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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된 한국인’에 대한 선입견 너머의 이야기
<해외입양인 여성들의 경험을 듣다> 다시 돌아온 한국
H.S. Kim
※ 한국은 오랜 기간 입양을 통해 아동을 해외로 내보낸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해외입양 이슈는 여성인권과 아동권, 빈곤과 차별, 인종과 이주의 문제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일다>는 각기 다른 사회에서 성장해 모국을 찾아온 해외입양인 여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들의 경험과 한국 사회에 주는 메시지를 듣고자 합니다. 이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일본계 미국인 커뮤니티에서 힘겹게 보낸 어린 시절
입양서류의 출생기록에 따르면 나는 1980년대의 끝 무렵 서울시 마포구에서 몹시 추운 겨울이 막 시작되는 어느 금요일 오후에 태어났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나는 짐짝처럼 떠밀려 한 위탁가정에 보내졌고, 그들은 내가 미국으로 가는 비행을 견딜 만큼 자랄 때까지 나를 맡았다. 나는 생애 첫 몇 개월을 어머니, 아버지, 십대 아들과 딸, 넷으로 이루어진 이 가족과 함께 보냈다. 입양 기록은 나를 “입양이 가능한 커다란 아기”로 묘사했다. 사회복지사는 내가 혼자 놓아두면 울고, 안아주면 웃으며, 위탁가정의 아버지와 오빠와 특히 친밀하다고 기록했다.
▶ 나의 입양 기록
생후 4개월이 됐을 때, 입양을 위해 미국으로 보내졌다. 나는 캘리포니아의 중소도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가 살던 곳은 인종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중산층 동네였다. 양부모는 일본계 미국인 3세였고, 나는 일본계 미국인 지역사회에서 힘겹게 성장했다.
내가 입양됐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아니면 모두 알고 있지만 대개 입 밖에 내지 않는 사실이랄까. 가끔 또래 아이들이 입양을 가지고 나를 놀렸다. 아이들은 보통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네 진짜 엄마는 널 원하지 않았대.”
5학년 때, 한 동네에서 자란 일본계 미국인 남자아이들의 무리가 방과 후 집으로 오는 길에 나를 괴롭히곤 했다. 그 아이들은 백주대낮의 교외 거리에서 나를 따라오면서 나이키를 신은 발로 내 등을 마구 걷어차며 “코리안, 코리안, 코리안”이라고 소리쳤다. 밤에는 집에 전화를 걸어 자동 응답기에 “퍽킹 코리안, 더티 코리안”이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입양에 대해 공공연하게 얘기하거나 가족의 화제로 입에 올리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양부모와 같은 아시아인이었기 때문에, 인종이 다른 가족에게 입양된 입양인이 흔히 겪는 낯선 사람들로부터의 이상한 시선과 질문들은 피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센트럴밸리의 작은 복숭아 농장에서 나고 자란 일가친척들은 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의 강제 수용소에 수감 당했다. 그 경험이 가져온 상처의 유산은 우리 가족과 공동체를 규정하는 측면 가운데 하나였다.
▶ 만자나르(Manzanar) 강제수용소. 2차 세계대전 동안 내 가족을 포함한 12만명을 부당하게 감금한 미국 강제수용소 중 하나다. 아래는 수용소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아이들. 1942년. (출처: US National Archives, 촬영: Dorothea Lange)
아이였을 때, 나는 우리 가족이 가게나 식당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당하던 일을 기억한다. 백인우월론자들은 우리의 친구들의 집, 일본계 미국인 지역 문화회관, 전미흑인지위향상협회(NAACP) 사무실에 화염병을 던졌다. 그 후 부모님은 예방 조치로 현관에 새로 자물쇠를 설치하고, 지역사회 행사에 동반 참석하는 일을 중단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공격당해 다칠 경우, 우리 가족에게 생길 일을 걱정했다.
시장을 보거나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모르는 사람들이 눈을 찢어 올리며 아시아인 흉내를 내거나, “칭총”이나 “니하오”라고 말하곤 했다. 내가 “진짜” 어느 나라 출신인지 묻는 사람들에서부터, 아시아 사람들은 수학을 잘 하고 운전을 못한다는 농담, 아시아 여자들은 성욕이 왕성하고 순종적일 거라는 기대에 이르기까지 미묘한 차별들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자유의 나라”라고 불리거나 말거나,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나오거나 말거나, 미국은 극히 인종차별적인 나라이다. 혐오 범죄, 유색인종에 대한 경찰의 과잉폭력, 외국인 혐오, 이슬람 증오, 인종차별적 이민정책, 전쟁도발, 레드 라이닝(인종차별을 바탕으로 빈곤층 거주 지역에만 대출·보험 등 금융 서비스의 제한을 두는 행위), 투표자 억압, 인종차별적 형사사법제도가 유색인종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노예제도, 식민주의, 대량학살, 인종차별의 제도화로 점철된 미국 역사는 대인관계에서도 명확히 드러나지만, 구조적이고 폭력적 방식으로 그 힘을 계속 발휘한다. 미국에서 젊은이로 성장하면서, 내 정체성은 퀴어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발전했고 그렇게 정치화되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의식은 그 이후에 생겼다.
