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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펙’ 순위에서 밀려나는 ‘몸’들

[성소수자, 나도 취준生이다]② 외모도 스펙인 사회


성소수자 청년들의 취업과 노동을 이야기하려 한다. 소위 ‘일반’ 청년들의 노동에 있어 접점과 간극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모두 헬조선이라 불리는 사회를 살아가는 20~30대지만, ‘청년’이라는 이름으로만 묶일 수는 없다. 취업 키워드를 통해 성소수자들과 비성소수자들의 삶을 살폈다. 그렇게 찾아낸 공통분모들이 우리 시대의 청년노동에 대해 말해줄 것이라 믿는다. [기록노동자 희정]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성형 부추기는 블라인드 면접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요즘은 그 연령대가 더 낮아졌다. 면접장에 서면 깨닫게 된다.


“치아 교정도 안 하고 뭐 했습니까?” 면접관의 질타. 당장이라도 평가서에 ‘자기 관리 부족’이라 쓸 기세다. “살 빼고 다시 면접 볼 생각 없습니까?” 이 말은 면접자에게 굶음이라는 절제와 러닝머신 위에서의 끈기를 떠올리게 한다.


▲ 외모가 스펙인 사회 ⓒ일러스트레이터 정은


얼굴(몸)은 자기 관리의 문제가 됐다. 책임져야 한다. 학벌, 성적, 기타 스펙을 지워 공정하게 선별하겠다던 ‘블라인드 면접’은 우습게도 외모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공채 시기만 되면 블라인드 면접을 빌미로 성형광고가 쏟아져 나온다. ‘표정성형’마저 있다.


외모는 이제 스펙이 됐다. 신조어도 나왔다. 페이스펙. 성형과 다이어트가 필수 9종 스펙에 입성한 것이 벌써 몇 해 전이다. 새로울 것도 없다. 예쁘지 않으면? 취업의 기회가 줄어든다. 자격증을 덜 따고, 학점이 좋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외모 지적과 성별


수차례 면접 이야기를 들은 터라 나도 기대하는 바가 생겼다. 외모 평가는 면접에서 필수 요소인가 싶었다. 그래서 트랜스젠더인 나이스에게 면접에 관해 물을 때 약간 기대를 했다. 겉으로 보기에 나이스는 그저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였다. 성전환 호르몬 투여를 중단했다. 생활비를 버는 것이 더 급한 문제였다. 사장들도 남자로 알고 뽑았다. 그래도 가는 몸과 ‘남자치고’ 다소 긴 샤기컷 머리가 사장님들을 언짢게 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스의 이야기는 예상과 달랐다. 피어싱 지적 정도가 끝이었다. 사회가 남자 외모에게 더 관대하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런데 성별 전환이 주는 외모 혼란에서도, 남성으로 성별 표현이 될 경우에는 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요즘 남자애들은 계집애 같이 꾸민단 말이야.” 이런 대화를 나눌 법한 사장님들은 대세가 된 ‘예쁜’ 남자를 인정한다. 텔레비전 화면 속에 수두룩하다. ‘여자보다 더 예쁜 남자’인 아이돌 스타가 무대를 뛰어다닌다. 그러나 ‘남자보다 잘생긴 여자’는 낯설다. 브라운관도 이들을 담지 않는다.(걸그룹 f(x) 엠버에 쏟아진 비난을 떠올려보라. 내용은 너무나 한결같다. “남자냐?”)


어떤 트랜스젠더는 살기 편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살기 편한 트랜스젠더는 없다. 어차피 남녀 유별한 세상에서 “좁디좁은 패싱(passing, 어떤 사람을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으로 여기게끔 외양과 행동을 위장하는 것)의 기준을 만족시켜도 바깥 사회에서 듣는 찬사는 기껏해야 멋진 여자, 예쁜 남자다.”(트랜스젠더의 이해, 이드, 2016 제8회 LGBTI인권포럼) 그것도 ‘멋지고 예쁠’ 때 이야기다.


그런 측면에서 트랜스젠더인 나이스보다 레즈비언 미리가 직장에서 듣는 외모 지적이 더 많다. 통념상 ‘귀여운’ 얼굴의 미리가 받는 지적보다 ‘안 꾸미는’ 비성소수자 여성이 듣는 외모평가가 더 가혹할 때도 있다.


