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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구 앞의 여성’의 생명과 권리를 보장하라
광화문 광장을 채운 ‘낙태죄 폐지’ 집회의 다양한 목소리들
“낙태죄를 폐지 안 하면 페미떼가 나온다. 폐지해!” 무서운 말처럼 들리지만 오히려 흥겹게 이 노래를 함께 부르는 페미니스트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였다. 쾌청한 하늘과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씨에 어울리게 한국성폭력상담소, 민주노총, 트렌스젠더인권단체 조각보, 장애여성공감 등 다양한 분야의 단체와 모임 명이 적힌 색색의 깃발들도 날리고 있었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소원 사건 결정을 앞두고, ‘모두를 위한 낙태죄폐지 공동행동’ 주관으로 7월 7일(토) 오후 4시부터 열린 낙태죄 폐지 집회엔 약 5천명(경찰 추산 1천5백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무대 앞을 차곡차곡 메우기 시작한 사람들의 손에는 낙태죄 폐지와 관련하여 다양한 목소리를 담은 피켓이 들려있었다.
▶ ‘낙태죄 폐지’ 집회 현장에서 주최 측이 배포한 피켓 ⓒ일다(박주연)
참여자들의 발언과 해외에서 온 연대 발언 영상, 축하 공연과 행진으로 진행된 이번 집회에선 다양한 경험을 가진 여성들이 왜 낙태죄가 폐지되어야 하는지 목소리를 냈다. ‘낙태죄 폐지’ 요구가 단순히 법 조항을 삭제하는 의미 이상이라는 걸 알려주는 소중한 메시지들을 몇 가지 꼽아보았다.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학교에서 배운 건?
인공 임신중절수술을 해봤다고 밝힌 가온누리씨는 “저의 낙태는 전부 첫 아이를 낳고 나서 이루어졌습니다” 라고 말했다. “첫 번째는 첫 아이를 출산한 후 100일 만에, 두 번째는 첫 아이 출산 후 1년 만에 이뤄졌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임신 주기에 대해 배웠습니다. 학교는 출산 후 100일 정도는 임신에서 안전하다고 가르쳤고, 또 월경 후 1주일 정도는 임신에서 안전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르침은 제 몸과는 맞지 않는 엉터리 지식일 뿐이었습니다.”
출산 이후 100일 동안 여성의 몸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어떻게 몸이 회복되는지 그 과정에 대해 배운 적이 있던가? 자연분만을 한 경우와 제왕절개수술을 한 경우엔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기간 동안 섹스를 해도 임신이 안 된다’는 식의 임신 주기와 관련된 정보는 ‘심지어 정확하지 않더라도’ 어쨌든 제공된다. 가온누리씨의 발언은 또한 이러한 교육이 ‘누구에게, 왜, 초점이 맞춰져 있는지’ 생각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경희대에서 페미니즘을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밝힌 이랑씨는 “저는 공교육에서 그려진 대로 낙태를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라고 고백했다. “그건 낙태 비디오 때문입니다. 이 비디오가 가짜라는 거 아시죠? 저는 이 비디오가 가짜라는 것도, 낙태는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대학에 와서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고 낙태죄가 있음으로 인해 낙태를 고민하는 여성들이 죄책감을 가진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 7월 7일 토요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낙태죄 폐지’ 집회 현장 ⓒ일다(박주연)
학교 성교육이 사실상 ‘정절교육’에 가까우며, 제대로 된 피임을 알려주지 않고, ‘낙태는 생명을 죽이는 것’이라는 죄책감을 주입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여성운동계는 지속적으로 비판해 왔다. 하지만 아직도 적절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 않다. 이랑씨의 표현대로 “운 좋게 페미니스트가 된 경우”가 아니고서야 모두가 응당 받아야 할 성교육을 제대로 받고 있지 못한 이 현실은 매우 문제적이지 않을 수 없다.
‘성교는 하되 책임지지 않는 사람’은 누구인가!
장애여성공감 진유선 활동가는 “국가는 생산적이지 않은 인구를 관리하고 보호한다는 이유로 정상/비정상을 판별했고, 정상의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성과 재생산 권리는 통제되어 왔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전까지 장애여성인 ‘너는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던 메시지는 의료기술이 발전함에 따라서 ‘이제 장애가 없는 아이를 낳을 수 있으니 안심하고 노력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국가의 인구정책과 필요에 따라 낙태를 단속하고, 아이 낳기를 강요하며,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국가가 여성의 몸을 인구정책의 도구로 보고 있다면, 남성중심의 사회는 여성의 몸을 욕망의 도구로 보고 있기도 하다.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의 고진달래 활동가가 대독한 발언에선 성구매 남성들로부터 ‘피임하지 않는 성관계’를 강요당하는 여성들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성구매 남성들은 성관계를 하다가 못 싸겠다 싶으면 콘돔을 뺍니다. 성관계는 같이 하지만 피임은 언제나 여성들의 몫입니다. 초이스가 되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고, 빈속에 술을 마시고, 그런 몸으로 여성들은 피임을 위해 약을 복용합니다. 그마저도 술과 숙취와 불규칙적인 생활 때문에 챙겨 먹기도 힘듭니다. 임플라논 등 장기적인 피임 방법을 찾았지만, 위생적이지 못한 환경에서 행해지는 성관계로 인해 질염, 골반염 등을 달고 살기 때문에 안전하지만은 않습니다.”
심지어 “‘부인을 7번 낙태시켰어, 이 형이 그렇게 힘이 좋아. 했다 하면 다 임신이야’ 이런 말들을 농담으로 하며, 남성연대 속에서 여성의 몸은 소모되고 있습니다” 라고 덧붙였다.
