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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중심적’ 한국영화계 성평등 전략이 필요하다

여성영화인, 여성캐릭터, 여성의 서사 부재(不在)한 현실


“어린이들이 TV나 영화를 볼 때 보이는 것들은 이런 거예요.

-대부분 남성들이 세계를 탐험하고

-극영화에서 영웅들은 대체로 남성이며

-만화에서 8~9개의 캐릭터가 목소리나 행동 양식을 통해 남성으로 묘사되며

-만화에서 소녀들이 작고 날씬하고 섹시한 어린 여성으로 나오는 것.”


6월 5일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개최한 국제 컨퍼런스 ‘영화산업 성평등을 위한 정책과 전략들’에서 독일의 사례를 발표한 타티아나 투란스키 감독(작가, ProQuota Film 공동설립자)은 영화와 미디어에서 여성에 대한 관점, 여성의 경험과 서사가 부재한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어떤 문화적 영향이 영화 안에서 반영되는지, 즉 어떤 고정관념이 재생산되고 있고 어떻게 현실이 구축되는지 질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7년에 개봉한 상업영화 중 여성감독 작품 비율은 고작 2%였다. 또한 작년 한국영화 흥행 TOP 10위 중 여성 캐릭터가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영화는 <아이 캔 스피크>(김현석 감독)가 유일했다. 여성 캐릭터가 인상 깊었던 영화를 꼽으라고 한다면 한두 개를 간신히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참고 기사: 2017년 여성영화인들의 안부를 묻다 http://ildaro.com/8077) 


▶ 2017년 흥행 1~10위 영화 포스터. 여성의 모습이 보이는 건 <아이 캔 스피크>가 유일하다.


전원(All) 여성 제작진 구성이 가지는 의미


올해 5월, 미국 케이블 방송사인 스타즈(Starz)에선 <비다>(Vida)라는 TV시리즈가 방영되었다. LA의 이스트사이드에서 자랐지만 집을 떠나 살고 있던 자매가 엄마의 부고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엄마가 여성파트너와 결혼을 했었다는 비밀을 알게 되고 동시에 예상치 못한 일들을 겪게 된다는 줄거리다.


이 드라마는 멕시칸 어메리칸(Mexican-American), 밀레니얼 라티넥스(Latinx; 최근엔 라틴계 여성/남성을 뜻하는 Latina/Latino라는 말 대신 성별을 드러내지 않는 Latinx가 밀레니얼을 중심으로 쓰인다)의 삶과, 라틴 커뮤니티가 도시에서 겪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낙후된 구도심 지역이 개발되어 중산층 계층이 유입되면서 저소득층 원주민을 대체하는 현상) 이슈 등을 현실적으로 드러냈다는 평을 받았다. TV/영화 평론가인 욜란다 마챠도(Yolanda Machado)는 “내 생애 TV에서 LA의 라티넥스 커뮤니티를 이렇게 잘 표현한 걸 이전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라고 말했고, 많은 라티넥스 대중들도 이 드라마에 환호했다. 이런 반응을 반증하듯 시즌1이 끝나자마자 시즌2 제작이 확정되었다.


사실 이 드라마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요소가 있다. 바로 작가진이 모두 라티넥스(All Latinx)라는 거다. 심지어 이런 구성은 놀랍게도 미국 TV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작가진 중 한 명만이 남성이고 나머진 다 여성이며, 작가진의 반은 퀴어다. 또한 시즌1 에피소드 6개 중 2개를 남성감독이, 4개는 여성감독이 연출했다. 


▶ 작가진이 모두 라티넥스이며 반은 퀴어인 TV시리즈 <비다>는 라티넥스 커뮤니티와 자매와 엄마의 관계, 그리고 퀴어 정체성과 섹슈얼리티를 과감하고 진실되게 풀어냈다. (출처: STARS 홈페이지)

 

‘전원’ 여성감독이 연출한 TV 시리즈도 있다. OWN의 <퀸 슈가>(Queen Sugar)의 경우엔 시즌1부터 지금 방영 중인 시즌3까지, 30개가 넘는 모든 에피소드를 여성감독이 연출하고 있다. 총괄 제작자인 에바 두버네이(Ava DuVernay)는 5월에 열렸던 글로리아 시상식(Gloria Awards)에서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털어놓기도 했다. “뜬금없이 어떤 분에게 전화가 와서 ‘감독협회의 몇몇 남성들이 <퀸 슈가>가 여성감독만 고용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 남성에게 말했어요.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렇게 불만 있는 분들한테 절 고소하라고 하세요. 그럼 저도 그동안 여성감독들을 제외시켰던 제작사들을 다 고소할 테니까요’ 라고 했죠.”