그리고 트랜스젠더 남성 지민이 있다. 일터에서는 ‘여직원’이다. 외모 지적을 받나요? 묻자 지민은 크게 끄덕였다. “입사 초반에는 거의 필수 질문이에요.” 사람들이 보기에 지민은 ‘보이쉬’하다. 짧은 머리를 하고 바지만 입는다. 날씬하지도 않고 화장도 안 한다. 면접관들이 ‘자기 관리 부족’이라 평가하고 싶어 근질근질할 상이다. “왜 치마 안 입니?” 사람들은 묻는다. 그러나 지민이 체대 입시생이었다는 걸 밝히고 나면 다소 자유로워진다.


운동하는 여자는 이 사회에서 ‘보편’이라 부르는 여성과는 다르게 취급된다. 여성에게 주어질 수 없다고 믿는 힘과 운동신경을 가진 ‘체육소녀’들은 전형적인 ‘여성’에서 벗어남을 허락받는다. 논쟁의 중심에 선 정수기 물통마저, 지민이 들면 사람들은 개의치 않는다. 그렇다고 참견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진 건 아니다. 다른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연애는 안 해? 그래도 연애는 해야지.”


여자는…, 남자처럼…


▲ ‘여자는 자고로’, ‘남자는 남자답게’ 적합한 용모가 있다고 한다. ⓒ일러스트레이터 정은


여자는 치마도 입고, 꾸미고, 연애도 해야 한다. 그 ‘여자’의 실체는, 안경에 대한 용모규정에서 잘 드러난다. 극장 알바부터 은행 직원까지 다양한 서비스직에서 안경 쓴 여자에 대한 규제가 있다. 남성의 안경에는 관대하다. 여자직원에게는 안경 외에도 립스틱, 피부톤, 스타킹색 등 외모 통제가 끊이지 않는다.


명확한 이유도 없다.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진행하는 내부 가이드 라인이란다. “여자가 더 화려하게 보여야 하기에”라며 얼버무린다. 그러나 브라운관 너머 안경 쓴 사람이 누구인가를 보면 답이 나온다. 전문직 남성과 못생긴 여자. 지적 능력은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적 특성이 아니다.


반면, 남자인 현진은 대학시절 알바부터 정규채용까지 번번이 탈락해 왔다. 강사나 관리직 자리는 현진을 특히나 반기지 않았다. ‘인서울’ 대졸자에 신체 건강한 비성소수자 남성이다. 그러나 키가 작고 왜소하다. 그의 몸은 사회적 남성과 맞지 않았다. ‘책임감 있고 강하고 리더십 있다’는 남성의 이미지는 단단한 골격과 근육으로 기대된다. 그래서 왜소한 체격의 현진에게 일을 주지 않는다. 특히 (남자처럼) 가르치고 (남자처럼) 지시하는 역할을 맡기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처럼’ 각자에게 적합한 용모가 있다고 했다. 그 용모를 관리하고 노력하여 면접장에 가져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면접장에 들어설 수 없는 용모가 존재한다.


마늘의 용모단정


마늘은 용모단정하다. 화장을 하고 긴 머리를 하나로 깔끔하게 묶는다. 중요한 날이라면 정장 치마도 입어줄 마음이 있다. 그러나 마늘의 꾸밈은 ‘용모단정’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주민등록번호가 ‘1’로 시작하는 마늘에게는 다른 ‘관리’가 요구된다.


트랜스젠더, 젠더퀴어(여성과 남성으로 나누는 성별 이분법에서 벗어난 성정체성) 등으로 명명되는 이들은 태어날 때 사회가(정확히는 의사가) 지정한 성별로 살 수 없다. ‘여자니까’ ‘남자답게’로 살지 않는다. 이들을 본 면접관은 당혹해 한다. 그리고는 끝. 탈락이다.


‘탈락’을 면해보겠다고 마늘은 미용실 의자에 앉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계속 길러온 머리다. 평소에는 치마를 입고 화장을 했다.(마늘은 이 행위를 ‘여성이 된다’고 하지 않고, ‘사회가 권하는 여성의 모습을 연기한다’고 했다.) 그 모습으로는 면접에 통과할 가능성이 없다. 어쨌건 서류상 남자였다. 미용실에 갔다. 머리를 자르려 했다.


