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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들의 ‘젠더 노동’

[성소수자, 나도 취준生이다]③ 성별 역할이 능력?


성소수자 청년들의 취업과 노동을 이야기하려 한다. 소위 ‘일반’ 청년들의 노동에 있어 접점과 간극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모두 헬조선이라 불리는 사회를 살아가는 20~30대지만, ‘청년’이라는 이름으로만 묶일 수는 없다. 취업 키워드를 통해 성소수자들과 비성소수자들의 삶을 살폈다. 그렇게 찾아낸 공통분모들이 우리 시대의 청년노동에 대해 말해줄 것이라 믿는다. [기록노동자 희정]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직무에서 기대되는 목소리


콜센터 직원 마늘 이야기를 이어가보자. 마늘에게는 주민등록번호 ‘1’이 꼬리표처럼 붙는다. 자신을 남자로도 여자로도 규정하지 않지만(젠더 퀴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남자다. 국가가 정하고 법이 정했다. 주민등록상의 성별과 본인의 성별이 일치하지 않은 까닭에 일자리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다가 콜센터에 취직하게 됐다.


“콜센터 교육 때 사람들이 저를 여성으로 알고 있었는데, 강사가 와서 숫자를 세니까 남성이 하나 비는 거예요. 숫자를 계속 세시는데. 나중에 남자들 다 포기하고, 하나 남아 있다고 기록에 나와 있는데. 아무리 봐도 남자는 없고 ㅎㅎ” (마늘, 20대, 비수도권 거주, 젠더퀴어, 퀘스쳐너리, 현재 학생)


마늘은 취업 후 자유로이 치마를 입고 화장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남자화장실을 사용해야 하고, 콜센터 기록에는 ‘남자 직원’으로 표시됐다. 그럼에도 마늘은 마늘로 출근했다.


마늘은 제 자신으로 출근했으나, 그곳에도 남자/여자는 있었다.


“저는 ‘1’로 등록되어 있으니까. 너는 남자니까 콜 받을 때 중저음 신뢰감 있는 목소리로 해야 한다고 하는데. 저는 그게 되게 어렵거든요. 전화 받을 때는 목소리가 한 톤 더 올라가요. 고객들도 다 여자인줄 알고 아가씨, 하고요. 그런데 교육 때 매번 평가에서 ‘목소리에 신뢰감이 묻어나지 않는다’ 하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마늘의 외양을 문제 삼지 않았던 회사는 목소리에는 성별을 부여했다. 수화기 너머 외모는 보이지 않으나, 목소리에는 기대되는 성별이 있다.


“여자는 친절하고 상냥하게 웃어주는 목소리. 남자는 단호하면서도 신뢰감 있는 목소리. 그런 음성의 톤이 정해져 있어요.”


신뢰감의 근원


‘남성=신뢰, 여성=친절’이라는 고정된 성별 역할(분업)은 회사의 욕심만은 아니었다.


“특정(진상) 고객들이 있어요. 콜 받는 직원들은 다 알 정도로 특이한 고객들. 그런 분들이 전화 오면 일부러 목소리 깔고 받죠. 상담원이 남성 목소리면 고객들이 클레임을 못 거는 경우가 많아요. 클레임을 걸더라도 수위가 낮아진다던지.”


‘신뢰감’은 연기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듣는 사람이 신뢰를 수용해야 한다. 30년을 남성 역할을 수행하다가 트랜지션(성전환)한 케이트 본스타인은 말했다. “남자와 여자가 받는 취급의 차이는 분명 있다.” 남녀 위치에 모두 있어 본 사람의 이야기다.