‘산업’이 된 한국의 해외입양 역사를 알게 되다
나는 대학에서 아시아 미국학과에서 개설한 한국계 미국인의 역사에 대한 강좌를 수강했다. 15주간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전 처음으로 내 자신의 역사를 공부했다. 나는 한국 아이들의 입양이 역사의 일부라는 것을 배웠다. 지정학, 한국전쟁, 국가 건설, 차별, 세계화, 자본이 그것에 영향을 미쳤다. 나는 한국 아이들의 입양이 국내 복지제도의 발전을 저해하는 구조적·사회적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전쟁 이후, 입양을 위해 해외로 보내진 아기들은 대부분 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였다. 1955년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인 해리 홀트와 버사 홀트 부부는 ‘홀트해외양자회’를 세워 한국 아이들의 입양을 산업으로 만들었다.
홀트의 사업 관행에 수상한 점이 많았다는 증거는 많이 있다. 그들은 “신속하게 절차를 처리했고, 아기들을 ‘우편주문’할 수 있게 했으며, 최소한의 기준을 무시했다. 아이들로 가득 찬 전세 비행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현대판 노예선으로 보였다. 그들은 다른 기관에서 거절한 부부들도 받아주었다.” (토비아스 휘비네트, http://www.tobiashubinette.se/adoption_history.pdf) 홀트가 없었다면, 한국에서 시작해서 세계 전역의 다른 나라들로 확산된 해외입양이 아마도 지금 같은 사업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4만 달러 정도면 홀트를 통해 한국 아이를 입양할 수 있다.
▶ 한국의 해외입양은 입양기관에 의해 산업화되어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아기 수출 국가’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일다(일러스트: 두나)
1960년대와 1970년대엔 한국이 주로 여성노동에 의존하여 산업화되면서, 대개 젊은 공장 노동자들이 낳은 아기들이 해외로 입양 보내졌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포기한 이유로 가난을 지적했다. 박정희(1963~1979)와 전두환(1980~1988)의 권위주의 체제 아래 한국인들이 과잉 인구와 대중의 빈곤 속에서 허덕이고 있을 때, 가족계획과 이민이 인구를 줄이는 방책으로 사용되었다. 해외입양은 이 두 방책의 결합이었다.
이는 때마침 미국에서 해외입양 수요가 증가한 것과 맞아 떨어졌다. 미국에서 해외입양은 핵가족 단위를 추구하는 불임 중산층 부부들의 마지막 수단이 되었다. 1960년대 성혁명이 벌어지고 미국에서 여성의 권리가 증대되자, 임신중단이 합법화되고 피임기구들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다. 또 비혼모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나아지고 정부 지원이 늘어났다. 그 결과 미국 내에서 입양할 수 있는 아이들의 수는 줄어들었다.
한국으로부터 입양은 1980년대에 정점에 올랐다. 해외로 보낸 아기들은 거의 모두 미혼 여성이 낳은 아기들이었다. 한국의 수많은 입양기관 중 많은 수가 영리 활동과 부동산 투기에 뛰어든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들은 자체 조산원, 보육시설, 일시보호시설을 운영했다. 1980년대 말, 나를 포함해서 매년 6천5백 명에서 9천 명의 아기들이 입양을 위해 해외로 보내졌다.
오늘날 한국은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이자 OECD에서 출생률이 가장 낮은 나라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국 아이의 해외입양은 최근 줄어드는 추세이긴 하지만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현재 입양을 위해 가족이 포기한 아이들의 90% 이상은 미혼모가 낳은 아이들이다.
한국에 첫 발을 딛다, 첫 눈을 맞다
내가 아이였을 때는 입양을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문제로만 생각했다. 누군가 나를 낳았고 키우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나는 그 이유를 몰랐고, 그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입양인으로 나는 안정된 유년시절, 대학 교육, 마음을 써주는 가족을 가졌다. 나는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대해 생각하고 입양되기 전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으로 보였다.
양부모님은 입양되기 전의 나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고 말씀하시며, 친가족에 대해 알아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입양에 대해 물어봤을 때, 부모님은 불안감을 느끼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부모님께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고, 내가 느끼고 있는 혼란과 상실감을 부모님들이 느끼지 못하도록 애썼다.
하지만 해외입양의 역사를 배우고 나서, 나는 구조라는 렌즈를 통해 입양을 보기 시작했다. 내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생각해보기 시작했고, 그 렌즈를 통해 내가 어떻게 입양인이 되었는지 탐구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나는 내 경험을 나라는 일개인보다 더 큰 어떤 것의 일부로 볼 수 있는 도구를 가졌다.
강좌를 수강하는 동안, 나는 또 성인이 된 일부 입양인들이 한국에 돌아가서 살고 있으며,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장이라도 그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나는 입양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데 관심이 있는 다른 입양된 한국 사람을 만나는데 강한 끌림을 느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시작하고 난 뒤에도, 한국에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해져서 꼭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되어버렸다. 한국에 돌아가는 것은 만약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어떻게의 문제였다. 몇 년 동안 일을 해서 한국으로 이주할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았다.
▶ 2014년 겨울, 해외입양인을 위한 게스트하우스 뿌리의 집에 도착했다. ⓒH.S. Kim
그리고 첫눈이 내리는 2014년 겨울, 한국에 도착했다. 25년 동안 한국에서 떨어져 있었던 셈이다. 난생 처음 맞는 눈이었고, 공항 열차에서 나왔을 때 눈이 머리칼에 꽤 많이 젖어들어 깜짝 놀랐다. 나는 눈을 피하려고 우산을 샀다. 거리에서 떡볶이를 사먹고, 경복궁 역 근처에 있는 입양인을 위한 게스트하우스 <뿌리의 집>(KoRoot)으로 향했다. 남편인 김 목사님과 함께 <뿌리의 집>을 운영하시는 공 여사님이 게스트하우스 문 앞에 나와서 나를 안으로 맞아들여주셨다.
