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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는 불법 난민이다!’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 이란 출신 난민운동가(상)


독일에서 살고 있는 난민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베를린의 정치그룹 국제여성공간(IWSPACE, International Women Space)이 제작한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이야기>에 수록된 내용으로, 이주여성과 난민여성으로 구성된 팀이 다른 난민여성들을 인터뷰하여 1인칭 에세이로 재구성한 것이며 하리타님이 번역, 해제를 달아 소개합니다.


“They cannot find me in their minds”라는 제목의 글 속 화자는 이란 출신의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독일에서 난민의 권리를 주장하며 급진적인 운동을 펼친 인물입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원문을 재구성하였으며,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학생’ 신분에서 ‘난민’이 되어 다시 독일로


나는 독일에 맨 처음 학생 신분으로 왔다가 이란으로 되돌아갔다. 이란에 도착하자마자 체포되었다. 왜, 어쩌다가 그랬는지는 밝히지 않겠다. 감옥에서 나와, 다시 독일로 가서 망명 신청을 했다. 그 때 나는 가족에게 보냈던 편지-이란으로 돌아가면 체포될 것 같다고 쓴 편지를 들고 갔다.


유학 시절에 여러 위험 신호가 있었지만 나는 보지 못했다. 이란 행 비행기 표를 끊은 뒤 주독일 이란 대사관에서 몇 차례 전화를 걸어왔는데, 그 때 나는 심각한 우울 상태여서 신경 쓰지 못했다.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의 삶, 학생으로 사는 것에 너무나 좌절해서 그 때는 이란으로 돌아갈 생각뿐이었다. 스스로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돌아갈 거야” 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나의 정치 활동은 일찌감치 시작되었다. 나중에 구속으로 이어진 몇몇 사건은 예전부터 있었다. 아무튼, 독일로 돌아와서 한 망명 신청은 거부되었다. 독일 당국은 내가 학생 신분으로 거주한 적이 있기 때문에 망명 신청이 불가하다고 했다. 나는 지금은 그 때와 상황이 다르다면서 도움을 요청했다. 모든 것이 두렵다고도 했다. 나에게 ‘하드코어’한 시간이었던 대학 생활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 때 사람들에게서 도망쳐 나왔기 때문이다.


몇몇 예전 친구들이 지낼 곳을 알아봐주거나, 학생 비자를 다시 신청해보라고 했다. 같은 도시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내 동생은 여전히 잘 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석사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다. 이란에서 통신전기공학 석사 학위를 딴 후 독일에서의 석사 과정은 타이틀은 같지만 내용은 경영과 연관되어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통신시스템 이론에 집중해 전기공학을 공부했는데, 이론에 치중하는 이런 방향으로 나가려는 이들은 보통 유럽이 아닌 미국으로 갔다. 통신시스템은 아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기술을 논하기 때문에 상당히 추상적이었고, 실용적인 연구는 아직 불가능하거나 몇몇 지역에서만 가능했다.


사실 이 공부에 대한 관심은 ‘우리 가족 중 나는 똑똑하지 않다’는 열등감에서 비롯되었다. 스스로를 천재라고 증명하려던 것은 아니다. 이 분야의 사람들이 종종 수학, 물리학 분야에서 천재라고 불렸고 나중에 구글 같은 큰 조직의 우두머리가 된다 해도 말이다. 내가 공부했던 대학에는 천재 아니면 책벌레들이 있었고, 나는 책벌레 쪽이었다. 하루에 20시간씩 책을 읽어대다 보면 거기서 뭔가는 배우게 된다. 나로서는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멍청한 아이가 아니라고.


