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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여성난민의 외침 ‘자유와 인권은 어디 있나’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 이라크 여성
독일에서 살고 있는 난민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베를린의 정치그룹 국제여성공간(IWSPACE, International Women Space)이 제작한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이야기>에 수록된 내용으로, 이주여성과 난민여성으로 구성된 팀이 다른 난민여성들을 인터뷰하여 1인칭 에세이로 재구성한 것이며 하리타님이 번역, 해제를 달아 소개합니다.
“이라크에서든 독일에서든 나의 존엄을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Whether in Iraq or Germany, I will not allow anyone to compromise my dignity) 편의 화자는 이라크 출신 여성 난민으로,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외치다 고문을 당하다
나는 카발라(Karbala,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남서쪽에 있는 인구 70여만 명의 도시)에서 왔다. 우리는 이라크에서 사담 후세인에 의해 박해를 당했다. 그는 무슬림들, 특히 시아파(Shia, 혹은 Shiites)를 공격했다. 우리는 코란을 암송할 수 없었고, 아이들에게 코란이나 샤리아(Sharia, 이슬람 율법)를 가르치는 수업 같은 종교 모임을 여는 것도 금지 당했다. 사담으로부터 이라크를 해방시킨 것이 미국이 아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이라크인들이 스스로를 해방시키길 바랐다. 미군이 들어온 이래, 좋은 변화가 일어난 게 아니라 오히려 전보다 상황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이후에 이라크인들에 의한 혁명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시계를 거꾸로 돌린 것은, 내 생각에, 이라크에 있었던 너무나 많은 죽음과 희생이다. 전쟁과 분쟁으로 온갖 희생을 치렀고 이라크는 다른 어느 곳보다 많은 피해와 손실에 시달렸다. 수많은 여성들, 딸들이 강간을 당하고 남자아이들이 살해당했다. 내 생각에 이라크엔 지금까지 다른 어느 아랍국가, 아니 어느 나라에서보다 많은 희생자가 있었다. 이것이 이라크에 정체 상태를 야기했다. 테러가 일어나는데 거기서 자유로워질 방법이 없다. 테러리즘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테러리즘은 인접국가에서 이라크로 들어온다.
[※ 이라크를 비롯한 이슬람권에는 여러 종파가 있다. 그 중 시아(Shia)파와 수니(Sunnis)파 간의 갈등이 두드러져 왔다. 이라크 인구의 60% 가량이 시아파이며, 수니파 무슬림은 약 20%를 차지한다. 1979-2003년까지 장기 집권한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은 수니파 출신이었고, 독재 말기에 특히 시아파에 대한 박해가 심했다. 후세인이 권력 유지와 사회 통제를 목적으로 한 탄압에 ‘종교적 구실을 붙였다’는 해석이 많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그리고 후세인 처형 이후 시아파 정부가 들어섰다. 2007년 전후로 시아-수니파 간 분파 갈등이 내전에 버금갈 정도로 고조됐다. 새 정부에서 자리를 차지한 시아파인들은 정치적 보복을 행사하고, 수니파 무장조직 알카에다는 시아파 주요 성지를 훼손하는 등 쌍방 폭력이 발생했다. 화자 여성은 시아파 무슬림 신도로서, 후세인 정부에 유감이 많았기 때문에 분파 갈등을 혁명(revolution)이라 지칭한 것으로 보이나, 확실치는 않다.]