<뿌리의 집>에서는 한 달 동안 머물렀다. 주위 상황을 파악하기에 좋은 따뜻하고 환대받는 공간이었고, 그것은 한국에 도착한 이후 내가 바랄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시작점이었다. 한국에 올 때 나는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고, 친구들이나 공동체나 아무 지원 없이 고립되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하지만 <뿌리의 집>에 묵는 동안 공동숙소에서 함께 생활하는 몇 사람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그 경험을 함께 한 입양인들 사이에는 특별한 끈끈함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회복력 그리고 완벽한 고구마 조리법
한국에 돌아온 것은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내가 내린 결정 중, 나 자신에 대해서 정의할 수 있는 가장 중대한 결정이었다. 이곳에서 지난 4년 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나는 활동가 단체인 해외입양인연대(Adoptee Solidarity Korea)에 가입했고, 입양인 활동과 조직화에 참여했다. 입양인들과 공동체를 건설했고, 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방식으로 유대감을 느꼈다.
나는 불안과 깊고 어두운 우울감과 싸웠다. 나는 16개월 동안 한국어 교실에서 한국어를 배우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등록을 취소했다가, 재등록했다가, 다시 1급을 시험 봤다가,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나는 퀴어 공동체를 알게 됐고, 고구마 요리법을 완벽하게 익혔으며, 개 두 마리를 입양했다. 나는 개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내 귀에 낯설게 들리지 않을 때까지 되풀이해서 연습했다.
▶ 한강 공원에서 두 마리의 개와 함께. ⓒH.S. Kim
나는 아이들과 어른들, 할머니들, 성소수자들, 재미동포, 중국동포, 예술가들, 대학원생들, 과학자들, 아이돌 연습생들, 회사 사장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미혼모들을 위해 아기를 돌봐주었고, 우리의 투쟁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배웠다. 퀴어문화축제에서는 내가 속한 퀴어 풍물패와 함께 장구를 쳤다. 성소수자 혐오 세력이 증오의 외침을 부르짖는 한 가운데에서, 내 얼굴에는 환희와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의 감정이 교차하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마포구 새우젓 축제에서 제일 좋아하는 가수 김연자 님의 라이브 공연을 보았는데 김연자 님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나는 세 번 이사했다. 신촌의 큰 언덕 꼭대기에 있는 고시원에서, 곱등이들이 잔뜩 뛰어다니는 반지하방으로, 다시 내가 태어난 곳에서 500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합정동의 옥탑방으로.
박근혜 탄핵을 외치는 촛불 혁명 동안 매주 거리에서 수백만의 이웃들과 하나가 되었다. 사드 배치가 강행되는 소성리에 가서 마을에 포대를 세우기 위한 장비를 실은 화물트럭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분노한 어르신들과 함께 길을 막았다.
나는 새 친구들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입양인 가운데 자살한 한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입양인 공동체가 마주하는 많은 문제들에 좌절감과 슬픔을 느꼈고, 그 앞에서도 입양인들이 헌신성과 꿋꿋함을 잃지 않는 것을 보고 겸허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민주주의, 여성의 권리, LGBTQ(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퀴어)의 권리, 노동자의 권리, 경제적 불평등, 장애인 차별, 환경 문제 등에 대해 배웠다. 나는 수 세대에 걸친 투쟁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조직하고 서로에게 희망을 주는지를 보았다.
▶ 성주 소성리에서 사드 배치에 저항하는 어르신들과 함께. 나는 민주주의와 소수자의 권리, 환경 문제 등에 대해 배웠고, 투쟁에 참여하며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조직하고 서로에게 희망을 주는지 보았다. ⓒH.S. Kim
‘친엄마를 만나봤냐?’ 묻는 한국인들
나는 오랫동안 한국어를 배우려고 씨름했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내가 이 과정을 지적으로 분석해 보려고 노력하는 만큼, 내가 태어난 나라의 말을 배우는 것은 감정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영화 <블랙 팬서>에는 약초를 먹으면 선조들이 있는 장소로 가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만약 내가 그런 선조들의 장소에 간다면 과연 그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겼다. 그 사람들은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줄 알기나 할까?
한국어 독학과 어학 교실에 그 많은 시간을 들인 덕에 요즘에는 한국어를 중급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분명 한국어 원어민이 아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억양에 자신이 없었고, 내가 얼마나 잘 적응했는지 또 얼마나 “한국인”인지 입증하기 위해서는 유창하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나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은 피했다. 남들이 나를 멋대로 재단할까봐 걱정했고 나도 내 스스로를 재단했기 때문이다. 가끔 사람들은 나를 재단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내가 한국어를 구사하는 방식을 받아들게 되었다. 내가 입양인이란 사실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실수나 서툰 문법은 아무렇지 않다. 내가 말하는 방식은 내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걸 듣고 나에 대해 잘못 추측하는 낯선 이들과 비슷한 대화를 자주 반복하고 있다. 일주일에 최소 몇 번씩은 내가 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열면 “아! 한국사람 아니야? 한국인 아니에요?”나 “아, 외국인이에요?” 같은 말을 듣고 있다. “중국?”, “일본?”, “대만?”이라고 다른 아시아 나라들의 이름을 막 갖다 대는 사람들도 있다. “아니요, 저는 한국인입니다.” 나는 대답한다. “저는 입양인인데 여기에서 태어나서 미국에서 컸어요.”