<나는 꽤 여러 가지 세일즈 일을 해 봐서 어떻게 설득해야 구매하게 되는지 안다. 물론 남자로 일할 때 얘기다. 여성이 되어 일했을 때 고객들은 나의 ‘전문가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어머나 저보다 훨씬 더 잘 아시네요, 존슨 씨.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라고 묻는 수밖에 없었다.> -케이트 본스타인, 『젠더 무법자』


“취급의 차이는 전혀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취급의 차이는 ‘능력’으로 분류된다. 콜센터 대부분 남성 직원들은 업무 평가가 좋다. 회사 또한 마늘이 주민등록번호와 동일한 ‘남성’으로 있어주길 바랐다. “남자가 귀하거든요.” 입사동기 중 교육을 수료한 ‘남자’는 마늘 하나다.


앨리 러셀 혹실드는 『감정노동』에서 감정노동 일터에 여성이 몰리는 이유를 남성에 비해 낮은 지위 때문이라 지적한다. 콜센터에 남성이 드문 이유이기도 하다. 콜센터의 낮은 임금과 사회적 지위(“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두려울 것 없이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고객 불만 접수처”로 존재)는 남성이 감당할 종류가 아니다. 감당해야 한다고 배워온 일이 다르다. 남녀 평균 임금이 다르다. 결국 남성들은 교육을 이수하지 못하고(않고) 떠난다.


미국과 유럽 국가에서도 감정노동 일자리는 여성의 것이었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집어삼키며 서구의 감정노동 일터는 여성 이주노동자로 빠르게 대체됐다. 이후 전지구화는 유럽과 미국의 콜센터를 인도나 필리핀 등 제3세계 국가로 아웃소싱하는 방식으로 ‘진화’해버린다. 낯선 억양과 발음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들에겐 더 큰 장점이 있었다. 저렴한 노동값.

▲ 노동시장에서 성별에 기대되는 역할도, 비용도 다르다


후려치기 당하는 여성노동


비용과 성별은 언제나 같이 간다. “값싼 노동력의 거대 저장소”(실비아 페데리치, 『혁명의 영점』)로 인식되는 제3세계. 이들 국가로 진출할 때 국제기업이 고려하는 것 중 하나가 ‘여성차별 정도’라는 얘기가 있다. 여성차별이 심하다는 것은 ‘여자 있을 자리는 가정’이라는 논리가 더 강하다는 것. 집밖 여성노동은 부차적으로 여겨지기 쉽다. 그럴 경우 가격 ‘후려치기’가 가능하다.


게다가 노동 자체는 무성(無性)이라는 환상과는 다르게, 섹슈얼리티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국제 자본 진출이 시작된 제3세계 공장의 노동력은 (한국이 그러했듯) 대부분 ‘나이 어린 하층 계층 여성’이다. 이는 “외국 자본을 끌어오기 위한 유인 전략”과 무관하지 않다. 여성에게 덮어씌워진 수동적인 이미지는 고분고분한 노동자로 이어진다. 거기에 더해 (외국 투자자님들 보시기에) “이국적 섹슈얼리티까지 지닌 모습으로 선전된다.”(김현미 외, 「성별화된 시공간적 노동 개념과 한국 여성노동의 유연화」)


간혹 자본이 성별 고정을 극복해내는 순간도 있다. 정확한 정보 전달이 생명인 콜센터가 ‘비용’을 이유로 불명확한 이국 발음을 수용하듯 말이다. 콜센터의 메카라는 필리핀에서는 트랜스젠더 고용을 환영한다고 한다. 발달한 인권의식 때문이 아니다. 여/남 목소리를 모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노동력으로 여러 효과를 노리는 비용절감. 노동 유연화의 최고봉적 선택이다.


성별에 요구되는 것들


마늘도 때론 여/남 성별 목소리를 모두 활용한다. 신뢰감이 있다고 믿어지는 ‘남성’ 목소리로 나타나 진상 고객들을 무찌른다. 콜센터 회사는 마늘의 외모에 관심 없다. 다만 마늘이 남성으로 있길 바란다. 남자가 귀하다. 손자 사랑은 할머니 치마폭에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마늘은 콜센터 업무평가가 나름 공정하다고 말해왔다. 고객들이 외양을 보고 편견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정하다는 평가에도 성별에 따른 고정관념이 녹아들어 있다. 마늘도 안다. 객관적으로 보려 한다. 때론 활용한다.