▶ 2014년 국제관계학 연구자인 알카팁(Luay Al-Khatteeb)이 자신의 트위터에 한 이라크 가족의 사진을 올렸다. ‘국제 스시의 날’ 전후로 올린 위트 있는 트윗인 한편, 이라크 내 지속되는 분파 갈등의 종식을 희망하는 메시지도 담았다. 서로 다른 분파지만 같은 뿌리를 가진 무슬림으로써 평화롭게 공존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출처: 트위터)
이라크에서 누구든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며 싸우고 저항하려면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종교의 자유를 위해, 종교 규율을 옹호하고 자신이 선택한 대로 살고자하면 박해받을 위험에 처한다. 사담 후세인은 많은 것을 금지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사람들을 구타하고 징역형을 선고하는 것으로 답했다. 자기 정부에 동의하지 않는 의미가 될 만한 사회적 행위는 무엇이든 막으려고 사람들을 체포하고 처형했다. 나는 사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항상 알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종교인이었고, 우리 집에선 코란을 암송하고 종교문에 대해 토론하는 모임이 항상 열렸다. 사담의 지지자들이 어떻게 이를 박해했는지 나는 여러 번 목격했다. 한번은 어떤 방에 남자아이들을 모아놓고 코란과 이슬람 규율을 가르치고 있었다. 여자들은 다른 방에 모여 앉아있었다. 그 때 사담이 보낸 경찰이 집안에 쳐들어와 테이블을 뒤엎었고, 코란책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맞서지 못했지만 나는 결과를 알면서도 그들 앞에 나섰다. 그들은 나에게 “당신이 이렇게 대들고 나서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 지 알고나 있나” 라고 물었다. 나는 결과가 무엇이든 정의의 이름으로 코란의 이름으로 행동한다고, 내 목을 베어간다 해도 나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고 답했다.
신께 감사하게도, 나는 한 명의 자유로운 여성으로서 어떤 억압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는 위협에든 무엇에든 굴하지 않는다. 어찌 설명할까, 나는 나 스스로 허락하지 않은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장 권세 있는 사람이 그 무엇을 내게 갖다 대고 나를 찍어 내린다 해도 굴복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러 번 감옥에 갔다.
감옥에서 사람들은 나를 갖가지 방식으로 고문했다. 내 손톱을 뽑고, 의식을 잃을 정도로 구타하고, 그 다음에는 얼굴에 물을 끼얹어 깨어나게 하고는 다시 고문을 시작했다. 나는 오랫동안 버텼다. 심지어 언젠가는 심문 도중 내가 기어코 진술을 바꾸지 않자 내 혀를 자르겠다고 위협했다.
이런 비극에서 고통을 받으면서도 나는 나 자신을 끊임없이 달랬다. 이 시련을 견뎌야한다, 나는 내 가족이나 예언자와 같이 강인해야 한다. 사담은 악하고 내가 옳다고 스스로에게 되새겼고, 그래서 저항할 수 있었다. 마지막에는 너무 심하게 구타당해 그 자리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 내가 입원해있을 때 부모님이 변호사를 구해 형집행정지를 신청했다. 그 틈에 이란을 거쳐 독일로 피난을 왔다.
독일 난민 숙소에서 보낸 9년은 ‘재난’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비단 특정 국가의 탄압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고유한 존엄과 개성을 발휘할 때, 그들은 누군가가 자신들의 권리와 존엄을 침해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특히 종교적 신념에 대해 그렇다. 바로 이것이 내가 이라크에서든 다른 나라, 심지어 독일에서든 ‘누구도 나의 존엄과 믿음을 더럽힐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 모스크에서 따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여성 무슬림 신도들. (출처: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Center for Religion and Civic Culture)
그런데 카츠휴터-시츤도르프(독일 튀링겐 주에 있는 작은 마을)에 있는 난민 숙소로 온 이래, 나는 삶의 동기가 무엇인지 더 이상 모르겠다. 이라크에서는 저항의 이유가 있었으나, 여기서는 내가 무엇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견뎌야 하는가. 나는 가난하지 않다. 나의 부모님은 2천2백 제곱미터짜리 빌라를 소유했을 만큼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졌었다. 우리는 가난하지 않았다. 인정할 것은 해야 한다.