▶ 한국어를 배우러 어학 교실에 다니던 시절.(위) 친구들과 함께(아래). ⓒH.S. Kim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거나 모르는 사람과 대화할 때, 보통 첫 번째로 묻는 질문들 중 하나는 친엄마를 만나봤느냐는 것이다. 어떤 때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친엄마를 안을 때 마음이 어땠어요?”라든가 “울었나요?” 같은 질문을 듣는다. 한번은 “‘엄마’라고 부를 때 마음이 어땠어요?”라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다른 때는 아니라고, 엄마를 찾지 못했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다른 질문을 듣는다. “아, 미안해요, 엄마가 참 안 됐네요.” 혹은 “왜 엄마를 찾지 않았나요?”, “왜 엄마를 못 찾았나요?” 그리고 ”엄마를 찾으러 방송에 나가봤나요?” 하는.
나는 그때그때 나누고 싶은 대화의 종류에 따라 다르게 대답한다. 하지만 안경을 써보거나, 꼬치 오뎅을 먹고 있거나, 친구들과 함께 볼일을 보고 있을 때 가끔 별로 내키지 않는 대화를 피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나는 자신에 관한 얘기를 잘 안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흔히 입양인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에 근거한 매우 사적인 질문들이다.
모든 입양인들이 가족을 찾거나, 찾고 싶어 하거나,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는 가족을 찾았지만 가족이 그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거나, 기록이 소실되거나 잘못됐거나, 불완전하거나 다른 사람과 바뀌거나 하는 경우도 있다. 입양기관들은 완전하고 정확한 기록을 갖고 있지 않다. 서류에 정보가 있어도, 개인정보 보호법 때문에 입양인이 서류 전체를 볼 수 없게 되어 있다. 친가족을 찾는 것은 힘들고 좌절감을 주는 과정일 수 있다. 친부모를 찾는 입양인 가운데 성공하는 것은 겨우 5퍼센트뿐이다.
친가족을 찾아낸 입양인들에게 이 여정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보통 입양인과 친가족 사이에는 커다란 언어적, 문화적 차이가 존재하며 친가족과의 관계를 맺는 것은 복잡한 일일 수 있다. 그 과정엔 기쁨과 치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간혹 상처가 더 크게 벌어지거나 새로운 상처가 생길 수도 있다.
친어머니와의 만남
나는 3년 전에 한국 중앙입양원(Korea Adoption Services)에서 가족 찾기를 시작했다. 중앙입양원은 입양인의 친가족 찾기를 주관하는 보건복지부 산하 정부기관이다. 중앙입양원의 내 서류에 있는 어머니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는 정확했다. 하지만 본인의 동의가 없는 한 어머니에 관한 어떤 정보도 볼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중앙입양원은 어머니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전보를 보냈지만 답장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나는 전보 영수증을 달라고 요구했다. 중앙입양원은 영수증의 송장번호를 검게 색칠해서 줬지만, 나는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길에 그것을 창가에 들고 빛을 비추어 보았다. 가게들이 스쳐 지나가고 사람들이 각기 자기 갈 곳으로 서둘러 가는 동안, 검은 잉크 너머 어렴풋이 송장번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송장번호를 가지고 나는 어머니의 주소를 찾아낼 수 있었다. 내가 그분의 아파트를 찾아갔을 때는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아파트 입구는 자전거와 유모차, 아이들이 타는 노란 플라스틱 차들로 번잡했다. 나는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그분이 대답했다.
나는 그분도 나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몇 주 전과 몇 달 전에 홀트와 중앙입양원에 나에 대해 문의를 해놓았지만, 답변을 듣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전보 영수증이 없었다면, 우리는 서로 찾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내가 그동안 들어온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서류들에 대한 얘기들, 중앙입양원과 입양기관들이 친가족을 찾는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는 얘기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몹시 화가 났다.
몇몇 사람들은 내가 친가족을 찾은 것은 행운이라고 말한다. 친가족을 찾을 수 있는 5퍼센트에 속한다는 의미에서 내가 드문 경우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친가족을 찾은 입양인에게 ‘운이 좋다’고 말하는 것은, 출생지를 알아내고 출생기록을 열람할 수 있는 것이 많은 입양인들이 누리지 못하고 있는 기본적인 인권이라는 사실을 지우는 것이다. 나는 가족 찾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특권을 누렸다. 하지만 가족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 정말로 특권일 수는 없다.
다시 만난 이후 어머니와 나는 정기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밥을 함께 먹고 쇼핑을 함께 다니고, 딸기빙수를 같이 먹었다. 우리는 커다란 언어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어머니는 나에 관해 남편에게 말했고, 나는 그분도 만나보았다. 그분은 자신의 숙모도 사촌누이를 입양 보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사촌누이가 성인이 된 이후에 다시 만났다. 그녀는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다.
▶ 어머니와 만나 함께 먹은 딸기빙수. ⓒH.S. Kim
나는 전일제 한국어 교실에 등록했다. 내 한국인 가족과 자유롭게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고 관계를 발전시키기를 바랐다.
