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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노동을 다룬 현대미술전 “히든 워커스”의 의의

여성의 관점으로 ‘미술’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 필자 이충열님이 여성주의 미술가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전시를 보기 위해서는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밟아야 한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전시에 대한 설명이 빼곡하게 적힌 까만 글씨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전시 의도는 계단을 내려오며 그 벽을 바라보았을 때부터 드러난다. 사선으로 보아야 보이는 흰 벽의 하얀 글씨-HEDDEN WORKERS-는 모두 대문자다. 전시를 기획한 박혜진 큐레이터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철저하게 평가 절하한 ‘여성노동’의 의미를 큰 소리로 외치면서도, 그 사실을 이 사회가 은폐하고 있는 현실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


▶ 코리아나미술관 현대미술 전시 <히든 워커스>(HIDDEN WORKERS) 메인 이미지


기획 의도가 뚜렷한 전시에서 좋은 작업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관객의 입장에서 행운이고, 미술 작업을 하는 작가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자극이 된다. 이 자극을 어떻게 소화할까 고민하느라 전시 소식을 미처 전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각각의 작품 설명 위주로 소개된 글은 보도를 통해 많이 공유되었기 때문에 전시 자체에 대한 글을 써보기로 했다.


여성주의를 지지하는 미술가이자 교육자로서, 필자는 코리아나미술관의 현대미술 전시 “히든 워커스(HIDDEN WORKERS)”의 세 가지 의의를 이야기하려 한다. 첫째, 이 전시는 현대미술이 너무 어렵고 복잡해서 관객을 소외시킨다는 오해를 해소할 수 있다. 둘째, 중산층 엘리트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과거 서구의 페미니즘 미술이 현대에 와서 더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셋째, ‘미술관’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친절한 현대미술 전시


현대미술은 어떻게 보아야 할지 모르겠고 어렵게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회화나 조각을 보면 직관적으로 ‘아름답다’거나 ‘잘 만들었다’거나 ‘좋다’는 등의 느낌/감정을 가지게 된다. 반면, 관객의 사유(思惟)를 요청하는 현대미술은 주체로서의 개인보다 소속과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로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수평적인 관계와 연대보다 수직적인 관계와 조직문화에 익숙한 대한민국의 환경에서는 더욱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개념미술처럼 우리의 삶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문제에 집중하거나, 언어와 철학을 깊이 다루는 작업들은 관련 지식을 필요로 해서 관객이 소외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런데 <히든 워커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노동’이라는 소재를 다룸으로써 많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우리의 삶과 유리되었던 ‘미술’이 우리 ‘삶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 것이다. 또한 수많은 노동 중에서 ‘여성노동’이 가지는 특수성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관객의 경험과 맞닿을 수 있는 표면적이 넓다. 직접 재현을 통해 결론 내린 방식이 아니라, 여러 세대와 여러 문화의 작가들이 각자의 입장과 관점에서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여 다각도에서 접근한 작업들을 통해 ‘여성노동’을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그 덕에 관객들도 자기 경험에 비추어 자유롭게 작업을 경험하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 미얼 래더맨 유켈리스, 하트포트 워시:닦기/자국/메인터넌스, 실외 (코리아나 미술관 제공)


현대미술은 전통적인 미술과 달리 시각적 스펙터클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 과거 미술이 선사했던 이미지를 통한 자극을 대중매체와 오락산업이 충족시켜주게 되면서, 현대미술은 점점 의미를 만들고 지배 이데올로기가 가렸던 진실들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저하게 신자유주의 경쟁 논리에 의해 모든 분야에서 자극성을 추구하게 된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미술도 ‘유명한’ 작가가 자신이 소유한 자본과 권력을 이용하여 ‘거대한 규모’로 작업하거나, 캐릭터 상품처럼 누가 봐도 그의 것임을 알 수 있도록 자기복제해서 ‘각인’ 효과가 있을 때 인정을 받는 것 같다.