독일 시스템이 우리를 지탱해준 것도 물론 있다. 당국은 비록 조건이 열악한 집단 숙소이긴 하지만 지낼 곳을 마련해줬다. 나는 거의 7년 동안 이곳 숙소의 방 한 칸에 줄곧 살았다. 내 딸은 아침에 일찍 학교에 가야하는데도 밤에 잠을 못 이루는 일이 허다했다. 같은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밤새 울부짖는 소리 때문이었다. 나는 당시에 잠을 자기 위해 진정제를 복용해야 했다.
독일 당국은 우리에게 분명 뭔가를 해줬다. 그걸 부정할 수는 없다. 달랑 방 한 칸이지만. 신께 감사하게도 우리는 길거리에 나앉지는 않았다. 우리에겐 옷과 음식도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우리의 자리는 제대로 된 삶과는 거리가 한참 먼 난민 숙소이다. 마치 우리에게 전염병이라도 있다는 듯이,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는 듯이, 우리 아이들에겐 다른 아이들처럼 살 권리가 없다는 듯이. 견디기가 정말 어렵다.
이곳 상황을 독일어로는 ‘재난’(Katastrophe)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 숙소로 매일 경찰이 왔다. 누가 칼로 남을 공격하고, 남의 아이를 때리고, 남의 아내를 공격하고 혹은 사람들이 서로의 물건을 훔쳤기 때문이다. 상황은 비참했다. 남을 괴롭히는 것이 목적인 사람들이 있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독일 사회가 우리를 이렇게 대우하면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우리를 이런 비참함 속에 내버려둠으로써, 이런 처지에서 살게 함으로써,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음으로써, 우리가 ‘차라리 그냥 돌아가겠다’고 말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실제 몸으로 겪었고 듣고 본 현실이다.
신이 나의 증인이다. 나는 자유와 인권이 어디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우리는 당신들과 같은 인간이고, 우리 아이들도 당신 아이들과 마찬가지다.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우리가 머물던 숙소 건물은 감옥처럼 생겼다. 방들은 원 모양으로 모여 있고 가운데 빈 공간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쓰레기더미 바로 옆이었다. 거기선 언제나 썩은 내가 진동을 해서 내 딸은 화장실 가느라 밖을 드나들며 늘상 아팠다. 화장실은 3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어서 겨울엔 눈을 뚫고 한참 오르내려야 했다. 돌아올 때쯤이면 딸아이는 축축하게 젖고 목은 붓곤 했다.
아이는 8살 때 외국인청 책임자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다. “당신의 아들이나 딸을 우리가 사는 곳에 단 일주일이라도 살게 할 건가요? 저는 아이이고, 저에게도 권리가 있어요. 당신이 독일인이라서 당신 딸과 아들은 연휴에 프랑스나 제가 모르는 외국에 놀러가고, 저는 못 가나요? 연휴가 끝나고 학교에서 애들이 ‘너는 어디에 갔었니?’ 하고 물으면 전 ‘아무데도 안 갔다’고 해요. ‘넌 어디서 놀아?’ 이렇게 물으면 나는 ‘쓰레기 옆에서’ 라고 말해요.”
▶ 베를린의 오라니엔(Oranien) 광장에서 난민들이 천막 농성을 하는 모습. 현수막에 ‘강제송환은 살인이다’ 라고 적혀있다. (출처: 독일 난민 포럼 THE VOICE)
우리는 독일에 9년째 살고 있다. 우리가 처음 왔을 때 내 딸은 두 살이었다. 이 아이는 독일어를 할 수 있고, 선생님들이 말하길 학교에서 뭐든 뛰어나게 잘하다고 한다. 예의가 무척 바르고 두루 원만하며 읽기와 작문을 잘한다고 한다. 아이가 여기 온지 9년이나 되었는데 그 동안에 자기 오빠를 한 번도 못 본 것이 가슴 아프다. 저녁기도가 끝나면 딸아이는 창문을 열고 신께 기도한다. 독일 정부가 마침내 자기에게 체류권을 주어서 오빠를 만나고 올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한다. 아이가 원하는 건 단지 이뿐이다.