어머니는 나한테 동생들이 둘, 남동생과 여동생이 하나씩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나는 동생들을 만나지 못했고, 어머니와 남편 분은 그들에게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분들은 가족 중에 입양인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동생들이 결혼하기 어려워 질 거라고 생각했다. 대신 나는 동생들의 공개 소셜 미디어 계정을 익명으로 팔로우했다. 그래서 조부모님들, 사촌들, 이모들, 삼촌들, 외갓집과 우리 가족의 고향 사진들을 볼 수 있었다. 컴퓨터 화면을 통해 내 가족에 대해 배우는 것은 때때로 이상하고 불공평한 기분이 들었다. 꼭 내가 속하지 않은 한국인 가족에 대한 TV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처럼.
몇 달이 지나자, 어머니와 연락은 점점 뜨문뜨문해졌다. 카카오톡으로 문자를 보내면 며칠 뒤에야 답장이 오곤 했다. 결국 서로를 찾고 나서 1년 만에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다. 우리가 만나는 시간은 한편으로는 기쁘고 만족스러웠지만, 때로는 내게도 복잡한 감정이 들게 했고, 다 이해하긴 어렵지만 어머니에게도 큰 도전이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아직 결혼하지 않고 혼자 아이를 기르는 것과 입양,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커다란 낙인이 되는 곳이라는 사실에 나는 좌절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 사회와 가족이 나와 나의 어머니, 나와 동행하는 존재들인 미혼모들과 입양인들을 비롯해 사회적으로 수용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는 날이 곧 오리라고 나는 낙관한다.
더 나은, 더 포용력 있는 세상이 올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 해외입양인들은 한국에 돌아오고 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돌아온 사람들은 우리 공동체의 선구적인 개척자들이었다. 그들은 엄청난 역경을 물리치며 공동체를 건설하고, 한국의 법과 정책을 바꾸고, 조직을 만들었다. 또한 뒤에 온 입양인들이 한국에서 계속 살며 일하며 투쟁할 수 있게끔 자원을 쓸 수 있도록 마련해 놓았다.
조직하고 투쟁하고 단순히 삶을 살아가는 와중에도 우리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한국인이 된다는 건 이렇다, 입양된 한국인은 이렇다 라고 하는 서사에 계속 도전하고 있다. 우리는 불쌍한 희생자도, 운 좋은 문화 외교관도, 혼란스러워하는 아이들도 아니다. 우리는 다양한 삶을 살면서 더 나은, 더 포용성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폭넓고 강한 생명력을 가진 공동체이다.
여러 면에서 입양된 한국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비입양 한국인들과 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우리는 서로 그렇게 다르지 않다. 입양인이든 비입양인이든 한국인들은 사회에서 누구를 존중하고 누구를 배제할지, 누구를 벌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동일한 힘들―즉 가부장제, 여성혐오, 성소수자 혐오, 트랜스젠더 혐오, 인종차별, 자본주의, 계급차별, 장애인 차별, 민족주의, 군사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 해외입양과 그것을 탄생시키고 전파시킨 힘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가 매우 다양한 정체성과 경험들을 가진 입양된 한국인들과 비입양 한국인들로서 함께 투쟁하고 함께 살아갈 때, 나는 우리에게 필요한 세상을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고 있다는 희망을 느낀다.
페미니스트이며 활동가인 아룬타이 로이의 말처럼 ―
“다른 세계는 가능할 뿐 아니라 이미 오는 중이다. 조용한 날이면 나는 그 세계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
(번역: 권호영)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A Story of Overcoming Prejudices about Korean Adoptees
Listening to the experiences of overseas adoptee women (1): My return to Korea
H.S. Kim
Editor’s note: South Korea has a long history of sending its children abroad for adoption. The issue of overseas adoption is connected to issues of women’s and children rights, poverty and discrimination, and race and migration. By listening to the voices of women who grew up in other societies and then returned to the country of their birth, Ilda hopes to hear their experiences and the messages they hold for Korean society. This series is supported by the Korea Press Foundation’s Press Promotion Fund.
A difficult childhood in a Japanese-American community
According to the birth records in my adoption file, I was born in Mapo-gu, Seoul at the tail end of the 1980s, on a Friday afternoon at the start of a very cold winter. As soon as I came into this world, I was bundled away and delivered to a foster family who looked after me until I was old enough to survive an international flight to the United States. I spent the first months of my life with this foster family of four--mother, father, teenage son and daughter. My adoption record describes me as an “adoptable big-sized baby.” The social worker reported that I cried when left alone, giggled when held, and was especially close to my foster father and brother.
▶ My adoption paperwork
When I was four months old, I was sent to the United States for adoption. I spent my childhood in California in a medium-sized city in an ethnically diverse middle class neighborhood. My adoptive parents are third-generation Japanese Americans, and I grew up enmeshed in the local Japanese American community.
My adoption was an open secret, or maybe a well-known but mostly unspoken fact. From time to time I was teased by my peers about being adopted, usually comments like, “My mom says your real mom didn’t want you.” In fifth grade, a group of Japanese American boys I had grown up with would harass me as I walked home after school. Following me down my sunny suburban street, they kicked rocks at my back with their Nikes and chanted “Korean, Korean, Korean.” At night, they would call my house and left messages on my answering machine, “Fucking Korean, dirty Korean.” But for the most part, my adoption was not talked about, either publicly or in my family. And because I was Asian like my adoptive parents, I avoided the stares and questions from strangers that many transracial adoptees experience.