 

“저는 저 나름대로 삶을 살 거고. 상황에 맞게 저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제가 성소수자라서 그렇게 산다기보다,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갈 거라 생각해요. 다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으로 자신의 모습을 바꿔 나가지 않나요?”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이유는 “각각의 성별에 기대되는 것이 너무 명확하게 나눠져 있기” 때문이라 했다. 반을 딱 쪼개 남자, 여자가 있다. 마늘만이 아니다. 우리 또한 각각의 성별에 요구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없다. 여자아이는 분홍. 남자아이는 파랑으로 자라왔다. 남자아이는 탑에서 공주를 구하고, 여자아이는 구두를 신고 왕자랑 춤춰야 한다.


▲ 성별 질서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은 점수가 깎인다. (출처: 전국퀴어모여라 클레이카드)


‘여자/남자다운 행실’도 업무능력


이토록 명확한 성별 질서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은 초조해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00년에 조사한 「성소수자 차별 사례집」을 보면 이런 경우를 심심치 않게 발견한다. 인터뷰이 한 명은 승진에서 탈락하는 자신을 이렇게 납득시켰다. “여성스럽지 않은 태도나 말투, 외양들이 상사에게 좋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성소수자임을 커밍아웃하지 않아도, 이미 ‘여성다움’ 상실에서 점수가 깎인다.


게이라고 정체성을 밝힌 이는 승진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리 말했다. “결혼하지 않으면 책임감이 있다고 인정받지 못 한다.” 우리가 살면서 눈치 챈 것처럼 ‘결혼 여부’와 ‘여자/남자다운 행실’도 업무능력 평가에 들어간다.


어느 일터든 직원들이 업무를 하며 성별을 적재적소에 활용하길 요구한다. 그것이 능력이라 치부된다. 무성(無性)이든 멀티젠더이든 상관없다. 지정성별(태어남과 동시에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지정받은 생물학적 성별)에 따른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에이섹슈얼(타인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거나 현저하게 낮은 경우)이라고 말하는 지연은 2차 하청 부품공장에 다닌다. 거기서 ‘그녀’는 그저 여자다. “여자도 완전 여자죠.” 그리고 짧게 덧붙인다. “그렇지 않으면 일이 안 돼요.” 원청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는 2차업체에서 지연의 능력은 ‘여자’였다.


“일하다 보면 라인(컨베이어 벨트)이 서요. 우리 (하청업체) 잘못 때문에 설 때도 있죠. 라인이 잠시만 멈춰도 업체가 배상해야 하는 손해가 몇 백 만원이에요. 원청에 보고가 올라가면. 그런데 보고를 올리는 게 정규직(관리자)이니까. 그 사람이 말만 잘 하면 멈춘 게 또 없어지는 거예요.”


라인이 멈추면, 정규직 관리자랑 친하게 지내던 하청직원들이 움직인다. 이들은 여자다. 업체에서 가장 어린 지연도 (표현대로라면) “끌고 간다”. 웃어주고 비위 맞춰주고, 그러고 나면 라인 멈춘 것이 없던 일이 된다. 하청업체 여성들은 능력을 그렇게 인정받는다고 했다. 커밍아웃도 하지 않았지만, 해봤자 지연은 자신이 여자일 뿐일 거라 했다. “누가 이해하겠어요? 제 정체성을.” 여자가 활용해야 하는 능력을 선배들로부터 강제 학습 중이다.


그런데 그 능력을 인정받아봤자, 불안한 하청업체 인생에 달라지는 것도 없다. 경기가 어렵다 싶으면 폐업(동시에 해고)이다. 새로운 직장을 구할 때 여성들은 ‘그 능력’을 가지고 누구와 경쟁할 수도 없다. 남성 노동자와 대적할 것은 더욱 아니다. 지연의 표현을 또 빌리자면 “지게차 운전하는 게 차라리 스펙이다.”