우리 딸은 겨우 11살이지만, 우리 건물 전체가 이 아이 덕분에 돌아간다고 할 만큼 공동체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번역을 도맡고 사람들의 버스 편도 다 알아봐준다. 우리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고, 범죄자도 아닌데, 이 아이는 아직도 제대로 된 체류권을 갖지 못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번역자 노트] ‘진짜 신’은 언제나 평등하고 자애로웠다
이번 이야기의 화자는 종교 박해와 독재 정권의 고문, 난민캠프의 남루한 환경을 차례로 거친 생존자이다. 이 독실한 무슬림 여성의 결개와 투지, 그리고 종교인으로서의 긍지에 나는 경이를 넘어 경외감을 느꼈다는 것을 먼저 밝혀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한 구절 ‘한 명의 자유로운 여자로서’ 라는 표현에 솔직히 나도 모르게 멈췄다. 그 한마디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잘 넘어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내가 가진 ‘무슬림 여성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편견이란, 스카프 쓴 여성은 보수적 관념을 지녔을 것이라고 보는 것, 믿음이 독실할수록 성차별과 불평등에는 침묵할 거라는 추측이다. 행동거지에 있어 이들 여성을 부끄럼이 많고 ‘외간 남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으로 알거나, 아이를 많이 낳고 남편을 내조하는 전통적인 역할에 충실할 것으로 으레 짐작하는 것도 편견에 해당된다. 요컨대 무슬림 여성을 ‘자유로운 현대여성’으로 보지 않는 관점이다.
추측성 일반화를 그만두고 무슬림 여성들의 다양한 삶과 성향을 들여다보는 데까지는 어렵지 않게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많은 무슬림 여성들의 실제 생활상을 보고 있자면 또 다시 반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가령, 여성 신도들은 전 세계 대부분의 모스크에서 남녀 분리 규율 때문에 별도의 방이나 파티션으로 구분된 공간을 써야한다. 모스크 건물이 비좁거나 붐비는 때에는 아예 못 들어오게도 한다. 일부 근본주의 학자들은 코란의 구절을 인용하며 여성들에게 모스크에 오지 말고 집에서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남녀가 동등하지만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규율이 적용된다고 보기에는 여성 편에만 생활의 제약이 겹겹이 둘러쳐졌다. 이렇게 성별을 근거로 한 권리나 의무에 대한 제약, 금지는 나에게 엄연한 여성억압으로 느껴진다.
본문의 화자 여성에게로 돌아가면, 나는 이 사람이 스스로를 ‘자유로운 여성’이라고 부른 것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경제활동, 사회진출, 가족생활 등 세속적 삶의 영역에까지 불평등을 드리우는 성차별적 종교 교리와 규율을 지키기 위해 순교마저 불사할 수 있다는 것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나도 안다. 나의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나는 종교가 삶의 중심이 아니고, 현대 세속 문화의 관점을 짙게 가졌고, 그 토대에서 만들어진 서구의 페미니즘을 사고의 틀로 익혔다.
하지만 ‘저 사람과 나는 달라’로 끝내고 싶지 않다. 이 거리감을 조금이라도 극복하고 이 여성의 시선과 선택을 이해하고 싶다. 결국 내 안의 낯선 대상, 이슬람교와 낯선 타자, 무슬림에 대한 공부로 첫 걸음을 뗄 수밖에 없다는 결론. 나의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는 ‘페미니스트’ 아니겠는가. 누군가를 알아갈 땐 늘 공통점에서 출발한다. 무슬림이면서 여성인권운동가인 여성들의 목소리를 찾아 마음을 열고 듣기 시작했다. 대부분 비무슬림권 사회의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나 서로 다른 문화 간 혼란과 충돌을 자기 나름대로 극복해낸 이주민 2세들이다.