However, I was conscious of being Asian American from a young age. My extended family, born and raised on a small peach farm in the California Central Valley, had been incarcerated in American concentration camps during WWII, and the traumatic legacy of that experience was one of the defining aspects of my family and community.
▶ Top: Manzanar Concentration Camp, one of ten US concentration camps where 120,000 Japanese Americans, including my family, were unjustly incarcerated during WWII; Bottom: children waiting for the bus to take them to such a camp in 1942. (Source: US National Archives; Photographer: Dorothea Lange)
https://www.flickr.com/photos/usnationalarchives/3679508964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anzanar_Flag.jpg
As a child, I remember my family being denied entry into stores and service at restaurants. White supremacists firebombed our friends’ homes, a Japanese American community center, and the office of the 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NAACP). After that, as a precaution, my parents installed a deadbolt on our front door and stopped attending community events together. They were worried about what would happen to our family if they were both hurt in an attack.
Strangers would pull their eyes back in an Asian stereotype or say “ching chong” or “ni hao” to me as I packed my groceries at the store, or ate dinner at my college cafeteria. There were a variety of microaggressions, from people asking where I was “really” from to jokes about Asians being good at math and bad at driving, to expectations that Asian women are hypersexual and submissive.
Regardless of being called the “land of the free” and having our first Black president, the United States is a deeply racist country. Hate crimes, police brutality against Black and Brown people, xenophobia, Islamophobia, racist immigration policies, warmongering, redlining, voter suppression, and a racist criminal justice system affect the lives of people of color on a daily basis. The United States’ history of slavery, colonialism, genocide, and institutionalized racism manifests itself in both interpersonal relationships and continues to exert its power in structural, violent ways. Growing up in the United States as a young person, my identity developed and I became politicized as a queer Asian American. My consciousness as a Korean person came later.
Learning about the history of Korean adoption as an ‘industry’
In college, I took an Asian American studies course on Korean American history. On Tuesday and Thursday mornings for fifteen weeks, I studied my own history for the first time. I learned about adoption from South Korea as a part of history, influenced by geopolitics, the Korean War, nation-building, discrimination, globalization, and capital. I discovered that adoption out of South Korea is a structural, societal issue that hindered the development of a domestic welfare system.
After the Korean War, most babies sent abroad for adoption were the mixed-race children of US GIs and Korean women. In 1955, white American Christian fundamentalists Harry and Bertha Holt founded Holt International adoption agency, which industrialized adoption from South Korea.
It is well-documented that Holt’s business practices were questionable--they conducted “speedy procedures, made ‘mail order’ babies possible, disregarded minimum standards, chartered whole flights filled up with children which were perceived by many as modern slave ships, and accepted couples who had been rejected by other agencies.” (Tobias Hübinette, “Korean adoption history” http://www.tobiashubinette.se/adoption_history.pdf)
Without Holt, international adoption starting from South Korea and spreading to other countries around the world would probably not have become the business that it is. Even today, it costs around $40,000 USD to adopt a Korean child through Holt.
▶ Through its adoption agencies, overseas adoption in South Korea became an industry that spread through the world, and the country was criticized for “exporting babies.” © Ilda (Artist: Doona)
As South Korea industrialized in the 1960s and 70s in large part through reliance on female labor, most babies sent abroad for adoption were born to young factory workers. Many named poverty as the reason for giving up their child. As South Korea struggled with overpopulation and mass poverty during the authoritarian regimes of Park Chung Hee (1963-79) and Chun Doo Hwan (1980-88), both family planning and emigration were used to decrease the population. International adoption was a combination of both of these tactics.
This coincided with an increased demand for international adoption in the United States. In the US, international adoption had become a last resort for infertile middle-class couples who sought to create a nuclear family unit. After the the strengthening of women’s rights in the US after the 1960s sexual revolution, abortion was legalized, and there was increased access to contraceptives and growing social tolerance and government support for single mothers. As a result, fewer children were available for adoption domestically.
Adoption from South Korea peaked in the 1980s, and almost all of the babies sent overseas were born to unmarried women. It was around this time too that many of the numerous agencies in South Korea participated in profit-making activities and real estate investments, as well as ran their own delivery clinics, foster homes and temporary institutions. In the late 1980s, 6500 to 9000 babies were being sent abroad each year for adoption, including me.
Today, although South Korea boasts the 11th largest economy in the world and the lowest fertility rate in the OECD, international adoption out of Korea continues, albeit slower in recent years. Over 90 percent of children given up today for adoption are born to unwed mothers.
Setting foot in Korea – and being snowed on – for the first time
As a child, I had considered my adoption a personal, individual matter--someone had given birth to me, and had decided not to raise me. I didn’t know why, and I tried not to think about it too much. As an adoptee, I had a stable childhood, a college education, and a family that cared about me. I thought that I should be grateful for what I had, and thinking about Korea and my life before adoption seemed pointless. My adoptive parents had told me they knew nothing about who I was before I was adopted, and forbid me from searching for any birth family. I think that they felt threatened when I asked questions about my adoption, so I didn’t. I didn’t want to hurt them, and I tried to protect them from the confusion and loss I was feeling.
After learning about the history of international adoption though, I began to view adoption through a structural lens, and started to think about where my story was located historically. Through this lens, I started to piece together how I become an adoptee. For the first time, I had the tools to see my experience as part of something larger than just me.
During my studies I also learned that some adoptees had returned to South Korea as adults to live, and were working to change Korean society. Immediately, I wanted to join them. I felt a strong draw to meet other adopted Koreans who were interested in taking a critical look at the adoption system.