그러나 자르지 못했다. “머리를 오랫동안 기른 상태라서, 제 외형이나 스타일이 정체성의 일부로 자리 잡았단 생각이 들거든요.” 그깟 머리가 아니었다. 자신이 정체성을 찾으려 했던 시간만큼 머리도 같이 길었다. 헤어디자이너는 단발을 권했다. “그게 손님에게 더 어울려요.”


마늘이 구하고자 한 것은 뭐 그리 잘난 기업 정직원 자리도 아니었다. 급작스러운 독립-아마 원인은 성 정체성에 따른 부모와의 불화로 추측되는-으로 인해 일자리가 필요했다. 카페, 음식점 서빙 같은 아르바이트도 가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이 그저 주어지는 법은 없다. 알바 사장도, 면접관도 주민등록 숫자 ‘1’에게 묻는다. “남자가 왜?”


단발머리가 된 마늘은 ‘일반 직장’을 포기하고 콜센터를 찾았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목소리로만 사람을 대하는 직업. 용모단정 같은 것은 고용조건에 들어가지 않을 직장이다. 면접 때도 별스러운 질문이 오가지 않았다. 콜센터는 마늘의 소위 ‘여성스러운’ 제스처도, 성별 판독이나 남녀 구분이 애매한 음성도 신경 쓰지 않았다.


“면접장에서는 목소리 듣고 인사말 정도 시켜보는 거? 면접 때는 머리는 길렀지만 별로 (여성처럼) 안 꾸미고 갔거든요. 왜 길렀냐고 물어보기에 모발 기증을 하려고 한다. 일단 뽑혀야 하니까 착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교육 기간에는 화장한 채로 갔죠.” -마늘, 20대, 비수도권 거주자, 젠더퀴어, 퀘스쳐너리(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을 확립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은 경우를 부르는 말), 현재 학생


마늘은 그렇게 콜센터에 취직했다. 너무도 정해진 수순으로 움직여 나는 ‘왜’를 묻지 못했다. 그래서 마늘이 물어왔다.


“왜 내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묻지 않나요?”


지하 속 공평


누구도 마늘과 같은 이들이 왜 그곳에서 일하는가 묻지 않는다. 세상은 마늘의 존재를 모른 척한다. 일을 구해 먹고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도 망각한다. 그러나 이 잔인한 세계에도 ‘공평’은 있다. 세상의 관심 밖인 것은 마늘만이 아니었다. 세상은 콜센터에서 수화기를 붙잡고 있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관심이 없다.


마늘은 이 일을 두고 “말만 또박또박 하면 되는 일”이라 칭했다. 진입장벽이 낮다. 그래서일까, 콜센터는 주로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이 ‘보조’적이고 ‘푼돈’이고 ‘양육비’ 정도인 돈을 벌기 위해 선택하는 대표 직종이다.(그 푼돈이 없으면 가계가 휘청거린다는 것은 암묵적 비밀이다.)


1980년대 이후로 대규모 여성 취업장이 된 서비스 업종. 그러나 기혼여성들에게는 여기도 좁은 문일 뿐이다. 나이가 걸리고 외모가 걸린다. ‘피부화장, 붉은 립스틱, 눈썹 정리, 커피색 스타킹, 2-3cm 구두굽, 렌즈 착용’을 직원에게 요구하는 회사(CGV 규정)가 용모를 고용 잣대로 두지 않을 리 없다.


▲ CGV의 여성알바 채용 외모 규정에 항의하는 알바노조 피켓팅. ⓒ알바노조


외모가 자연스럽게 ‘업무수행 자질’로 요구되는 지상(地上)의 서비스업을 피해, 기혼여성들은 지하세계를 찾게 된다. “누가 날 써주겠어.” 여성들의 자조에는 단절된 경력, 부족한 일자리, 육아로 인해 빠듯한 시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용인 받지 못하는 ‘외모’가 포함된다.


