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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가 아닌 ‘관념’으로서의 여성

<도영원의 젠더 프리즘> 여자는 여자일까?


※ 세상을 바라보는 20-30대 페미니스트들의 관점과 목소리를 싣는 ‘젠더 프리즘’ 칼럼입니다. 필자 도영원님은 영국 글래스고대학교에서 인권과 국제정치 석사를 전공하고, 현재는 한국에서 프리랜서 인권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해쉬태그 #트랜스젠더 농담

 

올해 여름, 나는 한 세미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나섰다. 몇 명은 화장실에 가고, 나를 포함해 남은 사람들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모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옆에 있던 한 남성 참가자가 이런 말을 해서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여성분들은 다 화장실에 가셨네요.”

 

그 자리에는 내 친구인 다른 여성이 있었으므로, 그가 나의 비(非)여성적 젠더 정체성을 존중하려는 의도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우리 둘과 화장실에 간 여성 참가자들 사이의 차이가 뭐였냐고? 그렇다, 나와 내 친구는 ‘남자처럼’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고, 화장실에 간 여성들은 모두 ‘청순한’ 긴 생머리를 하고 있었다. 종종 그러하듯이 이 날도 머리 길이가 내 성별을 결정했던 것이다!

 

- 무엇이 여자를 여자로 만드는가

 

트랜스젠더 정체성이 가시화되면서 혐오발언을 마주할 일도 그만큼 많아진 것 같다. 특히 최근에는 트랜스젠더 배제적인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며 (페미니즘의 주체가 될 자격이 있는) ‘여성’은 스스로 이름 붙임으로써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절대적인(또는 타고난) 속성이라는 주장을 종종 접한다.

 

그러나 페니스 대신에 클리토리스를 달고 있는 나를 볼 때, 이들은 결국 알아볼 방법도 없는 나의 본질(?)보다는 ‘여성적인’ 얼굴이나, ‘여성적인’ 꾸미기, 혹은 신체의 모양과 같은 정보에 의해 나의 성별을 판단할 것이다. 만약 여자를 여자라고 부르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가 정말로 존재했다면, 성별을 구분하기 위해 굳이 성별 스테레오 타입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말이다.

 

▶ 성별을 판단한다고 생각할 때 정말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출처: 셔터스톡)

 

또 하루는 와인 테이스팅 강좌를 들은 적이 있다. 엘리베이터 사건이 있었던 바로 그 세미나 참가자들과 함께였다. 경력 있는 소믈리에가 코르크 여는 법을 시연해 보이고 따라해 볼 사람을 자원 받았다. ‘보통 코르크는 남성분이 연다’는 말에 악동처럼 반항심을 자극 받은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강사는 예상대로 난처한 얼굴을 했다.

 

“남성분께 양보하시겠습니까?”

 

분명히 엘리베이터 앞에서는 나를 가리켜 남성이라고 했던 사람이, 이제는 나에게 여성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것이었다. 같은 공간에서 나는 상황에 따라 비(非)여성이기도 하고 비(非)남성이기도 한데, 아무도 거기에 모순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성별이라는 꼬리표가 수시로 그 내용을 바꾼다는 사실에 상당히 익숙한 것이 아닐까?

 

성별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고정적인 기호가 아니다. 한 마디로 여성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매번 다른 것을 가리키고, 또 일일이 물어보지 않아도 맥락에 따라 어떤 ‘여성’을 가리키는 것인지를 금방 파악한다. 예를 들어 산부인과에서 말하는 ‘여성’은 해부학적으로 질과 자궁 등 ‘여성기’가 달린 사람이다. 또 소개팅을 시켜 달라는 비(非)성소수자 친구가 “아는 여자애 있냐”고 물어볼 때의 ‘여자’는 ‘여성의 외형’을 가진 남성애자라는 뜻으로 통한다. 언젠가는 내가 가방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았을 때 주위에 서있던 사람들이 “여자다!”하며 놀린 적이 있는데, 이 때 ‘여자’는 물론 ‘여성적인’ 취향이나 취미를 가진 사람을 이르는 것이다.

 

이 생각에 처음 다다랐을 때, 나는 내가 가진 장난감 블록들을 다른 모양으로 조립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었다. 변화는 나의 무의식에 호소했는지, 꿈속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성별 표현도 달라졌다. 나는 꿈에서 전형적인 여성의 외모를 하고 있지만 남성이라고 느껴지거나, 그 반대인 인물들을 보기 시작했다.

 

한 번은 꿈이 아닌 현실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파티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파티가 끝난 뒤 다른 사람에게서 ‘그 사람의 성별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성별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만나보니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성이라고 생각할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내게 자신이 여성이라고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게는 그가 여성이라는 인상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 여성성, 남성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역할(극)에 가깝다. (출처: 셔터스톡)


- 여성이라는 이름에 들러붙은 고리들

 

그러고 보면 ‘여성성’, ‘여성 신체’, 그리고 여성이라는 성 정체성은 다 여성이라는 관념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서로 다른 것들을 말하고 있다. 때로는 마치 무작위로 맺어진 것처럼, 대부분의 ‘여성적’인 것에는 여성이라 불리는 사람들과 어떤 필연적인 연관성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흔히 조신함이나 상냥함 같은 것을 ‘여성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들이 여성의 태생적 성질이라는 믿음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이미 페미니즘에 의해 수없이 격파되었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관성이 없을지언정, 여성이라는 이름에 의해 연결되어 어느새 서로를 단단히 붙들고 강화하는 관계가 되어버린 것 같다. 여성성은 여성들이 가진 성질이기 때문에 여성성이라 불리고, 그러니까 여성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마땅히 이런 성질을 가져야 한다는 식이다. 여성과 여성성 중 어느 것이 먼저인가? 마치 닭과 달걀 중 어느 쪽이 먼저냐는 질문 같다.

 

이제는 누가 나를 함부로 여성이라고 지칭해도 쉽사리 불편해지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여성’이란 무슨 뜻인지 한참을 생각해봐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성기 모양을 말하고 있는가? 내가 사회적으로 여성이라고 지정되고 인식되는 사람임을 말하고 있는가? 내가 여성의 성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남성 권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으로서의 나를 말하고 있는가? 그렇게 의미를 유추하다 보면 어느새 화를 낼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페터 빅셀의 유명한 단편소설 <연필은 연필이다>에는, 혼자서 침대를 ‘사진’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남자가 등장한다. 모든 사물의 이름을 뒤섞어버리면서 단조롭고 무료하던 그의 일상은 흥미롭게 탈바꿈하지만, 대신에 다른 사람과 평범한 의사소통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만다. 나는 침대를 사진이라고 부르는 남자가 된 걸까? 그런데 정말 침대를 꼭 침대라고 부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전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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