As I graduated from college and started working, the pull to move to Korea didn’t go away. If anything, it grew stronger, until it became an inevitability. It was a matter of when and how--not if--I was to return to Korea. After working for a few years, I had saved enough money for the move.
▶ I arrived at KoRoot, a guesthouse for overseas adoptees, in the winter of 2014. © H.S. Kim
I arrived on the first snow in winter 2014. I had been away from Korea for twenty-five years. It was my first time in falling snow, and when I emerged from the airport train I was surprised at how wet it made my hair. I bought an umbrella to keep it off of me. Exhausted, I ate ddukbokki on the street and made my way to KoRoot, a guesthouse for adoptees located near Gyeongbokgung Station. Mrs. Kong, who runs KoRoot with her husband Pastor Kim, greeted me at the door of the guesthouse and welcomed me inside.
I stayed at KoRoot for a month. A warm, welcoming space for me to get my bearings, it was the softest landing I could have asked for. Moving to Korea, I knew no one and my biggest fear was being isolated, without friends, community, or support. Staying at KoRoot however, I became close with some of the others who were living in the communal dorm with me. I think there is a special bond between adoptees who return to Korea around the same time and navigate the experience together.
Resilience and how to cook the perfect sweet potato
Returning to Korea has been the most defining decision I have made in my life so far. There have been many ups and downs during my last four years here. I joined the activist organization Adoptee Solidarity Korea (ASK) and became involved in adoptee activism and organizing. I built community with adoptees and felt kinship in a way I hadn’t experienced before.
I struggled with anxiety and a deep, dark depression. I endeavored through Korean language school for sixteen months, failed, unenrolled, re-enrolled, tested back into level 1, and did it all over again. I found queer community, perfected my sweet potato-cooking skills, and adopted two dogs. I practiced saying “I love you” to them over and over, until the sentence no longer sounded strange to my ears.
▶ At Han River Park with my two adopted dogs. © H.S. Kim
I taught English to children and adults, grandmothers, queer folks, Korean American folks, Korean Chinese folks, artists, grad students, scientists, Kpop trainees, and company presidents. I babysat for unwed moms and learned how our struggles are intimately connected. I drummed with my queer pungmul group at the Queer Festival in the midst of anti-queer groups screaming hatred, and tears of joy and heartbreak rolled down my face.
I saw my favorite singer Kim Yeon Ja perform live at the Mapo-gu Fermented Shrimp Festival and she couldn’t have been any more perfect. I moved house three times--from a goshiwon at the top of a giant hill in Sinchon to a half-basement filled with bouncing spider crickets, to a rooftop room in Hapjeong, five hundred meters from where I was born.
I joined millions of my neighbors on the streets every weekend during the Candlelight Revolution. I traveled to Soseongri and blocked the roads with fierce elders to stop supply trucks from bringing equipment to build weapons into their town.
I attended weddings of new friends and the funeral of one of our own we lost to suicide. I was frustrated and heartbroken by the many issues confronting the adoptee community, and humbled by the dedication and resilience adoptees hold in the face of it. I learned about struggles for democracy, women’s rights, LGBTQ rights, workers’ rights, economic justice, disability justice, and environmental justice and I saw how people have organized and uplifted each other in struggle for generations.
▶ With elderly protesters in Soseong-ri, Seongju, demonstrating against THAAD deployment. While participating in the struggle, I learned about democracy, minority rights, and environmental problems, and saw how the protesters organized and gave each other hope. ⓒH.S. Kim
Koreans who ask, “Have you met your birth mom?”
I have struggled with learning Korean for a long time and still do. As much as I have tried to intellectualize the process, it has been undeniably emotional for me to learn to speak the language of the place I came from. In the recent movie Black Panther, there’s an herb that, if eaten, transports you to your ancestral plane where your ancestors are waiting to speak with you. After I saw the movie, I kept wondering whether or not I’d be able to communicate with my ancestors if I ever go to my ancestral plane. Would they even know to meet me there?
These days, after countless hours of self-study and language school, I can now speak Korean at an intermediate level. However, I am obviously not a native speaker, nor will I ever be. I used to feel insecure about my accent, and thought I needed to speak fluently in order to prove how well-adjusted and “Korean” I was. I avoided speaking in groups or with strangers because I worried they would judge me, and because I judged myself. Sometimes people do judge me, but over time, I’ve come to accept my style of Korean--I’m okay with my mistakes and clumsy grammar, much like I’m okay with being an adoptee. How I speak is a reflection of who I am and where I have come from.
I do have the same conversation with strangers though, who often make assumptions about me based on the way I speak. At least a few times a week, I’ll open my mouth to say something and the response will be “Oh! You’re not Korean?” or “Oh, you’re a foreigner?” or they’ll simply start naming Asian countries: “China?” “Japan?” “Taiwan?”
“No, I am Korean,” I reply. “I’m an adoptee. I was born here and grew up in the United States.”
▶ Top: When I took Korean language class; Bottom: With my friends. © H.S. Kim
Usually when I meet new people or talk to strangers, one of the first things they ask me is whether or not I’ve met my mom. Sometimes I’ll say yes, and get questions like “What did it feel like to hold her?” or “Did you cry?” Once I got “What did it feel like to call her ‘mom’?”
Other times I’ll say no, I haven’t found my mom, and I’ll get other responses. Oh, I’m so sorry, your poor mom. Why haven’t you looked for her? Why can’t you find her? Have you gone on TV to find her?