맞다, 이 모든 상황이 무척 억압적이었다고 지금은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두 번째로 독일로 갔을 때는 “이런 건 이제 끝이다!” 라고 선언하면서 대학 교재와 보고서 등 공부 관련된 모든 것을 완전히 다 불태워버렸다. 이전에는 어떤 변화도 없이 더 행복해지지도 못한 채 공부를 끝마친다는 상식적인 논리에 충실히 따랐다면, 이번에는 “이봐,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증명하려는 거지?” 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오라니엔 광장에 대해 알게 되었다. 거기서 사람들이 거리를 점거하고 바바리아에서 베를린까지 행진도 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있었다. 그곳이 내게 허락된 유일한 곳 같아서, 거기 갔다. 베를린에 있는 오라니엔 캠프에 갔을 때, 나는 강제 송환이나 거주의무(Residenzpflicht; 난민 및 망명신청자들을 지정 숙소에 격리하고 여행과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독일 법규) 같은 것들에 대해 하나도 몰랐다. 나는 내 자신의 그림자처럼 살고 있었고 개인적인 고민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캠프에 도착해서 M을 만났다. 그는 캠프를 막 떠나는 참이었다. 수단 사람들의 텐트 안 그의 자리가 비게 되었다. 나는 거기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 2012년, 뷔츠부르크(Wurzburg) 난민 캠프에 있던 이란 출신 난민 무하메드 라자파(Muhammed Rahsapar)가 자살한 사건을 계기로, 독일 각지에 있던 난민들이 모여 한 달간 600km 걷기 항의집회를 벌였다. 이들은 최종 목적지였던 베를린에 도착해 이주민이 많이 사는 구역인 크로이츠베아크(Kreuzberg) 오라니엔 광장(Oranienplatz)에 캠프를 꾸리고 2년여에 걸친 농성을 시작했다. 난민에 대한 독일 정부의 지나친 통제와 차별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했다. 현장에서 정기적으로 연대 단체들과 집회를 열고 홍보 부스를 운영했다. 이들은 단식농성을 하거나, 공항에서 난민을 강제 송환하는 경찰과 대치했다. 전국 각지에 있는 난민들과 연대하기 위해 각지의 난민수용시설로 버스투어를 떠나기도 했다.


▶ 2012년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광장에서 단식농성 중인 난민운동가들. (출처: Andrea Linss)


난민 인권을 위한 장기농성, 길 위의 생활이 시작되다


람페두사 그룹이 도착했던 때가 기억난다. 우리가 이미 학교(크로이츠베아크 구역에 빈 건물이었던 게하르트-하웁트만 학교Gehart-Hauptmann-Schule. 오라우어Ohlauer 거리에 있어서 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함)를 점거하고 난 다음이었다. 나는 첫 날부터 거기 참여하고 있었다. 잠은 오라니엔 광장에서 계속 자기로 했기 때문에 몇몇 동료들과 그렇게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때로는 캠프에 우리 셋뿐이었기 때문이다. 소수의 인원으로 그 캠프를 지키는 것은 무척 어려웠고, 우리는 다 지쳐버렸다. 하지만 거리에 있어야 우리의 투쟁이 잘 보이기 때문에 광장의 캠프를 유지해야 했다.


그렇게 시간을 좀 끌고 나서 람페두사 그룹에게 캠프 자리를 넘겨주고 우리는 학교로 합류했다. 그것도 괜찮았다. 람페두사가 광장의 주된 이슈가 되면서 투쟁이 다음 단계로 나아간 것 같았다. 이 무렵에 나는 N과 같이 학교로 옮겼다. 몇 달 동안 학교와 광장을 매일 오갔다. 학교의 상황은 사실 좀 웃겼던 게, 점거는 했지만 거기에 실제로 사는 사람은 아직 많지 않았고 매일 새로운 사람들이 찾아오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여성 공간 위층의 한 방을 썼다. 사람들이 매일 속속 도착하면서는 이방 저방으로 옮겨 다녔다. 방을 바꾸는 것이 여전히 가능했다.


※ 람페두사(Lampedusa)는 이탈리아 남단 지중해에 있는 섬 이름으로, 중동 지역에서 유럽으로 들어오려는 난민들의 주요 해상 경로에 위치해있다. 2011년 리비아 전쟁을 피해 바다를 건너던 난민선이 난파되어 3백명이 넘게 사망한 이래로 여러 차례 근처에서 유사한 사고와 인명 피해가 있었다. 지금도 유럽의 관문 ‘hotspot’(많은 수의 난민을 1차적으로 수용해 신속하게 수속하는 장소) 중 하나이며, 섬의 난민수용체계가 단계적으로 확대되었다. 기상 악화 시에도 운행할 수 있는 응급보트 4척이 람페두사 섬에 항시 대기한다. 본문에 언급되었듯이 독일에도 람페두사를 거쳐 온 난민들이 많다. 이들은 베를린, 함부르크, 하나우 등에서 ‘람페두사’라는 이름으로 그룹을 이루어 활동하고 있다.