고진달래 활동가는 “상사나 선임이 남성 후배들을 이끌고 룸살롱을 찾는 ‘알탕 카르텔’이 조직에서 힘을 발휘하는 사회에서 성관계는 개인들만의 것이라기보다 남성성 역할 수행과 그로 인한 사회적 지위 획득 등 우리 사회의 문화가 작동하는 장”이라며 “국가가 눈감아주고 제도적으로 지원하고 남성 간 연대가 공모하는 이 성관계에 그들은 무엇을 책임지고 있습니까?”라고 소리를 높였다.
성관계라는 행위가 아닌 여성의 몸과 건강, 생존권까지 구매했다고 착각하는 남성들이 ‘알탕 카르텔’로 문화를 만들며 여성을 도구로 이용하는 동안, 낙태죄 헌법소원의 공개 변론을 앞두고 여성을 ‘성교는 하되 책임지지 않는 사람’으로 표현한 의견서를 제출했던 법무부는 과연 무엇을 했는지 의문이 들게 하는 날카로운 발언이었다.
▶ ‘낙태죄 폐지’ 집회 참가자들의 행진 모습. ⓒ일다(박주연)
‘태아’ 논의에 가려진 여성들의 생명과 건강
낙태죄 폐지 이야기를 꺼내면 가장 먼저 나오는 얘기가 ‘태아도 생명인데, 생명을 어떻게 죽이냐’는 거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생명으로 볼 것인지 의료적 기준을 말하기 전에 늘 간과되는 것이 바로 ‘여성의 생명’이다.
공공운수노조에 소속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라고 밝힌 한 시민은 “낙태죄 관련 이야기를 듣고서 처음 든 생각은 이 땅에 여성노동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난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생명으로서 존중받았던가?’하는 것이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태어날 때부터 여자라 무시 받고, 출산과 육아는 오롯이 엄마의 몫이 되어 나의 존재감은 사라지고, 나의 존재감을 조금이나마 인정받을 수 있는 직장에서조차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인 나는, 과연 생명으로서 존중을 받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임신과 출산, 육아의 과정을 보내며 경력이 단절되고 그로 인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노동환경이 극히 열악할 수밖에 없는 이 여성들의 삶”은 왜 낙태죄 폐지 논의에서 뒷전이 되는지 물음을 제기하는 발언이었다.
누락되는 것은 여성의 건강권도 마찬가지다. 생명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불법 시술로 위험에 노출되고 있는 여성의 건강과 생명에 대해 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지 의문이 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여성위원장 윤정원 산부인과 전문의 또한 이 부분을 지적했다.
“안전하고 합법적인 인공임신중절을 부정하는 것은 여성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일입니다. 낙태죄 폐지 요구는 ‘내가 인공임신중절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와 상관없습니다. 이 요구는 비상구 앞에 서 있는 여성에게 적절한 정보와 의료적 지원, 시민으로서 존엄한 삶을 살아갈 인권을 주는 것에 대한 문제입니다.”
▶ ‘낙태죄 폐지’ 집회 행진 중 참여자가 든 피켓들. ⓒ일다(박주연)
‘알탕 카르텔’에 희생됐던 우리의 권리를 되찾자
인공임신중단이 이렇듯 여성의 건강과 생존과 직결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수술을 할 때조차 ‘남성’ 보호자의 동의를 요구받는 현실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한국한부모연합 오진방 사무국장이 대독한 글에선, 임신 사실을 알게 되자 해외로 도망간 생부 없이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알아봐야 했던 여성의 이야기가 나왔다. 무책임하게 떠난 남성 탓에 오롯이 책임을 지게 되었음에도, 수술을 하고자 할 땐 ‘남성’ 보호자가 있어야 했던 것이다.
“겨우 찾은 병원에서 아이아빠와 연락이 닿으면 수술을 시켜주겠다고 했습니다. 어렵게 날짜를 잡아 병원에 갔는데, 시차로 인해 아이아빠와 연락이 되지 않았고 결국 수술을 못하고 혼자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나 혼자서 한 임신도 아닌데 혼자서 책임을 떠안아야 하고, 혼자서 떠안았으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데 32살에 낙태를 보호자 없이 내 선택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분하고 억울해서 많이 울었습니다. 동네 병원에서는 모두 아이 아빠 혹은 보호자인 남자친구를 데리고 오라고 했고, 법적인 아빠도 아니고 생물학적 아빠도 아닌 남자친구라도 와야 수술을 시켜준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신변에 관해 선택할 수 있고 그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어있는 성인에게, 심지어 임신과 관련도 없는 ‘남성’ 보호자라도 데리고 오라고 하는 상황은, 이 사회에서 여성이 놓인 위치가 어떠한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낙태죄를 폐지하라’고 외치는 여성들-기혼, 비혼, 장애인, 성소수자, 십대 등-은 단지 ‘인공임신중단을 하고 싶어서’ 요구하는 게 아니다. 시위 참가자들은 낙태죄가 성차별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그것을 견고하게 지속시키고 있으며,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광화문 광장에서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집회가 진행되는 동안, 혜화역 부근에서는 불법촬영(몰카) 사건의 성별 편파 수사를 규탄하는 여성들의 세 번째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여성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가부장적 한국 사회를 규탄하며,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여성의 인권을 보장하는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이고, 재생산권은 여성 인권의 척도다. 낙태죄를 폐지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여성의 권리를 되찾는 일이며, 전 세계적인 흐름이기도 하다. (관련 기사: ‘임신중단 허용’ 아일랜드가 새로운 역사를 쓰다 http://ildaro.com/8218)
“이제는 한국이다. 낙태죄를 폐지하라.” (박주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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