because I have been forced to recognize that the people who are in this closet with me are, in fact, not all skeletons.


Today, as always, I am in the closet and I am out of it. Today, I am fighting for the beings in the closet with me or adjacent to me, the beings in the dark about their families and their histories, the beings whose bodies or families are not recognized by society or the state, the beings who just want to be respected and cared for. Today, I am fighting for being, and loving, for my coming out to be the journey that includes both arrival and departure, for this to be enough coming out for now. 


English-language blog of ILDASouth Korean Feminist Journal  http://ildaro.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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