역시 베를린에 있던 친구 A와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친구와 가까이 있다는 기분을 맛보기도 했다. 우리는 한참 서로 못 본 상태였다. 친구는 내 생활을 보더니 “아 그래, 여기서 무슨 운동을 하고 있구나” 라고 했다. 그 역시 인생을 말아먹었다. 내 말은, 나보다는 좀 나았을지 몰라도 꽤 어렵게 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오래 살았기에 비자를 쉽게 받을 수도 있었지만, 베를린에 머물기 위해 다 뒤로하고 사진 찍는 액티비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다. 나와 같은 공부를 하고 최초의 뭐시기가 되기도 한 그에게 사진은 아주 새로운 일이었다.


학교 점거 현장으로 같이 옮겨갔던 친구 N은 자기 방에서 훨씬 안정을 찾은 상태길래, 나는 A와 함께 소셜센터로 옮겼다. 거기서 2주 정도를 지냈다. 한편 학교의 상황은 또 변하고 있었다. 점거에 참여했던 퀴어 그룹이 떠나고, 미미(Mimi)가 기존의 있던 프리샵(Free Shop; 무료로 가져갈 수 있는 헌 물건을 모아놓은 곳)에 더해 에브리데이 키친(Everyday Kitchen; 농성에 참가하는 난민들에게 공급할 음식을 만드는 커뮤니티 부엌)을 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래서 나, A, 미미와 몇몇 사람들이 소셜센터에 모여서 음식을 만들게 되었다.


※ 미미(Mimi)는 오라니엔 광장을 중심으로 한 난민 당사자 운동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여성으로, 많은 동료 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미미는 2014년 6월, 게하르트-하웁트만 학교 지붕에서 있었던 농성 이후 쇠약해져 폐렴을 앓았다고 한다. 학교 점거 참여자 중 한 사람인 Alnour에 따르면, 경찰이 의료진 출입 요청에 응하지 않아 제때 치료를 못 받고 결국 숨졌다. 집회 영상 등에서 생전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본 기사 시리즈 후반부에 미미와의 인터뷰 원고가 소개될 예정이다.


나는 학교 현장에 상당히 애착을 갖고 있었다. 거기가 내 집이었다. 마침 소셜 센터 역시 오래지 않아 새로 도착한 사람들로 가득했고, 우리는 그 시점에 거길 나왔다. 우리에게는 그래도 특권-지지자들의 집이라든가 다른 지낼 곳이 있는 반면, 이제 막 온 사람들에게는 다른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A와 나는 프로젝트 하우스들을 다니며 지지자들과 같이 지냈다.


브뤼셀 행진 때까지 여기서 쫒겨 나면 저기로 가는 식으로 왔다갔다 옮겨 다녔다. 브뤼셀로 갈 때 나는 모든 소지품을 챙겼다. 베를린 생활은 그걸로 끝이라는 의미였다. 더 이상 있을 곳도 없으니 행진에나 가자는. 하지만 브뤼셀에 있는 동안 학교 점거자들은 강제 퇴거를 당했고, 나는 너무나 외로운 기분이 되어 단식투쟁을 하기로 했다.


베를린로 돌아오자마자 곧장 학교로 가서 지붕에 있던 사람들과 합류했다. 그 때 사람들은 3일째 지붕에서 농성 중이었고 나 역시 3일째 단식 중이었다. 그게 내가 연대하는 방식이었다. 9일 후에 모든 게 마무리됐다. 잘 모르겠다, 나는 지붕에서 투쟁하던 사람들이 이제 학교에서 계속 지낼 수 있다고 확신했고 일이 잘 풀렸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 않았다.


▶ 2014년 6월, 게하르트-하웁트만 학교 건물에 살던 난민들 중 일부가 경찰의 퇴거 행정집행에 불복하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지붕 위 농성은 9일 동안 이어졌다.(출처: Berliner Zeitung)


우린 혁명을 해낸 줄 알았는데, 바뀐 게 없었다


누군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이봐, 나는 혁명이 일어났다고 느꼈는데 아무것도 바뀐 게 없어.” 나도 그런 기분이었다. 물론 무슨 일이 있어나긴 했다. 투쟁한 사람들 편에서 한 발짝. 어쨌거든 저항은 새로운 공간을 열어냈다. 모든 혁명이 그렇다. 애초 저항 이후에 다른 집단이 와서 실제로 싸우던 사람들을 희생시키거나 죽이거나 아무튼 끝장 내 버리고는 자기들이 협상에 임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나는 해석은 이렇다.


