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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은 강력한 이성의 영역이자 관계의 정치
케어의 윤리에 주목하는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 오카노 야요
일본의 페미니스트이자 정치학자인 오카노 야요 씨(도지샤대학 대학원 글로벌 스터디즈과 교수)가 최근 ‘혈연을 뛰어넘는 가족의 모습’과 ‘사회에서 돌봄을 맡는다는 것’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정치학자들이 절대 다루지 않았던 ‘관계’의 정치
<페미니즘 정치학>(미스즈쇼보) 등의 저서를 펴내고 ‘정치학’과 ‘헌법’에 대해 이야기해 온 오카노 씨는 논리정연하게 정책에 관한 언어를 엮어내는 사람으로 대중에게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지난 1월에는 페미니스트 상담가 가노 기요미 씨의 저서 <나로 사는 지혜-여든의 페미니스트 카운슬러가 당신에게>(산이치쇼보)에서 저자와 대담하면서 어머니와의 관계,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 등을 적나라하게 밝혔다.
▶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 오카노 야요 도지샤대학 대학원 글로벌 스터디즈과 교수 ⓒ촬영: 다니구치 노리코
서양정치철학사를 전공한 오카노 씨는 한나 아렌트 연구자이기도 하다.
“그 사회에서 가장 차별받는 정체성을 갖고 싸워라, 아렌트의 이 말이 폐부를 찔렀어요. 자이니치(재일조선인), 천민 부락 문제와 유대인 문제, 그리고 동성애자 차별…. ‘출신이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으면 무사통과’라는 것은 자기가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렇게 만들고 있는 정치를 비판한 것이 한나 아렌트였고, 깊이 공감했습니다.”
차별을 받는 사람이 노력을 해야만 하는 구조를 만드는 정치에 문제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 아렌트는 공사이원론을 지적했습니다. ‘공적’ 세계는 정치 언어에 의한 세계, ‘사적’ 세계는 폭력에 의한 지배의 세계라고. 하지만 그동안 정치가 아니라고 여겨지던 ‘사적’ 세계가 세대를 뛰어넘어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정치학자가 절대 다루지 않았던 부모와 자녀, 엄마와의 관계, 혹은 임신중단에 대해 고민하는 여성들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파트너와의 관계나 가족과의 관계 등등. 이런 고민을 하다 보니, 제가 공부해온 ‘공적’인 정치 세계가 굉장히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양육이 본능이라고? 이성적이지 않으면 양육할 수 없다
정치학을 하되, 정치학을 다시 사고해야 한다고 생각한 오카노 야요 씨는 ‘돌봄의 윤리’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기보다 압도적으로 힘이 약한 사람, 어린이나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 세상에는 반드시 있어요. 힘이 약한 어린 아이가 혼자서 살아갈 수 있게 되기까지는 타인의 엄청난 시간과 수고가 드는데, 그 역할을 누가 맡는가. 역사적으로 육아를 하는 사람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차별 당하고 있어요. 아이를 낳는 여자들이 육아를 담당하게 되죠. 그리고 여성은 이성이 없다고 여겨져 왔습니다. 정치철학의 언어로 말하면 사적이고 이성적이지 않은, 본능의 세계라는 자리매김. 이성적이지 않아도 양육을 할 수 있다고들 생각하죠.”
역사책들을 펼쳐보면 정말 그런 표현이 속속 등장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돌봄이나 육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굉장히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다음 단계를 밟고 상대를 배려하면서 움직여요. 돌봄의 과정에선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어린 아이는 쑥쑥 자라 변화하죠. 사실 이 관계야말로 인간 사회의 소중한 정치 행위가 아닐까요.”
오카노 씨는 돌봄을 하는 사람들이 더 이성적일 뿐 아니라 윤리에 대해 훨씬 많이 고민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원래 자기보다 약한 존재에 대해서는 폭력적이 됩니다. 하지만 엄마들은 자녀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기 위해 엄청나게 자제해요. 그 행위에는 ‘상처받기 쉬운 자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윤리가 작동하고 있어요.”
▶ 오카노 야요 씨는 한나 아렌트 연구자이기도 하다. 아렌트는 그 사회에서 가장 차별받는 정체성을 갖고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지 출처: EBS 지식채널e
돌봄, 약자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윤리
오카노 씨는 프랑스에서 ‘케어(돌봄)의 윤리’를 연구하는 페미니스트 그룹을 만나기 위해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프랑스는 철저하게 ‘이성 제일주의’ 사회. 여성이든 남성이든 이성은 하나, 인간은 하나, 성차도 인종도 뛰어넘어 하나라는 이념이 있다고. 사회가 책임을 지고 아이를 키우는 것이 당연한 일로 인식된다. 세살까지는 엄마가 돌봐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도 없다.
“가장 놀란 건, 보육사들이 편해 보이는 거예요. 바닥에서 뒹굴거리면서 편안하게 아이를 어르고 달래요, 자신의 허리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그리고 오후 5시가 되면 다들 퇴근해요. 부모들도 그때까지는 퇴근해서 아이를 데리러 올 수 있죠. 평소에도 갈아입을 옷만 들고 와 아이를 맡기면, 다른 건 특별히 할 게 없어요.”
그런 육아 현실도 볼 수 있었으니, 파리 체류는 오카노 씨의 철학에 굉장히 시사하는 바 컸다.
“저는 사회에서 어떻게 새로운 인간을 키울까에 관심이 있어요. 정치학이 빛을 비춘 적 없고, 일본의 페미니즘 역시 깊이 파고들어 논의하지 않았던, 다음 세대에 대한 ‘돌봄의 윤리’와 ‘의존’-거기에는 ‘갈등’과 ‘모성’의 이슈도 얽혀있겠죠. 그것이야말로 페미니스트가 고민해야 할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 <일다>와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에서 제공한 기사입니다. 오모리 준코님이 작성하고, 고주영님이 번역하였습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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