그렇다고 해도 ‘꼭 전원(ALL)이어야 하나, 그 비율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비다>의 총괄제작자인 타냐 사라쵸(Tanya Saracho)는 벌처(vulture)와의 인터뷰에서 작가진 구성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려고 하냐? 그냥 능력 있는 사람들을 고용하라’는 주변의 염려와 만류를 접한다. ‘난 능력 있는 사람들을 고용할 거고, 그 사람이 단지 라티넥스인 것뿐인데 왜 그러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되물을 필요가 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면서 왜 그렇게 거슬려 하는 건가요?’


꼭 라티넥스여야 라티넥스의 삶을, 여성이어야 여성의 서사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누가’ 이야기를 만들고 풀어내느냐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올해 발표한 <소수자 영화정책 연구 - 성평등 영화정책을 중심으로> 보고서는 “여성감독의 부재가 여성 캐릭터의 부재로도 연결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호주의 경우 남성감독의 영화에서는 전체 등장인물 중 여성비율이 24%정도지만, 여성감독의 영화에서는 그 비율이 74%로 증가한다”고 사례를 덧붙인다.


한국 여성영화인들이 놓여있는 구조의 문제


영화산업의 성 불평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애초에 영화산업에 여성인력이 없어서’라는 말이 뒤따르기도 한다. 하지만 <소수자 영화정책 연구 - 성평등 영화정책을 중심으로>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대학 및 전문대학, 대학원에서 연극·영화 전공학과는 총 195개이며 이곳의 여학생 비중은 재적학생수를 기준으로 하였을 때 47%, 재학생을 기준으로 하면 57%”이다.


그러나 “감독급으로 올라가면 여성이 거의 없으며, 2016년 8월 기준 한국영화감독조합의 여성비율은 9.8%”“이다. 그리고 “2005-2016년 사이에 개봉한 한국영화에서 여성감독 영화의 비율이 9.7%, 2편 이상 개봉한 감독 중 여성감독의 비율은 8.7%”에 불과하다.


보고서에선 심층면접을 통해 영화산업 내 여성들의 차별적인 상황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1)성별 직무분리: 유리천장과 유리벽 2)인정되지 않는 여성직의 숙련과 성별 임금격차 3)여성직종에 부과되는 무급노동: 오피스 와이프와 촬영장의 꽃 4)성별화된 권위체계와 여성혐오 5)성희롱과 성추행 6)가족 형성으로 인한 경력단절 7)부재하는 통계자료 8)부족한 지원


이 연구 결과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나’를 투영할 수 있는 여성캐릭터가 왜 이렇게 부족한지에 대해, 여성감독의 부재만 지적해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거다. 여성직무(헤어, 의상, 미술)와 남성직무(조명, 촬영, 동시녹음)가 철저히 구분되는 상황과 그에 따른 임금격차, ‘특별히’ 여성에게만 부과되는 노동과 그런 직무 구분, 여성성을 강요하는 뿌리 깊은 성차별과 여성혐오 문화, 임신과 출산 육아 등으로 경력단절이 생기면 돌아오지 못하는 일터, 이런 현황에 대한 파악도 지원도 없는 현실이 중첩되어 있는 문제라는 걸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2015년 스크린호주(Screen Australia)가 영상산업 내 여성들의 현실을 파악하고자 조사했던 젠더매터스(Gender Matters- Women in the Australian Screen Industry) 보고서에도 여성들이 겪는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1)주요 결정자의 불균형적 성비와 그에 따른 편견 2)남성들이 독점하는 산업구조 3)출산 및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4)자신의 능력을 불신하게 하는 환경 5)불평등한 임금


영화기금 ‘성별 균형’ 맞추기 등 해외 영화정책들


영화진흥위원회의 <소수자 영화정책 연구 - 성평등 영화정책을 중심으로> 보고서에선 영화산업 내 여성들이 겪는 문제와 상황들을 정리한 후, 그것을 타파하고 개선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하기에 앞서 해외 사례를 소개한다.


스웨덴은 “2006년 이래로 이미 성평등 안건이 영화협약에 포함되어 있으며, 2011년 안나 세르너(Anna Serner) 영화위원장 취임 이후 성평등 실현을 위한 움직임을 매년 강화”하고 있다. 그 결과 “당시 영화산업 내 여성 비율이 26%에 불과했던 것에서 현재는 약 50%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스웨덴 영화위원회는 2016년 ‘목표 2020: 카메라 안과 밖 모두에서의 남녀평등’이라는 실천 목표를 다시 발표”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영화 제작에서 핵심 역할의 여성: 여성이 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영화와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적 조사를 실시한다.

둘째. 향상된 가시성: 디지털 지식은행(nordicwomeninfilm.com)을 계속 업데이트한다.

셋째. 지속적인 카운팅: 질적 분석을 특징으로 한 성평등 보고서를 매년 작성한다.