예를 들어 그 여자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나? 여러분(본 인터뷰를 진행하는 국제여성공간 IWS 활동가들을 지칭)에게는? 여러분은 더 이상에 학교에 남아있지 않다. 이번에도 급진적으로 저항했던 나와 몇몇 사람들은 혁명 이후에 모두 나와야 했다. 그리곤 더 평화적인 사람들-어떻게 불러야 마땅한지 모르겠다-, 그들이 조직을 유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혁명처럼, 결국엔 조직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지붕 농성을 한 동료들은 감옥에 갔다.


나는 모든 사회운동이 결국 이러한 지점에 다다르게 된다는 것을 배웠다. 누군가가 죽고 끝이 난다. 옳고 그름을 얘기하는 시간은 없다. 가서 싸우고는 시스템에 의해 죽임 당한다. 싸우다가 죽는다. 사람들은 그제야 무슨 일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게 된다. 그러면 누구도 그 일을 모른척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우린 속았다. 사람들은 우리로 하여금 혁명을 해냈다고, 이겼다고 믿게 했다. 하지만 실상 모든 것을 다 얻은 건 그들이다. 그들은 이런 합의를 만들어냈다. 자, 여기 당신들 공간을 줄게. 혁명을 했다고 하자. 말이 안 된다. 나는 우리가 벌인 운동이 더 이상 거기 없다고 본다.


잘 모르겠다. 나는 무수한 문제들에 대해 말할 수 있지만, 그것들을 역사적인 사건처럼 바라보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정말 많은 것들을 해냈지만 그 중요성은 잘 몰랐고, 그 때문에 우리의 운동은 깨어지고 말았다. 이에 대해 계속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운동을 시작하는데 도움을 줄 수는 있겠다. 우리의 경험이 다른 변화의 가능성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난민들을 고립시키는 독일 숙소 시스템에 반대한다


나의 망명 신청 과정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한두 달 정도였던 것 같다. 면담에 오라는 연락이 꽤 빨리 와서 좋았다. 결과도 빨리 나오리라 생각했지만 그렇진 않았다. 나보다 나중에 면담을 했지만 먼저 결과를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반대의 경우들도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내 남동생 역시 면담을 벌써 하고 왔다. 그 때 담당자들은 그에게 나에 대해 묻다가, 내가 베를린에서 문제를 일으킨다고 말했단다.


변호사가 말하길, 전에는 정부나 국가 조직에 반하는 뭔가를 하면 긍정적인 망명 신청 결과를 못 받는 법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도 암묵적으로는 분명 그런 게 존재할 것이다. 그들은 나에 대한 두꺼운 파일을 갖고 있다. 나는 오라니엔 광장에 있었으니까, 사실 좋은 결과를 기대하진 않는다. 그래도 아직 신청이 아예 거부되지는 않았다. 신분증은 갖고 있다. 얼마 전에 갱신을 해서 2016년까지 유효하다. 나보다 이전에 신청한 몇몇 친구들은 벌써 3년짜리 비자를 받았다고 한다. 나도 9~10개월 내에 긍정이든 부정이든 결과를 받을 거라고 했다. 광장 일에 연루되었던 사람에겐 3년이 보통 기다림의 기간이다. 나는 2년째 기다리고 있다.


나는 난민 숙소(Heim)에는 겨우 몇 시간만 머물렀다. 사실 오라니엔 광장 캠프가 강제 철거되고 우리는 아주 많은 난민 숙소를 일주일씩 떠돌아 다녔다. 하지만 정작 내가 배정받는 곳에는 세 시간만 있었다. 오라니엔 광장 투쟁 이후, 그 모든 것을 겪고 난 다음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망명 신청은 받아들여져서 나는 숙소를 배정받았다. 하지만 그 때 나는 거주 의무 규정에 관해 입장이 아주 분명했기 때문에 단 세 시간만 머문 것이다. 거기 더 있었더라면 그곳 사람들의 경험에 더 공감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을 가끔은 한다. 하지만 당시엔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숙소에 사는 난민들의 삶이 ‘고립’(isolation)이라는 것을 안다. 내가 왜 고립으로 돌아가겠는가? 나는 거리에서 싸우고 있었다. 나는 숙소에 살 필요가 없었다. 나는 난민 숙소 시스템에 반대하고 그래서 거기에 살 수 없었다.