아직도 우리가 제도를 통해서 접할 수 있는 ‘미술’은 서양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여 ‘기술’적인 훈련이 기본이 되는데, 남성중심의 사회에서는 여성보다 남성에게 기술 전수의 기회가 더 많다. 미술대학의 재학생은 여학생이 훨씬 많지만, 교수는 압도적으로 남교수가 많고, 미술계에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다수가 남성임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남성중심 문화는 물질성과 규모와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고 전통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가치를 추구하거나 대안적인 미를 탐구하거나 과정 중심적인 작업은 국내 미술‘계’에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인지 젠더 이슈를 다루거나 여성주의 관점을 미술의 언어로 표현하려 했던 페미니즘 미술은 작가가 어떤 시기에 잠깐 스쳐가는 소재나 주제로 소비하거나, 남성의 시선을 그대로 재현하면서 여성이 했으니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거나, 이슈에 따라 급하게 결성되어 평면적인 기획에 그치거나, 열악하고 접근성이 떨어지는 장소에서 열리거나, 기간이 짧거나 전시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더 많이 공유되지 못해서 아쉬운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히든 워커스>는 착실하게 기획되어 완성도 높은 전시로서 홍보도 잘 되었고, 충분한 기간 동안 열리고 있다. 또한 전시 정보를 습득한 도슨트가 아니라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가 직접 설명을 해주는 등 전문성과 대중성을 함께 추구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 임윤경, 지속되는 시간  (코리아나 미술관 제공)


서구 페미니즘 미술사와 국내 ‘여성주의 미술’ 흐름


필자가 처음 페미니즘 미술을 접한 것이 10년이 넘었는데, 아직 우리 사회에는 ‘페미니즘 미술’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여전히 페미니즘 미술은 여학생이 대다수인 미술대학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페미니즘 미술은 “왜 위대한 여성예술가는 없었는가?”라는 린다 노클린의 문제 제기가 기폭제가 되어 미국을 중심으로 1970년대부터 활발하게 시작되었다. 서구의 페미니즘 미술 운동은 백인/중산층/엘리트 여성의 문제 의식에서 출발하여 초기에는 다른 소수자를 고려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점차 가부장제 권력 구조에 대한 문제 의식으로 심화되고 다양한 목소리를 유연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실험들을 통해 발전해왔다. ‘여성주의 정체성’이 계속 변화해 가듯이 페미니즘 미술도 변화를 거듭한 것이다.


엘리트 여성들로부터 시작되었던 서구 페미니즘 미술과 달리 한국의 ‘여성주의 미술’은 1980년대 ‘민중미술’ 계열에서 시작하여 처음부터 여성노동자의 삶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다음 세대로 연결되지 못하고 명맥이 끊겼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서구의 페미니즘 미술은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현대미술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왔지만, 국내 상황은 달랐다. ‘민중미술’이 독재정치에 의해 탄압받으며 유연하게 변화하지 못하면서, 일상을 외면하는 ‘세련된’ 형식의 ‘미술’만이 살아남아 소수를 위한 교양과 사치의 문화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삶을 다루었던 국내의 ‘여성주의 미술’은 설 자리를 잃은 것이다.


물론 ‘여성주의 미술’의 시도와 기획이 없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고, ‘미술계’에서 무시되거나 악의적으로 평가 절하된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페미니즘 미술사의 한 흐름을 볼 수 있고 전문성과 대중성을 확보하며 주목받고 있는 <히든 워커스> 전시가 더 반갑게 느껴진다. 게다가 이 전시는 전면적으로 여성의 삶과 노동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 2016년 5월 19일 강남역 여성대상 살인 사건 이후의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에 부흥하면서도 젠더폭력 이슈에 머물던 기존 전시들과 차별성를 가진다. 또한 1970년대부터 아주 최근의 작업들을 통해 서구 페미니즘 미술과 국내 ‘여성주의 미술’의 연결점을 잘 보여준다.

