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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여성들

<리틀 포레스트> 혜원과 <드레스메이커> 틸리



몸도 마음도 지치는 일상이 이어지는 그런 때가 있다. 꽉 막힌 도시 속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조차 이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마주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손 안의 폰을 만지작거리지만 그 안에서도 즐거운 이야기를 찾기란 어렵다. 음악을 들으면서 눈을 감아보려고 해도, 눈을 감는 순간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마저도 쉽지 않다.


잠시라도 눈을 감을 수 있을 환경에 놓일 때 생각하는 건 늘 똑같다. ‘나에게도 돌아갈 수 있는 안식처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 ‘여기를 벗어날 수 있는 변명이든 이유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래서 고향(집)으로 돌아온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임순례 감독, 2018)과 <드레스메이커>(Dressmaker, 조슬린 무어하우스 감독, 2016)가 내게는 좀 더 특별하게 다가온 건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돌아온 사람


▶ 영화 <리틀 포레스트>(임순례 감독, 2018) 스틸 컷

 

나의 입장에서 보면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김태리 분)은 복 받은 사람이다. 돌아갈 곳이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고향집이 혜원을 반겨주는 따뜻한 공간인 건 아니다. 하지만 혜원이 어떤 벽에 부딪히고 지쳤을 때,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고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거기서 빠져나와 ‘갈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이모’가 아닌 ‘고모’가 버티고 있는, 완벽한 탈출구는 아니지만 “난 시험 붙었는데 넌 어때?”라고 묻는 남자친구와 마주하지 않아도 되고, 허기가 채워지지 않는 편의점 도시락만이 유일한 선택이 아닌 그곳에서 혜원은 잠시 멈춤을 택한다. 당당하게 떠났다가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돌아왔다는 마음의 짐이 있긴 했지만.


혜원은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돌아온 것도 아니었다. 일단 도시 속 일상에서 벗어나긴 했는데 뭘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다. 잠시 있을 거라며 고모가 해 주는 반찬도 안 받으려고 하고 강아지 입양도 거부하지만, 어느새 자연스럽게 강아지 오구는 삶 속에 들어오고 혜원은 팔을 걷어 요리를 하기 시작한다. 계획이 없을 뿐, 먹고 사는 것을 그만둔 게 아니니까.


그렇게 정성스러운 요리를 만들고, 때로는 친구네 과수원 일을 돕기도 하고 고모네 논 일을 도와드리기도 한다. 가끔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모여 직접 담근 막걸리도 마시고,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다가 토라지기도 하고 같이 웃기도 한다.


그렇게 계절이 지나고 시간이 흐르는 과정 속에서 혜원은 꼭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 모습은 언뜻, 인생을 방관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혜원은 자신의 삶을 지속하고 있다. 정성스럽게 천천히 요리를 하며, “포기가 아니라 선택한 거야”라는 말대로 멈춘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천천히 지켜봐 주는 것뿐이다.


돌아와선 안 될 곳에 돌아온 사람


▶ 영화 <드레스메이커>(Dressmaker, 조슬린 무어하우스 감독, 2016) 스틸 컷


그에 반해 <드레스메이커>의 틸리(케이트 윈슬렛 분)는 완전 반대의 상황이다. 틸리에게는 ‘돌아가면 안 되는 곳’이 있다. 아빠가 누군지 모르는 비혼모의 딸로 태어나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온 동네 사람들에게 질타와 무시를 당하다가 결국 살인자로 몰려 쫓겨났기 때문이다.


쫓겨난 후 (물론 고생을 했겠지만) 파리 등 화려한 도시에서 자신의 능력을 키우며 원만한 생활을 즐기던 틸리는 어느 날 그 지옥 같은 고향집으로 돌아온다. ‘거지 틸리’라며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디올 풍이지만 제 디자인이에요”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고풍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말이다.


틸리는 혜원과 달리 “그래, 나 여기 있다”고 소리치는 것마냥 사람들이 눈길을 줄 수밖에 없는 화려함과 아름다움으로 자신의 컴백을 온 동네에 알린다. 그의 재등장은 마을을 들썩이게 만들고 틸리는 자신에게 집중되는 이목을 한껏 이용한다.


“네가 아니면 내(가 괴롭힘 당할) 차례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어”라며 어린 시절 자신의 고통을 방관했던 친구에게, “널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겠다”고 말한 후 아름다운 드레스와 함께 변신을 만들어낸 틸리. 이제 그는 모든 마을 여성들이 찾는 드레스메이커가 되어간다.


하지만 틸리가 자신을 괴롭히다 쫓아낸 고향으로 돌아온 건, 그곳의 유일한 드레스메이커가 되려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잠시 쉬거나 멈춤을 하려고 온 것도 아니다. 자신이 정말 살인자인지 그 의문을 풀고 진실과 마주하기 위해 온 것이다. 기억나지 않는 과거 때문에 ‘나는 살인자’라는 괴로움에 시달리는 걸 그만두려고 말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배경과 방식을 가졌지만, 혜원과 틸리가 일상의 삶을 떠나 고향(집)으로 돌아온 진짜 이유는 사실 같았던 게 아닐까. ‘살아가기 위해서’라는 것 말이다.


▶ <리틀 포레스트>에서 혜원이 돌아간 고향(집)에는 ‘딸을 기다리는 엄마’가 없다.