여자냄새 지우기


입사 7년차, 조나단은 대리 직책쯤 달았다. 그 연차 동료들처럼 회사 내에서 요구받는 역할이 많다. 그래서 여자를 사랑하기에 “(법 테두리 안) 결혼을 하지 못하고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점이 업무에는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경력단절이 없다.(달리 말해, 회사가 언제든 일을 시킬 수 있는 단절 없는 ‘노동력’이 된다.) 가정과 회사 이중노동에 갈등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여성들. 조나단은 혼란을 겪을 기회 자체를 박탈당했다. 그 박탈이 연봉협상을 이롭게 한다.


초등학교 교사인 준현은 결혼이라는 안전지대가 없기에 더욱 승진에 목매는 동료 게이들을 언급했다. 정작 본인은 승진 욕심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남교사’는 사십 줄이 넘으면 환영받지 못한다. 이것이 걱정이다. 젊을 때는 선호되지만, 나이가 들면 학교도 학부모도 원하지 않는다. ‘왜 아직도 평교사나 하고 있어?’ 여자교사들에게 적용되지 않는 평가 잣대가 남성교사에게 가해진다.


남자교사들이 인생 자체를 저평가 당하지 않기 위해 취할 방법 중 하나. 그 나이가 되도록 평교사로 머물지 않는 것. 승진에 연연하게 된다. 알다시피 여성은 그런 평가를 받지도 못한다. 여성에게 승진, 능력을 우선순위로 두지 않는 사회분위기는 ‘유리천장’으로 이어진다.


‘여성성’을 내려놓고(전희경은 『오빠는 필요 없다』에서 ‘여자 냄새 지우기’라 표현했다.) 남성들의 질서에 들어가야만 능력을 인정받는다. 여성성은 우위의 자산이 되지 못한다. 남성은 여성의 일이라 통념화된 노동(돌봄/감정 노동 등)에 종사할 경우 가혹한 평가를 받는다. 그것을 뒤집을 방법은 ‘남자들의 방식으로’ 경쟁하는 것이다. 경쟁과 성취를 통해 ‘사회적 남성성’을 확인시켜야 한다.


▲ 2015년 5월 16일 서울역 광장.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 공동행동’ 문화제.  (사진: 김예지)


해와 달의 순서


‘여자냄새가 나는’ 마늘의 여자동료들은 교육장에서 배운 대로 고객에게 ‘친절’하지만, 결국은 “높은 사람 바꿔” 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쯤 되면 한탄이 나온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 역사가 몇 년인데, 이토록 저평가 당해야 하는가. 취업문 통과를 앞둔 20대는 더 격한 비명을 지른다. “남자인 게 스펙이죠.”


<남자가 4명이고 여자가 1명 뽑히는 이런 구조였어요. (…) 남성은 남성인 게 스펙이죠. 그거는 만고불변의 진리인 듯. 진짜 면접 다른 데를 가도 뭔가 여자는 생색 구색 맞추기용으로. 만약에 백 명을 면접 보면 남자는 구십에, 여자는 열 명밖에 안되고 사실 여자는 거의 뽑지 않는 그런 데가 많았고.> -정책토론회 「청년노동, 말하는 대로- 여성들의 일 경험을 중심으로」, 한국여성민우회, 2015년 10월 29일


취업 후도 마찬가지다. 승진에서 뒤쳐진다. 성별 임금격차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육아가 시작되면 고난의 행군이다. 월급 36.7% 더 받고, 앞서 승진하고, 육아노동을 피할 기회가 많은 남성들의 인생도 그리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헬조선의 노동기계들이다. 일주일에 반 이상 야근을 하고, OECD 국가 중 멕시코 노동자들과 노동시간 1, 2위를 다툰다. 어쩌면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 맞는지 모르겠다. 아담에게는 땀 흘려 노동하는 고통을 주고 이브에게는 임신하는 고통을 주었다고 했다. 여기서 공감 가는 부분은 ‘고통’이다.