넷째. 성별과 다양성에 대한 지식 증가: 어린이와 청년들을 가르칠 수 있는 교육자를 대상으로 젠더에 초점을 맞춘 교육 세미나를 실시한다.


특히 “세르너 영화위원장은 정책 기구나 투자 단위에서의 결정권자가 성평등 인식과 실천의지를 가져야 할 것을 역설했다.” 


▶ 스크린호주에서 발표한 젠더매터스(Gender Matters - Women in the Australian Screen Industry) 보고서 중 ‘성평등 실현을 위한 5가지 계획’


호주의 경우에도 “2014년 호주 박스오피스에 오른 250개의 영화 중 여성이 감독한 영화는 8%에 불과”하였으며, “호주국립영화학교에서 시나리오, 제작, 연출을 전공한 졸업생 중 남성이 52%, 여성이 48%였음에도 영화제작 현장에선 감독 10명 중 1명이 여성에 불과”하는 등 영화산업의 불평등 문제가 부각되었다. 그 후 실태조사를 통해 문제점을 파악하고 “성평등 실현을 위한 5가지 계획(Five point plan)을 발표”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기간에 열린 국제 커퍼런스 ‘영화산업 성평등을 위한 정책과 전략들’에서 BFI영국영화기금 사례를 직접 발표한 리찌 프랭키(Lizzie Francke) 이사는 “작년 가을, BFI 영화기금 지침에 커다란 변화를 발표했다”고 밝히며 그 내용을 공개했다.


-지원받는 영화제작자가 50대 50의 성별 균형을 이뤄야 하며

-지원받는 이의 20%가 영국의 흑인, 아시아인 및 인종적 소수이도록

-지원받는 이의 9%가 LGBTQ로 정체화한 사람이도록

-지원받는 이의 7%가 장애인이도록 한다.


리찌 프랭키 이사는 “올해 4월부터 이 지침이 공식적으로 실시되었고 정기적으로 모니터링한 후 2020년 BFI의 전략 리뷰에서 보고될 것”이라고 밝혔다.


진짜 ‘현실’ 속 다양성이 반영된 콘텐츠를 볼 수 있도록


2016년부터 문제 제기 및 폭로가 이어졌던 영화계 내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화진흥위원회는 2017년부터 영화발전기금 지원 사업 대상자에 대해 제작 참여자 전원이 성희롱 예방교육을 수강하고, 성범죄 예방 관리감독을 위한 노력을 다짐하는 서약서를 의무적으로 제출하게 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영화진흥위원회 지원 사업 대상자는 성범죄로 벌금형 이상의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사실이 없음을 확인하는 확인서를 제출해야 하며, 그런 사실이 확인될 경우 지원 사업 대상에서 취소될 수 있다.


이런 정책이 마련되고 변화를 위한 움직임이 시작된 것은 분명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여성영화인들이 겪고 있는 중첩적인 문제가 해결되진 않을 것임이 분명하다. 여성들이 스크린에서 밀려난 기분을 느끼지 않게 하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지도 않을 것이란 걸 관객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은 (사)여성영화인모임이 2017년부터 준비해 올해 3월 개소했다. 영화산업 성평등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움직이는 여성영화인들에게도 다양한 지원이 있기를 바란다. (출처: 든든 홈페이지)


해외의 좋은 선례들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성평등 정책을 한국의 영화/TV산업에도 속속들이 집어넣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산업이 사회 문화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재생산하기 쉬운 위치에 있고, ‘현실을 반영한다’는 이미지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 변화의 영향력 역시 크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성평등에 대해 아직도 ‘여성을 억지로 끌어올리거나 남성이 무언가를 내주는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빠리떼를 생각해 보자. 한국에선 여남동수제로 불리는 프랑스의 ‘빠리떼’는 인구 성비에 맞게 어떤 자리들을 채우는 제도로, 지금의 남성의 과다대표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합리적인 정책이라는 평을 받는다. 이런정책이 국내에 도입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영국에서 여성들이 선거를 할 수 있게 된 (제한된) 참정권을 획득한 지 올해가 100주년이다. 긴 역사 동안 여성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머물러야 했던 시간에도 끊임없이 목소리를 냈다. 그런 수많은 결과들 중 하나가 영국 BFI 영화기금 정책의 변화일 것이다. 다양한 여성과 소수자들을 위해 또 한 발걸음을 내디딘 이 장면을 국내에선 누가 만들어 낼 것인가?


남성중심적 영화산업은 이전엔 당연하게 보였을지 몰라도 이젠 명백히 틀렸다. 그동안 영화가 놓쳐왔던 ‘현실’이 영화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정부와 영화진흥위원회, 그리고 영화인들이 가열차게 움직이길 기대한다. (박주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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