돌아온 우리를 기다리는 건…엄마?


그렇게 고향(집)으로 돌아온 혜원과 틸리에겐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 집엔 그들을 기다리는 엄마가 없다. 딸과 엄마의 가슴 찡한 모녀 상봉이나 ‘얼마든지 네가 원하는 만큼 쉬면서 지내렴.’이라고 말하며 따뜻하게 차를 건네는 엄마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다.


혜원의 엄마(문소리 분)는 혜원이 성인이 되는 시점에 딸을 두고 자신이 먼저 독립해버려서 집에 없다. 틸리의 엄마(주디 데이비스 분)는 집에 있지만, 돌아온 틸리에게 “난 너 같은 딸 둔 적 없어. 난 네 엄마가 아냐.” 라고 말하며 밀어낸다.


혜원과 틸리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언제나 우리를 반겨주는 따뜻한 사람’,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엄마도 때로는 나를 슬프게 하고, 상처 주기도 하고, 괴롭게 하기도 한다. 불쑥 나타나는 딸만큼이나 엄마도 종잡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다.


사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고 무한한 사랑이 있는 곳’에 대한 상상이 종종 엄마라는 모성의 존재로 귀결되는 건, 무언가를 다시 만들어 낼 수 있는 재생산의 주체가 여성이라는 한정적이고 빈약한 우리의 생각과 상상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모녀를 그리는 많은 이야기들이 딸과 엄마를 너무 의존적인 관계로 표현하는 게 늘 지겨웠다. 여성은 독립적인 주체가 되지 못하고 늘 다른 사람이 필요한 것처럼 그리고, ‘딸과 엄마’를 퉁쳐서 어떤 이미지로 고정시키는 것에 대해 불편한 감정이 있었다. 그런데 이 두 영화는 엄마라는 존재를 사람들의 전형적 환상을 바탕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또 혜원과 틸리가, 엄마가 날 따뜻하게 받아줄 거라는 생각으로 돌아온 게 아니라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고 돌아왔다는 점이 돋보였다.


▶ 품격 있는 복수를 보여주는 영화 <드레스메이커>(Dressmaker)의 한 장면.

 

힐링과 임파워링 사이에서


현실의 나에겐, 역시 돌아갈 곳은 없다. 지금은 실질적으로 그런 공간이 없다. 희망사항으로 조용한 시골의 작은 집 같은 이야기를 하지만 현실은 현실대로 받아들이고 산다. 그래서 이 영화들은 사실 나의 대리만족이었다.


<리틀 포레스트>는 귀여운 강아지가 있고, 내세울 것 없는 어른이 되어버린 나의 모습을 잘 알지 못하는 어렸을 적 친구들이 있고, 땀을 흘리며 할 수 있는 노동의 기회가 있고, 서두르지 않고 따뜻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완벽한 안식처를 상상하는 치유의 시간으로.


<드레스메이커>는 잔혹한 진실이라 하더라도 마주하고자 하는 용기와, 그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물러나지 않고 품격 있게 대처(복수)하는 힘에 대해 생각하는 임파워링의 시간으로 말이다.


물론 이건 나의 환상이거나 꿈이지만, 그렇다고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나도 내가 살아가기 위한 방식을 찾는 거니까. <드레스메이커>의 대미를 장식하는 고품격 복수 장면에는 “쓰레기를 태우나 보네요”라는 대사가 나온다. 지친 몸과 마음은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영화들을 보면서 달래고, 지금은 조금 더 ‘쓰레기’를 태우는 데 힘을 모아야겠다고 다시 일어서 본다.


▶ 영화 <선셋 대로>(Sunset Boulevard, 빌리 와일더 감독, 1950) 스틸 컷

 

[영화 속 영화] 선셋 대로: 지워지는 여성들


<드레스메이커>에서 틸리와 몰리(엄마), 테디가 함께 영화관에 갔을 때 상영되는 영화 <선셋 대로>(Sunset Boulevard, 빌리 와일더 감독, 1950)는 국내에서도 클래식 영화로 유명하다. 조슬린 무어하우스 감독이 어떤 의도로 이 영화를 자신의 영화 안에 집어넣었는지는 모르지만, 난 비슷한 점이 없어 보이는 이 세 영화에서 공통점을 하나 발견했다.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은 최근 상업영화에서 매우 보기 힘든 ‘평범한’ 20대 여성청년이고, <드레스메이커>의 틸리는 마을 사람들이 지워내고 싶어서 안달하는 가난한 비혼모의 딸이다. <선셋 대로>의 노르마(글로리아 스완슨 분)는 한때 무성영화의 스타였지만 유성영화가 등장하고 나이 들면서 아무도 찾지 않게 된 배우다. 이 영화들에서는 보이지 않거나 지워지는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전면 등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각각 시대도 다르고(드레스메이커는 1926년, 선셋대로는 1949년, 리틀 포레스트는 2017년 배경), 나라도 다른데(드레스메이커는 호주, 선셋 대로는 미국, 리틀 포레스트는 한국), 여성들이 처한 환경이나 여성에 대한 사회의 젠더 인식은 왜 인지 비슷해 보인다는 거다. 노르마의 욕망과 열정이 표출되는 화면으로 채워진 <선셋 대로>의 마지막 장면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과 함께 ‘여성이 받아야 하는 시선/받을 수 있는 시선’에 대해 고민해보게 한다.  (박주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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