십여 년이 흘러, 이들에게 어머님 이모님 고모님 호칭이 따라붙는 그런 나이가 되면, 사회는 그제야 ‘아름다운’ 외모의 굴레에서 그들을 놓아준다. 더는 이들에게 ‘날씬한, 하얀, 가는, 말랑한, 부드러운’ 촉감과 외양을 원하지 않는다. 그녀들도 “내가 여자라고?” 하며 깔깔 웃어젖힌다. 그런 의미로 ‘여성다운’ 외모에서 자유롭다. 아쉽게도 해방은 아니다. 다른 것을 내놓으라 한다. 후덕한 모성의 상징인 살집이 허용된 여자 나이엔 돌봄노동이 적합하다고 한다. ‘모성을 가진 여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저임금 보상이 따른다.


마치 중력의 힘이 작용하듯 ‘그녀’들을 잡아당긴다. 저임금 노동이 미끄럼틀 아래서 이들을 기다린다. 외양을 보지 않는 저임금 서비스업계. 그 지하세계 중간 즈음에 콜센터가 있다. 아직 ‘여성다운’ ‘고운’ 목소리를 지닌 나이대의 여성들이 온다. 그곳에 성별 규범(남자는 남자답게)이라는 중력에서 떨어져 나온 마늘이 문을 두드린다.


지하세계의 다채로움


내게는 저임금과 감정노동의 끝판왕으로 여겨지던 콜센터. 그러나 마늘은 다른 평가를 내놓았다. 면접조차 허용하지 않은 지상보다 콜센터 지하세계에 숨 쉴 틈이 더 많다고 했다. “외부에서 평가가 진행되기에 능력과 성과를 공정하게 인정받는 곳”이라 했다. 외부 평가란 고객이 하는 상담원 친절 평가를 가리킨다.


고객은 마늘의 성별을 모른다. 마늘의 외형을 모른다. “저는 전화 받을 때는 목소리가 한 톤 더 올라가거든요. 고객들도 다 여자인 줄 알고 아가씨, 하고요” 수화기 너머의 고객은 오직 자신을 대응하는 방식으로만 평가를 내놓는다.


돌이켜보면 서비스 노동자에 대한 실시간 고객평가가 도입될 때, 노동조합 등이 얼마나 반발했는가. 일하는 사람을 옥죄는 상시적인 평가는 비판받을 만하다. 그러나 겉모습을 두고 색안경 낀 평가를 수시로 당해온 마늘 입장에서 수화기 너머 고객평가는 공정함의 상징, 블라인드 테스트와 다를 바 없다.


마늘이 느끼는 공정함은 직장 내 인권에서 기인한 게 아니다. 앞서 마늘은 “말만 또박 하면 되는 직장”이라 했다. 회사가 직원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다. 기대하는 것은 저임금과 콜 수를 견뎌낼 사람뿐이다. 원래 기계에 칠해진 ‘색’은 중요하지 않다. 꼭 같은 색일 필요도 없다. 기계는 움직이는 것이 가장 큰 미덕이다.


이 점을 마늘도 모르지 않는다. 마늘의 목소리를 다른 동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물었다. “남의 콜을 들을 만큼 다들 여유롭지 않아요.” 바쁠 때는 하루에 200콜도 받는다. 마치 허들을 뛰는 것 같다고 했다. 마늘의 익명성은 노동 강도로부터 지켜진다.


그럼에도 사람과 대면하지 않는 노동, 그에 따른 업무평가를 마늘이 ‘공정하다’ 느낀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 ‘다르다’는 것이 평가절하로 이어지는 사회에서, 마늘은 다름이 가려지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았다고 느꼈다.


다름의 가벼움


여성학자 정희진은 “몸 때문에 차별 받는 사람들에게 몸은 중립지대가 아니다”(<낯선 시선>, 2017)라고 했다. 마늘에게 몸은 중립지대일 수가 없다. 마늘은 다르다. 보기부터 다르다. 몸이 가려지자 차별이 일정 사라졌다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같은가?


우리가 ‘단정하고 친절한 서비스직에 적합한 여성’이라고 할 때 떠올리는, 그 여성과 ‘우리’는 같은가? 그 여성처럼 고르고 하얀 치아를 살짝 보이며 웃고 있는가. 우윳빛 가는 목과 둥근 어깨를 가지고 있는가. 마르고 곧게 뻗은 다리를 가지고 있는가. 맑은 피부에 자연스러우면서도 화사한 화장을 하고 있는가.