▶ 인도계 소설가 사미나 알리는 코란 경전을 인용하며, 초기 이슬람 교리가 여성억압을 정당화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미지: pixabay.com)
사미나 알리(Samina Ali)는 인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소설가이다. 사미나는 테드 강연 <무슬림 여성의 히잡에 대해 코란에는 실제로 뭐라고 쓰여 있는가?>(What does the Quran really say about a Muslim woman’s hijab)에서, 코란 경전의 글귀를 인용하며 초기 이슬람교의 모습과 교리의 기원을 조목조목 논한다. 히잡의 본래 뜻은 ‘장막’ ‘구분’이라는 의미일 뿐 여성의 의복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었다. 코란에서 발견되는 여성의 의복에 대한 몇 군데 언급한 내용은 오늘날 무슬림 사회에서 권고 혹은 의무화하는 ‘감싸고 가리기’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경전이 묘사하는 것은 이슬람 이전 시대(pre-Islamic era) 생활상으로, 당시 여성들의 의복은 노출이 많았고 나중에 점점 신체를 많이 가리는 쪽으로 패션이 바뀌었는데, 그 과정에서 학자들이 기존 코란 구절에 임의로 많은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임의적 해석을 가지고 새로운 규율을 만들고 그것이 사회문화적으로 통용되었다고.
또한, 사미나는 이슬람교의 근본은 여성 억압이나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오히려 코란에 따르면 남녀가 동등했다는 증거를 댄다. 코란에 등장한 무하메드의 부인들은 가부장적 일부다처제의 희생양이 아니라 활동적이고 독립적인 여성들이었다. 첫째 부인은 무하메드에게 먼저 청혼한 잘 나가는 상인이었고, 둘째 부인은 낙타를 타고 전쟁에 나간 전사였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강연은 그 동안 가부장제에 구미에 맞춘 임의적 경전 해석을 퍼뜨려 성차별을 부추기고 혐오를 용인해온 무슬림들을 미국에서 종종 일어나는 무슬림 혐오 범죄, 스카프 쓴 무슬림 여성들을 무차별 살해하고 인터넷에 떠벌린 범죄자들과 나란히 놓으며 끝난다.
무슬림 사회에서는 경전을 근거로 할 때 신도들에게 가장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체득하고 역시 경전에서 여성 존중과 평등의 메시지를 길어 올린 액티비스트도 있다. 1989년생 젊은 평화운동가 알라 무라비트(Alaa Murabit)는 리비아계 캐나다인 2세로, 11남매 속에서 자랐다. 독실한 무슬림이었고, 모든 형제자매에게 공평하고 자애로웠던 부모 밑에서 자란 알라는 청소년기에 처음으로 리비아에서 학교를 다니고 생활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곳 무슬림 사회가 여성에게 차별적이고 젠더 폭력이 난무했기 때문이다. 캐나다의 가족과 지역공동체에서 익힌 이슬람 문화나 교리와 전혀 달랐다. 여성이라는 자기 존재가 뿌리째 흔들리는 경험이었다.
나중에 알라는 내과의사가 되었고 시민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리더가 되었는데,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기엔 여성들의 사회 경제 문화적 지위와 참여도가 너무나 낮은 현실에 자꾸 부딪쳤다. 기존의 여성 엠파워먼트 전략으로는 성과가 지지부진하다고 느끼던 차에 코란을 직접 인용한 캠페인을 대중매체, 교육기관, 심지어 모스크에까지 전개해 리비아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너(가부장)에게 가장 좋은 것이 네 가족에게도 가장 좋다”, “네 형제가 남을 억압하게 두지 마라.” 이러한 메시지에 지역 모스크 지도자들도 반응해 설교 시간에 처음으로 그 동안 금기였던 ‘가정폭력’ 문제가 언급되었다. 수많은 남성 종교지도자들이 그간 코란을 인용해 여성 억압을 정당화했는데, 그들의 방어(defense)법을 자신의 공격(offense)법으로 쓴 것이다.
사실 알라의 메시지는 상당히 온건하게 들린다. 여전히 남성 신도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런데도 그녀는 지금까지 수많은 비난과 살해 협박에 맞서야했다고 한다. 감히 여자가 코란을 다르게 해석해 예언자의 말씀을 왜곡한다고 성내는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의 근본을 알 수 없는 분노 때문이었다.