나는 특권적인 위치에 있었다. 당국이 난민을 지정 숙소에 데려가면 그 사람은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만 세상과 연결된다. 내게는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는 특권이 있었고 그래서 숙소로 들어갈 수 없었다. 내게 주어진 숙소는 베를린에 있었는데, 이 역시 ‘이란에서 온 난민’들을 위한 특권이다. 나는 숙소 배정에 어떤 규칙이 있다는 것, 당국이 난민들을 무작위로 넣는 것이 아님을 지금은 알고 있다.


▶2014년 4월 오라니엔 광장 농성장 입구에 캠페인 현수막이 걸려있다 (출처: dreamstime.com)


불평등을 드러내는 선언, ‘나는 난민이다’


나는 친구들과 “난민이란 지칭을 그만두자”(stop calling people refugees)는 캠페인에 대해 얘기해보았다. 내게 이 메시지는 “그 누구도 불법이 아니다”(Kein Mensch ist illegal)라는 슬로건과 같다. 하지만 실상 내가 느끼는 감각은 “그래, 난 불법이다”(Doch, ich bin illegal)이다.


언젠가 오라니엔 관장에서 그렇게 답한 적이 있다. 당신들은 불법인 사람은 없다고 외치고 다니지만, 현실에서 나는 불법이고 그걸 무시하고 싶지 않다고. 내가 당신들과 동등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고. 우린 동등하지 않다. “난민 환영”(Refugees welcome) 슬로건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환영받지 못한다. 거리에서 외치는 말들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나는 그래서 오히려 “나는 난민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누군가? 나는 난민이다. 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나의 불평등을 인지하는 선언이다.


여기서 태어나 유럽시민권을 갖고 있고, 외국인으로 보이고 싶지 않지만 피부색 때문에 언제나 “어디서 왔어요?”라는 질문을 받는 이들도 떠올려본다. “뭐라고요? 내게 왜 그런 질문을 하죠? 나는 시민권을 갖고 있고, 언어를 갖고 있는데, 모든 것을 가졌는데 당신은 나를 피부색으로 판단하는 군요.” 그들이 대면하는 차별은 이렇다.


앞서 말한 캠페인들은 이 사회에서 배제되고 싶지 않지만 차별적 시선을 받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의 길은 아니다. 현재 나는 내가 난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선호한다. 나는 다른 이들과 같지 않다. 나의 삶은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 (이게 나의 입장이지만 양쪽 다 이해는 간다.) 다시 말하자면 “그래, 나는 난민이다.”


[번역자 노트] 오라니엔 광장을 다시 찾아가다


올해 상반기 베를린에 두 번 다녀왔다. 그 때마다 ‘오라니엔 광장’ 지하철역을 여러 번 지나쳤다. 이전 기사에서 그곳 농성장의 텐트 모습을 담은 사진을 소개한 적도 있다. 우연히 찾은 이미지였다. 그 정도로 지나갔다. 이번 원고에 ‘오라니엔’ 이 낯익은 이름이 다시 등장했다. 이번만큼은 도저히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라도 알기 위해 파고들었다. 화자가 들려준 ‘직접행동’ 구술사의 빈틈들을 메워보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오라니엔 광장 농성에 참가한 난민들은 많게는 3백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2012년 겨울 추위를 피하기 위해 학교로 쓰였던 빈 건물로 들어갔다. 엄밀히 말하자면 공유지에 무단으로 거주하는 것. 영어로는 스쾃팅(Squatting), 웅크려 앉는다는 뜻도 있다. 집회에서 팔다리가 잡혀 연행되는 것을 최대한 방지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본문의 화자는 바로 이 점거 운동에 직접 나선 것으로 나온다.


▶광장에서 농성을 시작한 난민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들어간 오라우어 학교의 2014년 6월 당시 모습. (출처: Andrea Linss)


그와 같이 언급된 ‘브뤼셀 행진’은 뭘까. 2014년에 난민 그룹이 프랑스 스트라스부르크(Strassbourg)에서 벨기에 브뤼셀(Brussel)까지 걸으며 난민에게 적대적인 국경 제도를 비판한 시민불복종 캠페인을 말한다. 화자의 행적이 비로소 공식적인 사건 기록들과 겹쳐졌다. 사회와 격리된 시설에 난민을 데려다놓고 감시하고 통제하는 의무거주법에 반대하기 위해, 배정받은 숙소를 마다하고 ‘불법’이 되어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다가 브뤼셀까지 가게 된 화자의 고생길이다.


