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파트 앞을 지나는 마을버스 새 노선이 생겼다는 공지가 붙었다. 찬찬히 살펴보니 버스는 평소 내가 큰 불편 없이 걸어 다니는 곳들을 통과하고 있었다. 지금껏 우리 동네사람들은 그곳을 지나가는 버스가 없어 불편했었나 보다. 특히 노인이나 거동이 힘든 사람들을 생각하면, 버스노선이 증설되어 다행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도시에 살며 놓치기 쉬운 자연의 느린 리듬
내가 현재 살고 있는 곳은 도시이긴 하지만, 걸어서 모든 편의시설을 쉽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시의 삶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시청, 구청, 동사무소, 학교, 도서관, 마트, 은행, 우체국, 병원, 운동센터, 여성회관, 쇼핑센터, 영화관 등과 같은 편의시설을 이용하기 위해서 굳이 대중교통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고, 심지어 자전거조차 이용할 필요가 없다. 걸어서 최대 20분 정도면 목적지에 도착해 원하는 볼 일을 다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보행자만을 위한 길이 별도로 배려되어 있어, 굳이 도로가 인도를 걷지 않아도 되어서 도시인에게는 행운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일상을 걸어서 꾸리는 것과 교통수단에 의존하는 것은 우선 속도에 대한 기대감이 다르다. 나날이 가속화되는 도시의 리듬을 생각한다면, 그런 다수의 리듬을 벗어나 보다 느린 리듬으로 살아가려면 마음의 여유가 필수적이다. 사실 도시인들이 일상적으로 빠른 속도를 원하면서 자가용차나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할 때조차, 그리 먼 거리가 아니라서 보행이나 자전거에 의존해도 충분하며, 걸어가도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가 걷는 속도에 맞춰 일상을 꾸리는 것은 도시에 살면서 놓치기 쉬운 자연의 리듬에 나 자신을 내맡길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닫힌 공간에서 닫힌 공간으로 이동하는 도시에서는 상점의 패션변화로 계절을 느끼지 않는다면, 사계절 내내 채소와 과일이 범람하는 마트나 사계절 내내 비슷한 기온을 유지하는 백화점처럼 계절을 잊게 되는 공간이라고 하지 않는가.
걷는 동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환경에 내 오감을 열어두면, 계절과 일기의 작은 변화까지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요즘 같으면, 오가며 시선을 사로잡는 산수유의 작은 꽃망울들로 걸음을 멈추게 되고, 따뜻한 봄 햇살 아래서도 맹렬히 불어대는 겨울바람에 맞서 서둘러 걸음을 옮기다 보면 함께 겨울에서 봄으로 마구 달려가는 느낌이 든다.
제한된 움직임만 허용되는 공간에서 나와
그런데 좀더 자연의 리듬과 합일할 수 있는 것은, 장소이동을 위해 도시한복판을 가로지를 때보다는 공원이나 하천 가에서 느릿느릿 산책을 하거나 가볍게 산길을 오르고 내릴 때인 것 같다. 다시 말해서 휴식이나 즐길 요량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이다. 꼭 장소이동이란 목적을 가지지 않더라도, 우리에게는 일상적인 걷기가 필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특별한 날의 이벤트로서도 아니고….
내 경우를 보더라도 평소 닫힌 공간 속에서 의자에 눌러 앉아 일을 하다 보면 몸은 거의 정지한 채 정신만 꿈틀거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열린 공간 속에서 걷는 일이야말로 내가 육신을 가진 하나의 생명체라는 생생한 느낌을 나 자신에게 되돌려 주는 방법인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오전에 가까운 산을 찾거나 늦은 오후나 밤에 근처 하천가나 공원을 찾아 천천히 걷곤 한다.
매일매일 지극히 제한된 움직임만 허용되는 공간에 갇혀 일하다 다시 닫힌 교통수단으로 이동하는 도시인이라면, 자기 자신이 자연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몸을 가진 존재라는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또다시 닫힌 공간인 헬스장 한 구석 러닝머신으로 달려가기보다는 야외에서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걸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인생에서 멋진 생각들은 걸으면서 얻었다
몸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움직이다 보면, 육신에 이어 정신도 깨어나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 중에 해결하기 힘들었던 문제의 해답을 얻기도 하고, 때로는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기막힌 생각들이 내 머리 속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 내 인생에 있어 멋진 생각들은 걸으며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신체적으로 불편할 때,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잊고 싶은 근심으로 고통 받을 때는 조금 부지런히 산길을 걷는다. 산길을 따라 정신 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그 모든 문제들이 내 곁을 떠나있다. 누구는 ‘산에다 모두 버리고 온다’고 표현하는데, 아무튼 내 머리 속도 내 육신도 비록 잠시라고 하더라도 깨끗이 비워내는 것이다. 바로 휴식의 순간이다. 이후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다시 일상의 문제를 대할 여유를 회복하게 된다.
함께 새 노선표를 살펴보던 친구가 “이제부터 버스 타고 다녀야지” 하길래, 난 “평소에도 잘 걸어 다녔는데, 왜 버스를 타야 하지? 버스 기다리는 시간에 걸어가면 금방 도착할 텐데…” 했더니, 그 친구도 금방 수긍한다. 그나마 걸어서 볼일 보고 공원, 하천, 산을 어슬렁거릴 수 있다는 점이 내가 도시생활을 덜 지치고 계속할 수 있는 이유인데, 마을버스 노선의 증설로 내 일상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다. 혹시 장바구니가 너무 무거운 날이 온다면, 그때는 그 버스를 이용하려나.
*함께 읽자. 레베카 솔닛 <걷기의 역사>(민음사, 2003) 이경신▣ 일다는 어떤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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