I answer differently depending on the kind of conversation I feel like having at that moment, but sometimes I can’t get around having a conversation I don’t particularly want to have as I’m trying on glasses, eating fish cake on a stick, or tagging along with a friend running errands. I am a private person, and these are very personal questions that are often based on assumptions people have about adoptees.
Not all adoptees search, want to search, or are able to search for family. Some people have searched, but found their family doesn’t want to meet, or that their records were lost, falsified, incomplete, or switched with someone else’s. Adoption agencies have not kept complete and accurate records, and even if there is information in a file, adoptees are not allowed to see the complete file because of privacy laws. It can be a difficult, frustrating process--only about 5 percent of adoptees who search for birth family are successful.
For adoptees who do locate birth family, the journey is just starting. There are often huge language and cultural differences, and navigating a relationship with birth family can be complicated. There can be joy and healing, but sometimes wounds can be torn open or created.
Meeting my mother
I started my search at Korea Adoption Services (KAS) over three years ago. KAS is the government agency under the Ministry of Health and Welfare that handles birth family search. My mother’s name and ID number in my file at KAS were accurate, but I was told that I wasn’t allowed to see any information about her without her consent.
KAS sent a telegram to my mother to get her consent, but told me they had not received a reply. I asked for a copy of the telegram receipt. KAS had blackened the tracking number on the receipt, but on the bus ride home I held the paper up to the window. As stores zipped by and people hurried to their destinations, I could faintly see the tracking number through the black ink.
Through that tracking number I was able to find her address. When I showed up at her apartment, it was pouring rain. The entrance to her building was crowded with bikes, baby strollers, and a child-size yellow plastic car. I climbed the stairs to the second floor and knocked on her door. She answered.
I learned that she had been looking for me too. She had contacted both Holt and KAS asking about me in the weeks and months before, but hadn’t received a response back. If not for that telegram receipt, we may not have been able to locate each other. When I realized that, I couldn’t help but think of all the other stories I’ve heard about incomplete and inaccurate files, and about KAS and adoption agencies mishandling birth family search cases. I was so angry.
Some people say that I’m lucky to have found birth family. In the sense that I’m part of that 5 percent of adoptees who are able to find birth family, I know I am rare. But to say that adoptees are lucky erases the fact that knowing where you come from, and having access to your birth record is a human right that has been denied to many adopted people. I am privileged that I was able to search successfully, but a successful search shouldn’t actually be a privilege.
After we were reunited, my mother and I started to meet regularly. We shared meals, shopping, and strawberry shaved ice while trying to get to know each other despite our significant language barrier. She told her husband about me, and I met him too. He said that his aunt had given his cousin up for adoption too. They had been reunited when she was an adult. She lives in Los Angeles.
▶ The strawberry shaved ice dessert I ate with my mother. © H.S. Kim
I enrolled in a full-time Korean language class because I wanted to be able to speak freely with my Korean family. I hoped we could learn more about each other and develop a relationship.
My mother told me I have two siblings, a brother and a sister. I have never met them and my mother and her husband don’t want to tell them about me. They think it will make it hard for my siblings to get married if people know there is an adoptee in the family. Instead, I follow my siblings anonymously on their public social media accounts, and have been able to see photos of my grandparents, cousins, aunts, uncles, ancestral home, and the town our family is from. It sometimes feels weird and one-sided to learn about my family through a computer screen, like I’m watching a TV show about a Korean family that I’m not a part of.
Over the months, contact with my mother became less and less frequent and it would take days to get a response to my Kakao chat messages. We eventually fell out of communication a year after we found each other. Our time together, while joyous and fulfilling on one hand, was at times complicated for me and challenging for her in a way that I don’t fully understand.
I feel frustrated that our society is still at a place where single and unwed motherhood, adoption, and women's sexuality are so stigmatized. But I am hopeful that in time, social and family acceptance will expand to include everyone that struggles with acceptance, including me, my mother, and our fellow single moms and adoptees.
A better, more inclusive society is coming
Adoptees have been returning to South Korea for the past thirty years. Those who returned in the 1990s and 2000s were the trailblazing pioneers of our community, who pushed back against overwhelming odds to create community, change laws and policies, build organizations, and open up access to the resources that make it possible for returned adoptees to continue to live, work, and fight in South Korea. As we organize, struggle, and simply live our lives, we continue to challenge the narrative of what it means to be Korean and what it means to be an adopted Korean. We’re not pitiful victims, lucky cultural ambassadors, or lost children. We’re a diverse, incredibly resilient community of people living our varied lives and working to create a better, more inclusive society.
In many ways, adopted Koreans have more in common with non-adopted Koreans than most people acknowledge. We are not all that different from each other. Koreans, adopted and non-adopted, were and continue to be affected by the same forces that determine who is valued, who is excluded, and who deserves to be punished in society today--patriarchy, misogyny, homophobia, transphobia, racism, capitalism, classism, ableism, nationalism, militarism. Transnational adoption and the forces that birthed and propagated it continue to affect all of us. As we continue to struggle together and live side by side as adopted Koreans and non-adopted Koreans with a vast range of identities and experiences, I feel hopeful that together we are creating the kind of world that we need. In the words of feminist and activist Arundhati Roy--
Another world is not only possible, she is on her way. On a quiet day, I can hear her breathing.
English-language blog of ILDA: South Korean Feminist Journal http://ildaro.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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