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프리랜서 일은 취미생활? 
 
번역 프리랜서로 일을 한 지 2년이 조금 넘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면서 프리랜서의 길을 걷기로 하고 번역이라는 일을 택하기까지 나는 꽤 오랜 고민을 거쳤다.

이전에 다니던 회사는 상하구조가 확실하고 권위적인 분위기였던 데다 성희롱까지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이었다. 나는 회사 분위기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고 어떻게 버텨낸다고 하더라도 나이가 들면 여자인 내가 설 자리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내 미래를 위해 어떤 직업을 택해야 할지 새롭게 고민을 시작했다.

새로운 직업을 택할 때 나는 몇 가지 조건을 생각했다. 그 조건은 대략 내 적성에 맞는 일이면서 어느 정도의 수입은 보장되어야 하며, 나이가 들어도 여자라는 이유로 일을 못 하게 되지는 않아야 하며, 최대한 조직 사회의 불합리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일이어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러한 조건들을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번역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약간의 준비 기간을 거친 끝에 영상 번역 프리랜서로 일을 하게 됐다.

현실적인 고민 속에서 번역 프리랜서라는 직업을 택했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프리랜서에 대한 환상이 조금은 있었다. 내 시간을 자율적으로 조정할 수도 있고 원할 때면 일을 접고 여행도 떠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을 하면서 이러한 환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2년간 일을 하면서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고 일감도 꾸준히 받을 수 있게 됐지만 그래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만은 지울 수가 없다. 일을 할 때마다 늘 하나하나 시험을 받는 기분이 들고 일이 며칠만 일이 없어도 금방 백수가 되는 기분에 휩싸이기 십상이다. 그래서 일이 많이 들어올 때는 무리를 해서라도 다 받아서 밤새 일을 하게 되고 일이 없을 때에도 혹시나 어디서 연락이 올까봐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프리랜서로서의 고충보다 나를 정말로 절망시키는 것은 내 일을 전문적인 영역으로 여겨주지 않는 사회의 시선이다.

나는 일에 대한 욕심이 어느 정도 있는 편이고 무엇보다 생존을 위해서라도 일을 제대로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가지고 번역을 한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해도 번역을 하는 여자 프리랜서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생계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여자가 하기에 괜찮은 직업’을 가졌다는 수준이다. 이러한 평가는 부모님이나 나이 드신 분들은 물론이고 또래의 젊은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지금껏 내가 직업을 소개하면서 제일 많이 듣는 말이 ‘여자가 하기에 좋은 직업이다’라는 말이었다. 나에게 일을 주는 업체의 남자들의 인식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한 번은 나에게 일을 주는 업체의 부장 급 상사가 ‘이 직업이 여자들에게는 참 좋은 직업이다.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어서 남자들이 참 좋아한다. 나중에 결혼도 잘 할 거다’라는 말을 듣기 좋은 소리라도 되는 듯 한 적이 있다. 옆에 있던 젊은 남자 사원들도 수긍을 하며 ‘남자가 하기엔 수입이 불규칙하고 안 좋지만 여자가 하기에는 딱 좋죠.’하고 맞장구를 쳤다. 더 심한 경우에는 번역가의 실력이 비슷한 경우 생계를 고민해야 하는 남자에게 우선적으로 일을 준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일을 하는 입장에서는 이럴 때마다 맥이 빠지지 않을 수 없다. 프리랜서라서 수입이 불규칙하다거나 그래서 힘든 면이 있다는 건 당연한 부분이고 감수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그 얘기와 덧붙여서 그래서 여자가 하기에 좋다는 말을 듣거나 남자 프리랜서에게 먼저 일을 준다고 얘기하는 사람을 만나면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하는 내가 오히려 바보가 된 기분이다.

나는 생존을 위해 번역을 하고 있고 이 분야에서 어느 정도의 성취를 해 내고 싶어서 일을 한다. 그러나 사회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대부분 내 직업에 대해 여자니까, 그래서 생계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니까 집에서 취미생활처럼 가볍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한다.

아직도 여성의 일에 대해서 ‘취미 삼아 사정이 될 때 잠깐 하는 것’ 정도로 치부하는 사회의 시선이 답답하고 화가 난다. 손안지연여성주의 저널 일다는 어떤 곳?

[성별 분리] 텔레마케터, 여성유망직종? / 정형옥 2005/01/09/

[성별 분리] 간병노동, 여성의 숙명인가 / 김홍수영 2004/12/26/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