▶ 소말리아 출신 여성 아얀 히르시 알리의 저서 <나는 왜 이슬람 개혁을 말하는가>(Heretic: Why Muslim Needs A Reformation Now) 표지 이미지
한편, 젠더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망명해 나중에 하원 의원까지 지낸 소말리아 출신 여성 아얀 히르시 알리(Ayaan Hirsi Ali)는 자신의 저서 <나는 왜 이슬람 개혁을 말하는가>(원제 Heretic: Why Muslim Needs A Reformation Now, 이정민 역, 책담)를 통해 보다 전면전을 선포했다. 다른 인권운동가들이 이슬람 교리 자체는 평화와 사랑을 지향하나 그것을 현실에 잘못 적용하는 폭력적인 근본주의자들이 문제라고 하는 반면, 아얀은 코란과 하디스(Hadiths)의 가르침 자체를 문제 삼으며 근본 교리 중 다섯 가지 개념을 아예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코란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두고 예언자 무함메드를 무오류적 존재로 못 박는 것 2)현세의 삶보다 내세의 행복을 내세우며 순교를 이상화하는 태도 3)현대 국가의 법보다도 우월한 포괄적 법률 체계로 인정받는 샤리아 4)선악을 강요하는 관습 5)지하드 혹은 성전의 개념이 그 다섯 가지이다. 아얀은 기독교가 개혁을 통해 새로운 사회사상을 수혈하고 시대에 따라 확장을 거듭해온 것을 참고하자며, 이슬람교도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외친다. 발상은 다르지만 앞선 두 여성 못지않게 도발적이고 치열한 사상이자 실천으로 보인다.
이 여성들은 남성 중심의 신앙공동체가 이슬람교를 어떻게 형성하고 또 현실 정치에 활용했는지에 무지하지 않았고 뚜렷한 문제의식을 가졌지만, 신앙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대신 자기 나름대로 치열하게 탐구해 신과 가까이 관계 맺었다. 또한 그것이 삶의 빛과 길이 되도록 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참모습으로 살 수 있게 이끌고, 신의 뜻이자 종교의 본질을 구현해내기 위해 매일 새롭고 도전적인 ‘복음’을 전파해왔다. 무슬림이면서 페미니스트일 수도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소개한 여성인권운동가들이나 본문의 화자에 비하면, 나의 신앙심이나 신학적 이해는 왜소하지만 나도 나름 종교인이다. 기도할 줄 안다. 사람들이 제 멋대로 갖다 붙이는 신, 세속적 욕망에 찌든 자들이 쓴 경전 속의 신 말고, 우리 안팎에 현존하는 ‘진짜 신’들은 누구도 무엇도 차별하지 않으며 자신의 이름으로 다른 이를 해치라고 허락한 적 없다고 확신한다. 또한 윽박지르고 벌하기 이전에 한 번 더 용서하고 포옹하는 존재라 믿는다. 그런 신에게 말 거는 방법을 나는 이렇게 배웠다.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잇는 곳에 진리를
절망에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여기 몇 마디 덧붙여 오늘 기도는 이렇게 끝낸다.
“살갗으로 가슴으로 말소리로 피 흘리는 이 많은 사람들을 굽어보소서. 폭탄과 혐오, 탐욕과 차별로 침몰하는 이 세상을 굽어보소서. 그 속에서 스스로를 구하고 서로를 구하는 딸들을 살피소서.”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독일살이 4년차. 온갖 차이와 차별에 대한 감각이 여전히 곤두서있다. 일다에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칼럼을 연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더 자유로운 페미니즘을 위하여>(2017, 동녁)를 썼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환경사회학 석사과정을 마쳤고, 앞으로 젠더, 이주, 섹슈얼리티,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계속 글쓰고 행동해나가려 한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이다. facebook.com/haritamoonri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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