한편, 베를린으로 아예 떠날 작정이었다가 지붕 농성을 하는 동료들 소식을 듣고 돌아와 단식을 하며 연대했다는 대목은 또 뭔가. 2014년 6월에 있었던 행정집행에 대한 것이다. 오라우어 학교 건물에 살던 난민들을 퇴거시키려고 경찰이 출동하자, 이에 불복하는 이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지붕에 올라갔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얘기다. 지붕에 갇힌 인원은 소수였지만 이내 학교 앞으로 지지자들이 몰려들었다. 대학생, 인권활동가, 연대 단체 등 1천여 명이 9일 동안 경찰과 대치했다. 화자는 이 무리 속에서 단식농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위험천만한 지붕농성을 끝내기 위해 교섭이 진행됐고, 베를린 시의원과 건물관리인 등이  ‘학교 건물을 난민센터로 쓰겠다’는 농성단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일단락됐다. 하지만 시 정부에서 곧장 사설 경비업체를 고용해 학교 출입구를 통제했고, 거주 난민들은 고립되고 말았다. 외부의 방문이나 의료 처치가 여의치 않았다. 몇 달 뒤에는 시가 합의 내용을 번복하며 다시 퇴거를 명령했다. 점거 난민들을 범법자, 특히 마약거래범으로 몰아가는 여론도 있었다. 자선단체나 연대조직의 생필품 지원에 의지하며 때로는 하루 이틀 굶기도 하는 상황에서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시를 고소했다. 2015년 10월, 베를시에는 퇴거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고 기존 합의 내용이 유효하다는 판결이 나왔다.


무엇보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오라니엔 농성장과 거기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일종의 ‘결말’이었다. 현재까지 운영 중인 관련 사이트 ‘Oplatz.net’에 따르면, 농성장의 난민들 가운데 람페두사를 거쳐 온 이들과 나머지 사람들이 점차 입장 차이를 보였다고 한다. 언론 역시 아프리카 이주 난민들이 현지 좌파활동가들에게 착취를 당한다는 식으로 부정적인 여론몰이를 했다. 시 정부는 농성을 중단하면 집을 제공한다는 회유책을 제시했고, 일부가 이에 따르길 원하면서 그룹 내 갈등이 깊어졌다.


농성 조직은 결국 와해됐지만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변화했다. 2014년 이래로 난민 당사자 운동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발전해왔다. 미디어, 청소년, 여성 분야 그룹이 따로 생기고, 학교 점거지에 남은 이들, 난민 숙소 간 연대에 집중하거나 강제송환 조치에 대응하는 그룹, 람페두사 출신자들 등이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활동하고 있는 오라니엔 광장 난민 그룹의 트위터 페이지. (출처: twitter.com)


사실은 나는 좀 우려스럽다. 제주도의 예멘 난민들에 대한 적대와 혐오가 넘치는 지금 한국에서 이번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난민을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 혹은 근본주의 무슬림 교리에 빠진 과격한 남성으로 단정 지어 상상하는 이들에게는 자기 권리와 자유를 위해 직접 ‘빡세게 투쟁’하는 난민의 모습이 좀 충격적일지도 모르겠다. 실은 특별할 것 없다. 이들도 자기 몫과 뜻을 지키려는 것뿐이다. 노동자가 파업의 권리를 행사하거나 시민이 집회 결사의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모든 난민이 글 속의 화자처럼 불법 신분이 되길 감수하고 정치적 행동에 나서지는 않는다. 다만 모든 난민이 그 덕분에 좀 편해졌다. ‘급진적인 (그러나 평화적인) 항의 집회’가 여러 차례 있은 뒤, 독일 내 많은 난민숙소들이 3-4인실 체계로 바뀌고 현금 지원을 시작했으며, 강제송환 조치를 줄였다. 늘 그렇듯, 누군가는 더 많이 고발하고 요구하고 밀어붙여야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바뀐다. 내가 그 역할을 못할지언정, 팔 걷어붙이고 나선 이를 꺾지는 말자. 고민하고 방황하며 어려운 시간들을 지나온 난민운동가, 오늘의 화자를 뜨겁게 응원한다. (하리타)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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