▶ 릴리아나 앙굴로, 유토픽 네그로 (코리아나 미술관 제공)


바람직한 미술관의 역할


국내에서 미술 전시장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유형은 크게 세 가지인 것 같다. 미술 전공자, 데이트하는 연인, 소수의 미술애호가나 투자자. 이외의 사람들은 지인이 전시를 하지 않는 이상 전시장에 갈 일이 거의 없다. 미술은 우리의 삶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또한 입시 위주의 공교육 제도는 근대적 분과 학문을 통합시킬 기회를 제공하는 예술교과를 축소하여,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미술’을 접할 기회가 더 줄어들었다. 게다가 현대미술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개인들을 억압하기 위해 만든 견고한 벽에 틈새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면, 시장이 지배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현대미술을 환영하는 곳이 드문 것이 당연하기도 하다.


대중매체를 통해 홍보되는 전시는 대부분 과거의 ‘유명한’ 작품이나 ‘과학과 미술의 만남’ 등 기술적인 효과로 흥미를 유발하는 것들이다.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서 미술을 접할 수 있는 전시장은 ‘화랑’ 또는 ‘갤러리’로 미술품을 거래하기 위한 공간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상품으로서의 미술’이 아니라 ‘예술로서의 미술’이 발달하려면 교육을 포함하는 ‘미술관’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래서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와 참여 작가가 함께 이끌어가는 ‘큐레이터 & 아티스트 토크’는 이번처럼 기획이 중요한 전시에서는 더욱 의미가 있다고 본다. 전시 주제와 관련된 전문가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전시 연계 세미나’ 역시 전시에서 다루는 주제를 더 심화시킬 수 있게 돕는 장치라는 점에서, <히든 워커스> 전시가 교육의 중요성을 충분히 고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월 19일에 열린 ‘전시 연계 세미나’에서 스스로 ‘엘리트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인식하는 강연자와 젠더폭력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는 20대 여성의 대화도 의미심장했다. 이 대화는 강의를 마치고 질의응답 시간에 이루어졌는데, 이 시간도 강의 후 형식적인 것이라기보다 강연자가 다른 세대의 이야기를 듣고자 청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한 관객이 강연자에게 ‘몰카’라는 단어를 지양하고 ‘불법 촬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강연자는 ‘불법 촬영’이라는 표현은 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불온하고 은밀한 욕망을 표현할 수 없고, 본인은 ‘적들의 언어’를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바꾸는 방식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몰카(불법 촬영)’이라고 표기하겠다고 했다. 사회적 위치에 따른 경험의 차이와 그에 따라 심리적 거리두기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차이를 볼 수 있으면서도 ‘대화’를 통해 서로의 입장에 대해 알 수 있었던 이 에피소드는 <히든 워커스>의 의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 조혜정 & 임숙현, 감정의 시대-서비스 노동의 관계미학 (코리아나 미술관 제공)


여성의 삶과 미술이 만나는 장


대한민국에서 ‘미술’은 사교육을 통해 ‘입시미술’을 훈련 받아서 특정한 형식의 시험에 합격해야 ‘전공’을 할 수 있고, 대학에 가서도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교육 과정을 거치게 된다. 또한 예술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없으며 물질을 만드는 작업을 선호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여러 자원을 확보하지 못한 사람이 지속적으로 ‘창작’ 행위에 집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환경에서 결국 ‘미술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는 ‘계층’이 아닌 경우가 많다. 작업의 주제나 관심이 국민 다수인 ‘노동자’와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게다가 ‘미술’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가부장제 남성의 시선’이기 때문에 수많은 ‘여성’ 미술가들은 혼란을 겪으면서도 ‘여성으로서 보기’를 시도하기 어려워한다.


이런 현실에서 ‘여성’의 ‘노동’ 문제를 ‘미술’로 다룬 이 전시 소식을 들었을 때 큰 기대감이 있었다. 이미 전시관에서 공개한 보도 자료가 작품들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일개 작가로서 평하기는 부끄럽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전시의 배경과 의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히든 워커스>가 여성의 관점으로 ‘미술’을 어떻게 볼 수 있을지 논의를 확장시키는 데에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아직 2주의 전시 기간이 남았으니 더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면 좋겠다. 전시장에서 감탄하고 마는 전시가 아니라, 일상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삶에 대한 고민을 연결시킬 수 있는 좋은 작업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은 사람이 경험하면 좋겠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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