아담과 이브가 받은 고통은 땀 흘리거나 피 흘려야 하는 데 있지 않다. 세상을 아담과 이브로 나누고, ‘아담은’ ‘이브는’ 하며 성별에 따른 역할을 나눠 고정시켜버린 그때, 고통이 탄생했다. 성차별은 세상에 아담(남)과 이브(여)밖에 없다는 성별 이분법과 같이 작동할 수밖에 없다.


성차별은 성별 간의 권력이 달라서 벌어지는 일이다. 남과 여, 우리는 이 단어가 동전의 앞뒤 면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흔히 동전의 양면 같다고 여겨지는 단어들. 앞과 뒤, 해와 달,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 부자와 거지, 왕과 왕비, 그리고 남자와 여자. 우리는 이 대칭 단어들 중 어느 것을 앞에 놓아야 하는지 바로 판단할 수 있다. ‘뒤와 앞’은 어색하다. ‘남자와 여자’ 순서는 현실에서 남자 초등학생 ㄱ씨가 1번을 배정받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자학생은 15번부터다. 그게 승진 순서가 되고, 사회적 지위가 된다.


세상이 둘로 나누어졌다는 이분법은 a와 b의 만남이 아니다. a와 a 아닌 것의 조합일 뿐이다. a는 앞에 온다. 정확히는 a가 a 아닌 것을 뒤로 보낼 수 있다. “a가 아닌 것을 사용하고 배치하고 규정할 수 있는 a의 권력”(정희진, 『양성평등을 반대한다』)이 존재한다.


그러나 수십 종의 크레파스는 어느 색을 맨 앞에 놓아야 하는가. 서가에 수없이 꽂힌 서적 중 어느 책을 앞에 두아야 하는가. 앞선 경우처럼 손쉽게 정할 수 없다. 앞에 있을 권력도, 뒤에 놓을 권력도 없다. 권력이 차이를 만들 필요도 없다.


두 가지 선택과 수많은 배제


세상이 남과 여, 그것도 남자가 자동으로 앞에 오는 이분법에 푹 빠진 탓에 뒤에 오는 ‘여자’의 노동은 중심에 설 수 없다. 이 사회는 남자가 ‘스펙’인 게 맞다. “여자가 어디 감히”라는 말은 여자 있을 곳을 알려준다.


그러나 노동시장은 여자들을 아예 내몰 지도 않는다. 여성노동의 역할 중 하나는 대규모 ‘산업예비군’(실업군이자 예비노동력)으로의 기능이다. 이는 전체 노동값을 하락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한다. “너 말고 일할 사람 많아” 같은 것 말이다.


동시에 국가에게는 여성이 가정에 머무는 일은 중요하다. 여성의 몸은 출산율을 통제하기 위한 도구로 여겨져 왔다. 가임기 여성 지도를 만드는 일을 정부기관(행정자치부)이 했다는 사실은 놀라울 게 없다. “덮어 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시절부터 국가는 출산 통제에 들어갔다. 여자는 가정에도, 일터에도 어디에나 존재해야 했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다. 가정 내 여성의 재생산(돌봄, 출산, 양육)은 공짜 노동이다.


여자들은 애 낳는 틈틈이 노동값 36.7%가 사라지는 마술을 부리는 직장으로 간다. 그곳에는 여자와 남자가 있다. 아니 여자와 남자만 있다. 다른 크레파스 색들은 보이지 않는다. 다채로운 선택지들은 취업조차 허락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존재를 숨겨 당신의 옆자리에 있을 수도. ‘퀴어’로서 가지고 있는 주황, 보라, 노랑의 언어를 버리고 세상이 가진 언어를 쓰며 존재를 지웠다 썼다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자가 어디에서도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행성, 그 같은 자리에서 성소수자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지우고 지워지는 경험을 한다. (※ 기사에 등장하는 이름 중 일부는 가명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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