사회는 ‘그 여성’을 기준으로 해서 우리의 스펙을 평가한다. 우리는 그 여성과 다르지 않기 위해 러닝머신 위에서 뛰고 수술대 위에 눕는다. 노력(?)은 결과로 돌아온다. 여성노동자의 단정성이 고객만족에 영향을 미친다. 외모가 임금에 영향을 미친다는 숱한 조사결과가 무수하다. 평균 이하인 경우 불이익을 받는다는 결과도 함께.


마늘의 다름을 두고 평가절하 하는 세상은, ‘우리의 다름’을 두고도 마찬가지이다. 상벌이 있다. 평균 이하일 경우 알다시피, 세상 살기 피곤하다. 그런데 평균은 어디쯤일까. 우리가 이상적인 그 여성을 좇아 달리는 사이, 이상과 정상(평균)의 구별은 모호해져 버렸다. 미용체중이 어느새 정상체중으로 자리 잡았듯 말이다.


어느새 우리는 ‘정상’ 기준 안에 드는 것조차 버거워진다. ‘보통 여성’이 되는 일에 힘이 부친다. <거부당한 몸>의 저자 수전 웬델은 이를 두고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신체 사이즈가 아닌 몸” 또한 문화적 의미로 구성된 “장애”라고 했다. 우리는 전전긍긍한다. “몸이 우리를 배신할까봐, 살이 찌거나, 주름이 지거나, 너무 빨리 노화되거나,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심해지게 만들까봐”(실비아 페데리치 <혁명의 영점>) 우리의 몸이 ‘정상’이 아닐까봐.


그러니 우리가 마늘의 처지를 생경하게 보는 일은 우습다. ‘정상’이 아니라고 평가절하 당하는 이는 마늘만이 아니었다. 마늘에게 머리를 자르라고 강요하는 취업시장은 우리도 가만두지 않는다. 콧대와 치아와 턱선, 이제는 표정까지 내버려두지 않는다.


중력에 던지는 물음표


‘규범적 미’라는 중력은 같은 행성에 사는 마늘과 ‘우리’를 무겁게 누른다. 성소수자 자살률과 거식증 여성 발병률은 중력의 동시대성을 말해준다. 중력은 트랜스젠더 여성에게 붙는 ‘여자보다 더 예쁜’이라는 수식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사회가 마지못해 ‘성별전환’을 인정하는 대상은 미의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는 트랜스젠더 뿐이다. 예뻐야 용서받는다.


마늘은 예뻐지려는 이가 아니다. “사람들에게 이질감을 주거나 괴리감을 주는 옷을 선호해요. 내가 이렇게 하고 있으면, 너 내가 어떻게 보여? 헷갈리지?” 그리고 내 성별을 정의내리기 “어렵지?”


마늘은 지구에 살면서 ‘중력’을 거부한다. 머리 자르기를 거부한다. 화장을 한다. 그렇다고 사회가 허락한 ‘여자’가 되지도 않는다. ‘예쁜 여자’도 ‘정상 남자’도 되지 않겠다고 한다. 그의 존재는 “모든 인간은 인간이기 전에, 남성과 여성이어야 하는 젠더 사회”(정희진,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2017)를 당황케 한다.


마늘의 외모는 이 세계에서 스펙이 될 수 없다. 세상이 요구하는 표준에 들지 않는다. 스펙이 될 수 없는 몸은 의외로 무수히 많다. 우리 사회는 ‘정상(남성)’의 몸을 우위에 두고, 그 아래 ‘미치지 못하는’ 몸들을 줄 세운다. 수많은 몸들(인종, 장애, 질환 등을 겪는 몸)이 능력 밖의 것이라 치부된다. 이들의 몸은 점수가 될 수 없다. 질문이 된다.


마늘의 몸은 존재 자체가 물음표다. 그것은 지금까지 여성들이 ‘몸’에 던져온 많은 질문들과 궤를 같이 한다. 꾸밈노동을 거부하고, 코르셋을 벗고, 여자들은 많은 질문을 해왔다. 고정화된 외양과 성별 분업을 의심하고 의문했다. 저 헛된 중력을 향해 말이다. 우리는 지금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 기사에 등장하는 이름 중 일부는 가명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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